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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Note4]웃으며 고문 받은 독재정권 질타한 선비, / 시골훈장 (sintobule) / 2008-3-27 11:05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uid=69577&table=seoprise_11&mode=search&field=nic&s_que=시골훈장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1879~1962) 선생
심산 김창숙 선생은 이 시대 마지막 선비로 불리는 분이다.
이 포스팅의 제목을 난 맹자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志士不忘在溝壑(지사불망재구학),
勇士不忘喪其元(용사불망상기원)이라 했다.
드라마 대왕세종에서도 나온 구절이기도 한데..
심산 김창숙 선생의 살아온 그 길을 돌이켜볼때 이 구절이 참으로 잘어울린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뜻을 새겨보자면 뜻있는 선비(志士)는 그 몸이 죽어 도랑이나 골짜기에 버려질 것을
잊지않고, 용감한 선비(勇士)는 그의 목이 잘릴것을 잊지않는다.
즉, 대의를 위해선 죽음도 불사한다는 말이다.
그는 국권침탈전에는 을사늑약에 반대하고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성토하며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1910년 성명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나섰다가 경술국치 후엔 3.1독립운동에 유교대표가 없음을
통탄하여 전국의 유림의 뜻을 모아 파리장서사건을 주도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에도 참여하였다.
의열단의 고문으로서 의열투쟁의 길에 나섰고 또 나석주 의사의 의거를 후원하여 성사하였다.
1927년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 그 스스로 포로라며 일제와 끝까지 맞섰고
그 과정에서 모진 고문으로 앉은뱅이가 되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광복 후엔 신탁통치반대운동에 나섰고 또 통일정부수립 운동에도 투신하였다.
그리고 또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에 맞서 싸우다 고령의 나이에도 수차례 옥고를 치루었으며
그는 초대 성균관 대학의 총장으로, 또한 이시대 마지막 선비로서 유교의 큰 어른으로
진정으로 이 나라의 존경을 받는 큰 어른이었다.
일제에 의해 모진 고문으로 고초를 겪을때 그는 지필묵을 청하여 고문관들에게 시 한수 지어
보였다.
조국의 광복을 도모한지 십여년
가정도 목숨도 돌보지 않았노라.
뇌락한 나의 일생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고문을 야단스럽게 벌일 필요가 무엇이뇨.
참된 선비로 평생을 불의와 싸워 온 그의 일생을 이 시 한수로 미뤄봐도 충분히 알 수 있다.
고령의 의병대장 송암 김면선생의 묘를 찾았을때 그의 임종시 한수를 접한 바있다.
只知有國 不知有身 (지지유국, 부지유신)
- 나라 있는줄은 알았으나 이 한몸 있는줄은 몰랐네.
약 4백년의 시공을 두고 두 선비의 말씀이 어찌 이리도 한가지로 통하는가.
‘앉은뱅이’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이 없었다면 한국의 유교는 역사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 전 시기에 걸쳐서 유교는 지배적 사상이었으나 유학자였던 양반 사대부들은 국망(國亡)에 무심했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점령한 직후인 1910년 10월 ‘합방 공로작(功勞爵)’을 수여한 76명의 한국인들은 모두 양반 유학자였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는 이완용·송병준 등과 대원군의 조카 이재완(李載完), 순종의 장인 윤택영(尹澤榮), 명성황후의 동생 민영린(閔泳璘) 등이 귀족 작위를 받았다고 전한다. 이때 일제는 1700여만원의 임시은사금을 지배층들에게 내려주었는데, 김창숙은 <자서전-벽옹(躄翁·앉은뱅이 노인) 73년 회상기>에서 “그때에 왜정 당국이 관직에 있던 자 및 고령자 그리고 효자 열녀에게 은사금이라고 돈을 주자 온 나라의 양반들이 많이 뛸 듯이 좋아하며 따랐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김창숙은 유림으로서 독립운동에 나선다.
1879년 음력 7월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김창숙은 조선 중기의 명현(名賢)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의 13대 종손으로서 유림의 정통성을 갖고 있었다. 1905년 일제가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자 김창숙은 대유(大儒)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이완용·이지용·박제순·이근택·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목을 베자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올렸다. 고종은 아무런 회답이 없었고 김창숙은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 뒤 송병준(宋秉畯)·이용구(李容九) 등의 일진회가 한일합방을 청원하자 김창숙은 뜻을 같이하는 유학자들을 모아 “이 역적들을 성토하지 않는 자 또한 역적이다”라며 처벌을 주장하는 건의문을 중추원에 보냈다. 성주 주둔 일본 헌병분견대 소장 노전(盧田彌之介)이 “황제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곧 반역이 아닌가?”라며 건의문 취소를 요구하자, 김창숙은 “사직(社稷·나라)이 임금보다 중한지라, 난명(亂命·혼미한 상태에서 내린 명령)은 따르지 않는 것이 바로 충성하는 길이다”라고 답한다.
단재와 함께 친일파의 집을 털다
나라가 끝내 멸망하자 김창숙은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방황하다가 ‘선세(先世)의 유업’을 망치겠다는 모친의 꾸짖음을 듣고 경서(經書)에 매진했다. 김창숙은 <자서전>에서 “격물치지(格物致知)·성의정심(誠意正心)·수신제가(修身齊家)·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가 모두 여기서 벗어나 딴 데 구할 것이 아님을 믿게 되었다”라고 적고 있다. 유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선비 김창숙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김창숙은 1919년 ‘독립선언서’를 보고는 한탄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천도교·기독교·불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유교를 꾸짖어 ‘오활한 선비, 썩은 선비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할 것이다.”
김창숙은 곽종석(郭鍾錫) 등 전국의 유림 130여 명을 규합해 파리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낸 ‘파리장서사건’, 즉 ‘제1차 유림단사건’을 주도했다. 한국의 유림이 역사 앞에 겨우 체면치레를 하게 된 것이다. 그는 1921년 2월 상해에서 북경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우당 이회영(李會榮), 단재 신채호(申采浩)와 의기투합한다. 우당과 단재는 아나키스트인데, 아나키스트와 유림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비타협적 항일 의지로 이루어진다. 김창숙은 아나키스트들과 국내 친일파 자금이 흘러든 북경 모아호동 고명복의 집을 털기도 했다.
“모아호동은 귀족들이 사는 곳으로 경비가 철통같아 일을 끝내려면 치밀한 사전계획이 필요했다. …김창숙이 앞장을 섰고 이을규·이정규·백정기가 그 집으로 잠입하여 값진 물건을 빼내어 무사히 돌아왔다. …다음날 모아호동 사건은 각 신문마다 대서특필되었다. 교포는 물론 중국인들까지도 모두 깜짝 놀랐다. 전 수사진이 동원되어 범인 체포에 나섰다.”(정화암,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
독립을 위한 실천에는 주저하지 않는 선비의 면모를 보여준 것이다. 김창숙은 일제 밀정 김달하(金達河)를 처단하기도 했다. 북경 정부의 임시집정 단기서(段祺瑞)의 비서였던 김달하는 독립운동가로 위장한 일제의 밀정이었다. 김달하가 조선총독부에서 경학원 부제학 자리를 비워놓았다고 회유하자 김창숙은 “네가 나를 경제적으로 곤란하다고 매수하려 드는구나. 사람들이 너를 밀정이라 해도 뜬소문으로 여겨 믿지 않았더니 지금 비로소 헛말이 아닌 줄 알았다”라며 이회영과 상의해 제거를 논의했고, 의열단 유자명(柳子明)이 두 사람의 말을 듣고 1925년 3월 다물단(多勿團)과 합작해 김달하를 제거한 것이다.
김달하를 처단한 직후 김창숙은 국내로 잠입했다. 김창숙은 이회영과 내몽골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북경 정부의 전 외교총장 서겸(徐謙)을 통해 북경 정부의 실권자 풍옥상(馮玉祥)과 교섭해 내몽골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에 3만여 정보(町步)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기로 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던 이회영은 이 방면에 많은 경험을 갖고 있었다. 자금 마련을 위해 김창숙은 1925년 8월 북경을 떠나 서울로 잠입했다. 서울에서 정수기 등과 비밀결사 ‘신건동맹단’을 조직하고는 직접 영남으로 내려가 자금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3·1운동의 열기가 사라진 뒤여서 반응이 신통치 않자 김창숙은 사람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번에 위험을 무릅쓰고 들어온 것은 나라 사람들이 호응해줄 것을 진심으로 기대했던 것이오. 전후 8개월 동안 겪고 보니 육군(六軍·천자의 군대, 많은 숫자의 군사라는 뜻)이 북을 쳐도 일어나지 않을 지경이고 방금 왜경이 사방으로 깔려 수사한다니 일은 이미 낭패되었소. …내가 지금 가지고 나가는 자금으로는 황무지 개간 사업을 거론하기도 만 번 어려울 것이니… 이 돈을 의열단 결사대의 손에 직접 넘겨주어 왜정 각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여 우리 국민들의 기운을 고무시킬 작정이요….”(<자서전>)
일부 자금만을 확보한 김창숙은 1926년 3월 압록강을 건너 다시 상해로 향했다. 그가 출국한 뒤 국내에서는 그와 접촉했던 수백 명의 전국 유림들이 검거되는 ‘제2차 유림단사건’이 발생한다. 상해에서 김창숙은 유자명에게 청년 결사대를 국내에 파견하는 문제를 상의했는데, 유자명은 자서전 <한 혁명자의 회억록>에서 이렇게 썼다.
“그때 김창숙 선생이 나를 찾아와서 말했다. ‘고향에 가서 친구들에게 돈을 모아가지고 왔는데, 이 돈으로 폭탄과 권총을 사서 적인(敵人)들과 투쟁할 것을 생각하고 있다.’ …나석주(羅錫疇)는 그때 천진에 있었는데, 나는 김 선생과 폭탄과 권총 한 개를 사서 상해에서 배를 타고 천진에 가서 나석주를 만나 서로 상의한 결과 나석주는 자신이 행동하겠다고 말했다.”(유자명, <한 혁명자의 회억록>)
일제의 고문, 웃으며 받다
1926년 세모를 물들였던 나석주 의사 사건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중국인 노동자 마중덕(馬中德)으로 변장해 입국한 나석주는 1926년 12월28일 동양척식회사 경성지점과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전을 벌여 경기도 경찰부 전전(田畑唯次) 경부보와 동양척식회사 토지개량부 대삼(大森太四郞) 차석 등 3명을 사살하고 총알이 떨어지자 교전(交戰) 중 자결했다.
1926년 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 선임된 김창숙은 유자명에 의해 의열단 고문으로도 추대된다. 그러나 그해 12월 지병인 치질이 재발해 들것에 실려 상해 공공조계(公共租界)에 있는 영국인 경영의 공제병원에 입원했다. 이듬해 2월에 재수술을 받고 가료를 하던 중 일본 영사관 형사들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장기(長崎·나가사키)와 하관(下關·시모노세키)을 거쳐 입국한 김창숙은 대구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형구를 야단스레 벌려놓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나는 웃으며 ‘너희들이 고문을 해서 정보를 얻어내려느냐? 나는 비록 고문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하고 종이와 붓을 달라 하여 시 일절을 써주었다.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십 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아보지 않았노라/ 뇌락(磊落·뜻이 커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음)한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한데/ 어찌 야단스럽게 고문하는가.’”(<자서전>)
이때 변호사 김완섭(金完燮)이 변호를 자청하며 거듭 만나자고 요청하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군은 무슨 말로 변호하겠는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김완섭이 ‘입회한 간수의 기록이 필시 조서에 들어가 앞으로 재판에 크게 불리할 것’이라고 염려하자, “나는 일찍이 생사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군은 걱정할 것이 없다”라고 초연했다.
1928년 14년형을 선고받은 김창숙은 대전형무소에서 감옥 생활을 시작했다. <자서전>에서 “나는 고문을 받은 이래 병이 더욱 악화되어 두 다리의 마비로 진작부터 앉은뱅이가 되어 일어날 때 남의 부측을 받아야 했다”고 쓰고 있다. 대구경찰서에서 받은 고문 때문에 불구자가 되었던 것이다. 김창숙은 1933년 신임 전옥(典獄·간수장) 궁기(宮崎)가 절을 할 것을 종용하자 “감옥 생활 6, 7년 동안 옥리에게 머리 숙여본 적 없다”면서, “내가 너희를 대하여 절을 하지 않는 것은 곧 나의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함이다”라고 거부했다. 이 시절 김창숙뿐만 아니라 전 가족이 독립운동에 나서 고초를 겪었다. 장남 환기(煥基)는 1927년 고문사했으며, 차남 찬기(燦基)도 투옥되었는데, 아들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김창숙은, “네가 옥에 갇힌 지 벌써 이태가 지났구나… 너의 허약한 체질로 몇 년씩 고문을 받아왔으니 결국 큰 병에 걸린 것이 당연하겠구나. 비록 그렇긴 하나 네 애비가 8년의 옥고를 치르고 큰 병에 걸리고도 아직 죽지 않은 것을 네가 생각하라… 때로 <소학> <논어> <맹자> 등 마음을 다스리는 데 절실한 책을 읽고 생각해라”라는 편지를 보냈다.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성명 발표
김창숙은 여러 번 와병으로 사경을 헤맸으나 그때마다 살아남았다. 1934년 9월에 위중하자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는데, 이때도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1945년 8월에는 건국동맹(建國同盟) 남한 책임자로 피선되었다는 혐의로 성주 경찰서에 체포되었다가 8·15 해방으로 옥문을 나섰다.
비록 해방은 되었지만 해방 정국은 김창숙에게 그리 순탄하지 못했다. 해방 뒤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나서는 한편 난립된 전국 유림을 유도회(儒道會) 총본부로 통합하고 위원장에 올랐다. 그리고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이 굳어지자 1948년 3월 김창숙은 김구·김규식·홍명희·조소앙·조성환·조완구와 ‘7인 지도자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소 양국이 군사상 필요로 임시로 정한 소위 38선을 국경선으로 고정시키고 양 정부 또는 양 국가를 형성하면 남북의 우리 형제자매가 미·소 전쟁의 전초전을 개시하여 총검으로 서로 대하게 될 것이 명약관화한 일이니…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려는 지역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한다.” 2년 뒤에 벌어질 6·25 전쟁의 참화를 정확히 예견한 성명서였다. 그 2년 뒤 김창숙은 서울에서 6·25를 겪었다. 서울시 인민위원장 이승엽이 지지를 종용하자 단칼에 거절한다.
집 한 칸 없이 세상 떠난 통일운동가
1951년 1·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했는데, 그해 봄 이승만 ‘하야경고문’을 발표했다가 부산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필두로 반이승만 투쟁에 나섰다. <자서전>에서 그는 이미 미 군정 산하 민주의원 회의석상에서 이승만에게 “당신은 오늘 이미 민족을 팔았거니와 다른 날에 국가를 팔지 않는다 보장하겠소?”라고 성토했다고 전하고 있다. 1952년 이승만이 당선을 위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들고 나오자 이시영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을 하려다가 괴청년들의 습격으로 모시 두루마기가 피투성이가 되는 테러를 당하고 부산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신익희의 급서로 이승만이 당선되자 “이제 전국의 민심은 각하에게서 이탈되었다”라면서 재선거를 요구하는 ‘대통령 3선 취임에 일언을 진(進)함’이란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반이승만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이승만 정권은 김창숙을 모든 자리에서 쫓아내는 공작으로 맞섰다. 교육부는 1956년 ‘김창숙 명의’로는 신입생 모집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공문을 보냈고, 그는 결국 성균관대학교 총장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에는 성균관장, 유도회 총본부장 등 일체의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1958년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운동에 나서고 81살 때인 1959년에는 ‘반독재 민권쟁취 구국운동’에 나서면서 이승만 대통령 사퇴권고 서한을 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축출되자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民自統) 대표로 추대되어 통일운동에 나섰다. 그는 집 한 칸도 없이 여관과 친척집을 전전하다가 84살 때인 1962년 서울 중앙의료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1957년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라는 시는 아직도 완수하지 못한 역사의 임무를 전해준다. “조국 광복에 바친 몸/ 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 년/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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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독립전사들의 식생활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고, 맞아서 죽다
비만탈출이 현대여성의 꿈일 만큼, 오늘날 비만은 모든 질병의 원인으로 우리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비만이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이요, 비만클리닉이 가장 인기 있는 클리닉인 요즘이다. 비만의 원인은 선천적인 유전의 요인도 있을 테지만, 대부분 영양 섭취 과다에 따른 지방질의 축적이 그 원인일 것이다.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우리 국민 대부분은 배부르게 먹을 수 없었다. 심지어 아이들이 뜀뛰기나 고무줄놀이를 하면, 배가 쉬 꺼진다고 못 하게 할 만큼, '믿거나 말거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도 있었다.
하물며 한 세기 전인 일제 강점하에 나라 잃고 이국에서 독립운동을 한 독립군 전사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독립운동사가 대부분 '사건사' 위주로 기술하고 있는데 견주어,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연구위원이 저술한 <중국동북지역 민족운동과 한국현대사> 제4장에는 독립군 전사들의 식생활문제를 밝히고 있어 이 궁금증을 풀 수가 있었다.
일제 강점하 독립운동은 '굶어서 죽고, 얼어서 죽고, 맞아서 죽을' 각오 없이는 독립전사가 될 수 없을 만큼, 그때 목숨을 바친 선열들은 대부분 굶어서 죽었거나 얼어서 죽었고, 일제의 총에 맞아 죽었다. 흔히 '풍찬노숙(風餐露宿)'으로 표현되는 독립전사들의 생활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신흥무관학교 교관을 지낸 원병상씨는《신흥무관학교》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새벽 6시, 기상나팔 소리가 잠든 학생들의 귓전을 때리면 기숙사의 학생들은 일제히 일어나 내무반을 정리한 다음 복장을 갖추고 각반을 차고서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인원 점호를 하고 보건체조를 한다.
눈바람이 살을 에는 듯한 혹한에도 아침마다 윤기섭 교감은 풀 모자를 쓰고 홑옷을 입고 나와 학생들을 지도했다. 체조가 끝나면 청소와 세면이었고, 이어서 식사 시간이었다. 주식은 열에 뜨고 좀먹은 좁쌀이라 솥뚜껑을 열면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열악한 환경이지만 교직원들은 보수도 없이 오직 뜨거운 정성으로 생도들을 가르쳤다. 생도들도 주린 배를 졸라매고 매일 맹훈련을 계속했다. 여기에는 영예도 공명도 없고, 불평불만도 있을 수 없었다. 오직 희생정신으로 일사보국(一死報國)의 일념에 불탈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집합나팔 소리에 조례가 시작되었다.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태우고, 모조리 빼앗다
대일 무장투쟁 선봉장인 일송 김동삼의 차림은 어깨에 담요 한 장을 메고 한 푼짜리 만주 전병으로 요기하면서 겨울에도 '싸이헤'라는 만주인 여름신발을 신고 강행군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산리 전투 때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안무 등의 독립군부대는 북간도 한인 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성원을 받았는데, 군수품 대부분을 이들이 지원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전투가 끝난 뒤 일본군은 간도지방의 한인들을 대대적으로 보복 폭행 학살하는 경신참변의 만행을 저질렀다.
한인 동포들은 그런 수난 속에서도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독립전사들을 계속 후원하였기에 일제강점 기간 내도록 독립전사들의 생존과 투쟁이 가능했다. 일제강점 초기 사정이 좋을 때는 독립전투 후 동포들이 돼지고기나 술도 접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상황이 어려워지자 독립군 전사들은 광목으로 길게 만든 포대에 쌀을 서너 되씩 각자 어깨에 메고 다니면서 끼니를 해결하였다.
주식인 쌀이 떨어지면 감자나 옥수수 등으로 끼니를 때웠다. 적의 추격이나 포위 토벌을 당할 경우는 불을 피우지 못하기 때문에 날 감자를 며칠동안 먹기도 하고, 추격을 벗어나면 감자전이나 감자떡을 해먹기도 하였다. 그나마 식량이 떨어지면 가죽허리띠를 삶아 허기를 면하기도 하고 했다.
적은 식량으로 많은 대원들이 식사하는 방법은 각자 휴대한 쌀을 꺼내 큰 가마솥에 물을 가득 붓고 끓인 다음 쌀과 산나물을 넣고 나물죽을 끓여 나눠 먹기도 하였다. 식량이 다 떨어진 뒤에는 최후 생명 유지방법은 풀을 끓여서(풀물을 우려내) 목숨을 연명하기도 하였다.
독립전사들의 전투시 가장 어려운 보급품은 식량, 신발, 성냥, 소금 등이었는데 특히 소금을 먹지 못하면 몸이 붓고 힘이 없어 움직이지 못하였다.
일제는 이를 알고서 소금과 성냥 판매를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소금은 주로 지하조직망을 통해 구입하였는데, 이도 여의치 않을 경우는 대용품을 개발하여 썼다. 풀과 나무를 우리거나 태워서 소금을 만들기도 했고, 참나무나 싸리나무, 느릅나무 등을 태운 재나 머루넝쿨에서 나오는 물이나 고추씨를 우려낸 물을 소금대용으로 썼다고 한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빗질 토벌이라 하여, 독립군 토벌에 더욱 극성을 부렸는데, 이른바 삼광작전이라 하여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태우고, 모조리 빼앗는' 만행으로 생존위협에 직면한 독립전사 가운데는 상당수가 도주와 투항, 배신 밀고 등의 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런 한계 상황에서 최후까지 항전한 상당수 독립전사는 '인간승리'로 길이 상찬(賞讚)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굶어서 죽은 귀신이 가장 불쌍하다고 하는데, 독립전사의 영혼을 진혼하는 재를 올릴 때는 제물을 푸짐히 차려서 사후나마 포식하도록 배려해야 마땅하리라. 그것이 살아있는 후손의 최소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오호 통재라, 영령들이시여! 하늘나라에서 길이 영생하시면서 이 나라와 겨레를 부디 지켜주시옵소서.
ⓒ박도
[歷史Note1]내가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