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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우신 주님
역사 안에 화가들이 많지만, 아주 탁월한 화가는 많지 않습니다. 몇 사람 되지 않는 탁월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 피카소인데, 그가 여행 중에 한 농가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인심이 많이 변했다고 하지만, 시골은 지금도 훈훈합니다. 서울 사람들은 깍쟁이지만, 시골 사람들은 인정이 있어서 손님을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스위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스위스를 방문했을 때 베로니나 쮜리히 같은 도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시골 사람들은 얼마나 따뜻하고 친절하게 맞아 주는지, 또 얼마나 융숭한 대접을 해 주었는지 모릅니다. 도시보다 시골에 은혜가 더 많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피카소가 묵었던 그 농가의 주인도 피카소에게 얼마나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접을 해 주었는지, 모처럼 피카소의 마음이 훈훈했습니다. 그리고 식사 후에 그 집의 아이들과 함께 지낼 때도, 아이들이 얼마나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노는지, 피카소는 아주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좋은 손수건을 갖고 놀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피카소는 그 손수건에 그림을 그려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얘야, 그 손수건을 좀 다오. 내가 예쁜 그림을 그려 줄게."
아이가 엄마 방으로 뛰어갔습니다.
"엄마! 저 아저씨, 이상한 사람인가 봐. 괜히 남의 손수건에 그림을 그린대. 손수건에 페인트 칠을 한대. 아주 이상한 사람인가 봐. 미쳤는가 봐." .
그러니까 엄마도 "참 이상하다. 그 사람이 정말 미쳤나? 왜 남의 손수건에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만약 그림을 그리도록 피카소에게 그 손수건을 맡겼으면 적어도 오억 이상은 벌었을 것입니다. 피카소가 그린 그림은 한 장에 한 사십 억이나 하니, 손수건에 그린 그림이라도 오억은 되지 않겠습니까?
그 농가의 가정이 얼마나 좋은 기회를 놓쳤습니까?
우리도 살아가면서 많은 좋은 찬스, 좋은 기회를 놓치고 삽니다.
특별히 예배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별한 기회를 주시는 시간입니다. 더구나 설교 시간은 운명을 바꾸는 뛰어난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시간입니다.
또 성령이 한 덩어리로 불의 혀같이 내려왔지만 120명 성도의 머리에 가닥가닥 임한 것처럼, 제가 지금 혼자 설교하지만 성령님께서는 가닥가닥으로, 개인적(individual)으로 내려오셔서 감동시키시기 때문에 여러분 개인에게 맞도록 적용시키시고 변화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설교 시간에는 나를 열어야 합니다. Open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게 그려 주세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 인격에 작업해 주세요.' 하고 맡겨야 갚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후회하지 않는 길입니다. 이 기회를 잡아야 됩니다. 이 시간에도 기회를 잡아 우리가 Upgrade되고, 더 값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피카소가 손수건에 그림을 그리면 그 손수건의 가치가 엄청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작업하시면 우리가 그만큼 가치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간이 그런 축복의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설교 준비하면서 얼마나 흥분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신비하고 놀라운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지구가 지금 무서운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무서운 소리를 내면서 공전을 하고, 또 자전을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팽팽 날려가지 않고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서 있는 이 곳에서 똑바로 지구를 뚫으면 아르헨티나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거꾸로 달려 있는데,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물론 원리가 있지만, 우리가 이렇게 날려가지 않고 똑바로 사는 것이 참 신비롭습니다.
지구의 많은 부분이 바다입니다. 그 바다의 물이 출렁이고 있는데도, 아주 세차게 도는데도 바다의 물이 육지를 덮지 않고 keeping, holding 되어 그대로 있단 말입니다. 참 신비합니다.
또 이 지구 밑에는 강이 흐르고 있어서,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어서 땅을 파면 생수가 솟아나고, 뜨거운 물, 펄펄 끓는 물도 흘러서 온천도 솟아납니다. 또 석유가 가득해서 수많은 자동차가 그렇게 석유를 태우고 태워도 계속 뿜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금이 나오고, 은이 나오고, 동이 나오고, 별의별 지하 자원이 다 나옵니다. 또 불덩어리가 있어서 불을 뿜어내기도 합니다. 신비롭습니다.
그리고 은하계의 별을 이천억 개로 보는데, 이 은하계 같은 은하계가 또 이천억 개가 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이 은하계 안에는 이천억 개의 별이 있는데, 그 별들 중에서 사람이 살고 토끼가 뛰고 새가 노래하고 샘이 솟아나는 별은 지구 하나뿐이란 말입니다. 엄청난 이 우주에서 사람이 사는 곳은 지구뿐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우연한 일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사람이나 생물을 연구하다가 깜짝깜짝 놀랄 일을 발견한답니다. 로봇을 아무리 잘 만들어도 손에 땀이 나는 로봇은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로봇을 아무리 인간같이 만들어도 로봇은 로봇에 지나지 않습니다. 손에 땀이 나는 로봇, 손톱이 자라는 로봇, 이가 자라는 로봇을 만들 수 없는 것입니다. 머리카락이 자라는 로봇을 만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학자들이 하나님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게놈이 무엇입니까? 모든 생명체의 모든 세포에는 설계도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세포의 설계도를 게놈이라고 합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나서 생명체가 되는데, 모든 세포에는 설계도가 있어서 아들이 아버지를 닮게 되는 것입니다. 딸이 엄마를 닮고, 손녀가 할아버지를 닮는 것입니다. 목소리까지, 점까지, 걸음걸이까지 닮는단 말입니다.
제가 거울 앞에 서면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거울 앞에 저 지용수가 서 있는데 마치 저의 아버지가 서 계시는 것 같습니다.
박테리아에 하나에도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코드가 있는데, 그것을 과학자들이 풀어헤치니 천 페이지의 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사람의 적혈구 하나의 코드를 풀면 백만 페이지의 책이 나온답니다. 그리고 사람 몸 하나 하나마다 하나님의 설계도가 들어 있는데, 그것을 다 풀어놓으면 그 책을 100m 높이로 쌓아놓고, 가로로 10km를 달리고 세로로 10km를 달려야 한답니다. 엄청납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보고 놀랍니다. 비행기, 그 쇳덩어리가 사람 수백 명을 싣고 어떻게 허허로이 떠서 하늘을 날아 서울에서 미국까지 가고, 영국까지 가느냔 말입니다. 그것도 논스톱으로, 쉬지 않고 어떻게 시카고까지도 가느냔 말입니다. 신비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쇳덩어리가 우연히 그렇게 날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비행기 엔진 하나를 만드는데, 부속품이 백만 개나 듭니다. 부속품 백 만개로 설계한 것을 그대로 맞추어야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비행기 하나에도 그렇게 정성이 들어가고 설계가 필요한데, 이 우주의 질서가, 억만 개의 별이 부딪치지 않고 척척 돌아가는 것이 어떻게 우연히 되겠습니까? 어떻게 가스의 부피가 큰 것은 태양이 되고 작은 것은 별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그 태양이 계속 타도, 누가 기름을 부어 주지 않고 계속 타기만 하는데도 부피도 줄지 않고 열도 줄지 않느냐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설계하셨기 때문입니다.
깨달으면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주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꽃을 보세요. 땅에서, 흙에서 수분을 빨아들였는데, 어떻게 저렇게 빨간색의 꽃이 나올 수 있습니까? 빨간색, 노란색, 참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놀랍고, 또 그 아들 예수님이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나신다고 성경에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히 다윗의 자손에서 메시아, 그리스도가 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세상에! 그 그리스도를 '내 주'라고 부릅니다.
시편 110편 1절을 보면, 다윗이 성령에 충만해서 자기도 모르는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이 말을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20장에 인용하십니다. 41절 이하에 보면, 많은 사람 앞에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다윗의 후손이라 하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후손이 되겠느냐?"
이런 관계는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석가, 공자, 마호메트 등 세상 모든 종교의 창시자들은 다 때가 되어서 태어났다가 때가 되어서 죽고 썩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자 잉태되어 오셨는데, 말세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탄부터 말세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가 말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2010년이 될지, 2050년이 될지 모르지만, 혹은 더 오랜 후가 될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초림부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가 말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루가 천 년 같기 때문에 이천 년도 이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구약에 예언된 그대로 말세에 오셨습니다. 구약에는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구약에 나타나실 때는 천사 같은 몸으로 잠깐 나타나셨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에 들어가서 죽게 되었을 때, 인자 같은 분이 내려오셔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분을 우리가 예수님이라고 추측하는데, 잠깐 오셨다가 사라지셨습니다.
사람 몸을 입고 오신 때는 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의 몸을 입고 나실 때, 그때부터 말세인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
즉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죄 지을 것을 보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창세 전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설계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로봇처럼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녹음된 노래보다 생음악을 좋아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때는 인격으로 찬양하지 않고 녹음된 노래나 로봇처럼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으로 찬양하기를 원하십니다. 또 세상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 의지로 사람들이 죄를 지어 다 멸망할 것을 아시고, 멸망당하는 그 불쌍한 사람들을 살리는 길을 설계하셨습니다. 흠도 점도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같이 이 땅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3일 만에 부활시키시고, 또 승천시키셨다가 다시 재림하시도록 하나님께서 설계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놀라운 사실이 또 있는데, 그것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지용수를, 양곡교회를, 여러분을 아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우리 세포 하나 하나에 생명체의 설계도가 있는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입니다. 어떻게 우주가 생기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아셨느냔 말입니다.
에베소서 1장 3절, 4절에 말씀하십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할렐루야!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땅에서 누리는 축복이 많습니다만, 이것은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참 복, 신령한 하늘의 복은 하늘에 가서 받게 됩니다.
하늘의 그 모든 복을 주시기 위하여 창세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단 말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되면 놀라워 감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양곡교회를 아셨습니다. 창세 전에 여러분을 아시고 부르셨습니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하시는 분이 계실지 몰라도, 왜 그럴 수 없습니까?
하늘에 있는 은하계의 별이 이천억 개인데, 이런 은하계가 또 이천억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 엄청난 별도 컨트롤하시고 질서대로 돌아가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60억 인구를 마음대로 못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는 식은 죽 먹기보다 더 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는 아주 간단한 일이란 말입니다.
이 하나님을, 이 주님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감격해서 주님을 찬양하도록,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하늘의 복을 주시려고 하나님께서 설계도를 가지고 계획하셨단 말입니다.
제가 김영숙 씨를 사랑하는 것은, 김영숙 씨가 로봇이라 태어나면서부터 지용수밖에 몰라서 "용수님, 용수님. 사랑합니다. 용수님, 용수님…"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마 지겨워서 제가 "아이구! 로봇아, 좀 꺼져라!"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남자도 사랑할 수 있고, 저 남자도 사랑할 수 있는 김영숙 씨가 저를 사랑해서 자유 의지로 저를 택해 제 아내가 되었으니 제가 기쁨으로 김영숙 씨를 사랑한단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기계적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데 죄를 짓지 않고, 우상을 섬길 수 있는데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합니다."할 때 하나님께서 감격하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이러한 찬송과 경배를 받으시기 위하여 예수를 설계하셔서 말세에 우리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존 칼빈이 말했습니다.
"마지막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렇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은 이 마지막 때에 은총이 가득한 증거다." 할렐루야!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장 2절) 할렐루야!
다윗이 성령 충만해서 얼핏 예수님을 주라 불렀지만, 예수님을 뵙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에 대해서 예언을 했지만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성령으로 만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 없이는 하나님께 갈 길이 없습니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사 영광을 주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천하 인간의 이름 중에, 천지에 있는 이름 중에 구원받을 만한 이름은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오직 예수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그 길이요, 내가 그 진리요, 내가 그 생명이라" 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뿐인 길, 하나뿐인 생명, 하나뿐인 진리, 하나님께 가는 길은 오직 나 하나뿐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우리 주님께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치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자요,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자라."
그런데 요한복음 14장 8절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여, 하나님 아버지를 좀 보여 주세요. 그러면 우리가 족하겠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빌립아, 답답하구나. 네가 나와 이렇게 오래 있으면서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 내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고 아버지 안에 내가 있는 것을 모르느냐?"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지만 그 안에 하나님께서 같이 계십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요한복음 17장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곧 지게 되셨을 때, 십자가를 앞에 놓고 우리 주님께서 사람처럼 기도하셨는데, '창세 전에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내가 영광을 누렸는데, 지금도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누리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 드리셨습니다.
예수님 계신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고, 예수님 계신 곳에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놀라운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을 깨닫고 나면 이제는 믿음을 하나님께 두고, 소망을 하나님께 둡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놀라우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인간, 이 지용수를 창세 전에 알고 나의 설계, 지용수의 설계를 갖고 계시는데, 무엇 때문에 세상을 믿고 세상에 소망을 두겠습니까?
하나님만 믿으면 충분합니다.
우리 교회가 앞으로 오만 명, 십만 명을 구원하여 오만 명, 십만 명이 모여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우리의 계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 우리 양곡교회의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입니다.
저는 99세까지 사역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 계획이니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제 계획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 제 끝을 다 보시는 하나님께서 "야, 너 지용수는 120세까지 양곡교회에서 설교해야 된다."라고 하실 수도 있고, "야, 너 내일 천국으로 와야 된다. 네 천국 집이 완성되었다."라고 하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끝을 보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천국으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십니다. 그 끝을 보고 계시니 염려하지 마세요. 미래 때문에 불안해 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하나님께서 그 끝을 보시고 인도하고 계시니 담대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사랑하는 한 목사님의 사모님이 딸을 낳고 20년 만에 잉태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특히 신혼부부들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들 하나만 주세요."하고 기도하는 분들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아들을 낳으면 좋을 것 같지만 두고 보십시오. 지금 태어나는 아들과 딸의 비율을 보면, 아들 113명에 딸은 100명이랍니다. 이제는 어영부영하게 사는 남자, 어수룩한 남자들은 장가도 못 가게 될 것입니다. 남편 감은 남아 돌아가고 신부 감은 모자라니, 아니 그래도 여성 상위 시대니 뭐니 하는데 큰일났습니다. 한 여자가 두세 남자를 거느리고 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한 여자가 두세 남자에게 "당신은 설거지하고, 당신은 집 청소하고…"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따라합시다.
"주시는 대로 받자."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의 끝을 보시니, 딸이 있어야 좋은 집에는 딸을 주시고, 아들 필요한 집에는 아들을 주십니다. 또 '너는 남이 낳은 아이를 입양해서 길러라.'하실 집에는 아들도 딸도 주지 않으십니다.
어쨌든 그 사모님이 내일 모레 아기를 낳으시게 되는데, 저도 그 아기가 아들이기를 바라지만, 끝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니 주시는 대로 받아야 합니다.
그 목사님이 목회를 얼마나 재미있게 하시는지 모릅니다.
한 집사님이 목사님을 찾아왔더랍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왜 그러세요?"
"저, 집사 떼어 주세요. 집사 자격이 없습니다."
"왜 그러세요?"
"담배를 못 끊고 계속 담배를 피웁니다. 그러니 어떻게 집사가 되겠습니까? 떼어 주세요."
집사님이 되어서도 담배를 피우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목사님을 찾아왔겠습니까?
그때 목사님이 무어라 말씀하셨는지 아십니까?
"집사님, 계속 피우고 들키지 마세요."
들키지 말고 담배를 계속 피우면서 집사 직분을 감당하라는 말입니다.
목사님이 목회를 해 보니, 그냥 두어도 때가 되면 사람들이 담배를 다 끊었던 것입니다. 양담배를 갖다 주며 아무리 담배를 피우라고 해도 피우지 못할 때가 온다는 것을 목사님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는 것을 목사님은 믿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새 신자를 환영할 때, 그분이 장로님이 될지, 권사님 될지 우리는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한 장의 종이는 아주 약해서 금방 찢어지지만 그것을 벽에 붙여 놓으면 벽처럼 단단하게 되듯이, 사람은 약해서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담배 하나 술 하나 끊지 못하여 슬쩍슬쩍 술 담배를 하는 약한 집사님이라도 하나님께 붙어 있으면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내 남편은 약하고, 내 아내는 약해서 믿을 수 없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걱정이 없습니다.
저희 세 아이를 위해 제가 매일 손들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세 아이만 생각하면 '아이고, 교통 사고가 없어야 될 텐데, 잘 되어야 될 텐데….'하게 됩니다. 그러다가도 하나님만 생각하면 '괜찮다!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계획이 계시니 괜찮다. 할렐루야!' 하게 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고 믿고 살면 얼마나 편하고 배짱 좋은지 모릅니다. .
저희 아들들이 집에 온다고 소식을 듣고 기뻐서 어머니께 전화를 했습니다.
"어머니, 우리 아들들이 온대요. 보시러 오세요."
어머니가 손자들을 아주 사랑하시니, 반갑게 "가지.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못 오신다고 다시 전화를 하셨습니다. 작은집이 모를 도둑 맞아서 오실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토요일에 모를 심으시려고 금요일에 모 심을 논 일곱 마지기를 다 정리해 놓은 후, 모판에서 모를 옮겨 놓았는데, 그 모를 어떤 도둑놈이 다 훔쳐갔답니다.
아니! 쌀 백 가마니, 천 가마니를 훔쳐 가는 것이 낫지, 75세가 넘으신 할아버지 할머니가 농사지을 모를 훔쳐 가다니, 얼마나 나쁜 놈입니까? 저의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의 아들들이 다 잘 살고 있지만, 그래도 연세 드신 분들이 심을 모를 어떻게 훔쳐 간단 말입니까?
그래서 저의 작은어머니가 아주 믿음이 좋은 권사님이지만 울고 계신답니다.
"네 숙모가 저렇게 울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가겠냐?"
세상에! 제 평생에 모 도둑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습니다.
설교 준비를 하다가 작은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작은어머니!"
작은어머니가 울기만 하셨습니다.
"지서에 신고했습니까?"
"논에 심은 것을 신고한들 찾겠는가?"
"크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감사하세요. 물론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다 아시는 일이니 합력해서 선이 될 겁니다. 감사하세요. 그리고 이제 연세도 높으신데 좀 쉬세요. 올해는 그냥 푹 쉬세요."
"그래도 논을 어떻게 비워두는고. 모를 좀 구해다 심어야지."
지금 어디에서 모를 구해다 심겠습니까? 언제 벼를 뿌려서 모판을 해 가지고 모를 심겠습니까? 작은어머니께는 감사하라고 했지만, 제 마음도 아프고 답답했습니다.
'아이고, 하나님. 일곱 마지기를 어떻게 하지요?'
그런데 오늘 1부 예배를 드린 후에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가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작은집이 모 도둑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고 동네 사람들이 모두 남은 모를 갖다 줘서 모가 넘친다."
그래서 작은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더니 또 우셨습니다. 이번에는 동네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것 때문에 좋아서 우셨습니다.
그러니까 어제는 좋지 않아서 우시고, 오늘은 좋아서 우시는 것입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을 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편 30:5)
하나님께서는 벌써 '아, ○○○ 권사가 우는구나. 내일 아침에는 좋아서 운다.' 하시며 다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좋은 일을 보면 좋아하고, 좋지 않은 일을 보면 '아이고!'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멀리까지 다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도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아프지만 삼일 뒤에 부활한다.'하시며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서 다 설계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설계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를 설계하신 분은 우리 나라 최고 설계자 중의 한 분입니다. 아주 든든하게 설계를 하고 그대로 지어서 우리 교회는 지붕에 눈이 2m가 쌓여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설계대로 지어야 든든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처음 짓기 시작할 때의 일입니다. 제가 집회를 다녀오니, 120-130cm 높이의 벽돌이 쌓여 있었는데 꼭 창고 같았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의 벽돌이 부분적으로 조금씩 튀어나오게 세워져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아름답게 예술적으로 설계되어 있었는데, 벽돌공들이 창고의 벽을 쌓듯이 그냥 쌓았던 것입니다. 그냥 쌓으면 돈도 적게 들고 시간도 벌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양같이 순하고 고와 보이지만, 때로는 사자 같습니다.
"헐어요!"
그러니까 소장님이 말했습니다.
"아이고, 뺑 돌아가며 1m나 쌓은 것을 다 헐어요?"
"헐어요! 헐고 설계대로 다시 쌓으세요."
그래서 그것을 헐고 설계대로 다시 세워서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의 설계도를 갖고 계십니다.
그 설계대로 살면 우리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뛰어난 설계자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지용수를 설계해 놓으셨는데,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대로 담을 쌓으면 아름답기 그지없는 지용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용수 멋대로 하면 창고 같은 지용수가 되는 것입니다.
혹 "목사님, 하나님의 설계도를 좀 보여 주세요."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성경, 하나님 말씀이 설계도입니다.
개인적인 설계도는 다 달라도 우리에게 공통으로 주신 설계도가 성경입니다. 이대로 순종하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아름다운 아내, 아름다운 남편, 아름다운 자녀, 위대한 정치가,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남은 생애를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통했으면 믿음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 없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태인들이 아무리 십일조를 잘 하고, 아무리 자녀 교육을 잘 해도 구원이 없습니다. 유태인들의 자녀 교육의 방법과 바로 살려고 애쓰는 생활은 우리가 배워야 하지만, 그것으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어야만 받는 것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사람은 이제 하나님만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망도 하나님께 두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교회 권사님의 손자가 경기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를 소원하다가 그 학교에 들어가니 감사한답니다. 그러니까 네 살 먹은 그 여동생도 "나도 경기… 나도 경기…"하며 기도한답니다. 그것이 기도 제목이지만, 소망은 아닙니다.
경기 초등학교를 나오고, 경기 중학교를 나오고, 경기 고등학교를 나오고, 경기 대학을 나와서 경기 회사에 들어가 경기 회사의 부장이 되고 이사가 되면 무엇합니까?
세상의 경기는 좋다 나쁘다 합니다.
세상의 것은 좋은 것 같아도 정말 좋은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저희가 새 사택에 이사갔을 때는 그 집이 얼마나 좋아 보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서 물이 흘러 들어와 방바닥이 흥건히 썩어서 수리를 하고 있습니다.
새 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차리리 헌 차가 타고 다니기에 편하고 좋습니다. 새 차를 타면 얼마나 조심스럽습니까? 주차할 때도 누가 흠을 내면 어떻게 하나 불안합니다. 그러다 조금이라도 긁히면 내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픕니다.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살면 행복할 줄 알지만 결혼해서 살아 보십시오. 얼마나 골치 아픈 일이 많은지 모릅니다.
의사가 되면 좋을 것 같아도 의사가 되어 보십시오. 병원을 경영하면 병원이 잘 되다가 안 되다가, 환자들은 불평하고….
사람들이 자식, 자식 하지만, 자식도 소망이 되지 않습니다.
1975년도에 한 남편이 자기 부인이 중병이 나자 이혼하고 갔습니다. 참 나쁜 남자입니다. 중병이 생겼으면 남편이 더 필요한데, 이혼하고 갔습니다.
그 부인이 어려운 몸으로 혼자 아들 셋을 키웠습니다. 아들 셋을 다 결혼시키고 그런 대로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풍으로 언어 장애가 오고 거동이 힘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주식 투자를 했다가 쫄딱 망한 둘째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와서는 말했습니다.
"어머니, 남은 재산을 우리에게 주시면 잘 모시겠습니다."
그래서 자기 재산을 둘째 아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재산을 받자마자 아들과 며느리가 어머니를 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서울 지방 법원에 고발을 했습니다.
'아들놈한테서 내 재산을 빼앗아 달라.'
그래서 어머니가 재산을 다시 돌려 받았습니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자식도 잘 키우고 회사 일도 부지런히 해야 되지만, 거기에 소망을 두면 나중에 땅 칠 일이 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두어야 됩니다. 하나님께 두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섭섭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배신하지 않으십니다. 천국까지 책임지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요한복음 14:1-2)
사기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늘에, 천국에 우리 집도 없는데 우리 주님께서 "천국에 네 집이 있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여러분과 저의 집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께 있을 때 모든 것이 다 있는 것입니다.
어느 중학교 3학년 교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선생님이 수업을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코를 골면서 잤습니다.
"일어나라."
"야! 좀 관둬! 자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야.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 학생이 여선생님에게 욕을 하면서 이렇게 대들었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 아이는 그냥 되는 대로, 마음대로 사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짜증 속에서 될 대로 되라 하며 사는 것입니다.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이에게도 예수님이 들어가시면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혹 선생님이 실수해도 기도해 드리고, 부모님이 실수해도 '우리 부모님도 사람인데 …'하며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희망을 갖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는 아이는 부모님도 모르고, 선생님도 모릅니다. 아무리 교육해도,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이 가르쳐도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되는 길은 예수가 들어가는 길뿐입니다. 예수뿐입니다. 할렐루야!
예수가 들어가야 사람다운 사람이 됩니다. 좋은 학생,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사는 길도 예수가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만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 민족이 더불어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바르게 살아야 됩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예수님을, 이 천지에 구원 얻을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을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쉰들리스트 영화를 보다가 울었습니다.
한 사업가가 독일 나치에게 죽음을 당하는 유태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아주 애를 씁니다. 그래서 1100명을 구원합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장면을 보고 제가 울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자기 차를 보면서, 금 배지를 보면서 막 웁니다.
"내가 왜 저 차를 팔지 않았던고! 저 차만 팔았어도 열 명은 더 구했을 텐데…. 내가 왜 아직도 금 배지를 달고 다니는고! 이것만 팔았으면, 금 배지를 팔았으면 두 사람은 더 구했을 텐데…. 내가 이걸 몰랐네."
그때 제가 얼마나 뉘우쳤는지 모릅니다.
'사업가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저렇게 애쓰는데, 나는 목사인데, 사람 구하는 목사인데 저런 열정이 있나?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겠다는 열정이 내게 있나? 도대체 나는 뭔가?'
그래서 제가 한참 울었습니다.
쉰들러가 그렇게 애써서 1100명을 구했지만, 그들은 몇 십 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의 구원은 천국으로 가게 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영생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의 구원은 반짝하는 선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놀라운 예수님, 창세 전부터 미리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세우신 구세주 예수님을 전하면, 우리의 전도를 받고 구원받는 사람은 몇 십 년 살다가 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삽니다. 영원히 삽니다. 영원히 영생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우리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6월 24일은 제2차 태신자 전도의 날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의 영적인 쉰들러가 되어서 이 놀라운 예수님을 전하여 우리 나라가 주님의 나라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