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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반납을 반대했지만
증 언 자 : 유승규(남)
생년월일 : 1959.(당시 나이 21세)
직 업 : 대학생 (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12
개 요
1980년 5월18일 당시 대학생이던 유승규 씨는 당초 계엄령이 확대되면 모이기로 한 약속에 따라 18일 오전 전남대 정문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 계엄군들의 잔인한 살상을 목격한 후 항쟁기간 동안 열심히 투쟁했다. '우리는 왜 싸워야만 하는가' 등의 대자보를 직접 써서 붙이기도 하고 총을 들고 계엄군에 맞서기도 했다. 그때 독재자들의 악랄한 실상을 깊이 깨닫게 되어 현재까지 독재정권의 퇴진을 위해 일선에서 싸우고 있다.
실제 경험한 독재자의 악랄한 살상
나의 아버님은 국민학교 1학년밖에 다니지 않았으나 국민학교 졸업장을 받았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무자격으로 국민학교 교사와 농협직원으로 일하시다 지금은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신다. 할아버님께서는 어렸을 적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셨고 나중에는 소작농으로서 20여 마지기의 농사를 짓다가 1945년 이후 토지개혁 당시 댓 마지기의 논을 장만하셨다고 한다. 그후 아버님께서 여덟 마지기까지 늘려서 지금은 그것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우리 가족은 부모님과 위로 형님 한 분, 밑으로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이 있다.
나의 경우는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야당에 관여하신 선생님의 영향으로 정치적인 관심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는 통일을 위해 무슨 노력이든 해야겠다는 결심을 키우면서 생활했고, 비록 시골에서였지만 교육감상을 받고 졸업했다. 대학을 진학하려 했으나 실패한 후 서울에서 재수를 하여 다음해 전남대 상대에 입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무척 순진하여 상대만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유신시대 때 대학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동참하고 싶었으나 학생운동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해서인지 겉으로 드러난 단체가 없어 그 맥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무조건 시위만 있으면 참여하는 정도였다.
그렇게 대학생활을 하던중 1980년 5월을 맞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5·18을 겪은 후 충격이 컸겠지만 나에게도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지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큰 계기가 됐다. 책에서 본 독재와 실제로 경험한 독재자들의 악랄한 살상은 판이하게 달랐다. '과연 인간이 저럴 수가 있을까'라는 자문을 수없이 하면서 그것은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해 준 결과가 되었다.
학생에서 시민군으로
18일 아침 사전에 이미 휴교령을 예측하고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오전 8시 교문 앞, 12시 광주역, 1시 도청 앞에서 모이기로 한 약속에 따라 오전 8시경 전남대학교 정문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서너명의 학생이 와 있었다. 정문을 경비하고 있던 공수들이 "우리와는 상관없으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 이곳에 오래 있어봐야 아무 소용 없고 좋지 않은 일만 생길 테니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학군단장과 교수 한 분이 공수에게 맞았다는 소문을 들었다.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한편으로는 왜 우리 학교에 공수들이 들어가 있으면서 우리 학생들을 못 들어가게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어 화가 치밀었다. 다리가 후들거려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어 학교 근처에 사는 친구집으로 가서 잠시 쉬다 친구와 학교 정문 앞으로 다시 나갔다. 그때는 약 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정문 앞 다리에 40명 정도 모여 연좌농성을 했다. 그러자 공수들이 확성기로 "해산하지 않으면 강제로 해산시키겠다"고 위협을 했다.
잠시 후 지휘관이 구령을 하자 1개 분대병력이 곤봉을 빼들고 "돌격!"이라고 소리치면서 우리를 향해 돌진해 왔다. 우리는 곧바로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정문 쪽으로 가다 공수한테 붙잡힌 학생이 무차별 구타당하는 광경을 지켜보고 격분을 참지 못해 돌을 던졌다. 투석전을 벌이다 공수들이 곤봉을 들고 달려오면 흩어지기를 거듭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한 학생들은 거의 2백명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그러나 악랄한 공수의 진압에 밀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은 신역을 거쳐 금남로로 진출하였다.
처음에는 중앙로에서 전경과 대치해 있었으나 다시금 밀려서 금남로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금남로에서 발을 ꁹ춰 '척척' 소리를 내면서 시위대를 향해 전진해 오는 전경들의 기세에 눌려 도망가면서도 우리들은 산발적인 시위를 계속했다. 그러나 최루탄을 쏘며 진압하는 전경들에게 밀려 충장로 파출소 뒤를 돌아 양영학원 부근으로 가게 됐다. 그곳에서 동명로를 따라 왔다갔다하며 시위를 하였는데 나는 대형 태극기를 들고 참여했었다. 그때 동명동파출소에 들어가 최규하 사진을 벽에서 떼낸 후 깨버렸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위대열에 끼어 장동 로터리 쪽으로 가던중 전경차 한 대를 가로막아 그 차에 탔던 전경들을 붙잡았다. 그들을 앞세우고 가다 장동 로터리에서 처음으로 시내진압을 나온 공수들을 목격했다. 그 시간이 오후 4-5시경이었다. 나는 그들이 시위대를 향해 전력질주해 오면 골목으로 숨었다가 잠잠해진 듯싶으면 다시 나와 돌을 던지기를 되풀이했다. 그들은 우리가 도망가는 순간 지프차를 타고 쫓아와서 붙잡은 후 사정없이 패서 트럭에 내던졌다. 그러면 트럭 위에 있던 군인이 또 개패듯이 때리는 것이었다.
19일. 오전에 학교 앞으로 갔다. 언제든지 학교로 갔다가 별일이 없으면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서 모이기로 약속이 됐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공수들이 젊은 사람이나 학생들이 보이면 무조건 잡아다 몰살시킨다"는 소문을 듣고 무서워서 집으로 갔다.
오후에는 같이 살던 삼촌과 함께 시청 쪽에서 가서 시위에 참여하고 돌아다녔는데 자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계엄군과의 공방전
20일 낮에 친구들과 함께 우리집에 모여 놀다 오후에 산수동 오거리로 나갔다.
"오늘 밤에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서기로 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때부터 친구 두 명과 함께 목청껏 외쳤다.
"민주시민 여러분!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시내로 나갑시다. 광주시민 전체가 들고 일어서야 공수들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외치면서 산수동을 몇 번 오갔더니 처음에는 불과 10여 명에 불과했던 시민들이 점차 늘어서 1백여 명쯤 되었다. 계속 소리치고 다니자 목도 아프고 잘 들리지 않는 듯싶어 산수동사무소로 가서 마이크를 우리에게 내달라고 했다. 그 곳에 있던 직원 한 명이 절대 줄 수 없다고 버티는 바람에 밖으로 나와 전파사를 찾아가 마이크를 구하려다 결국 실패하고 난 뒤에도 계속 목청껏 외치고 다녔다.
한시간 이상을 골목골목을 누비며 시민의 동참을 호소하고 다닌 결과 연탄집게, 파이프, 몽둥이 등의 무기를 들고 산수동 오거리로 모인 시민들이 천 명 이상되었다. 친구와 나는 대열에 끼지 않고 옆에서 따라가며 계속 소리쳤다. 우리는 MBC방송국을 거쳐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쪽으로 갔다. 그 곳에는 이미 많은 시민들이 모여 있어 거기서부터 산수동에서 대열을 이루고 왔던 시민들과 합세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 있던 시위대와 함께 광주역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미 공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들로부터 약 1백 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까지 접근했으나 자욱한 최루탄가스 때문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다.
공수에게 쫓기던 우리는 시외버스공용터미널 주위에 있던 주유소에서 휘발유가 가득 든 드럼통을 끄집어내 트럭에 싣고 신역으로 향했다. 휘발유에 불이 붙어 주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 트럭을 몰고 공수를 향해 돌진했던 운전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날 밤 광주역에 있던 공수들은 최루탄도 무수히 발사하고 총도 간헐적으로 쏘아댔다. 그때 나는 시위대 뒤편에 있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모르겠다. 나는 광주역과 금남로를 오가며 새벽 3시까지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벌이다 시청 쪽으로 해서 집으로 갔다.
목이 끊어져 덜렁거리는 청년
다음날(21일) 아침 일찍 "광주시민 여러분! 도청으로 모입시다" 라는 가두방송을 듣고 도청 앞으로 갔다. 이미 금남로는 나보다 먼저 나온 시민들로 꽉 메워져 있었다. 그곳에서 서울에서 왔다고 하는 여학생 두 명(경희대생이라 했음)을 만났다. 그들은 새벽까지 광주역에서 공수에 맞서 싸우다 왔다고 했는데 맨발을 벗고 있었다. 그들로부터 광주역에 있던 공수들이 새벽에 퇴각당한 소식을 듣고 먼저 집으로 갔던 사실이 무척 미안하고 부끄럽게 생각되었다. 그때 리어커에 실려 태극기가 씌워진 시신 두 구를 봤으나 이미 그 전부터 공수들의 만행을 보고 극도로 치를 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죽은 사람을 목격한 사실로 인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전일빌딩 앞에 있던 계엄군에게 접근하여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소?"라고 물어봤으나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는 관광호텔 조금 위쪽 에 있었는데 그곳에 있던 시민들이 "도청으로 밀고 가자"고 소리치면서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가자 계엄군이 공포탄을 쏘기 시작했다. 총소리에 일시 흩어졌던 시민들은 잠시 후 다시 몰려들었다. 다시 모인 시민 중 7, 8명이 군용 트럭에 타고 도청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자 계엄군들은 조준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때 차에 탔던 사람들이 고꾸라지면서 차는 수협 앞에 곤두박질쳤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후로도 차를 몰아 도청으로 돌진하는 시도가 두어 차례 더 있었고, 그 중에는 다시 시위대열로 되돌아온 차도 있었다. 그때 계엄군은 도청 앞 시계탑과 전일빌딩 중간에 서너 군데 드럼통을 세워놓고 그뒤에 '엎드려쏴' 자세로 있었다.
장갑차에 탄 한 청년이 웃옷을 벗고 머리에는 띠를 질끈 동여메고 태극기를 든 채 '해치' 위에 서서 도청을 향해 가다 목에 총을 맞아 고개가 뒤로 젖혀진 채 덜렁거리면서 돌아왔다. 5·18을 얘기할 때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장면이 바로 21일 도청 앞 상황이고 바로 그 청년의 처참한 모습이다. 그 사건이야말로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계엄군을 향해 갈 때는 멀쩡했던 사람이 돌아나올 때는 목이 끊어져 덜렁거린 상태였던 것이다. 계엄군들은 장갑차를 향해 조준사격을 한 후 실탄을 재장전하여 시민들을 향해 수평으로 난사하기 시작했다. 금남로에 있던 시민들이 계엄군이 갈긴 총에 맞아 픽픽 고꾸라졌다. 내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은 총알이 옷만 찢고 지나간 자리를 보여줬다.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
1시경에 지하도 공사장에서 약 3백 명 가량의 시민, 학생이 연좌농성을 했다. 학생으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이 앞에 서서 선동을 하면 우리는 '아리랑', '선구자',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함께 불렀다. 건물 사이사이에는 약간의 시민들이 숨어서 구경하고 있었다. 우리가 연좌농성을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두세 발의 총성이 들렸다. 그러자 여태껏 앞에 서서 주동하고 있던 청년이 한쪽 팔을 감싸쥔 채 공사장 뒤로 달려갔다. 앉아 있었던 우리들도 순식간에 주변에 있는 건물 뒤로 숨었다.
오후 4시쯤 되었을 때 광주은행 부근에 트럭이 한 대 나타났다. 트럭에는 약 30여 정의 카빈이 있었으나 시민수에 비해 총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나는 총을 받지 못했다. 그때부터 시민군과 계엄군의 총격전이 벌어졌다. 계엄군은 건물 옥상에서 총을 쐈으나 모습은 드러나지 않았다. 시민군들도 건물 사이사이에 숨어 있다 잠깐 나와서 총을 쏘고 다시 숨는 방법으로 계속 총을 쏘았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 오후 6시경 폐허 속을 걷는 듯한 쓸쓸한 기분을 느끼며 집으로 갔다.
도청에서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며 비탄에 잠긴 나는 밤새 고민하다 죽을 각오로 싸우겠다는 결심을 하고 충장중학교 앞 도로에 나가 시위차량을 기다렸다. 지금 나가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죽더라도 떳떳하게 싸우다가 죽자'고 마음을 굳혔다. 그곳에서 총을 갖고 있는 시민을 만나 "아저씨, 그 총 제게 주세요. 그것을 가지고 가서 제가 싸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분은 군대에 있을 때 자기도 '명사수'였다고 하면서 총을 주지 않았다. 그분과 함께 작은 군용차를 타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가는 도중 우리 방송은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 아저씨는 북한방송을 틀어놨다. 공원에는 총과 실탄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나는 카빈 한 정과 실탄을 지급받고, 그곳에 있던 트럭에 15명쯤 되는 시민과 같이 백운동 철길로 갔다. 주변의 좌우측 높은 건물 옥상으로 가서 새벽까지 경계를 섰다. 아마 그때 암호가 '담배-연기'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옆사람이 가지고 있던 무전기로 우리가 백운동 로터리 부근의 경계를 하고 있음을 도청에 알렸다.
새벽녘에 같이 근무섰던 40대 정도의 아저씨 세 명과 함께 광주공원 부근으로 가서 여인숙에서 잤다. 그 중 한 분은 동생이 죽어서 분한 마음에 총을 들게 됐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전원 총을 멘 40명 정도가 공원다리 입구에서 30-40대의 아저씨에게 총기조작술에 관해 20분쯤 배웠다. 소대단위로 조원을 짜서 구령을 붙이며 흩어졌다. 우리 소대원은 총을 메고 시위차량을 타고 다니다 밤이 되자 도청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다음날 처음에는 입관된 시체 옆에서 근무를 서다가 나중에 도청 정문 앞에서 보초를 섰다. 잠깐 동안 보초를 섰지만 그동안에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러 온 많은 시민들을 만났다. 그러던중 서방에 있는 교회에 공수들이 숨어 있다는 말을 듣고 대여섯 명이 차를 타고 서방으로 갔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못 들어가게 하자 "당신들이 공수들 숨겨준 것이 아니냐"면서 교회를 향해 발포한 후 확인은 하지 않고 가려는데 교도소 쪽에서 연달아 총성이 울렸다. 그날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위험지역이라는 소문이 들리면 즉석에서 경계근무를 섰다. 하지만 실제로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총을 쏴본 일은 없었다.
그날 밤 집으로 가서 삼촌과 함께 캔트지 2장에 '우리는 왜 싸워야만 하는가'에 관한 당위성을 피력한 대자보를 작성하여 다음날 아침 남도예술회관 벽에 붙였다.
25일 아침 도청 정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산수동에서 같이 살던 할머님이 나를 찾아오셨다. 시골에서 아버님이 오셨다면서 빨리 집으로 가자고 하셨다.
나는 가지고 있던 총을 옆에 있던 친구에게 넘겨주고 집으로 갔다. 그날 할머니, 아버지, 나 이렇게 셋이서 도로를 피해 논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화순까지 걸어간 후 화순에서 버스를 타고 시골로 갔다. 그후 개학할 무렵에야 광주로 왔다.
무기반납 연설에 격분한 즉석연설
광주로 온 후 27일 도청에서의 참담했던 일을 전해 듣고 시골로 피신했던 사실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괴로웠다.
계엄군이 도청에서 퇴각당한 21일 이후 어느 날인가 아마 '3차 시민궐기대회'가 열린 날이었을 것이다. 흰 장갑을 끼고 나타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람, 교회 목사, 김창길씨 등이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는 기만적인 연설을 하는 것을 듣고 격분한 나는 즉석에서 연설을 했다.
"저들의 속임수에 놀아나면 안 됩니다. 애국시민 여러분! 지금 무기를 반납하면 우리는 계엄군의 총에 맞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파리 목숨입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현정권이 퇴진하고 민주화가 이룩 되는 그날까지 싸워야 합니다. 무기반납은 절대 안됩니다"
라는 요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위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지만 지금도 시민들께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조사.정리 양난희)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