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조 학사집(鶴沙集)
참판 문공과 장령 문공 두 선생의 묘갈명병서(參判文公掌令文公兩先生墓碣銘幷序)
옛날 우리 중종조(中宗朝)에 정암(靜庵) 조 선생(趙先生: 조광조)이 임금을 만나 도를 행함에 당시 명현들을 끌어들여 함께 문치(文治)를 도모하였다. 이때 참판(參判) 문 선생 휘 근(瑾) 자(字) 사휘(士輝)와 장령(掌令) 문 선생 휘 관(瓘) 자(字) 백옥(伯玉) 형제 같은 분이 조 선생과 더불어 뜻이 같고 도가 합치되어 공손함을 합하고 마음을 화합하였다.
불행하게도 기묘년(己卯年, 1519, 중종 14)에 장령공[李文瓘]이 병으로 죽자 임금이 슬퍼하여 관과 장례 물품 및 장례비용을 내려주도록 하였고 조 선생이 상을 돌보았으니 한때의 슬픔과 영화가 지극하였다. 얼마 안 있어 북문의 화가 발생하였다.
참판공이 이때 경상 좌감사(慶尙左監司)가 되어 마침 우감사(右監司) 이항(李沆)과 함께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급보가 이르자 이항은 이전처럼 연회를 즐겼으나 공은 곧장 침실로 들어가서 참담해하며 즐거워하지 않았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털과 눈썹이 하얗게 되었는데 잠시 뒤에 파직되었다.
신사년(辛巳年, 1521, 중종 16)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또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마침내 폐고(廢錮: 종신토록 관리가 될 수 없게 함)되어 있다가 운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장령공을 예천군 서쪽 지만산(知滿山) 오향(午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고 이에 이르러 참판공이 운명하자 그 옆 자락 같은 좌향에 장사 지냈다.
아, 임진왜란에 문(文)씨 가문이 화를 입어 한 집안의 서적들이 없어져서 두 선생의 언론과 풍지를 찾을 수 없어 우선 한두 마디 전해지는 참된 문자로써 말하자면, 참판공은 홍치(弘治) 임자년(壬子年, 1492, 성종 23)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병진년(丙辰年, 1496, 연산 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정원 주서로 말미암아 예ㆍ병조의 좌랑, 사간원 헌납, 홍문과 수찬, 이조 좌ㆍ정랑, 경상 좌감사, 형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중간에 이력이 많지만 전하지 않는다. 장령공은 무오년(戊午年, 1498, 연산 4)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정묘년(丁卯年, 1507, 중종 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 부정자(副正字)로 말미암아 예문관 검열ㆍ대교ㆍ봉교, 성균관 전적, 병ㆍ호조 좌랑, 안음 현감, 병조 정랑, 사헌부 지평, 형ㆍ예조 좌랑, 사간원 헌납, 장악원 첨정, 주청사 서장관, 종부시 첨정,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였다. 이것이 두 선생 이력(履歷)의 대략이다.
참판공은 효성과 우애가 남달랐고 타고난 성품은 강직하였다. 불선(不善)을 저지르는 사람은 반드시 “문 선생이 알까 두렵다.”고 하였다. 조 선생이 일찍이 임금 앞에서 문(文) 아무개가 순수하고 강직하여 옛사람의 풍모가 있다고 하였으니 제현들에게 이렇게 칭찬하고 알아줌을 입었다.
처음 조 선생과 더불어 동시에 등용되었다가 끝내 조 선생과 더불어 동시에 화를 입었기 때문에 후학들이 공을 기묘명현(己卯名賢: 조선 시대,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신하들)이라 일컫고 있으며 상국(相國) 김육(金堉, 1580~1658)이《기묘명현록(己卯名賢錄)》을 작성함에 비로소 보충하여 넣었다.
장령공은 독실히 배우고 힘써 행하였으며 신중하고 과묵하였다. 거듭 사헌부에 들어감에 조정이 엄숙하였다. 외직으로 나와 작은 고을을 다스림에 맑은 풍모와 검소한 덕행이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 鄭汝昌)과 나란히 일컬어졌다. 죽게 되자 조 선생이 종시토록 직접 장례 일을 돌보았다. 대개 뜻이 같고 도가 합치되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이것이 두 선생 덕행의 대략이다.
서애 유 선생이 일찍이 두 선생의 뜻과 행실이 전하지 않음을 애석하게 여겼고 용성(龍城남원)의 선비들이 향사(鄕社)에 현사(賢祠)를 세웠다. 그 유풍과 여운이 또한 수백 년 뒤에 흥기되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문씨의 본적은 감문(甘文)인데, 삼한벽상공신 휘(諱) 다성(多省)의 후예이다.
이때부터 대대로 벼슬을 하여 고려 때의 평해군사(平海郡事) 휘 재도(載道)는 효행으로 정려가 내려졌다. 휘 구(龜)를 낳았는데 벼슬이 정승(政丞)에 이르렀다. 증조부 휘 손무(孫武)는 생원으로 좌통례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숭질(崇質)은 호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부친 휘 걸(傑)은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고 양양 부사(襄陽府使)를 역임하였다. 어머니는 정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로 대사성 휘 문흥(文興)의 따님이다. 맑은 행실이 있었고 두 아들을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쳐끝내 입신양명하게 되었다.
참판공의 부인은 정부인 행주 기씨(幸州奇氏)로 한 명의 아들인 홍수(弘壽)를 낳았고, 홍수가 한 아들 산두(山斗)를 낳았으며, 산두가 세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후손이 없다. 다만 서얼 계통으로 기명(起明)과 응명(應明)이 있었는데,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다. 외손으로 변(卞)ㆍ박(朴)ㆍ허(許) 세 성씨의 자손이 있다.
장령공의 부인은 영인(令人) 우계 이씨(羽溪李氏)인데, 현감 휘(諱) 대근(大根)의 따님이다. 두 아들을 낳았는데 홍필(弘弼)은 경릉 참봉(敬陵參奉)을 지냈고, 홍보(弘輔)는 충의교위(忠毅校尉)이다. 서자(庶子) 홍순(弘順)은 참봉을 지냈고, 두 아들을 두었으니 경세(經世)와 경제(經濟)이다. 후손들이 매우 많다.
참봉의 증손인 전 별제(別提) 우량(宇量)이 종인들을 창솔하여 두 선생의 무덤 사이에 하나의 비갈을 세우고서 문장을 새겼다. 능히 먼 조상을 미루어 여러 친족들에게 미쳤으니 세상에 드문 일이다. 후손 석규(碩珪)가 두 선생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겨 / 帝悶吾東
성신이 기대에 부응했고 / 聖神應期
현명한 임금이 연이어져/ 重煕累洽
우뚝이 문치를 열었네 / 蔚啓文治
세상에 이름난 인물이 있어 / 必有名世
정암이 발탁하였고 / 靜庵挺生
초야에 현인을 남기지 않아 / 野無遺賢
띠풀 뽑히듯 동류들과 나아갔네 / 茅拔彙征
형이 나발 불고 아우가 젓대 부니 / 伯壎仲箎
감문의 두 현인이고 / 甘文兩賢
공손함을 합하고 마음을 화합하여 / 協恭和衷
나란히 조정의 의표가 되었네 / 羽儀聯翩
하늘이 사문을 망치려 하여 / 天將喪文
무지개가 해를 침범했고 / 螮蝀干日
시사가 한 번 크게 변하여 / 時事一變
우리 도가 불행해졌네 / 吾道之厄
고상한 풍모가 이미 멀어졌으나 / 高風已遠
전형이 여전히 남아 있고 / 典刑猶存
엄연히 향현사가 있어서 / 有儼賢祠
비문에 부끄러움이 없네 / 無愧碑文
추한 자취가 안개처럼 사려져서 / 醜跡煙消
훌륭한 자취가 해처럼 밝으니 / 芳躅日皦
만세 뒤에 남기려고 / 萬世在後
감히 명을 지어 알리네 / 敢以銘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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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공손함을 …… 화합하였다:
원문의 협공화충(協恭和衷)은 서로 협력하여 마음을 합한다는 뜻이다.《서경》〈고요모(皐陶謨)〉에 “군신(君臣)이 공경함을 함
께하고 공손함을 합하여 마음을 화합한다.[同寅協恭, 和衷哉.]”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주02] 폐고(廢錮):
평생 관리가 될 수 없게 벼슬을 막는 것이다.
[주03] 일두(一蠹) 정 선생(鄭先生):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욱(伯勗), 호는 일두ㆍ수옹(睡翁),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김종직
의 문인으로 시강원 설서, 안음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일파로 몰려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주04] 바른 …… 가르쳐:
《춘추좌씨전》 은공(隱公) 3년 조에, 위(衛)나라 장공(莊公)의 아들 주우(州吁)가 오만 방자하게 굴자, 현대부(賢大夫) 석작(石
碏)이 장공에게 “아들을 사랑한다면 그에게 바른길로 가도록 가르쳐서 잘못된 곳으로 빠져들지 않게 해야 한다.[愛子, 敎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충간(忠諫)한 말이 나온다.
[주05] 현명한 임금이 연이어져:
원문의 ‘중희누흡(重熙累洽)’은 대대로 현명한 임금이 연이어 나와 태평성대를 이어간다는 말이다. 한(漢)나라 반고(班固)의〈동
도부(東都賦)〉에 “영평의 때에는 거듭 빛나고 대대로 합했다.[至於永平之際, 重熙而累洽]” 하였는데, 장선(張銑)의 주에 “‘희’
는 광명함이고 ‘흡’은 합함이다.
광무제가 이미 밝은데 명제가 이를 이었으므로 ‘중희누흡’이라고 말한 것이다.[熙, 光明也. 洽, 合也, 言光武既明, 而明帝繼之, 故
曰重熙累洽也.]” 하였다.《六臣註文選》
[주06] 띠풀 …… 나아갔네:
인재들이 일제히 포저도 조정에 진출했다는 말이다.《주역》〈태괘(泰卦) 초구(初九)〉의 “서로 엉켜 있는 잔디의 뿌리를 뽑듯 어
진 동류(同類)들과 함께 나아가니 길하다.[拔茅茹, 以其彙征, 吉.]”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 황만기 (역)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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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參判文公掌令文公兩先生墓碣銘幷序。
昔我中廟朝。靜庵趙先生。得君行道。引進一時名賢。共圖文治。時則有若參判文先生諱瑾字士輝。掌令文先生諱瓘字伯玉兄弟。與趙先生志同道合。協恭和衷。不幸己卯歲。掌令公以疾卒。自上震悼。命賜棺槨殮具及喪資。而趙先生護其喪。一時哀榮極矣。未幾。北門禍作。參判公時爲慶尙左監司。適與右監司李沆會飮。報至。沆宴樂自如。公卽入寢房。慘然不樂。一夜間鬚眉爲白。俄報罷。辛巳。拜刑曹參判。又劾罷。遂廢錮而卒。先是。掌令公葬于醴泉郡西知滿山午向原。至是參判公卒。葬于其傍麓同坐向焉。嗚呼。壬辰亂。文氏闔門被禍。一家書籍蕩失。兩先生言論風旨。無所尋逐。姑以一二傳信文字言之。參判公中弘治壬子司馬。丙辰文科。由承政院注書。歷禮兵曹佐郞,司諫院獻納弘文館修撰,吏曹佐正郞慶尙左監司,刑曹參判。中間履歷多不傳。掌令公中戊午進士。丁卯文科。由承文院權知副正字。歷藝文館檢閱待敎奉敎成均館典籍,兵戶曹佐郞安陰縣監兵曹正郞司憲府持平,刑禮曹佐郞,司諫院獻納,掌樂院僉正奏請使書狀官宗簿寺僉正,司憲府掌令。此兩先生履歷大槩也。參判公孝友出天。資性剛直。人之爲不善者。必曰恐文先生知也。趙先生嘗於榻前。稱文某純直有古人風。其被諸賢賞識如此。始與趙先生同進用。終與趙先生同被禍。後學稱公爲己卯名賢。而金相國堉脩己卯錄。始補入焉。掌令公篤學力行。愼重寡默。再入憲府。朝行肅然。出宰百里。其淸風儉德。與一蠹鄭先生竝稱。及其卒也。趙先生始終躬庀事。蓋志同道合而然也。此兩先生德行大槩也。西厓柳先生。嘗惜兩先生志行無傳。而龍城士子方營建賢祠於鄕社。其遺風餘韻。亦可想像興起於千百載之下矣。文氏籍甘文。三韓壁上功臣。諱多省之後。自是世襲軒冕。高麗時。平海郡事諱載道。有孝行旌閭。生諱龜。官至政丞。曾祖諱孫武。生員贈左通禮。祖諱崇質。贈戶曹參議。考諱傑。贈吏曹參判行襄陽府使。妣貞夫人星州李氏。大司成諱文興之女。有淑行。訓二子以義方。終至立揚焉。參判公配貞夫人幸州奇氏。一子弘壽。生一子。山斗有三子。皆無後。只有孼派。起明,應明。皆武科。外裔卞,朴,許三姓。有子孫。掌令公配令人羽溪李氏。縣監諱大根之女。生二子。曰弘弼。敬陵參奉。曰弘輔。忠毅校尉。庶子曰弘順。參奉。有二子。經世,經濟。雲仍甚衆。參奉曾孫前別提宇量。倡率宗人。營立一碣于兩先生墓間而文之。能追遠以及旁親。世罕有也。其胤曰碩珪。狀兩先生行蹟者。銘曰。
帝悶吾東。聖神應期。重煕累洽。蔚啓文治。必有名世。靜庵挺生。野無遺賢。茅拔彙征。伯壎仲箎。甘文兩賢。協恭和衷。羽儀聯翩。天將喪文。螮蝀干日。時事一變。吾道之厄。高風已遠。典刑猶存。有儼賢祠。無愧碑文。醜跡煙消。芳躅日皦。萬世在後。敢以銘詔。<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