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레의 과거청산 작업과 실종자 문제
우 석 균1) 1. 서론 칠레의 과거청산 작업은 두 가지 점에서 독특한 특징을 띤다. 첫째, 피노체트가 전 세계적으로 유례없을 정도로 확고한 퇴임안전판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과거청산 작업 자체가 태생적 한계를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둘째, 피노체트가 과거사 문제로 기소, 체포, 연금된 곳은 자국이 아닌 외국이었으니 이 역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게다가 피노체트가 비록 석방되어 귀국했지만 그 사건은 칠레 국내의 인권운동을 고무시켜 결국은 그를 자국 법정에 우기에 이르렀다. 전자는 과거청산 작업의 가장 커다란 걸림돌은 기득권층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꼽히고 있으며, 후자는 반인륜범죄에 대한 단죄는 국경을 초월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실현된 본보기로 꼽힌다. 그러나 칠레 과거청산의 두 가지 특징에 대한 이런 일반적인 평가는 많은 점을 간과하고 있다. 우선 피노체트 한 개인에 대한 인적 청산이 불가능했다거나 혹은 그가 마련해 놓은 가시적인 몇몇 퇴임안전판이 과거청산 작업의 결정적인 걸림돌이라고 단정하기는 힘들 만큼 피노체트 시대의 유산이 사회 전반에 광범위하게, 또한 중첩적으로 퍼져 있었으며, 심지어 살바도르 아옌데 집권 이전부터 있었던 보혁 대립의 후유증도 작용하였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또한 피노체트의 국외 체포는 오히려 주권침해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우파를 결집시키고 집권 가능성을 높여 주었으며, 국론분열과 1999년 대선에 대한 우려로 정부가 과거청산 논의를 또다시 서둘러 봉합시키게 만든 부작용을 초래했다. 본고는 특히 칠레 연행실종자 가족모임(AFDD, Agrupación deFamiliares de Detenidos Desaparecidos)의 활동을 바탕으로 칠레의 과거청산 작업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실종자들은 피노체트 쿠데타의 최대의 피해자였다. 이는 1990년 민주화 이후 정부 주도로 설치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Comisión Nacional de Verdad y Reconciliación)’의 주요 조사 대상이 ‘실종자와 정치적 처형자’이며, 1994년 산티아고 시립 공동묘지에 건립한 추모벽 역시 ‘실종자와 정치적 처형자’라는 점에서 잘 알 수 있다. 게다가 실종자 사망 경위나 시신 발굴 문제는 그 누구도 풀기 힘든 난제라서 칠레 과거청산 작업이 어느 정도 완수되었는지를 잴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도 하기 때문에 실종자 문제가 특별한 관심을 끈다. 실종자 문제를 둘러싸고 야기된 수많은 쟁점은 과거청산 작업이 그 윤리적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를 잘 보여준다. 가령, 실종의 책임을 해당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에게 물어야 하는지 아니면 쿠데타에 가담한 모든 집단에게 물어야 하는지, 1978년에 제정된 사면법이 초법적이므로 무효화시키는 것이 당연하지 아니면 일단 공포되고 그에 따른 판례까지 이미 있는 마당에 사면법을 폐기하는 것이 초법적 발상인지, 스페인의 요구로 영국에서 피노체트 체포된 일이 주권 침해인지 아니면 반인륜범죄 책임자에 대한 당연한 단죄인지, 실종자 가족의 요구처럼 모든 실종자에 대한 개별적인 사망경위 조사, 사체 발굴, 가해자 규명과 처벌 등이 이루어져야 하는지 아니면 개별적인 조사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피노체트를 비롯한 쿠데타 주축 세력과 정보부 요원에 대해 일괄적인 단죄로 실종자 문제를 마무리해야 하는지, 현실 정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실종자 가족모임이 정치적 성향을 띠어야 하는지 아니면 모임의 순수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나은지, 가장 심각한 피해자인 실종자 문제를 먼저 처리하는 것이 정의구현에 한발 더 다가서는 것인지 아니면 실종자들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의 역량을 민주화에 집중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인지, 실종자 문제가 전체 칠레 국민 입장에서 과연 소수의 문제인지 아니면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저버린 국가의 신뢰 회복이 달린 중차대한 문제인지 등등의 쟁점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2. 연행실종자 현황 연행실종자(detenidos desaparecidos)는 군이나 비밀경찰 혹은 경찰군(carabinero)에 의해 연행된 뒤 생사를 알 수 없거나, 이들이 고의적으로 은폐한 시신이 한 달 이상 지난 후에 발견된 이들을 총칭하는 말이다.2) 연행되어 살해된 후 그 시신이 공공연히 거리에 버려진 경우나 시신을 은폐했다 하더라도 한 달 이전에 발견된 경우는 정치적 처형자(ejecutados políticos)로 분류된다. 쿠데타 이후 연행실종자와 정치적 처형자 그리고 공식적으로 실종 원인이나 사망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이의 수는 약 3,000명에 달한다. 빠디야 바예스떼로스는 연대사목회(Vicaría de la Solidaridad)와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의 각각의 통계 및 레띡 보고서(Informe Rettig)라고 불리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Comisión Nacional de Verdad y Reconciliación)의 통계를 토대로 연행실종자 수를 1,193명으로 잡고 있다. 연령별로는 20대와 30대가 전체의 약 49%, 직업별로는 농민, 노동자, 학생이 전체의 약 70%, 정당별로는 공산당, 사회당, 좌익혁명운동(MIR)이 전체의 약 62%, 지역별로는 수도권 지역의 실종자 수가 전체의 약 53.22%를 차지하고 있다. 특기할 만한 것은 연행실종자가 쿠데타 직후에만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1974년 이후의 실종자 수도 무려 47%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대부분은 1974-1976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피해자가 청년층, 민중 계층, 좌익, 산업화 지역인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쿠데타 직후가 아닌 시기에도 실종자가 양산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조직적인 탄압에 의해 실종자가 발생했음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빠디야 바예스떼로스의 통계에 따르면 실제로 1974년에서 1976년 사이에 실종의 약 65%는 일종의 비밀경찰인 국가정보국(DINA, Dirección Nacional de Inteligencia)에 의해 자행되었다.2)
3. 군부독재 시기의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의 결성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1976년에 결성되었다. 1992년까지는 연대사목회의 지원으로 산티아고 대성당에 본부를 두었으며, 연대사목회가 해산된 이후에는 FASIC이라는 각 종교 단체 연합회의 지원으로 사무실을 계속 운영하였고, 현재는 2001년 저항 가수들의 공연 모금으로 마련한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다.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의 운영은 자원봉사자들이 담당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이 연행실종자의 가족이다.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의 결성은 1976년에 이루어졌지만 실종자 가족들은 이미 쿠데타 직후부터 개별적으로 실종자들을 수소문하고 다녔으며 사법부에 실종자들을 보호해 달라는 청원(recurso de amparo)을 넣기도 했다. 실종자 가족들이 공동으로 실종자 문제를 협의하게 된 것은 평화를 위한 위원회(Cómite para la Paz)가 설립되면서부터이다. 이 위원회는 연대사목회의 전신으로 연대사목회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이 쿠데타 이후의 인권침해를 감시하고 고발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평화를 위한 위원회에 실종자 문제를 호소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로의 아픔을 나누던 실종자 가족들은 1975년 소위 119명 명단이 발표되면서 실종자 문제를 공동으로 협의하기 시작했다. 119명 명단이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잡지가 좌익무장단체의 내분과 유혈충돌이 발생했다는 기사를 실으면서 밝힌 사망자 명단이다. 이들이 바로 실종자들이었다. 훗날 꼴롬보 작전(Operación Colombo)이라고 명령된 이 사건은 사실은 DINA가 조작한 것이다. 문제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잡지는 그 기사가 실린 호만 발간된 유령 잡지였다. 또한 실종자 명단 중에서는 칠레 군사평의회가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은 인물도 실수로 올라갔으며, 뿌충까비 형무소에서는 그 실종자들과 같이 구금, 고문당한 적이 있다며 DINA의 살해 의혹을 제기한 33인의 수감자들이 단식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실종자 가족들은 그들의 힘을 좀더 조직적으로 결집할 수 있을 단체의 설립을 모색한 끝에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을 만든 것이다.
4.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와 과거청산의 한계 1983년의 경제위기로 사회적 불만이 표출되면서 칠레 민주화는 중요한 전기를 맞이하였다. 경제위기가 극복된 이후 칠레 경제의 거시지표는 라틴아메리카 국가 중에서 제일 양호한 것으로 평가되었지만 1983년에 분출된 사회적 불만은 그와 상관없이 민주화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1988년 10월 5일 피노체트의 집권을 8년 더 연장하는 안을 놓고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반정부 세력은 승리를 거두었고, 이듬해 12월 꼰세르따시온의 단일 후보로 나선 빠뜨리시오 아일윈은 군부에서 대리인으로 내세운 비시에게 무난히 승리를 거두었다. 1990년 3월 집권한 아일윈은 많은 나라가 민주화 이행기에 흔히 겪듯이 군부정권과의 관계 정립 문제로 많은 제약에 부딪혔지만 2년 연속 선거를 통해 국민의 여망을 확인한 덕분에 전격적으로 과거청산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통령령으로 설치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가 과거사에 대한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1)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의 활동 라울 레띡(Raúl Rettig)을 위원장으로 하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는 1990년 4월 25일부터 9개월 시한으로 1973년에서 1990년까지 17년간의 군부독재 치하에서 벌어진 심각한 인권유린 사례 조사에 착수했다. 60여명의 인원이 투입되어 4,000건 이상의 진정 사건을 조사한 위원회는 이듬해 2월 소위 레띡 보고서(Informe Rettig)라고 불리는 보고서를 아일윈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보고서는 4,000건의 진정 사건 중 3,000건을 조사하였고 그중 2,025건이 국가기관에 의해 자행된 인권범죄라고 판정하였다.3) 그러나 레띡 위원회의 활동은 분명 미흡한 수준이었다. ‘진실과 화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처음부터 위원회의 목적은 진상규명을 통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자는 것이었으며 이에 따라 은연 중에 화해를 강조하였다. 즉, 가해자를 처벌할 의사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진상규명도 미흡했다. 물론 증거 부족 탓에 모든 진정 사건에 대해 명확한 판정을 내리기 힘들었다는 애로사항이 있었지만, 문제는 보고서에 가해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즉 어느 국가기관이 인권유린에 개입했는지, 또 해당 기관의 누가 책임이 있는지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또한 사망이나 실종 사례만 조사했을 뿐 고문에 따른 후유증 등은 조사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진실 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열린 것도 아니어서 조사 과정의 투명성을 검증받은 것도 아니었다. 레띡 위원회의 활동과 보고서는 인권문제에 있어 분명 중요한 한 획을 그은 것임은 틀림없지만 희생자 가족들의 기대에는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다. 3월 4일 대통령이 TV에 출연해 위원회의 보고서에 대한 대 국민담화를 했을 때 아일윈은 국가를 대신해 사망자와 실종자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다. 그리고 과거의 상처를 하루빨리 잊고 미래지향적인 칠레 사회를 건설하자고 호소했다. 하지만 새로운 불씨를 지폈을 뿐이다. 칠레는 피노체트 지지파와 반대파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피노체트 반대파도 아쉽지만 현실적으로 진상규명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는 측과 가해자 처벌 없이 과거를 덮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측으로 분열되었다. 아일윈 정부의 다음 행보는 종결법(Ley de Punto Final)을 입안하는 것이었다. 비록 군부독재 시절 피해자들의 격렬한 시위로 무산되기는 했지만 종결법 입안 의도는 과거사에 대한 사법적 단죄 의지가 확고하지 못함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사망 경위나 가해자를 밝혀내기 더욱 힘든 실종자 문제는 진실규명 작업조차 요원한 일이 되어버렸다. 2) 과거청산 작업의 태생적 한계 그렇다면 과거청산이 미흡한 수준에 머무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가해자 처벌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칠레나 아르헨티나 민주화 과정에 대한 국내외 연구가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대로 민주화 이행기에 새로 출범한 민선 정부는 가해자 처벌이 먼저냐 민주주의 정착이 먼저냐를 놓고 고심할 수밖에 없다. 가해자 처벌은 필연적으로 전임 집권 세력과 그의 지지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고 이를 무릅쓰고 가해자 처벌에 착수할 경우 과거처럼 또다시 쿠데타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우려가 민주주의 정착을 선결과제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이다. 칠레 역시 피노체트가 주도한 쿠데타가 너무나 끔찍한 결과를 야기했기 때문에 과거사가 재연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꼰세르따시온에 참여한 정치가들은 물론 일반 국민 사이에도 널리 퍼져 있었다. 그렇다해도 칠레의 과거청산 작업 수위는 이웃나라 아르헨티나에도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는 칠레의 민주화가 절반의 민주화였기 때문이다. 포클랜드 전쟁의 패배로 지지기반이 완전히 붕괴된 아르헨티나에서조차 알폰신(Raúl Alfonsín)의 뒤를 이어 집권한 메넴(Carlos Menem)이 군부와 타협하면서 가해자를 사면했는데, ‘보호민주주의’ 혹은 ‘위탁민주주의’로 정의될 정도로 민주화 과정 자체가 군부와의 타협의 산물인 칠레의 경우 가해자 처벌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4) 과거청산의 직접적인 장애는 피노체트가 제도적으로 마련해 놓은 퇴임안전판이었다. 피노체트는 이미 1980년 국민투표를 통해 공포한 헌법과 1989년의 국군조직법을 통해 군 통수권을 장악했다. 1998년까지 전군 참모총장 직을 유지할 수 있을 권리를 획득했고, 대통령이 군 문제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아일윈은 물론 그의 후임 대통령인 프레이(Eduardo Frei Tagle)는 군 통수권이 없는 반쪽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피노체트 자신이 종신 상원의원이 될 권리가 있었고, 심지어 퇴임 전에 상원의원의 1/5을 지명할 권리를 행사했다. 그가 지명한 1/5의 상원의원과 우파 상원의원을 합치면 자연스럽게 개헌저지선이 확보되는 셈이다. 실제로 1995년 프레이 대통령이 시도한 헌법 개헌은 근소한 차이로 수포로 돌아갔다.5) 헌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피노체트는 군 통수권은 물론 상원의 1/3에 해당하는 지분을 행사하는 강력한 실세였으니 가해자 처벌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피노체트를 위시한 쿠데타 세력의 건재나 그들이 남긴 제도적 유산만이 과거청산의 걸림돌은 아니었다. 아옌데의 집권이 멀리는 1920년대, 가깝게는 1950년대 이후의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된 계층의 경제적 불만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한 결과였듯이, 피노체트에 대한 지지 역시 경제적 요인이 작용하였다. 피노체트는 냉전체제 하의 국가안보론에 입각한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발본색원 작업을 1976년까지 수행한 후 1977년 차까리야 강령(Plan de Chacarilla)에서 공표한 대로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을 칠레에 도입, 비교적 일관된 정책기조를 유지하며 순조롭게 경제 운용을 하여 퇴임 무렵의 각종 거시경제 지표는 매우 튼실하였다. 피노체트 지지자 중에 우파 정치인, 군부, 기업인은 물론 안정적 경제성장의 수혜자가 된 일부 중산층도 있었다는 점은 결코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1973년부터의 각종 경제 지표를 살펴보면 피노체트 재임 기간 중의 실질 성장률은 미미한 것이라는 지적이 있고 빈곤층은 오히려 증가하였다. 하지만 1980년대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극심한 경제위기를 겪은 여타 라틴아메리카 국가와 비교하면 확실히 피노체트의 경제 성적표는 돋보이는 것이었다. 1993년에는 아시아의 ‘네 마리 용’과 비견될 정도로 호황 국면에 접어들어 ‘칠레의 기적’이라고까지 불리게 된 칠레 경제를 피노체트의 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상 피노체트 단죄는 거센 저항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피노체트의 지지기반은 1958년, 1964년, 1970년의 대선 결과가 증명하듯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것이었다. 피노체트의 지지기반인 우파는 1958년과 1970년은 3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고 1964년에는 캐스팅보트를 행사하여 기독민주당(DC, Democracia Cristiana)의 에두아르도 프레이(Eduardo Frei Montalva)6)를 당선시켰다. 또한 이미 쿠데타 이전부터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된 극심한 보혁 대립이 쿠데타와 피노체트 집권 기간 중에 자행된 각종 범죄를 심각한 인권 유린 사례로 보지 않게 만든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기독민주당의 집권으로 좌․우파의 갈등이 완화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오히려 심화되었다. 이는 기독민주당 주도의 일련의 개혁 정책이 한편으로부터는 너무 가혹하다는 불만을, 또 한편으로부터는 너무 미온적이라는 불만을 샀기 때문이다. 칠레 사회의 양분화는 1973년 국회의원 선거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아옌데의 인민연합(Unidad Popular)은 48.1%의 지지를 얻었고, 기독민주당과 우파 제 정당이 제휴한 CODE는 49.9%의 지지를 얻었다.7) 이 대립은 선거라는 메커니즘까지 무시하게 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가령 1973년 9월 11일은 아옌데가 재신임을 묻는 중간국민투표 실시를 공포하려 했던 날임에도 불구하고 군부가 쿠데타를 감행했다는 점이 그 좋은 예이다. 사회학자 또마스 물리앙은 당시의 대립이 이념적인 수준을 넘어 상대방을 일종의 ‘악의 축’으로 규정하는 수준으로까지 치달았다고까지 해석한다.8) 즉, ‘쿠데타가 아니라 내전이었다’는 피노체트 측의 주장은 적어도 우파 지지자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상당수 중도파 인사들마저 좌우 갈등의 심화로 인해 쿠데타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프레이의 태도가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프레이는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날 쿠데타가 일어날 것이라는 확실한 정보를 입수했지만 평소의 소신에 따라, 헌정 질서를 유지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 소신이란 칠레는 공산당 독재냐 군부 독재냐 하는 기로에 서 있으며 소련의 지령을 받는 공산당 독재보다는 최소한 국가적 정체성을 유지할 군부 독재가 차라리 낫다는 것이었다.9) 이에 따라 기독민주당은 베르나르도 라이튼(Bernardo Leighton) 등 몇몇 간부들 이외에는 쿠데타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하지 않았다. 기독민주당은 1983년부터 적극적인 반피노체트 운동을 펼쳤으며 꼰세르따시온의 최대 주주로서 아일윈과 에두아르도 프레이 따글레(Eduardo Frei Tagle)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지만 쿠데타의 불가피함에 대한 인식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는 볼 수 없으며, 이는 전통적인 기독민주당 지지층이나 꼰세르따시온 지지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 지지자들이 피노체트의 연임을 좌절시킨 1988년 국민투표에서 55%의 거부자 군에 속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과거청산의 당위성 자체가 일반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5. 실종자 문제의 실종 국민투표, 민선정부 수립,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의 활동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요약하자면 결국 피노체트의 강압적 통치 스타일에 염증을 느끼고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람이 다수였기는 하지만 과거청산을 반드시 해야 된다는 목소리는 오히려 소수였다고 볼 수 있다. 피노체트가 여전히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꼰세르따시온이나 일반 국민의 관심사는 성공적인 민주화가 가능한가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는 분명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으로서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였다. 특히 민주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될 무렵인 1984년에서부터 1989년의 대선에 이르기까지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당시의 야권 정당로부터 지지의 대가로 실종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약속을 문서로 받았기 때문에 레띡 보고서나 그 이후의 종결법 입안 시도 등은 커다란 좌절감과 배신감을 안겨주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부터 이런 결과를 예측한 사람들도 있었다. 가령 스페인인으로 아옌데의 보좌관으로 활동했으며 훗날 1996년 스페인에서 시작된 피노체트 기소 작업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앙 가르세(Joan Garcé)는 이 위원회가 사실상 과거사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10) 위원회 설치령 2항에는 위원회에 사법적 권한도 없을 뿐더러 조사 결과가 사법적 목적에 이용되어서도 안 됨을 분명히 했다. 또한 위원 8명 중 절반이 우파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결국 실종자 문제가 실종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의 조사에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이 큰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법부를 신뢰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법적으로는 도저히 실종자 문제를 다룰 수 있을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피노체트 집권 시기 동안 실종자나 구금자의 보호를 위해 사법부에 5,000여건의 보호 청구를 내었지만 단 4건만 받아들여졌을 뿐 모두 기각된바 있다. 또한 1978년 군사평의회는 국회가 여전히 해산되어 있는 상태에서 포고령 2,191호를 통해 1973년 9월 11일부터의 모든 인권침해를 문제 삼지 않게다는 사면법(Ley de Amnistía)을 공포하였다. 사면법의 존재로 피노체트 통치 기간 중에는 어떠한 형사 소추도 불가능했다. 실제로 롱껜(Lonquén) 사건의 재판 결과가 그러했다. 롱껜 사건이란 1978년 12월 산티아고 인근의 작은 마을 롱껜의 폐광에서 17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불거진 것이다. 모두 1973년 쿠데타 직후 인근 마을 파출소에 연행되었다가 실종된 사람들의 시신이었다. 군사평의회는 이때까지 실종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입장이었으나 시신이 발견된 이후 실종자의 존재를 처음 인정하였다. 다만 내전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죽음이며 사체 방치였을 뿐이라고 강변하였다. 그러나 사건의 파장이 워낙 컸기 때문에 일련의 조사를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특별 검사가 임명되고 조사와 재판이 진행되었다. 피고들은 실종자들을 앞세워 불법무기 수색에 나섰다가 게릴라의 습격으로 그들이 사망했고, 자신들이 죄를 뒤집어쓸까봐 시신을 유기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종자들 중 총상을 입은 이가 둘밖에 없었으며 기습을 받았다면서 실종자들만 죽었다는 사실이 설득력이 없다는 점을 들어 재판부는 피고 측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피고들은 결국 사면법에 의거해 사면되었다.11) 사면법은 민주화 이후에도 과거청산의 결정적 걸림돌이었다. 1995년 DINA의 총책임자와 제2인자인 꼰뜨레라스와 에스삐노사에 대한 유죄 선고가 1978년 이전의 범죄를 단죄한 유일한 경우였다. 그러나 불법구금, 고문, 살인, 실종 등 DINA의 모든 범죄의 책임자인 두 사람의 처벌은 미국의 외교적 압력 때문이었을 뿐이다. 두 사람은, 아옌데 시절의 주요 각료로 미국으로 망명한 오를란도 레뗄리에르(Orlando Letelier)와 그의 미국인 여비서를 워싱턴 한복판에서 차를 폭파시켜 암살한 사건의 책임자였다. 따라서 두 사람에 대한 사법적 단죄는 예외적인 경우였고 그밖의 1978년까지 인권유린 사례에 대한 처벌은 사실상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었다. 민정 이양 후 8년간, 즉 피노체트가 런던에서 체포된 1998년까지 과거사 문제로 처벌 받은 사람은 꼰뜨레라스와 에스삐노사를 비롯해 14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면법은 가해자 처벌을 근본적으로 봉쇄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진상규명에도 걸림돌이 되었다. 어차피 사면될 사건을 검찰이 성의 있게 조사할 리가 없었을 뿐더러 사면법의 존재로 인해 모든 실종 사건이 사실상 종결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사면법 자체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 하였다. 우선 사면법의 존재는 군정 기간 중에 범죄 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범죄 없는 곳에 사면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사면은 죄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확인된 이후에 취해지는 법적 조치인 만큼 사법부는 물론이고 정부도 진상규명에 노력할 것을 촉구했다. 나아가 사면법이 초법적 조치임을 주장했다. 쿠데타 이후의 범죄의 상당수가 군사평의회 시절에 자행된 것인데 군사평의회 자신이 발의한 사면법은 죄를 지은 자가 스스로를 사면하는 법을 만든 초법적 조치라는 것이다. 또한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모든 실종 사건이 개별적으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하고 또한 개별적으로 가해자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인권은 결국 개개인의 권리이므로 사면법을 통한 일괄 사면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12)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의 이런 주장은 여러 가지 점에서 쟁점의 소지가 되고 있다. 먼저 사면법 자체가 초법적인지 사면법을 무효화시키자는 주장이 초법적 발상인지가 문제가 되었다. 가령, 사면법을 반포한 군사평의회의 4인방이 죄인이라는 판결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사면법을 무효화시킨다는 발상 자체가 초법적이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또 롱껜 사건의 당사자들이 이미 사면된 지금 사면법이 무효화되면 그들을 다시 재판할 수 있는지 혹은 일사부재리 원칙에 따라 당시의 판결을 존중해야 하는지도 문제였다. 또한 인권이 개개인의 권리이므로 반드시 개별적인 조사와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 역시 첨예한 쟁점이었다. 물론 실종자 가족들이 이를 주장한 것은 어떤 법리적 근거에 입각해서라기보다는 사면법과 같은 사례가 다시는 있으면 안 된다는 뜻을 강력히 표명한 것이었다. 즉 실종자의 시신도 찾지 못하고 진상규명도 미흡하고 가해자 처벌도 전혀 논의조차 되지 못한 상태에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의 일괄적 화해 방식의 과거청산이나 아일윈 정부가 발의한 종결법 방식의 과거청산을 경계하고자 함이었다. 이는 곧 개인의 인권이 통치행위나 입법부의 권리와 충돌할 때 무엇이 선행되어야 하는지의 문제나 다름 아니었다. 비록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자국 국민의 인권유린에 대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국가가 소홀히 할 때 과연 국가의 장래가 있을 수 있느냐는 주장을 하지만,13) 국가가 ‘소수’의 실종자 가족을 위해 과거사에 발목 잡혀 다른 국민들의 행복추구권을 소홀히 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는 반론도 제기되었다. 이런 여러 가지 쟁점의 도출은 다시 한번 실종자 문제의 처리를 미궁에 빠뜨렸다. 이런 쟁점들에 대한 뚜렷한 해답이 도출되지 않고 현실적으로 사면법으로 인해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이 국제적 연대를 모색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이 그들의 주장을 처음 국제단체에 호소한 것은 1977년 칠레 주재 유엔 산하 라틴아메리카 경제위원회(CEPAL)에서 벌인 단식농성을 통해서였다. 그 결과 군사평의회가 실종자 문제에 관심을 두겠다는 약속을 유엔 총장에게 하게 되었다.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그 여세를 몰아 처음으로 해외에 대표단을 파견하였다. 대표단은 유엔을 방문하여 칠레 인권상황에 대해 고발했다. 대표단은 귀국하자마자 국외로 추방되었지만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자신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해외에 알리는 것이 효과적인 투쟁 수단임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또한 비슷한 경험을 한 라틴아메리카 각국의 실종자 가족의 연대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하였다. 1981년 코스타리카 산호세에서 개최된 제1차 라틴아메리카 연행실종자 가족대회는 같은 대회를 베네수엘라 카라카스에서 한 번 더 개최하기를 의결했고 베네수엘라 대회는 라틴아메리카 연행실종자 가족협의회(FEDEFAM, Federación Latinoamericana de Asociaciones de Familiares de Detenidos-Desaparecidos)라는 기구를 발족시켰다. 이로써 실종자 문제를 상시적으로 국제여론에 호소할 수 있는 통로가 열린 것이다.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피노체트 재임시의 여러 사건을 반인륜범죄로 몰고 갔다. 그것만이 국내법인 사면법의 저촉을 받지 않고 가해자들을 처벌할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엔 인권헌장, 포로에 대한 처우를 규정한 제네바협약 ―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내전이라고 규정한점을 이용했다 ― 등을 상기시켜 국제여론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피노체트를 반인륜범죄 재판이나 전범재판에 회부할 수 있을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피노체트를 기소하게 되었다. 인권 문제에 있어서 특별한 족적을 남긴 적이 없는 스페인이 과연 재판 관할권이 있는지도 문제가 되었지만, 피노체트 통치 기간 중 살해되거나 실종된 스페인인들이 있고 스페인이 국제법을 준수할 의무가 있다는 판단 아래 기소를 위한 심의에 들어갔다.14)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칠레 주재 스페인 영사관을 통해 혹은 스페인 현지에 직접 대표단을 파견하여 증언에 임했고 마침내 스페인의 요청에 의해 피노체트가 1998년 영국에서 체포되면서 실종자 가족들의 오랜 바람은 이루어지는 듯했다. 개별 국가의 주권이 우선인지 국제법이 우선인지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고 국제여론은 대체로 피노체트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특히 유엔 인권위원회와 프랑스, 벨기에 등이 적극적으로 이를 주장하였다.15) 그러나 칠레 프레이 정부의 입장은 주권 회복을 위해 피노체트가 아무 조건 없이 귀국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1999년 피노체트의 귀국을 마침내 허용했다. 피노체트의 체포는 구체제의 유산이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를 다시금 보여주었다. 피노체트의 체포와 단죄가 실종자 문제를 풀 열쇠가 될 것이라는 가족들의 기대와는 달리 칠레 국론은 양분되었고 유례없이 격렬한 피노체트 지지 시위가 일어나고 우파가 결집하게 되었다. 특히 1999년 말 대선과 맞물려 우파 호아낀 라빈(Joaquín Lavín) 후보의 승리 가능성마저 엿보이는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원래부터 정부의 과거청산 의지가 미약했던 데다가 정권 재창출 가능성이 위협을 받게 되자 실종자 문제에 대한 대응은 오히려 후퇴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99년 8월 21일 설치된 ‘대화 테이블(Mesa de diálogo)’이었다. 이 대화 테이블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진정한 화해를 이끌 방도를 모색하기 위해 정부 측 12인과 비정부측 12인으로 구성된 위원회로 실종자 문제는 주 의제의 하나였다. 물론 처음부터 실종자 가족 대표가 빠진 자리였고 비정부측 인사들 상당수가 피노체트 지지세력이었기 때문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의 재판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더구나 실종자 가족 대표는 배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피노체트 체포를 둘러싸고 점점 칠레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자 위원회의 논의 방향은 실종자 문제를 도외시하고 아예 사회통합방안을 도출하는 데 전념했다.16) 사회통합방안으로 군부가 과거의 오류를 인정하고 자체적으로 실종자에 대한 성의 있는 진상조사를 벌이겠다는 약속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아낀 라빈을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새로 선출된 대통령 리까르도 라고스(Ricardo Lagos)는 2000년 1월 7일 대국민담화에서 이 성과를 높이 평가하고 받아들이자고 말했다. 이후 군부는 6개월의 조사 끝에 140명의 실종 사건에만 군부가 책임이 있으며 30여건의 암매장 사례만 고백했을 뿐이다. 그리고 가해자를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군부가 인정한 실종 사건과 관련지어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다.17) 결국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의 조사와 별로 다를 바 없는 결과를 낳은 셈이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여전히 피노체트 지지자들이 공공연히 그를 지지하고 피노체트가 영국에서 무사히 귀환하였으며 ‘대화 테이블’도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는데 정작 피노체트는 1999년 말에 자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는 점이다. 1973년 쿠데타 직후 일어난 죽음의 순례단(Caravana de la Muerte) 사건 때문이었다. 피노체트의 명령을 받았다고 추정되는 군 장교 아레야노 스딱이 동년 10월 헬기를 타고 6개 도시 포로수용소를 순회하며 73명의 포로를 군 재판 없이 즉결처분한 사건이었다. 전쟁포로 처리에 대한 반인륜범죄가 적용된 것이다. 피노체트는 2000년 2월까지 실종자 가족 등이 제기한 240건이 넘는 형사 소송에 직면해야 했다. 쿠데타 이후의 일련의 사망, 실종 사건이 통치행위였으며 따라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피노체트 변호인의 주장은 기각되었다. 쿠데타 직후 피노체트가 이끈 군사평의회가 입법, 행정, 사법 3권을 다 쥐고 있었으므로 피노체트가 행정부의 수반으로서의 역할만 한 것은 아니라는 법원의 판단이었다.18) 이번에는 1978년의 사면법도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반인륜범죄이며 포로 처우에 대한 제네바 협정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였다.19) 그러나 재판은 치매를 이유로 중단되고 결국 과거청산 작업은 다시 미제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피노체트에 대한 칠레 자국에서의 기소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결국은 그를 법정에 세웠으며, 치매를 이유로 재판이 중단된 만큼 적어도 피노체트가 공인으로서 활동할 수 있을 여지가 봉쇄되었다는 점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여기서 과연 피노체트의 퇴임안전판이 작동하지 않고 과거청산의 당위성을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했다고 해서 좀더 일찍 피노체트를 기소하고 ― 치매를 핑계로 대기 전에 ― 그와 더불어 실종자 문제 논의의 물꼬를 틀만한 사회적 공간이 있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결코 그렇다고만은 볼 수 없다. 물론 실종자 문제는 그 ‘그로테스크하고 멜로드라마적’인 속성으로 국내외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었다.20) 백주대낮에 담배나 신문을 사러나갔다가 연행, 실종되는 그로테스크한 현실과 국회나 유엔 산하 기관 담장에 스스로의 몸을 쇠사슬로 묶고 실종자 문제의 해결을 부르짖는 멜로드라마틱한 모성애나 남편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수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픔에 대한 공감과 실종자 문제 해법 찾기는 별개의 문제였다. 심지어 실종자 가족들의 입장도 저마다 달랐다. 실종자 가족 중 어머니나 혹은 부인이 실종자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는 반면, 다른 구성원들은 미온적인 경우가 많았다. 이는 다른 가족 구성원이 또다시 비슷한 피해를 입거나 생활에 지장을 받는 것을 예방하려는 어머니나 부인의 희생정신의 소산인 경우도 있고 혹은 다른 가족 구성원의 이기심 내지 두려움 때문인 경우도 있었다. 또한 실종자 가족이라 하더라도 연행실종자 가족모임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었는데 이는 과거사를 잊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현실론과 반드시 정의가 구현되는 날까지 싸우겠다는 이상론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연행실종자 가족모임 활동에 참여한 이들도 자신의 가족이 생사가 확인될 때까지, 죽음으로 판명되면 진상규명 선까지 그도 아니면 가해자 처벌까지 등등 어느 선까지 활동에 참여할 것인지 저마다 입장이 달랐다. 실종자 가족 내부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결정이 상존하는 형편이니 일반국민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또한 실종자 문제는 롱껜 사건으로 실질적으로 종결된 것으로 간주하는 분위기도 점점 팽배했다. 롱껜 사건은 군사정부에게도 커다란 타격이었지만 실종자 가족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생환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송두리째 앗아갔기 때문이다. 또한 롱껜 사건 이전까지 칠레 인권 문제에 있어서 실종자 문제를 최우선으로 삼았던 연대사목회도 그들의 정책을 새로운 방향으로 틀 수밖에 없었다.21) 1979년 롱껜 순례를 집전한 Prebch의 강론은 연대사목회의 방향 선회를 분명히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강론을 통해 연대사목회는 앞으로는 인권 전반에 걸쳐 골고루 관심을 보일 것이고 쿠데타 이후 늘어나는 빈부격차로 인한 경제적 약자에도 눈길을 돌리리라는 넓은 의미에서의 인권 보호에 신경을 쓸 것이라는 것을 공표했다. 롱껜 사건 이후 활동을 중단한 연행실종자 가족모임 구성원이 상당수라는 점도 문제였지만 가족모임 활동에 절대적인 지원을 해주던 연대사목회의 선언 역시 실종자 가족의 활동을 위축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계속적인 활동을 하려는 의지를 지닌 가족모임 구성원의 입장은 상이했다. 계속해서 실종자 문제에 매달려야 한다는 측과 그보다 광범위한 사회연대를 모색해 민주화를 먼저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사실상 실종자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후자의 입장이 마침내 승리하여 연행실종자 가족모임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물론 정권 교체 후에 실종자에 대한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을 담보로 한 연대였다. 그러나 실종자 가족이 생사확인보다 민주화에 매진하는 순간부터 실종자 문제는 과거사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린 측면이 있다. 실종자 문제는 난제 중의 난제이다. 피노체트가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실종자 문제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처형자’ 문제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잘 알 수 있다. ‘납치’와 ‘살인’이 형법상 가장 중차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가해자들은 더욱더 입을 굳게 닫고 있으며 따라서 칠레의 경우처럼 사체조차 찾기 힘들게 된다. 또한 ‘죽은 자’는 망각되게 마련이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산 자’의 문제 해결의지가 점점 쇠퇴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실종자 문제 처리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속한 개입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신속한 개입은 실종자 문제의 세계화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대규모 실종을 야기한 책임자가 자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한다면 내부에서의 신속한 개입은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고슬라비아나 르완다의 반인륜범죄 재판 과정에서 대두되었듯이 반인륜범죄를 다루는 항구적인 국제재판소가 필요할 것이다. 물론 그 국제재판소가 강대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가능성은 많다. 하지만 적어도 피노체트가 영국에서 체포된 이후 영향력이 급속도로 쇠퇴하고 급기야는 자국 법정에 섰다는 사실을 환기한다면 그런 기능을 하는 국제재판소가 인권문제 해결에 일정부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실종자 문제를 비롯한 과거청산 작업은 도덕적 명분 외에도 전술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 칠레의 사례가 주는 교훈일 수 있다. 아무리 쿠데타로 인해 ‘실종자’라는 “새로운 시민”22)이 나타난 것이 칠레사의 오점이라 하더라도 과거청산이라는 도덕적 명분에 얽매이다가 ‘전술적 오류’를 범한다면 1999년의 ‘대화 테이블’에서처럼 기득권층의 결집을 초래해 오히려 실종자 문제 해결이 후퇴하는 경우도 있다. 피노체트가 자국 법정에 서고 치매를 이유로 재판이 중단됨으로써 장차 공적 활동에 커다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그것은 피노체트 개인에 대한 인적청산일 뿐이다. 과거 피노체트를 둘러쌌던 기득권층에게는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결집을 초래했다면 피노체트에 대한 인적청산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과거청산은 도덕적 명분이나 의지 혹은 특정 개인이나 특정 사안에 대한 단죄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본보기를 남겼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산되어야할 과거에 대한 교정 노력은 일회적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칠레 사례가 주는 교훈이기도 하다. 민선정부가 들어선 직후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로 만족했다면 피노체트를 법정에 세우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권에 대한 인식, 시민의식, 민주화 등이 하루아침에 고양되는 것이 아니듯이 과거청산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출처: 역사와기억 홈페이지, http://past.snu.ac.kr>
3) 『레띡보고서』, http://www.purochile.org/rettig00.htm
8) Tomás Moulian, Chile actual: Anatomía de un mito, 5th ed., Santiago, LOM-ARCIS, 1997, p. 164.
9) Eugenio Ahumada y otros, Chile: La memoria prohibida, Vol. I, Santiago, Pehuén, 1989, p. 96.
16) Juan Francisco Coloane R., Britannia y un general, Santiago, LOM Edición, 2000, pp. 240-242.
17) Eduardo Anguita, op.cit., p. 374.
20) Hernán Vidal, op. cit., p. 54.
6.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