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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지산 국가지상' - 철기 이범석 선생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 장군 (1900.10.20 ~1972. 5.11)
.1919 신흥무관학교 교관
.1920 북로군정서 연성대장으로 청산리전투에서 일군 대파
.1934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 교관 및 韓籍軍官隊長
.1940~1945 한국광복군 참모장, 제2지대장
조국! 너무나 흔하게 쓰이는 말이고, 또 생각 없이 불리며 일컬어지는 단어다. 그러나 조국이라는 이 두 글자처럼 온 인류, 각 민족에게 제 각기 강력한 작용과 위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다시 없으리라 본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믿는 것이 옳은 내 견해이고, 내 체험의 소산인 것이다.
-이범석 장군의 회고록 '우둥불' 중에서-
이범석 장군은 1900년 10월 20일 서울 용동(龍洞)에서 부친 이문하(李文夏)와 모친 연안(延安) 이씨 사이의 4대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철기이다. 중국에서 활동할 때, 이범석 장군은 왕운산(王雲山), 이국근(李國根), 윤형권(尹衡權), 김광두(金光斗)라는 변성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범석 장군은 유족한 환경과 개화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부친은 1891년 증광시에 급제하여 농상공부 서기관으로 재직하던 관리였고, 또 가정교사이던 외삼촌 이태승은 신익희와 한성외국어학교 동창인 개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손위 매부인 신석우 또한 개화 지식인으로 이름 높았으므로 이범석 장군은 어려서부터 이들의 근대적 사고와 신학문에 크게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경술국치 직전 사립 장훈(長薰)학교에 입학하여 민족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이범석 장군의 애국애족 정신은 남달랐으리라고 생각된다.
이후 이범석 장군은 부친이 강원도 이천(伊川)군수로 부임함에 따라 이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 3월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던 중 1915년 여름 한강에서 여운형을 만나게 되었다. 여운형은 남경 금릉대학에 다니다 하기 방학이 되자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할 청년 학생들을 물색 중이었는데, 이 때 이범석 장군을 만난 것이었다. 이범석 장군은 여운형을 통해 국제 정세와 독립운동계의 소식을 듣고, 그의 권유로 중국 망명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그 해 11월 20일 신의주에서 일인 학생으로 가장하고 압록강 철교를 도보로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 이범석 장군은 봉천에 먼저 와 있던 여운형과 다시 만난 뒤 그를 따라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이범석 장군은 매부인 신석우를 비롯하여 신규식․조성환․신채호 등 민족 지도자들을 만나면서 이들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신규식의 주선으로 1916년 가을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에 입학하여 독립군 장교가 되기 위한 첫 발을 내딛었다.
운남강무당은 일본 육사 출신인 당계요(唐繼堯)가 운남성 곤명(昆明)에 설립한 군관학교였다. 당계요는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귀국하던 중, “한국 인민은 망국민(亡國民)이 아니다. 반드시 조만간 구제가 있을 것”이라며 한국의 처지를 동정하였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신규식과는 각별한 교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규식은 당계요에게 운남강무당에서 한국 청년들이 군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섭하였고, 그 결과 이범석 장군을 비롯한 5명의 한국 청년이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범석 장군은 운남강무당의 제12기 생도로 입학하여 2년 6개월 동안의 군사 교육을 이수하고, 1919년 3월 기병과를 수석 졸업함으로써 촉망받는 기병장교가 되었다. 그렇지만 3.1운동 소식이 알려지자 독립운동에 동참하기 위하여 이범석 장군은 한국인 동기생 4명과 함께 사직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그 해 7월 상해에 도착한 이범석 장군은 신규식․노백린․이동녕․안창호 등 임정 요인들을 두루 순방하였는데, 이들은 한결같이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할 것을 종용하였다. 이범석 장군 또한 무관학교에서 배운 군사 지식을 토대로 독립군을 양성하여 대일 항전을 벌이는 것이 조국 광복을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상해를 떠나 만주로 갔고, 그 해 10월부터 이시영의 주선으로 통화현 고산자에 있던 신흥무관학교의 고등군사반 교관으로 취임하여 독립군 장교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 시기 만주에서는 3.1운동의 영향으로 각지에서 독립군단이 결성되어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우선 서간도에서는 박장호‧백삼규 등이 1919년 4월 15일 유하현 삼원포 대화사에서 대한독립단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펼쳐 갔다. 또 부민단이 확대 발전한 한족회는 상해에 임시정부가 건립되자 대표를 파견하여 임시정부의 위치는 국제 외교상 상해에 두도록 하며, 무장 독립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위해 군정부는 만주에 건립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같은 한족회의 협의안이 1919년 11월 17일 임시의정원과 국무회의에서 통과됨으로써 한족회는 군정부의 기능을 갖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되었다.
북간도에서는 대표적인 한인 자치단체인 간민회가 대한국민회로 개편되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대한국민회는 본부를 연길현 춘양향에 두고 그 밑에 5개 지방회와 70여 개를 헤아리는 지회를 설치해 한인 자치와 독립운동 조직을 일치시켜 가며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특히 여기에는 국민회군이라 불리는 강력한 독립군 부대를 예하에 두고, 안무를 총사령에 임명하여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북간도에서 강력한 항일 독립군단으로 성립한 것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였다. 원래 1911년 서일이 북간도에서 대종교도를 중심으로 조직한 중광단(重光團)이 정의단, 군정회 등으로 변천하다가 1919년 12월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을 자임하면서 탄생한 것이 바로 북로군정서였다. 북로군정서는 김좌진을 사령관으로 맞이한 뒤, 천여 명의 한국인 장정들을 모집하여 무장 대오를 편성함으로써 북간도에서 가장 강력한 독립군 부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 같은 시기에 만주에 도착한 이범석 장군은 이청천, 신팔균, 김광서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의 교관으로 독립군 장교 양성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그리고 학교 내에 교성대를 편성하여 그 대장이 되었다. 교성대는 이듬해 3.1운동 기념일을 맞이하여 국내로 진공함으로써 재차 만세 시위운동을 불러일으킬 목적 아래 조직한 별동대였다. 하지만 그 같은 거사 계획이 실현되지 못하여 실의에 빠져 있던 시기에 북로군정서에서 이범석 장군의 파견을 요청하여 왔다. 이에 이범석 장군은 신흥무관학교를 떠나 1920년 4월 북간도 왕청현 서대파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로 갔다.
북로군정서의 군사 교관으로 부임한 이범석 장군은 그 해 5월 사관연성소를 창설한 뒤, 600여 명의 생도들을 모집하여 독립군 장교로 교육함으로써 부대의 전투역량을 강화하여 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하는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부대의 무장을 강화하였다. 그리하여 이제 북로군정서군은 강인한 독립정신으로 뭉치고, 고도의 군사교육에 의한 전투 역량과 최신의 체코제 무기로 무장한 최정예 부대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 독립군 전사 가운데 가장 찬란한 전과를 올린 청산리대첩의 주체적 요인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이즈음 독립군 부대의 빈번한 국내 진공 작전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독립군을 탄압하지 않고서는 한국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에 따라 1920년 5월 초 일제는 서북간도를 비롯한 만주지역의 독립군 탄압을 계획하고, 그 내용을 동삼성 순열사 장작림(張作霖)에게 통고하여 협조하도록 요구하였다. 그 결과 봉천성에는 일본인 경찰고문을 지휘관으로 하는 중‧일 합동수색대가 편성되었다. 하지만 중국측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독립군 탄압에 지극히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때문에 일제는 중국측의 태도를 불신하고 독자적으로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1920년 8월 소위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수립하고, 첫 단계로 ‘훈춘사건’을 조작하였다. 일제는 중국 마적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의 일본영사관 분관과 일본인 민가를 습격케 하였다. 그리하여 13명의 일본인과 한국인 순사 1명을 살해하고 3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것이다. 일제는 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선전하면서 중국측에 그 피해 보상을 요구하였다. 만약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이 직접 병력을 투입하여 마적단을 토벌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면서 마적단은 중국인 마적뿐만 아니라 한국인 및 러시아인이 혼합된 무장단체라고 주장하였다.
일제가 마적단의 구성을 러시아 및 한국인이 함께 한 국제적 무력단체라 주장한 것은 그들 나름의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인의 가담을 주장한 것은 대병력을 간도로 침입시켰을 경우 러시아가 이에 간섭할 것을 우려하여 그 약점을 잡기 위한 것이었으며, 한국인의 가담을 주장한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공격해야 할 대상이 한국 독립군인 까닭이었다. 일제의 이러한 계략과 주장은 중국측에서 어떤 답변을 하더라도 병력을 간도지역에 투입하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는 중국측의 답변이 있기도 전에 대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켰다.
일본군 침입병력은 조선군 제19사단을 주력부대로 하고 블라디보스토크파견군‧북만주파견군 및 관동군이 합세한 약 2만 명이었다. 이들은 서북간도를 목표로 남쪽에서는 조선군, 서쪽에서는 관동군, 북쪽에서는 북만주파견군, 그리고 동쪽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파견군이 먹이를 찾아 모여드는 승냥이처럼 포위해 들어왔다. 청산리대첩은 이같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었다.
훈춘사건 이전부터 독립군측은 일본군의 간도 침입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때문에 독립군단은 근거지에서 대규모의 일본군과 정면 승부할 경우 군영은 물론이고, 간도지역 한인들도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우려하여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10월 20일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대한독립군‧대한신민단‧국민회군 등의 독립군단은 백두산록으로 향하는 길목인 화룡현 2도구와 3도구에 집결하게 되었다. 독립군의 이러한 동태를 밀정들의 보고로 파악한 일제는 침략군의 일부인 동지대(東支隊)를 2, 3도구 방면으로 진입시켜 독립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피할 수 없는 일전을 벌이게 되었고, 그 중심지는 한인 마을이 있던 청산리 일대였다.
첫 전투는 3도구 방면에서 포진하고 있던 김좌진과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과 일본군 동지대 소속의 야마다 토벌대 사이에 10월 21일 전개된 백운평(白雲坪)전투였다. 이 전투 직전 북로군정서군 약 1,500여 명은 훈련 정도가 낮은 병사들과 본부대의 비전투원으로 제1제대(梯隊),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주축으로 하는 전투 요원으로 제2제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제1제대는 김좌진, 제2제대는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되, 제1제대가 선두에서 길을 열고 제2제대는 후미에서 일본군의 추격에 대비하도록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10월 21일 오전 9시 북로군정서군은 제1제대의 선도로 청산리 계곡과 봉밀구 계곡의 분수령인 노령(老嶺) 고개 마루에 도착하였다. 이 때 일본군이 급속히 추격하고 있어 이범석 장군과 김좌진은 더 이상 그들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북로군정서군은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유리한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전투 준비에 돌입하였다. 김좌진이 지휘하는 제1제대가 고개 마루 부근에서 예비대로 대기하는 가운데,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는 제2제대 약 600여 명의 독립군 용사들이 계곡 좌우에 위장을 철저히 하고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표범처럼 매복하고 있었다.
이 때 야마다 대좌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는 독립군 부대가 안도현 쪽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 21일 새벽 1개 중대를 추격대로 선발하여 야스가와 소좌로 하여금 독립군 부대를 뒤쫓도록 하였다. 그리고 본대 2개 중대는 야마다가 직접 지휘하면서 추격대를 뒤따르고 있었다. 드디어 야스가와가 이끄는 일본군 추격대가 청산리 계곡을 따라 이동하다가 오전 9시경 백운평에 도착하여 이범석 장군이 지휘하는 제2제대의 매복 지점으로 접근하였다. 이범석 장군의 부대는 야스가와 추격대의 첨병소대가 매복 위치에 들어서자,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일거에 일본군 첨병소대를 격멸하였다. 뒤이어 야스가와 추격대 본대가 도착하자 이들과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사이에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범석 장군의 부대는 암석과 수목 등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은폐 엄폐된 상태에서 조준사격을 할 수 있었던 반면에, 일본군은 표적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난사만 거듭하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이범석 장군의 부대는 이 전투에서 야스가와 추격대를 섬멸하는 대승리를 거두고 김좌진의 지시에 따라 22일 새벽 봉밀구 계곡에 있는 갑산촌으로 이동하였다.
갑산촌에 도착한 이범석 장군과 김좌진은 주민들로부터 갑산촌 북방 8km 지점인 천수평(泉水坪)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이에 이범석 장군과 김좌진은 일본군 기병대를 격멸하기로 결정하고, 전 부대를 천수평으로 이동시켰다. 이범석 장군과 김좌진은 화력이 미약한 제1제대를 천수평 서남쪽에 대기시키고, 제2제대 병력으로 일본군 기병대를 기습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22일 오전 6시 이범석 장군은 휘하 4개 중대 가운데 2개 중대를 천수평 동구밖에 배치하여 일본군이 도망하는 것을 막도록 하고, 2개 중대를 직접 이끌고 마을 북쪽의 하천을 따라 우회한 뒤 마을 입구에서 숙영 중인 일본군 기병대를 급습하였다. 졸지에 공격을 받은 일본군 기병대는 당황하여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이범석 장군이 직접 지휘하는 부대에 의해 괴멸되었고, 달아나던 기병대의 일부는 이범석 장군이 동구밖에 배치한 부대에 의해 섬멸되었다.
승리를 만끽할 여유도 없이 이범석 장군은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문서를 통해 천수평에서 멀지 않은 어랑촌에 일본군 본대가 집결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이범석 장군은 일본군 본대가 곧 천수평으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리고 이들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천수평과 어랑촌 사이의 고지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이범석 장군과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은 천수평 전투 직후 곧 바로 어랑촌를 조망할 수 있는 고지를 점령하였다.
여기에서 바로 북로군정서군은 일본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다. 22일 하루종일 계속된 이 어랑촌 전투에서 이범석 장군과 김좌진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는 고전하였지만, 먼저 고지를 차지한 이점이 있었으므로 결국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었다. 또 같은 시각 홍범도 부대도 그 서북쪽 2.5km 지점인 만리동 부근에서 일본군 수색대와 교전함으로써 일본군의 전력을 분산시킨 것이 큰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이날 밤 이범석 장군과 김좌진은 부대를 이끌고 노도구 쪽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어랑촌 전투 지역을 벗어났다. 하지만 김좌진 부대는 계획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홍범도 부대와 함께 서행(西行)하면서 고동하곡(古洞河谷)에서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노령 서쪽의 황구령촌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김좌진은 부대를 수습하여 재편성한 뒤 11월 7일 황구령촌을 출발하여 천보산 서쪽의 산맥을 따라 11월 중순 원래의 근거지였던 왕청현으로 갔다.
이범석 장군이 이끌던 북로군정서군 제2제대는 어랑촌에서 노도구를 향하여 계획대로 북상하던 중, 24일 밤 천보산(天寶山)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이범석 장군의 부대는 천보산 광산촌에 배치되어 있던 일본군 제73연대 제2대대 예하 1개 중대와 격돌하게 되었다. 이범석 장군의 부대는 일본군에 선제 공격을 가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런 뒤 곧 산개하여 왕청현으로 이동하여 여기에서 다시 김좌진의 본대와 합류한 뒤, 북만주의 밀산을 거쳐 노령 이만으로 북상하였다.
이와 같이 북로군정서군은 이범석 장군과 김좌진의 지휘 아래 청산리 부근의 백운평, 천수평‧어랑촌‧고동하곡, 천보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10여 차례 격전을 치렀다. 이에 대한 전과와 피해 상황은 자료마다 서로 다르다. 그렇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조사하여 발표한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은 1,200여 명의 전사자와 2,100여 명의 부상자를 냈고, 독립군측은 130여 명의 전사자와 220여 명의 부상자만을 냈을 뿐이다.
이후 독립군단은 병력을 수습하여 그 해 말까지 북만의 밀산에 집결하였다가 이듬해 노령으로 이동하였고, 일부는 압록강 대안의 남만주 오지로 이동하여 진영을 재정비하면서 무장투쟁을 준비하여 갔다. 러시아 볼셰비키의 원조를 기대하며 연해주로 이동한 독립군은 1921년 초 이만에 도착하였다. 이만에서 러시아의 정세를 관망한 독립군은 두 가지의 서로 다른 판단을 하게 되었다. 하나는 러시아가 아직 그들 자체도 정비하지 못한 상태이므로 한국 독립군을 원조하기가 힘들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립군의 현재 처지에서 후원을 요청할 곳은 볼셰비키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상반된 판단에 따라 독립군도 각기 개별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는데, 이범석 장군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일부 독립군단과 함께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직후 북만으로 다시 돌아왔다.
만주로 다시 돌아온 이범석 장군은 1923년 5월 김규식․고평 등과 함께 연길현 명월구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여 기병 사령으로 활약하였다. 또 1925년 2월에는 고려혁명군결사대를 조직하여 테러리즘에 의한 독립운동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만주․노령․외몽고 지역을 전전하며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과 대적하기 위해 만주 군벌 장종창의 막료 생활을 하기도 하고, 또 중국 국민정부군에 들어가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이봉창․윤봉길 의거 직후 김구와 장개석의 회담 결과, 1934년 2월 중국 육군중앙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게 되었다. 이에 이범석 장군은 한인특별반의 학생대장으로 선임되었고, 여기에서 총교도관 이청천과 오광선․조경한․윤경천․한헌 등 교관들과 함께 독립군 간부 양성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후일 한국 광복군의 주력이 되었다. 이후에도 이범석 장군은 중국 국민정부군의 장성으로 복무하면서 대일 항전과 한국 독립군의 지원을 위해 힘썼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중경에 도착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중국 국민정부의 후원 아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여기에 참여하여 참모장이 되었다. 광복군의 초기 편제는 중경에 위치한 총사령부 외에 서안의 제1지대(군사특파단)와 제5지대(한국청년전지공작대), 수원성 포두(包頭)의 제2지대, 안휘성 부양(阜陽)의 제3지대로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1942년 7월 민족혁명당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하면서 편제가 개편되었다. 즉 후기 편제는 조선의용대를 제1지대로, 기존의 제1‧2‧5지대를 합쳐 제2지대로, 안휘성 부양에 있던 기존 제3지대 겸 징모 제6분처를 승격시켜 제3지대로 삼았다. 이렇게 광복군 편제가 개편될 때, 이범석 장군은 광복군총사령부의 참모장으로 있다가 자원하여 제2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그것은 이범석 장군이 실병력을 지휘하여 독립전쟁에 직접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광복군 제2지대장으로서 이범석 장군은 최정예군을 만들기 위해 교육 훈련에 힘쓰는 한편,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미국 전략정보국의 지원 아래 한국 광복군을 훈련시킨 뒤,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하여 공작 거점을 확보하고 정보를 수집케 하는 독수리 계획(Eagle Project)을 추진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이범석 장군에 의해 선발된 50명의 한국광복군 요원들이 싸전트 대위의 지휘 아래 1945년 5월부터 8월까지 OSS의 교육 훈련을 받았다. 그리하여 8월 4일 50명 가운데 38명이 교육 훈련을 수료하고 국내 침투를 기다렸지만, 일제의 항복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일제의 항복 직후 이범석 장군은 곧 바로 OSS와 연계한 국내 정진대 파견을 추진하였다. 이는 가급적 신속히 국내로 광복군을 진입시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나아가 임시정부 환국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된다. 이같은 이범석 장군의 의도는 임정 지도부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국내 정진대를 편성한 뒤 OSS의 지원 아래 8월 16일 국내 진입을 시도하였지만 산동반도를 지나던 중 일본군의 미군 공격 소식이 알려짐에 따라 되돌아 왔다.
그 뒤 이범석 장군은 OSS 요원들과 함께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하여 8월 18일 12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여 그리던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이 동경으로부터 명령을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국내 진입과 한국인 접촉을 허용하지 않아 다음날 중국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범석 장군은 임정 요인들이 모두 귀환한 뒤인 1946년 6월 3일 500여 명의 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인천항을 통해 조국에 돌아왔다. 귀국 직후 이범석 장군은 좌우의 극한 대립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범석 장군은 1946년 10월 ‘민족지상 국가지상’을 내세운 민족청년단을 결성하여 해방 공간에서 민족 국가 건설에 힘썼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는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으로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군 창설과 육성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범석 장군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