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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禪軒 독서일기 2025년 10월 14일 화요일]
《『대동야승』 中 趙慶男 著 『續雜錄 속잡록』
소성 정의 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 복위 금상전하 즉위 》 (153)
<1623년 계해년 천계(天啓) 3년, 인조 원년>
○ 1월 5도 선유사(五道宣諭使)를 정하여 쌀과 포목을 거두어들인다는 첩지를 민간에 보내니 사람들이 자유를 얻지 못했다. 그래서 5도의 신민에게 칙지(勅旨)를 다음과 같이 내렸다.
왕은 이르노라. 아, 너희 5도 사민(士民)들은 나의 열 줄의 선유를 들을지어다. 곡식을 내서 윗사람을 섬기는 것은 고금의 통례요, 국가를 먼저 생각하고 사사(私事)를 뒤에 하는 것은 충의의 대절(大節)이다. 먹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없으니 군사를 쓰는 데는 가장 군량이 시급한데, 땅에서 생겨 다함이 없으니 돈을 지니는 것이 어찌 영총(榮寵)보다 낫겠느냐. 과인(寡人)이 즉위함으로부터 시국이 몹시 어려워졌다. 궁궐이 편안하지 못함으로써 토목(土木)의 역사를 면치 못했고, 서북에서 난리를 고하여 마침내 군사(軍事)가 치성하게 되었다. 세 변방에 수자리를 두니 힘은 이미 양식 보내기에 고갈되고, 천 리 밖에 물자를 수송하니 재물 역시 긁어내어 다하였으니 항상 잘못 처치할까 두려운데, 곡식을 거두는 일은 실로 부득이한 것이다. 하물며 명 나라 장수들이 장차 바닷길을 경유해 올 것이며, 거느린 군사도 반드시 수십만에 달할 것이니, 이쪽에서 응접하는 일도 한두 가지로 헤아릴 수 없다. 깊은 바다를 넘어 행군하는데 누가 군량을 계속 대줄 것인가. 우리 땅에 다다라 먹여주길 바랄 때 군량을 공급할 길이 없다. 민간의 남은 저축을 긁어내자니 허실(虛實)이 혼동될까 염려되고, 밭이랑에 따라 부세(賦稅)를 더하자니 가난뱅이가 흩어져 도망갈까 염려되니, 오직 급한 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곡식을 모으는 것이 제일이다. 그러므로 고관(高官) 중사(重使)를 보내어 현사(賢士)ㆍ대부(大夫)에게 알리노니, 부지런히 농사지었으니 어찌 간직해 둔 곡물이 없겠는가. 조상의 업을 물려받아서 또한 풍부하고 안락한 고장이 있으리니 창고가 찼다면 썩어서 소용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재물이 있으면 쓸 곳이 있는 법이니 늙도록 기다려서 무엇하리요. 선왕의 길러주신 지극한 인(仁)을 추념하고, 명 나라가 구원해 준 큰 덕도 갚아야 할 것이니, 혹은 의를 분발하여 전대를 털고, 혹은 충심을 다하여 곳간을 기울여서 힘써 관에 바쳐 군량을 비축하여 적을 멸하고 개가 부르기를 기약하자. 재주에 따라 직위를 받는 것이니 내 후한 보수를 아끼지 않겠다. 발길을 내딛어 조정에 오르면 네 어찌 둘 다 잘 됨을 마다하랴, 비록 수령(守令)의 중한 소임이라도 이력의 천심(淺深)에 구애하지 않을 것이고, 금자(金紫)의 높은 계급도 응모(應募)의 다과에 달렸느니라. 옛날 한 무제(漢武帝)의 세상에 있어서도 복식(卜式) 같은 어진 이가 있어서 재물을 수송해서 변방을 도와 벼슬이 마침내 어사(御使)에 이르렀고, 나라를 위해 가산을 탕진하여 이름이 드디어 당시에 드러났으니, 이 사람으로 하여금 지나간 세대에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지 말라. 아, 군사와 양식이 넉넉하면 반드시 먼저 민심에 믿음을 주는 법이니, 전대와 주머니에 쌓고서야 곧 천토(天討)를 개시할 것이다. 너희들이 인색하지 않으면 나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겠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한다.
○ 정언 한유상(韓惟翔) 등이 아뢰기를, “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 등이 대비를 두호할 음모를 오랫동안 품고 있으므로 화가 장차 멀지 않을 것이오니, 감히 미리 손쓸 것을 청하옵니다.” 하니, 광해는 바야흐로 김 상궁과 함께 후원에서 잔치하며 노니는데, 김 상궁이 광해의 손을 잡고 크게 웃으며, “외부 의론이 진실로 가소롭습니다. 성지(成之) 김 생원(金生員)이 어찌 이런 뜻이 있으오리까.” 하였다. 광해가 아뢴 것을 도로 돌려주며, “서서히 처리하겠다.” 하였다. 유상 등이 또 아뢰기를, “충성 된 말은 귀에 거슬리고, 크게 간사한 놈은 믿음직한 법이오니 훗날 설혹 후회가 생길지라도 신들이 말하지 않았다는 말씀은 마시옵소서.” 하였다. 광해가 상궁에게 묻자 상궁이 웃고 제지하니, 광해가 비답(批答)을 내리기를, “아무 근거 없는 말을 가지고서 충성 되고 선량한 신하를 해치려 하지 말라.” 하였다.
먼젓번에 이귀의 딸이 김자겸(金自兼)에게 출가했다가 일찍 과부가 되자 절개를 무너뜨리고 불당(佛堂)에 노닐며 부처에 종사했다. 이 일이 발각되어 옥에 갇혀 문초를 받게 되자 궁녀로 들어가기를 자원하니 광해가 허락했다. 그래서 궁중에 들어오게 되자 상궁과 결탁하여 모녀(母女)가 되기로 약속하고, 항상 그 아버지와 그 남편의 형 자점이 지극한 충성심이 있는데 불행히 대북(大北)에게 미움을 받아 항상 모해 당한다는 말을 하며, 날마다 하소연함과 동시에 또 다른 궁녀에게 금은(金銀)을 빌려주어 상궁에게 바치게 한 것이 수천 냥에 가까웠다. 광해가 유상의 장계를 볼 때마다 잡아다 국문을 하려고 하면 김이 말하기를, “성지는 일월 같은 충신입니다. 하물며 김 생원은 한낱 선비인데 무슨 권력이 있어 다른 계획을 하겠습니까.” 하니, 광해는 웃고 끄덕이며 전혀 의심함이 없었다.
[첨언] 광해왕이 반역의 고변을 여러 신하로부터 받고도 이귀의 딸이 뇌물로 녹인 김 상궁의 말을 듣고는 무마시켜버렸다. 이귀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반정을 계획하고 딸을 궁녀로 들여보내 광해왕이 총애하는 김 상궁에게 접근하도록 했다. 총기가 사라지고 주색잡기에 묻히고 김 상궁의 치마폭에 휩싸인 광해의 말로는 자업자득이었고 이귀의 책략은 주도면밀했다. 이로써 조선의 역사가 확 바뀌었다.
○ 2월 19일 저녁에, 엷은 햇무리가 생겼다.
○ 28일 밤 2경에 푸르고 붉은 기운이 서남방에서 일어나 하늘 복판으로 향하여 서로 부딪쳤고, 이튿날 4경에 동남쪽에서도 그러했다.
○ 3월 11일 낮에 서북방에서 천지가 진동했다.
○ 12일 소성 정의 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가 복위하고, 금상전하께서 즉위하였다. 이에 앞서 10여 년간에 조정이 문란하고 나랏일이 혼란하여 인민이 제 살 곳을 잃고 위와 아래가 모두 이반되고, 대비는 서궁(西宮)에 갇혀 구사십생(九死十生)을 겪으니 대북(大北)의 여러 간흉(奸兇)이 조석으로 해칠 계획을 했다.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이 서울에 있을 적에 서인(西人) 동지(同知) 김류(金瑬)를 만나보고 가만히 말하기를, “요즘 시국이 말이 아니고 국모 역시 보전하기 어려운 이때 동료들 가운데 종묘사직을 안보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그대가 있을 뿐이다.” 하고, 인하여 얼굴을 가리고 오열하니, 김유가 그 뜻을 알고 돌아갔다. 오성은 원통함을 못 이겨 유배지에서 죽었다. 김유가 문관(文官) 홍서봉(洪瑞鳳)ㆍ박동선(朴東善), 유학 심기원(沈器遠)과 비밀리에 의거(義擧)할 것을 꾀하고, 무장(武裝) 신경진(申景禛)ㆍ이흥립(李興立) 등 중로(重老)들과 결탁하여 군인을 모집하는데 홍서봉이 시 한 수를 지어 신흠(申欽)에게 보내기를,
전일에 풍파가 두렵더니 / 前日風波畏
풍파도 퍽이나 많아졌네 / 風波亦已多
우리들 포근히 잠이 들 적에 / 吾人睡足處
꿈속에서 풍파가 그쳤다 외치네 / 夢唱定風波
하였는데, 신흠이 보고서 홍서봉이 사직을 안보할 생각이 있는 것을 짐작했으나 감히 응하지 못했다. 전 부사 이귀가 문신 최명길(催鳴吉)ㆍ유학 심명세(沈鳴世)ㆍ송영망(宋英望) 등과 함께 또한 구사일생의 꾀를 내어 비밀리에 유학 김자점, 무장 이괄(李适)ㆍ이서(李曙) 등과 결탁하고 장정을 모집했는데, 오래지 않아서 김유와 이귀가 서로 호응하여 하나가 되어 금상을 추대할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김유로 대장을 삼아 무기를 준비하고 충의의 인사를 널리 모아서 내왕하며 모의하다가 일이 잘못 발각되어 삼사에서 여러 차례 고변하니, 여러 간신들이 매양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했으나 상궁이 안에서 도와준 덕분에 광해가 잡아서 문초하자는 청을 윤허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 이흥립이 도감대장(都監大將)으로 있었는데, 그 딸이 영상 박승종(朴承宗)의 아들에게 시집가서 승종과 사돈이 되었다. 승종은 흥립 역시 이 모의에 참여하여 삼사에서 변고를 고했으나 광해가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부득이 흥립을 자기 집으로 잡아다가 베어 죽이려고 하는데, 마침 승종의 아들 자흥(自興)이 밖에 나갔다 들어오자, 흥립이 달려가서 자흥의 허리를 껴안고 하소연하기를, “영상이 나더러 역적모의를 했다 하여 잡아다 죽이려고 하는데, 이는 필시 참으로 역적질하려는 자가 대장을 제거하기 위하여 도리어 나를 역적이라 지목하는 것이다.” 하였다. 자흥은 아버지에게 가서 고하기를, “흥립이 역적모의한 것은 아직 확실히 발각되지 않았는데 한 집안 사이에 함부로 죽이는 것은 온당치 못한 듯하옵니다.” 하니, 승종이 석방해 보냈다.
[첨언] 영의정 박승종은 단종릉에 비각이 있는 낙촌공 박충원의 증손자다. 아들 박자흥은 세자비의 아버지다. 박승종이 반란의 주력군 장수인 훈련대장 이흥립을 사돈이지만 처단하려고 했는데 아들 자흥이 말리는 바람에 석방하고 말았다. 이흥립이 대궐 문을 열고 반군을 안으로 들였다. 이로써 영의정 박승종은 반란 진압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로써 말양박씨의 주류이던 규정공파는 몰락하고 말았다. 이후 300년은 박씨 중에서 고려말 반남현 호장을 시조로 하는 반남박씨만 득세하였지 다른 박씨 문중들은 쇠락하였다. 반남박씨는 박혁거세 거서간은 인정하나 경명왕의 아들 8대군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귀가 이서를 들어 상궁에게 간청하여 장단 부사(長湍府使)를 삼게 하였는데, 모의가 이미 발각되어 사세가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나아가 군사 행동할 기일을 정하고 이날 석양에 금상전하를 모시고 홍제원(弘濟院)에 모여 거사하기로 약속했다. 유학 이두양(李斗陽)도 그 사실을 알고 군사 30여 명을 거느리고서 약속한 장소로 달려갔는데, 적적하게 사람 그림자도 없으므로 낭패라고 근심했다. 그런데 문득 한 점의 불빛이 서북쪽 산 밑에서 깜박이는 것이 보이므로 달려가 보니, 이귀 이하가 모두 모였는데 대장만이 오지 않았다. 밤 2경에 이서가 장단(長湍) 군사 3백여 명을 거느리고 당도하니, 이괄이 말하기를, “사세가 이미 급박하니 더 기다릴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의자에 앉아 대오를 갈라 진영을 정비하자 김유도 당도했다.
그래서 곧 군사를 이끌고 창의문(彰義門)을 경유하여 들어갔다. 그런데 이날 밤에 맹약한 사람 중에 이이반(李以般)이란 자가 일이 잘못될까 염려하여 승정원에 고변하기를, “김유ㆍ이귀 등이 역모하여 지금 홍제원에서 군사를 모아 이날 밤으로 대궐을 침범하기로 하였는데, 도감대장 이흥립이 내응할 것입니다.” 하였다. 정원이 장계를 아뢰어, 곧장 박승종ㆍ이이첨을 불러들여 흥립을 잡아다 문초하는데, 의군(義軍)은 벌써 창의동(彰義洞)을 지나 고함소리가 천지에 진동하니 승종과 이첨이 놀라 흩어져 달아났다. 의군이 창덕궁(昌德宮) 금호문(金虎門)에 당도하니, 수문장 박효립(朴孝立)이 문을 열고 맞아들였다. 그래서 장작더미에 불을 질러 불길이 궁사(宮舍)에까지 미치니, 의거를 하는 사람들이 자기 집사람에게 말하기를, “궁중에서 불이 나지 않으면 모두 달아나서 빠져 죽으라.” 하였기로 불을 놓아 알려준 것이다.
광해가 놀라 도망가고, 호위하던 군사들도 모두 흩어졌다. 주상은 돈화문(敦化門) 안에 좌정하고 군사를 나누어 서궁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입직(入直)한 신하들로 하여금 뜰에 내려가 절하고 하례를 드리게 하니, 병조 판서 권진(權縉) 이하가 모두 허둥지둥 사배를 드리고 땅바닥에 엎드려 명을 들었다. 그런데 승지 이덕형(李德泂)과 홍문 교리 윤지경(尹知敬)만이 꼿꼿이 서서 절을 하지 않으니, 좌우가, “너는 어찌 절을 하지 않느냐?” 물으니, 덕형이 말하기를, “몸이 신하가 되어 어찌 왕을 모르고서 갑자기 절을 할 수 있는가?” 하였다. 좌우가 말하기를, “능양군(綾陽君)이 대비를 받들고 의병을 일으켜 반정(反正)한 것이다.” 하니, 지경이 묻기를, “그렇다면 어째서 궁사를 불태웠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군졸이 불조심을 못해서 그런 것이지, 고의로 놓은 것이 아니다.” 하였다. 두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이렇게 되면 전왕(前王)은 어떻게 처우할 것이냐?” 하니, 말하기를, “그 죄가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대우해서 죽이지는 않겠다.” 하였다. 덕형과 지경이 드디어 사배의 예를 드리니 위의가 비로소 정해졌다.
그래서 성중에 포고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군교(軍校)를 사방으로 보내어 흉당(兇黨) 이이첨 3부자ㆍ한찬남(韓纘男) 3부자ㆍ이위경(李偉卿)ㆍ백대형(白大珩)ㆍ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박정길(朴鼎吉)ㆍ이정원(李挺元)ㆍ김상궁(金尙宮) 등을 잡아다 군문(軍門)으로 끌어내어 능지처참하고, 가산을 몰수함과 동시에 법에 의거하여 연좌율(緣坐律)을 썼다. 이날 황혼에 이이첨이 대궐에서 집으로 돌아와 권속과 세 아들 등 가족을 거느리고 성을 넘어 도망해 나가 한강 송정(松亭)에 당도하여 목수(木手)의 초립(草笠)과 귀마개를 바꾸어 쓰고 온 가족이 강을 건너 이북현(利北峴)에 당도하여 날이 밝자 각기 흩어져 숨었는데 군교가 뒤를 쫓아 포박해 왔다. 이때에 박자흥(朴自興)은 경기 감사로 있었는데, 이날 저녁에 박승종이 집으로 돌아와 자흥과 양주(楊州)로 달아나서 목사 박안례(朴安禮)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켜 국난을 진압하게 하고, 수원 방어사(水原防禦使) 조유도(趙有道)에게 명령을 전달하여 군사를 일으켜 합세하게 하였다.
13일 주상이 서궁에 가서 대비에게 절을 드리고 옥새를 바쳤다. 의거가 일어나던 처음에 광해는 담장을 넘어 초상집으로 들어가니, 주인이 자기 상복을 입혀 숨겨주고 와서 군문에 고하므로 곧 군인을 시켜 떠메고 와서 군중에 유치하였다. 이에 이르러 대비가 교서를 내리기를, “역적 이혼(李琿)를 보아야 너희들이 한 일을 알겠다.” 하므로, 곧 베로 만든 옷과 건과 흰색의 귀마개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다. 대비가 옥새를 받아 자리 옆에 두고 오래도록 옳다 그르다는 말을 하지 않다가 저녁에 전수하니 주상이 즉위하였다.
○ 감사의 분부로 인하여 박안례가 군사를 일으켜 두험천(豆險川)으로 나오고, 조유도도 군사를 거느리고 군문을 떠나려 하는데, 신경유(申景裕)를 시켜 달려가 안례와 유도를 효유하여 군사를 파하고 귀순하게 하니, 승종과 자흥이 선산(先山)으로 달려가서 같은 노끈에 목매 죽었다. 승종이 죽을 적에 자기 옷에다 글을 쓰기를, “임금을 바르게 받들지 못해서 오늘날 이렇게 되었으니 못에 빠져 자살하여 천지신명께 사죄한다.” 하였다. 승종이 비록 탐욕은 많았으나 실로 대비를 호위한 공이 많았다.
[첨언] 박안례는 경기감사 박자흥의 5촌 당숙이었다. 박안례와 조유도의 군사가 과감하게 한양에 진입하였다면 반군 세력을 토평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승종이 지니고 다니던 약을 먹고 죽기 전에 손자 박안례에게 이미 대세가 기울었으니 군사를 일으켜 쌍방 간에 피를 흘리게 하지 말라고 통지했다고 한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반란 때 쿠데타에 반대하는 다수의 장군들이 부대를 동원하지 않은 까닭은 같은 군인들끼리 싸우기를 피했기 때문이다.
○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보내어 정인홍(鄭仁弘), 통제사 원수신(元守愼), 충청 병사 한희길(韓希吉), 순천 부사 이원엽(李元燁) 등을 잡아다가 법대로 처참하고, 평안 감사 박엽(朴燁)과 의주 부윤(義州府尹) 정준(鄭遵)은 각각 있는 곳에서 베어 죽이니, 사형 당한 자가 거의 6ㆍ70명에 달하고, 그 나머지는 죄의 경중을 조사해서 모두 귀양 보냈다. 이때 박엽이 평안 감사로 있었는데, 탐욕스럽고 포학하며 방자해서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그래서 새로 익랑(翼廊) 70여 칸을 지어 연달아 장방(長房)을 만들고, 도내의 명창 백여 명을 모아 날마다 함께 거처하며 밤낮으로 오락을 일삼으며, 늘상 음탕한 짓을 하되 조금이라도 뜻에 맞지 않으면 사정없이 매를 때리고, 결미(結米)를 받아들이되 수를 배로 해서 독촉하여 조금이라도 어기거나 늦추는 일이 있으면 참혹한 형벌을 써서 죽이곤 하며, 하루의 비용이 6ㆍ70석에 달하여 학정이 날로 심하니 백성이 편히 살 수 없어 흩어지고 도망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온 도내가 텅 비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선전관 도사가 밀지(密旨)를 받들고 원수부(元帥府)로 달려가니, 때마침 도원수 한준겸(韓俊謙)이 중화(中和)에 있으므로 밀지를 원수부에 주어 밀지대로 이행하게 하고 의주(義州)로 달려갔다. 원수부에서는 아직도 서울 안의 정확한 소식을 모르는지라, 사람을 급히 보내어 실상을 자세히 탐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별장 몇 명으로 하여금 군사 5백여 명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가게 하며, 본성 유방별장(留防別將) 등과 상의하고,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적병의 그림자가 나타나서 변방의 정세가 매우 급박하니 군졸들은 지금 당장 의주로 떠나야 한다. 그러니 즉각 모두 보통문(普通門)에 모여 약속을 들으라.” 하니, 군중이 놀라서 일시에 모여들므로 좌우로 나누어 행군하게 하여 대아(大衙)를 호위했다. 박엽은 바야흐로 장방에 앉아 북치고 풍악놀이를 하며 출입을 엄중히 금하니 사람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군졸들이 담장을 넘어 지키는 군졸을 쳐서 물리치고 철문을 깨트리자, 대아의 종놈이 장방으로 가서 변을 고하기를, “담장 밖에는 대군이 겹겹으로 포위하고 나머지는 모두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하니, 박엽이 크게 노하며 말하기를, “내가 있는데 무슨 변란이 생긴단 말이냐? 네가 분명 망령이다.” 하며, 이내 물러가 있으라고 명령했다. 별장 등이 자기 소속 군사를 거느리고 활과 화살을 가지고 들어가 섬돌 위에 서서 나오기를 기다려 잡으려고 하는데, 박엽은 전혀 동요하지도 않고 앉아서 일어나지 않다가 원수부의 전령(傳令)을 보고서야 서서히 뜰로 내려왔다. 그래서 잡아 군 관청으로 나가서 형틀을 씌워 구류하고, 그 아내와 첩들로 하여금 서로 만나보게 한 다음에 또 성안 사가(私家) 방에 유치하니, 박엽이 말하기를, “나는 별로 대단한 죄도 없는데 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윽고 벽을 뚫고 올가미를 들여보내서 독촉해서 목을 매게 하고, 군사들이 올가미를 끌어 당겼으나 쉽게 죽지 않으므로 칼잡이가 곧장 방으로 들어가 발을 끌어당기니 숨이 마침내 끊어졌다. 그래서 곧장 네거리로 끌어내어 참형을 하니 창기(娼妓)들이 나와서 옆에서 보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너희들은 모두 감사의 애첩이었는데 감사가 죽어도 울지 않고 무심히 서서 구경만 하니 웬일이냐?” 하니, 기생들의 대답이, “사또 전에 영을 들으러 왔다.” 하고, 서로 더불어 시시덕거리며 갔다. 칼을 가진 자가 사방에 구름 모이듯 하여 다투어 들어가 살점을 베니, 별장들이 금할 길이 없으므로 본관에게 급히 관 속에 넣어 아문 밖 사가에 초빈해 두고 군사를 두어 수직하게 하고 이튿날 발송하기로 했는데, 도내의 원수진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이 모여 들어 관을 쪼개고 시체를 끌어내어 마디마디 끊어서 잠시 동안에 한 점의 살도 없고 해골도 거의 없어질 지경이었다. 서윤(庶尹)과 판관(判官)이 극력 타일렀으나 조금도 듣지 않으므로 겨우 남은 뼈 5ㆍ6마디를 주워서 궤에 숨겨두었다. 신임 감사 김신국(金藎國)이 부임하자, 감사의 명령으로 박엽의 아내와 첩이 뼈가 든 궤를 가지고 무사히 강을 건너 황주(黃州)에 당도하니, 황주 백성들이 일찍이 박엽에게 포학을 당했는지라 그 궤를 빼앗아 강물에 던졌다. 그 아내와 첩은 겨우 몸만 보존하여 걸어서 서울로 돌아왔다. 선전관 도사가 의주에 당도하여 정조의 목을 베었다.
[첨언] 이들 중에서 정인홍은 참 아까운 인물이다.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경상우도를 수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반정군의 이귀 등의 인물은 임진왜란 때 피해 다니기 바빴다. 성격이 지나치게 강건하여 반대파를 많이 만들었고, 이이첨과 그 무리들의 등살에 눌려 권력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정인홍과 함께 많은 경상우도의 북인 사대부들과 선비들이 죽거나 유배형에 처해짐으로써 남명학이 큰 타격을 입고 말았다.
[한국고전종합DB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