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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관심
㉝예수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했다
올리브산에서 예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걸음을 멈추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예수는 멈추었다.
걸음을 멈춘 예수는 무엇을 했을까. 그 갈림길에서 예수는 어떤 일을 했을까. 예수가 택한 답은 무척 뜻밖이었다. 그는 ‘기도’를 택했다. ‘하늘의 뜻’을 묻기로 했다.
2000년 전 예수가 땀을 피처럼 흘리며 기도헀다는 겟네마니 동산의 올리브나무. 예수 당시에 있었던 올리브 나무의 씨앗이 떨어져서 자란 후손이다. 그러니 저 나무의 조상은 예수가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터이다. 백성호 기자
밤이 꽤 깊지 않았을까. 예수가 기도하는 동안 제자들은 모두 잠에 취해 곯아떨어졌다. 예수가 몇 차례나 “깨어 있어라”고 당부했지만, 그들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의 갈림길’을 공유하고 있지 않았다. ‘삶이냐, 죽음이냐’ 하는 예수의 절박한 고뇌를 모르고 있었다.
예수는 몸부림쳤다. 실제로 마태오 복음서에는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태오 복음서 26장 38절)라고 기록돼 있다. 예수의 적나라한 심정이다. 루카 복음서에는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22장 44절)고 적혀 있다.
왜 땀이 핏방울처럼 떨어졌을까. 간절했기 때문이다. 혼신을 다했기 때문이다. 그토록 절박했던 예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마태오 복음서 26장 39절)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고, 예수는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루카 복음서 22장 41절) 기도했다. 대략 15m쯤 됐을까. 기도를 하다 돌아와 보면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깨어 있어라”고 당부한 뒤 다시 기도를 하다 돌아와 봐도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죽음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예수는 도망치지 않았다. 올리브 동산에서 달아났다면 십자가 처형을 면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도망가는 대신 하늘의 뜻을 묻는 기도를 택했다. 백성호 기자
예수는 그렇게 세 번이나 기도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하늘의 뜻’을 세 번이나 물었다. 하늘의 답은 분명했다. 제자들에게 돌아온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자고 있느냐? 이제 때가 가까웠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 가자. 보라, 나를 팔아넘길 자가 가까이 왔다.” 하늘의 답은 ‘예수의 죽음’이었다.
겟세마니 동산을 걸었다. 굵직굵직한 올리브나무들이 곳곳에 서 있었다. 우리는 갈망한다. ‘하늘의 뜻’이 언제나 ‘나의 뜻’을 따라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따라줄 때 우리는 또 말한다. “나의 기도가 통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와 예수의 기도는 다르다. 우리의 기도는 나를 키우고, 예수의 기도는 하늘을 키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지 마시고,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기도다.
만약 ‘아버지의 뜻’이 나의 뜻과 다를 때는 어떨까. 우리는 그것을 ‘아버지의 뜻’이라고 받아들일까. 그렇지 않다. ‘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묻지 않는다. ‘아버지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우리는 묻지 않는다. 그 대신 ‘나의 뜻’만 따진다. 내 뜻에 따라 하늘이 움직이기만 바란다.
올리브산에서 내려다 본 예루살렘성의 광경. 산에서 가파른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예루살렘 성전이 나온다. 백성호 기자
그런 우리에게 예수는 몸소 보여주었다. 기도가 무엇인지, 또 기도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 말이다. 예수에게 기도는 ‘하늘의 뜻’을 묻는 일이다. 그 뜻이 나의 뜻과 다를 때는 어김없이 ‘광야’가 펼쳐진다. 예수가 40일간 단식하며 만났던 싸움의 광야다.
그 광야가 나의 내면에 펼쳐진다. 나의 뜻을 따를 것인가, 하늘의 뜻을 따를 것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싸움이다. 예수는 광야에서도, 겟세마니에서도 우리에게 ‘싸움의 방향과 싸움의 기술’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싸울 때 하늘의 뜻이 드러나는지 말이다. 그것이 예수가 몸소 보여준 기도의 진정한 의미였다.
짧은 생각
사람들은 기도합니다.
주로
내 삶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늘에 구합니다.
그런 기도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런 기도에는
치명적 맹점이
하나 있습니다.
자칫하면
나의 성공만 구하는
기복 신앙으로 흐를
우려가 큽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기도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기도하는 걸까요.
기도의 본질적
존재 이유는
과연 뭘까요.
기도의 존재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와도
맥이 통합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온
이유와도
맥이 통합니다.
왜 우리는
기도하는 걸까요.
저는 그게
우리가
하늘과 하나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존재 이유도,
예수께서
이 땅에 온 이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하늘에서 멀어지면
삶이 고통스러워집니다.
그걸 다시
회복하기 위해
예수께서
이 땅에 왔습니다.
인간과 하늘이
다시 하나가 되도록
십자가라는
사다리를
직접 놓은 셈입니다.
그러니
기도 역시
이런 맥락 위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우리가
기도다운
기도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예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왜 그랬을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늘의 뜻을
닮게 되니까요.
그래야
우리가 하늘을 닮고,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
하늘과 하나가
될 테니까요.
그런데
정작 우리는
거꾸로
기도하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아버지 뜻대로 마시고
제 뜻대로 하소서.”
하느님이
내 뜻대로 일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치
하느님이
나의 하인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기도를
계속한다면
나와 하늘의 간격은
점점 더 멀어지겠지요.
그렇습니다.
하늘이
나를 닮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늘을
닮아 가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하늘과
하나가 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기도의 방식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요.
하늘의 뜻을
묻는 식으로
기도하면 어떨까요.
그 뜻을 알고,
내가 그 뜻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나는
하늘의 뜻대로
살게 될 테니까요.
그런 식으로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하늘을 닮아 가고,
하늘과 하나가 되어 갈 테니
말입니다.
예수의 기도를
다시 한번
음미해 봅니다.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
에디터
관심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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