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는 은가루를 담은 쟁반이다. 잔잔한 물결이 햇빛에 반짝거린다. 지난밤 한줄기 장마가 지나간 탓일까. 폭풍이 지난 뒤의 고요함인가. 폭풍 전야의 고요함인지 너무나 잠잠하다. 바람이 일지 않은 탓인지 갈매기도 부력을 받지 못해서 날지 않는 듯 하늘에는 갈매기도 보이지 않는다. 연안 여객선이 한려수도(閑麗水道)를 향해 미끄러져 나간다. 포구를 벗어난 배는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유유히 목적지를 향해 뱃머리를 잡았다. 사방에 옹기종기 널린 섬들은 초가 지붕 위의 조롱박처럼 손에 손을 잡고 있는 연이은 모습이다. 이름하여 한려수도다. 그 누가 푸른 바다라 했는가. 바다는 푸르다 못해 먹물을 풀어놓은 듯 검다. 어느 글에서 ‘검푸른 바다’라고 표현한 문장이 떠올라 고개가 끄덕여 졌다.
조용히 숨 고르기를 하는 바다를 달리는 여객선이 너무나 단조롭다. 배를 탈 때의 스릴은 롤링보다 핏칭이 커야한다. 산더미 같은 파도는 아니더라도 작은 집채만한 파도라도 밀려와야 그 파도를 넘기는 핏칭에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여름날 해수욕장에서 파도를 타본 쾌감을 알 것이다. 구명대에 몸을 끼워 바다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휘감아 타는 맛, 물 속에서도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그런 맛을 잔잔한 파도 때문에 스릴과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쉽다. 햇빛에 반사되는 수평선은 한 줄의 은빛 목거리같이 반짝인다. 물결이 뱃전에 부딪쳐 갈라지면서 하얀 포말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흩어진다. 따라오는 뱃길 자국이 밀려드는 물결로 포말과 함께 삼켜버린다. 그 광경을 보는 사람들이 괴성과 같은 탄성을 지른다. 너무나 감동적인 광경이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도 표현 할 수 없는 예술품을 만들어 내는 포말이다. 조그만 섬을 배경으로 부서지는 모습에 자신도 모르는 탄성이었으리라. 남해의 작은 섬 연화도를 향해 유람선은 기분 좋은 듯 춤을 춘다. 연화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연꽃처럼 생겼다는 전설을 품은 섬이다. 선장의 설명에 그런가 보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호기심이 더해 갔다. 섬 정면에서 보이는 모습은 그저 평범한 산 일뿐 연꽃 모양인지 알 수가 없다. 하늘에서 내려다 봐야 연꽃처럼 생겼는지 알 수 있겠지만 지금 그런 건 중요하지가 않다. 무궁화 꽃 같은 무궁도면 어떠랴. 지나치는 작은 바위섬의 기암절벽의 모습 앞에서 토해내는 감탄사를 삼킬 듯이 기적이 울었다. 연화도 도착을 알리는 기적이다.
연화도 선착장에서 십분 정도 거리에 있다는 연화사를 찾았다. 대웅전 앞에 섰다. 정면 바다를 바라보니 먼바다 위에는 대형 상선과 배들이 지나간다. 방금 포구에서 떠나는 쾌속 여객선이 물살을 가르며 쏜살같이 달려가는 모습이 아침마다 등교시간이 늦어 허둥대며 나가는 아들의 모습 같았다. 배들이 다니는 남해를 바라보면서 어릴 적의 꿈이 떠올랐다. 그 당시 외국 영화에서 한번 본 파이프 옆으로 꼬나 물고 수평선을 바라보는 선장이 너무 멋있었다. 간혹 망원경을 쳐다보며 조타기를 돌리며 항해하는 선장을 동경했다. 수업 시간에 해양대학 출신인 담임선생님의 원양 어선을 탔던 이야기가 한 몫 했었다. 키를 잡은 선장의 모습을 연상하며 마도로스가 되려 했던 꿈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하찮게 생각하는 다보탑이 우뚝 서있는 십원 동전 네개를 잃어버린 세월이 지난 기간이다. 어릴 적 그 꿈이 실현되었더라면 오늘 선장처럼 이렇게 바다 위를 떠돌아다닐 것이라 생각하니 얼핏 쓴웃음이 나왔다. 어린 시절 잠시 지나가는 꿈은 이룰 걸 못된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다. 그 시절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되살아 난 꿈을 회상하며 연화도를 떠날 때는 선장실에 들어가 선장의 눈치를 보면서 여러 가지를 물었다. 이 배는 몇 톤이며, 지금 속도는 얼마로 달리며, 가격은 어느 정도냐고 초등학생이 수학여행길에 질문하듯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내 위아래를 바라본다. 자기 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웬 뚱딴지같은 질문을 퍼붓느냐는 듯, 간간이 응답을 해줬다. 30톤이며, 지금 속도는 육지로 말하면 시속 40킬로미터로 운항중이며, 가격은 약 5억원 정도라고 답했다.
좌우 산세를 돌아 봤다. 산들이 연꽃 모양으로 절 주위를 에워싸고 있다. 얼핏 줏어들은 풍수 용어로 ‘연화 부수형(蓮花浮水形)’ 이다.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듯 한 형태다. 사명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전설이 담긴 연화사 법당에 들어섰다. 나도 모르게 두 손 모아 삼배를 올렸다. 법당 문을 나와 소금기 머금은 해풍이 뺨을 때리듯 얼굴을 스쳤다. 순간 내가 왜 여기에서 삼배를 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돌아오는 배 안에서 내내 생각에 잠겼다. 통영의 연안 여객선 터미널을 빠져 나왔다. 세시간동안 고도에 유배되어 갔다가 방면되어 돌아온 기분이다. 삼배를 올린 이유가 살아갈 날 들을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기원한 부끄러운 마음이 들켜버린 것 같다.
태양도 서산 넘어 귀가를 재촉하고 해 그림자가 길게 누워있다. 하루가 더 저물기 전에 우리도 돌아가야 한다. 버스가 몹시도 숨가쁘다. 태양도 집에 두고 온 미련 때문인지 바쁜 듯이 계속 버스를 따라 온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고속도로 휴게소에 머물렀다. 순간을 이용해 몸 속에서 머물며 참았던 불필요한 것들을 배설해야 한다. 남성 전용 칸에 들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배설의 쾌감을 느끼며 돌아섰다. 순간 깜짝 놀랐다. 술이 취해 실수로 잘못 들어 왔나?. 그럴 리가 없다. 방금 일을 처리한 곳이 남성 전용 칸이 아닌가.
“아주머니 여기는...남자용...”
“아저씨요 요즘 세상에 남자용 여자용이 어디 있능교...바쁜데...“
하며 뛰어 들어갔다. 그 뒤를 이어 터진 봇물처럼 우르르 몰려 들어와 빈칸을 향해 모두가 들어갔다. 옆의 여성용이 모자라 급한 나머지 남성 전용 영역을 침범한 것이다. 남성 전용 영역에는 그곳이 필요 없으니 남을 수밖에는, 버스에 올랐다. 나를 알아 본 그 아주머니가 그제야 부끄러운지 변명을 하듯이
”남자용은 두 가지나, 설치 해 놓고... 그것도 숫자도 많게 만들어 놓고...
“앞으로는 남녀 구분 없이 공용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남녀를 구분하는 성역(性域)을 무너뜨리는 소리요. 외침이다. 남녀 공용 시대가 이렇게 열리는가 보다.
퇴근 후 언제나 저녁 운동을 나선다. 길을 지나치다가 ‘헤어 샵’이라는 유리벽 안을 볼 때가 있다. 어느 날 우연하게 바라본 유리벽 안의 풍경에 놀랐다. 긴 벤치에서 남자들이 잡지책을 뒤적이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다. 희한한 세상이다. 갑자기 ‘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문구가 언제 사라 졌는지 궁금해진다. 세상 많이 변했구나 하며 의아스러웠다. 남자들이 여성 전용인 미용실에서 떳떳하게 기다리는 세상이다. 이용소를 하는 이발사들이 남성들은 이발소에서, 여성들은 미장원에서 할 수 있도록 행정당국에 건의 할 만도 하다. 남성 전용이었던 군대도 이미 여성에게 개방되어 여성 전용 영역이 되어간다. 곳곳에서 남성 전용과 여성 전용 구역이 무너지고 있다. 남자 전용 학교도 남녀 공학으로 변하고 있다. 공중 목욕탕 입구에 남탕, 여탕의 안내판이 언제 없어질지 궁금하다. 이 시대에 남녀를 경계짓는 성역(聖域)이 아닌 성역(性域)이 무너지는 것이 시간 문제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성균관 유림들이 호주제 폐지 반대를 들고나섰다. 엄연한 남성 위주의 호주 제를 기필코 지켜야 한다는 이 시대 마지막 유림들이다. 뉴스 화면에 반대하는 유림들의 얼굴들이 아른거린다. 그들의 이세들 중에 딸들이 없는지? 그들의 딸들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남녀 性域을 무너뜨리자고 외치는 모습이 반대를 외치는 아버지의 얼굴과 오버랩 되어 어른거린다. 이 오버랩을 과도기라 할까. 카메라맨은 이 광경을 길게 서서히 아주 길게 끌었으면 한다. 아직은 성역(性域)이 무너지면 안 된다. 그대로 성역(聖域)으로 두어야 한다. 엄연히 남자는 남자요, 여자는 여자다. 이런 내가 골샌님일까.
조간 신문을 펼쳤다. 마침 서울에서 열리는 여성 유엔 총회인 ‘세계 여성학 대회’가 열리고 있다. 신문의 타이틀이 ‘남녀 성(性)경계 무너지면 여성 할 일 뭔가’ 라는 원제목이 크게 부각되어 있고, 아래에 이렇게 쓰여 있다.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고발보다는 공존의 개념에 방점을 찍었다”. 공존의 개념이라면? 성역(性域)이 무너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래저래 21세기는 여성의 시대가 펼쳐지는가 보다. ‘암탉이 우면 집안이 망한다’는 우리 속담이 함께 사라지려는가 보다.
첫댓글 聖域을 性域으로 쓴 줄 알고..... 남녀의 성역이었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