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포츠담 광장엔 파리 퐁피두 센터를 공동 설계한 렌초 피아노(이탈리아)와 리처드 로저스(영국) 같은 쟁쟁한 건축가들의 작품이 늘어섰다. 연방 의사당 리노베이션은 대영박물관을 개조한 공으로 작위를 받은 영국인 노먼 포스터가 했다. 다른 구역에도 알도 로시(이탈리아), 대니얼 리베스킨트(미국) 등 거장의 건물이 즐비하다.
다른 나라 다른 도시들도 정도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한 무리의 건축가가 세계 도시를 휩쓰는 '건축의 명품 바람'이다. 다국적 기업의 본부를 끌어오려면 브랜드 있는 건물이 유리하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다.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민간 주도 재개발이 늘어나면서 이런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 바람에 실종되는 것이 개성과 맥락이다.
템스강에서 바라본 캐너리 훠프의 스카이라인은 뉴욕과 아주 닮았다. 가장 높은 원 캐나다 빌딩은 뉴욕 월드 파이낸셜 센터를 설계한 시저 펠리가 맡아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다. 포츠담 광장에 헬무트 얀이 디자인한 소니 플라자의 지붕은 후지산 모습을 본뜬 것으로, 모더니즘 건축이 둘러싼 바로 옆 켐퍼 광장과의 흐름을 깬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설계로 잘 알려진 미국의 프랭크 게리가 베를린의 파리 광장에 설계한 DG 은행에선 게리의 기법만 강하게 드러나지 도시의 특성이 반영되지 않았다.
어떻게 봐야 하나. 고유성이 묽어지는 지구화 시대이자 절충과 종합의 시대, 시장의 논리가 세계를 통일하는 시대임을 감안하면 별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각 도시의 역사성과 개성이 사라지는 데 대한 비판이 만만찮다.
미국의 도시사회학자 섀런 주킨은 '최근 재개발 현장의 건물들은 다국적 자본주의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규정했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시대라 해도 인간 집단의 구체적 삶을 표출하는 방식인 건축과 도시의 모습이 균일화되는 것은 곤란하다는 논리다.
모더니즘 시대부터 진행돼 온 균일화를 요즘 지배하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들이다. 폴 월터 클라크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론적으로 역사에 대한 존중과 토속적 또는 대중적 형태의 허용을 강조하지만 이들 건축에서는 누구의 역사이며, 누구의 토속인지, 어떤 대중인지가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결국 또 하나의 소비자본주의 상품일 뿐이라는 게 그의 결론이다.
베를린의 건축가 올리버 쿤은 '포츠담 광장 건설 과정에서 시민단체들이 독일의 특징을 담자고 끊임없이 제의했으나 국제적 건축가들이 주도하는 바람에 그들이 세계 어디에나 설계해 주는 일반적 형태를 지니게 됐다'고 말했다. 건축가 승효상(이로재 대표)씨는 포츠담 광장이 자본 위주의 건축과 도시를 축약한 모습이라며, '다임러와 소니 같은 다국적 기업의 빌딩들은 베를린의 한과 기억을 가리면서 현란한 외양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고 했다. 그는 '서울에서도 외국인들에게 설계를 맡긴 고층 빌딩들이 6백년 도읍의 맥락을 무시한 채 곳곳에서 솟아오르고 있다'고 걱정했다.
2003.12.10 18:06 입력 / 2003.12.12 18:36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