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에 궂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기분이 차분해진다. 남으로 가면서 비는 잦아들고 망향 휴게소 앞산에는 안개꽃이 피어 올랐다. 들판엔 나락이 익어 가나 추수하기는 이르다. 추석이 낼 모레다. 햅쌀로 조상을 모신다는데 어찌 해야 하나. 아직은 고구마나 콩밭이 짙푸르기만 할 뿐 무르익진 않았다. 넓고 푸른 만경강을 지나니 바로 군산이다. 만경평야겠지, 평화로운 전경이 펼쳐졌다. 어느 순간 나타난 부안 김제 줄포 법성포, 고창이란 이름이 반갑다. 고창은 복분자와 풍천장어가 유명하다. 가을이 짙어가는 길목에 여기에 왔다.
도솔산은 선운사가 유명해지면서 선운산이 되었다. 도솔암과 절 입구 일주문에 도솔산 선운사라고 적혀 있어 명백을 유지한다. 서정주의 ^선운사 동구^라는 시는 잘 알려져 있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시인이 찾아간 계절이 초겨울쯤 되지 않았을까. 우린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가는 게 아니다. 선운산 산행이 주 목적이다. 선운사 뒷편 동백 군락은 가을 햇살에 비쳐 싱싱함을 뽐내고 있다. 동백꽃이 피지 않은 산에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고 갈잎만이 산등성이에 낙엽이 되어 뒹굴었다. 다섯 시간 남짓을 걸었다. 선운사 마이재 수리봉 참당암 소리재 낙조대 천마봉 도솔암으로 내려 오는 코스다. 등산로가 그만하면 잘 닦여 있다. 선운산은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산 능선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 위에서 본 선운사 전경, 낙조대 풍경만으로도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 만하다.
그리워하면서도 만나지 못하다가 병이 생겨 상사병相思病에 걸린다. 요샌 들어보기 힘든 말이 되었다. 꽃과 잎이 평생 서로 사모하기만할 뿐 만나지 못한다 하여 상사화다. 꽃은 잎을 보고 싶어 하고 잎은 꽃을 보고 싶어 해도 이루어 지지 못하는 운명적 사랑이다. 상사화나 이와 비슷한 꽃무릇 군락지로 영광 불갑사와 고창 선운사가 유명하다. ^들어 가지 마시오^란 경고 글이나 ^꽃무릇 창작시 공모전^이란 플래카드가 무색하게 거의 꽃대도 내밀지 않았다. 날씨가 시원해져야 꽃이 피기 시작한단다. 그나마 겨우 상사화 몇 송이를 사진으로 찍었다.
몇 년전에도 영광 불갑사와 고창 선운사로 상사화와 꽃무릇을 보러 두 부부가 왔었다. 오늘은 두 여자가 빠졌다. 그때 일품이던 대웅전 앞 배롱나무가 끝물인 양 비루먹은 말같은 꽃들을 달고 있다. 땀으로 옷들이 흠뻑 젖었다. 덥긴 더웠다. 선운사 계곡 윗물은 말랐어도 아래 개울물은 여물어 간다. 가을이 익어간다. 풍경이란 음식점에서 복분자 막걸리와 장어탕을 먹었다.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백이 소리는 없을지라도 흥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