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옥산서원과 독락당을 지키는 잠계공 종손을 만나다
태풍 갈매기가 한반도를 통과하는 날 자유문예 부산경남지부는 문학 기행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전날 밤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 강풍과 폭우가 쏟아진다는 뉴스를 들었는데 천만다행 행사 당일 새벽에
부산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2008년 7월 20일 아침 9시에 부산 지하철 동래역 1번 출구 앞에서 경주를 향해 출발했다. 경주시 강동면 양동을 지나면서 고가도로가 넓은 안강들을 조각 조각으로 나누어 놓았다. 양동에는 민속촌인 양동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들의 집성촌이라 할 수 있고 오늘 찾아가는 주된 곳은
양동마을에서 태어나신 회재선생의 옥산 고택과 옥산서원이다.
독락당과 옥산서원을 답방하고 시간이 나면 대흥사를 둘러보고 양동 민속마을을 둘러보고 그래도 시간이 있으면
경주 시가지 어느 유적을 보기로 하였으나 시간에 쫓겨 어느 한 곳도 찬찬히 보지 못하고 양동민속마을을
마지막 코스로 하여 끝냈다.
足聯句 / 李彦迪(이언적) : 47세에 재등용되던 때 혼란한 사회를 개탄
江沈山影魚驚遁 강에 산 그림자 깊으니 고기 놀라서 숨고 峯帶煙光鶴( )悽 산에 부연 기운 가득하니 학도 두려워하네 物寒固宜述幻忘 만물이 막히어 모두 허황으로 미혹되니 人通何事誤東西 사람들은 어찌 동서도 분별 못하는가?
(필자의 말: 江沈山影魚驚돈 峯帶煙光鶴()悽 에서. 필자의 지인에게 부탁하여 '돈'자는 찾았으나
()안의 글자는 찾지못하였지만 시가 너무 좋아 부족한 대로 인용하였다.)
옥산서원 전경
옥산서원은 조선 선조 5년인 1572년 경주 부윤 이제민을 중심으로 경상도 유림의 뜻을 모아 창건되었으나 서원 재정면에
있어서는 회재 이언적의 손자 준{浚:호,구암(求菴)}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선조 7년1574년(옥산서원에서 준비한 안내
책자에는 1573년)에 임금으로부터 서원의 현판(縣板)과 노비, 서적 등을 하사받은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고 서원에서
공부하는 유생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한 때는 노복이 2백 수십 명이 되었다. 서원의 장서규모가 방대하여 인근의 정혜사에서 일부를 보관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으로 홍문관(弘文館)이 소실되어 1599년
옥산서원에 있던 서책을 나누어간 적도 있으나 퇴계선생이나 관찰사가 옥산서원의 서책을 서원 밖으로 유출하는 것을
금하는 편액(篇額)이 걸려 있고, 정조가 서원의 책을 반출하지 못하게 어명을 내리기도 했다. 서원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인 무변루(無邊樓)가 있는데 1층 양쪽 협실과
1층 통문을 갖추었고, 문루 맞은 편 중앙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이 있고,
무변루와 구인당의 편액(篇額)은 한석봉(한호)이 쓴 것이다. 그러나 구인당의 정면미간(正面楣間)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이고 내측에 있는 것은 이산해의 글씨이다. 구인당 주위에 (偕立齋), 양진재(兩進齋), 민구재(敏求齋),
암수재(闇修齋), 체인묘(體仁廟),신도비각(神道碑閣), 어서각(御書閣, 經閣), 문집판각(文集板閣), 청분각(淸芬閣)이 있다.
直薇垣(직미원)
李彦迪(이언적) : 司諫院 司諫으로 있다가 좌천되기 바로 직전에 쓴 시
玉漏丁東報五更 물시계소리는 五更를 알리는데 沈邊凉月透窓明 벼개가의 서늘한 달빛 창문을 밝게 하네. 關心宗社安危事 종사의 안위사가 더욱더 걱정되어 耿耿終宵夢不成 안절부절 밤새도록 잠 못 이루네.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의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본관은 여주(驪州).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장령·밀양 부사 등을 지냈다. 1531년 사간에 있으면서 김안로(金安老)의 중임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경주(慶州) 옥산 자옥산에 들어가 성리학연구에 전념했다. 1537년 김안로가 죽자 종부시첨정으로
다시 관직에 올라 전주 부윤으로 있으면서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좌찬성에 오르고 을사사화 때 추관(推官)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 강계(江界)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1517년 영남지방의 학자인 외숙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 사이에 토론되었던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참여하여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에서 두 사람의 견해를 비판하고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또한, 인(仁)에 대한 관심으로
《구인록(求仁錄, 1550)》을 써서 여러 경전과 송대(宋代) 도학자들의 설(說)에서 인의 본체와 실현방법에 관한 유학의
근본정신을 확인하고자 했다. 《대학장구보유(1549)》 《속대학혹문》에서는 주희가 《대학장구》에서 제시한 체계를 개편,
주희가 역점을 두었던 <격물치지보망장(格物致知補亡章)>을 인정하지 않고 격물치지장으로 옮기는 계획을 하여 주희의
《대학장구》 《대학혹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제시했다. 또한 정치문제에 있어서는 인의(仁義)를
근본으로 한 심학(心學)을 궁리정심(窮理正心)으로 체득하여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백성은 국가의 근본이며,
인심은 천하안위(天下安危)의 근본이라고 했다. 그 밖의 저서에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봉선잡의(奉先雜義)》
《회재집》 등이 있다. 문묘와 경주의 옥산서원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원 (文元)이다.
觀心 / 李彦迪(이언적) : 은거의 시기에 학문에 전념하던 때의 시
空山中夜整依襟 빈산 한밤중에 옷깃 여미고 앉으니 一點靑燈一片心 한점 푸른 등불 내 마음에 비치네. 本體己從明處驗 본체야 세상에서 이미 경험했으니 眞源更向靜中尋 진리의 근원을 고요함 가운데서 찾으리라.
옥산정사 독락당에서 자유문예 시인들과 함께
(좌로부터 이수한 시인, 이해철 선생, 필자, 노민환 시인, 이상미 시인, 정용장 시인)
하마비를 지나고 옥산서원을 지나서 버스의 종점에 내렸다. 종점인 독락당 앞 주차장 광장에서 십수 명의 학생들이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있는 곳을 지나 독락당 마루에서 집주인과 인사를 하였다. 지금의 집주인은 잠계공(潛溪公)의 17세 종손인 이해철 선생이다.
"사액서원인 옥산서원은 사적 154호이고 독락당(獨樂堂)은 보물 413호인데 독락당이 서원보다 더 귀한 사적자료입니까?" "그럼요, 독락당이 서원보다 건립년대가 앞섭니다. 독락당은 1516년에 지어 회재 할아버지 때부터 있었고 서원은
회재 할아버지 사후인 1572년에 지어졌습니다. 아마도 회재 할아버지의 생활공간이었던 점도 무시되지 않았을 법도 합니다."
독락당은 회재 선생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 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 이 창을 통해서 앞 냇물을 바라보게 한 것과 계정이 담장 밖으로
튀어나와 개울 바닥의 암반 위에 뜬 것 같은 것은 자연을 좀 더 가까이 가져오는 특별한 공간성을 이룬다.
"퇴계 선생과 조선 유학의 쌍벽을 이룬 율곡 선생은 동방5현(동방5賢)에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회재 선생과 퇴계 선생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와 함께 동방5현에 포함되었으니, 이것은 조선 성리학(性理學)에서 회재 선생이 기초한
주리론(主理論)이 주기론(主氣論)을 앞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어느 이론이 더 가치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런 면도 있을 겁니다.
성리학이 도학(노장 사상)이나 불교의 미망에서 벗어나도록 하였기 때문일 겁니다." "도교와 불교의 미망이라 함은?" "조한보는 성리학자이지만 그 이론에 인간을 떠난 초월적인 것에 절대적인 것(태극, 선 또는 이상)이 있어서 인간은
적멸하는 하나의 물상에 불과하다는 불교나 도교의 사상을 수용하지만, 회재 할아버지는 그 절대적인 태극은 물상의 생멸 이전, 이후에도 있는 것으로 물상이 생기면 물상 그 안에 같이 있어서, 인간이 영원성을 가진 태극과는 별개여서 인간은 허무하게
적멸하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온 통치세력이 불교의 퇴폐를 비판하여 도덕기반을
세우려고 힘쓰고 있었고 불교적 민간신앙적 생활관습을 바꾸하려던 시기였지요. 모든 물상은 하늘과 땅에서 재료와 기운을 얻어 만들어지고, 이(理)는 각양각색인 이 물상을 주재하는 존재의 근원이라고 봅니다. 태극(太極)은 인식과 감각을 초월한 영원불멸인 이(理)의 근원이고, 무극(無極)이란 태극의 무궁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회재 할아버지는 이(理)가 각 현상(現象)에 내재(內在)해 있다고 보셨습니다." "태극이란 물상을 주재하는 이치일 뿐, 태극과 물상이 분리된 것으로 보는 생각과는 다르다는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理)는 물상이 있게 하는 이치로써 영원한 것이고 기(氣)는 생멸하는 물상으로 보는
주리적(主理) 유학의 체계가 되고, 이것은 이황 선생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합니다. 인간에게도 이(理)가 내재하고,
그 바탕은 마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외부자극에 반응하게 될 때 이를 성(性)이라 하고, 인간이 이(理)를 거슬리지 않고
바른 도(道)를 걷기 위하여 자신의 심성(心性)을 다스려야 하며, 이때 중요한 덕목이 바로 인(仁)입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인(仁)을 구(求)함에 있어 몸소 민첩하게 실천하여 체득(體得)할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이러한 뜻은" '求人錄' (구인록)에 잘 나타나 있으며, 서원의 강당을 '求人當' (구인당)으로 부르고
'敏求齋' (민구재: 민첩하게 구함), '闇修齋' (암수재: 어두운 데서 닦음),
강당 뒤편의 사묘는 '體仁廟' (체인묘: 인을 몸소 체득함)로 이름 지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인록이란 요약하여 어떤 책입니까?" "1550년(명종 5)에 유배지인 평안도 강계(江界)의 적소(謫所)에서 저술하셨는데, 경전의 본문을 쓰고,
그 아래 주자(朱子)·정자(程子)의 대주(大註)를, 그리고 제가(諸家)의 소주(小註)를 병행하여 기재하였으며,
논어, 맹자 등 주로 제가의 설을 모으고 회재 할아버지의 견해를 <우안(愚按)>이라 하여 가끔 기재하였는데,
이 책은 인(仁)을 공자의 기본사상이자 유학의 본질로서 파악하고, 각 경전과 제설(諸說)을 종합하여 이를 종류별로
고찰한 최초의 저술(著述)이라고 합니다."
"회재 선생의 양병설이 율곡 선생의 10만 양병설보다 먼저 나왔다고 하는 설이 있는 데...?" "할아버지께서 모친 봉양을 구실로 자청하여 중앙관직에서 지방관인 전주 부윤으로 계시면서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렸는데 그 중 제9목 수군정(修軍政), 제10목 심기미(審幾微)가 있습니다.
9목 수군정은 유비무환즉 국보위정신(有備無患卽 國保衛精神)이고, 10목 심기미는 내우외환의 대비와
정보(情報)를 미리 얻어 대비하자는 것인데 이 소를 올린 후, 50년 후인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율곡 선생은 1583년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계진하고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고 하니 강병설(强兵說) 주장이
율곡 선생보다 41년 앞서지요."
"안향(安珦)이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가져와 성리학을 도입한 이후, 고려말 이색, 정몽주가 공부한 성리학의 연구가 정도전,
권근으로 이어지고, 고려조에 대한 의리를 지켜 선죽교에서 피살된 정몽주의 학풍을 이은 길재는 의리학(義理學)의 학통을
세웠다고 합니다. 길재는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나 노모 봉양을 이유로 귀향하여
선산(善山) 임천(林泉)에서 은거하던 중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세워져 1400년(정종 2) 태상박사(太常博士)의 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고 사퇴하고 김종직(金宗直)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에게 성리학을 가르쳤으니 이를
사림파라고 했으며, 그 학통은 김종직·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졌다는데 회재 선생은 어느 문하에서
수학하셨습니까?" "뚜렷한 학맥이 없었다고 보입니다. 10세에 부친을 여의자 우참찬을 지낸 외숙부 손중돈이 임지로 데리고 다니면서
지도한 것이 전부입니다. 퇴계 선생이 쓴 회재 선생 행장(行狀, 일대기(一代記)를 간략하게 서술한 기록)에 보면
'우리 선생처럼 스승의 전수한 곳이 없었음에도 자기 스스로 이 학(學)에 분기(奮起)하여 암연히 날로 나타남으로써
덕(德)이 행(行)에 부합하고 병연(炳然)히 저술이 나옴으로써 말이 후세에 전하게 된 분은 조선에서는 찾아보아도
그와 같은 이가 적을 것이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조선 주리론 성리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퇴계 선생의 이론이 전개되었군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독락당은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 1리 1600번지에 있는 회재 선생의 거처이고 서재였다. 지금은 회재 선생의 아들인
잠계공(潛溪公) 이전인(李全仁)의 17세 종손 부부가 고택을 지키는데 집이 커서 매년 수리할 곳이 많이 생겨도 재원이
넉넉지 않아 힘이 든다고 한다.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어도 경주시의 재정이 궁핍하니 유지보수비가 책정되지 않고 붕괴 정도의 큰 손실이 났을 때만
보수비의 일부가 보조금으로 나온다고 하며, 이해철 선생이 요구하면 문중에서 보조금이 나오지만 사소한 것까지 문중에
알릴 수 없는데, 건물의 규모가 너무 크고 더구나 한옥 고택이 되어 손 볼 일은 계속 일어나서 그때마다 품삯이 만만치
않다고 한다. 유서깊은 고택을 너무 오래 방치할 수도 없었으며 또한 종갓집을 지키려고 객지에서 귀향하여 집 근처에서 직장을 구하여
회사에 다녔으나 얼마 전 정년 퇴사하여, 자녀들은 다 객지에 나가고 내외간 둘만 살지만,
요즈음에 와서 생활이 더욱 곤궁해졌다고 한다.
회재 선생 유물전시관 개관식 장면
"회재 선생 유물전시관 건립에 2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다던데 대역사였겠습니다." "예산을 아끼려고 몸소 찾아다니며 자문받고 기획하는 것이 예삿일이 아니었습니다. 진열방식, 진열장 구조에 따라 가격에
엄청난 차이가 나고 유물 감상에 차질이 커서 고민고민했습니다." "너무 큰일을 몸소 주관하셔서 건강이 더 나빠지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 큰 할 일이 있지만 내 건강이 허락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이것이라도 완성하고 나니 조상님께 미안한 감이
줄어듭니다." 이해철 선생은 금년에 세 번이나 입원수술하신 터라 체력을 회복하려면 요양에만 전념하여야 할 형편이지만 유물관 관리가
마음에 쓰여 그렇게 하지 못하고 아직도 집에서 요양하면서 대역사의 마무리를 하지만 건강할 때처럼 활동할 수 없음을
아쉬워하셨다. 또한 42억 예산으로 정부가 옥산서원 남쪽에 공사중인 서원부속 건물로써 옥산서원에서 보관 중인 장서와 유물을
전시할 전시관 건립에 참여를 요청하였으나 건강상 적극적인 기여를 하지 못함을 조상님께 송구스러워 하셨다.
회재 선생 유물전시관은 사업비 8억 7천만 원이 소요된 99.15㎡의 목조 한식 골기와 건물 한 채인데,
보물 413호인 옥산정사 독락당 뒤편에 있다. 보물 525호인 삼국사기를 비롯한 보물 586호인 회재 선생 수필 고본 일괄 등 보물 총 7종 146점과 기타 전적류,
고문서 등 2천여 점이 수장된 회재 선생 유물전시관은 전시대 7개소를 비롯한 감시카메라 6대와 모니터를 갖추고 있어 그
간 후손들의 가정에서 분산 보관해 오던 것을 이곳에 모아 안심하고 영구히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해철 선생은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어려운 형편에 사재 4천여만 원을 추가 투자하여 선조의 얼과 공덕을 기리고
보존하려고 열정을 쏟다가 중병(위, 직장, 갑상선)을 얻어 3번이나 수술을 받고 투병 중이라 한다. 우리 일행을 위해 정해진 요양 중인 식사시간을 넘겨 가면서 장시간 최선의 봉사를 하시는 모습에 죄송함과 감사함을
금할 수 없었다.
수많은 소중한 유물 중에서 특별히 눈시울을 적시게 한 것 2가지가 있었으니, 첫째는 상소문 보물 제1473-30호 1566년(명종 21년) 8월에 회재 이언적 선생의 아들 전인(全人 1516-1568)
호는 잠계(潛溪) 자는 경부(敬夫)가 왕에게 아버지 죄를 변호하고 신원을 복원해 달라는 간절한 내용으로서 1
562년 작성한 상소문 초이다. 1566년 8월에 상소하여 1566년 9월 5일 전교가 있어 회재 선생 사후 13년 만에 복작이 되었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본보기로 길이 남으리라. 또 하나는 상소문 보물 제1473-31호 1568(선조 1년) 2월에 아들 전인(全人)은 선조 원년에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
회재 이언적에게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의 증직을 하사 하고 자신에게는 판사(종1품) 벼슬이 증직되었으나 이를 정중히 사양하고 성은에 감사한다는 사은소(謝恩疏)이다. 전인(全人)의 청렴하고 강직한 충정을 보면서 옛날이나 지금이나 탐관오리로 가득한 세상에 선비정신을 이토록
온전하게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다시 생각하였다.
이해철 선생이 해마다 기고하신 향토지(鄕土誌) 연간(年刊) '비화원'
"요즈음도 강의에 많이 나가십니까?" "전에는 유도(儒道)나 각 회사에서 예절 강의 요청이 있으면 나가고, 대개는 손님 접대로 소일했으나 요즈음은
요양 중이라 강의나 손님 접대는 특별한 경우 외에는 금하고 있습니다." "관람객이 얼마나 됩니까?" "1년에 15.000명쯤 되겠지요." "문인들이 단체로 문학기행도 많이 옵니까?" "문인 단체의 관광은 별로 없어도 개별적 교유(交遊)가 있는 문인들은 가끔 옵니다." "비화원(比火原)에 기고를 계속하셨던데 비화원이 무슨 뜻입니까?" "비화원이란 지금 안강문화연구회에서 매년 한 차례씩 발행하는 책이름입니다.
안강읍의 신라시대 이름이 비화현(比火縣)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기고한 글이 비화원에 실렸습니다.
경주풍물지리지에도 안강읍에 관한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지명의 유래나 풍습, 유도 등을 썼습니다." "책이 여러 권인데 연재물을 실었습니까?" "아닙니다. 각기 다른 주제에 대한 것인데 안강에 살면서도 안강에 대해 모르는 일들이 많아서 자료를 모아
연구해 본 것들입니다." "향토사학자이시네요. '안강의 마을과 산야, 제사축의 의미, 회재 이언적 선생의 고문서 소장에 대한 인문학적 고찰'을
발표하셔서 잘 보았습니다." '사학자라기보다 그냥 문화연구회원입니다."
이해철 선생 내외분
"사모님은 서예를 하신다고 들었는데..., 저의 일가 중에서 여주(驪州) 이씨 수한씨에게 시집가서 안강에 사는 분이 있어서
그편으로 들었습니다. " "예, 정통 서예를 배워서 이론이나 글씨 자체의 예술성에서는 저보다 월등하지요. 저야 할아버지 밑에서 붓글씨 좀 쓰다가
객지에서 유학하고 직장생활하면서 서예공부도 끝이 났지만, 그래도 사용하는 데는 집사람에게 밑지지 않을 것입니다. 허허..." "하기야, 예문이나 유학관련 저술에서 선생님을 따를 사람이 있겠습니까?" "별 말씀을 하십니다. 집사람 칭찬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그렇게 말했을 뿐입니다." "경주나 대구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승용차로 얼마나 걸립니까?" "경주역에서 50분 정도, 대구에서는 130분 정도 소요됩니다." "요양 중이신데 규정된 식사 시간까지 빼앗아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별말씀을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독락당 담 밑 개울에서 일요일 오후의 계정(溪亭)과 관어대(觀魚臺)를 보고 있으니. 여름에도 두꺼운 녹음과 흐르는 물로
더위가 없다는 말대로 반쯤은 암반이고 반쯤은 자갈인 맑은 개울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 등에 배어 나오던 땀이 식었다.
독락당 앞의 시내버스 주차장에 있는 안내문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농촌 전통 테마 마을(옥산 세심 마을) 체험마당: 전통 헬스(장작패기,지게지기, 디딜방아, 떡메치기) 체험장: 농사체험장, 고기잡이 체험장(버들치 낚시, 미꾸라지 잡기), 버섯체험장. 가 볼 곳: 정혜사 신라불탑 13층 석탑, 대흥사, 산림로,
四山五臺
(동쪽 화개산, 서쪽 자옥산, 남쪽 무학산, 북쪽 도덕산과
독락당 동쪽을 흐르는 개천을 따라
북쪽부터 징심대, 탁영대, 영귀대, 관어대, 세심대)
숙박시설: 독락당 외 민박 4곳, 홈스테이 1곳 민박문의: 054-762-6148 옥산서원, 독락당 관람문의: 054-762-7786
이석락 경주시 안강읍 출생, 자유문예 시 등단, 문학저널 초대작가(시), 자유문예 문인협회 부산경남지부장, 늘푸른문학회 운영위원, 소로문학골 소로동인, (사)한국문인협회 부산지회 회원, (사)한국육필문인협회 회원. 개인 시집: 내 발에 맞는 신이 없다 공동 시집: 그곳에 내가 있었네(5인 시집), 새벽 강을 바라보며(101인 시선) 동인지: '늘푸른문학', '햇살 드리워진 창가에 서서'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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