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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으로 재배된 러셋 버뱅크 種 감자
감자는 남아메리카 잉카 지역이 원산지로, 유럽인들에게는 미개인들의 땅에서 건너온 수상하고 악마적인(?) 식물로 여겨졌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한낱 식물에 불과한 감자를 그들의 뿌리 깊은 이원론적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자신을 항변할 수조차 없는 그 노랗고 동그스름한 덩이줄기 식물에게 도덕적 편견의 잣대를 들이댔습니다. (물론 감자는 차후에 웅변에 가까운 자기주장을 하게 되죠^^) 감자라는 새로운 식물은 영국인들이 억압하고 착취하던 아일랜드인들의 주 식량원이 되면서 아일랜드인들을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고 그와 더불어 영국인들에게는 매우 비위에 거슬리는 식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밀은 빵으로 변화되고 승화(?)되지만 감자는 감자 그 자체로 머문다는 점에서 경이롭지도 않으며 매혹을 지니지도 못한 식물로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밀이 하늘을 향해 자라나 태양 아래서 영글고 수확과 도정을 거쳐 정결한 순백의 가루로 빻아진 후 발효라는 신비(?)하고 긴 여정과 오븐 속에서의 고난(?)을 통해 갖가지 형상의 빵으로 태어나는 것에 반해 감자는 캄캄한 땅 밑 어둠속에서 자라났고 농부의 섬세한 손길과 농경문화가 축적한 기술 없이도 풍성하게 번식했으니까요. 껍질도 벗기지 않은 채로 그저 화덕에 던져 넣거나 솥에 삶기만 하면 주린 배와 부족한 영양을 동시에 채워줄 수 있는, 하층계급의 필요에 부응하는 <패스트푸드>였던 것입니다. 감자는 무던한 적응력과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고(高)영양가의 작물이었던 탓에 도리어 야만과 단순과 저급을 상징하는 식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영국인들은 아일랜드인들을 경멸하듯이 감자를 경멸했습니다. 밀은 문명을 상징하는 식물이었지만 감자는 야만을 상징하는 식물이었던 것입니다. 감자는 저장성이 떨어져 밀이나 다른 곡물들처럼 환금성이 적었기 때문에 경제의 논리와는 관련이 없는 식물이었습니다. 수확과 동시에 소비되어야 하는 먹거리 그 이상의 무엇이 될 수 없었죠. 감자는 아일랜드인들을 먹여 살렸을 뿐 아일랜드인들과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진보시키지는 못했다고 말한다면 감자에게는 참으로 억울한 모함이 될까요?^^
그러나 분분한 견해들과 편견과 심지어는 저주를 무릅쓰고 결국 감자는 유럽인들의 삶속으로 정착했습니다. 그 정착의 과정은 물론 쉽지는 않았습니다. 루이 16세는 마리 앙트와네트 왕비로 하여금 머리에 감자꽃을 꽂고 다니도록 했다고 해요. 왕실이 감자의 재배에 관해 유행을 선도하고자 했던 것이죠.^^ 또 왕실 경비병으로 하여금 왕실 감자밭을 지키게 하다가 자정이 되면 일부러 병력을 철수시켰는데, 서민들에게 <귀한 식물>이라는 환상을 심어줘 감자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고 감자 재배를 늘이고자 하는 의도로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그 야밤에 시민들은 감자밭에서 감자를 훔쳐내 널리 퍼트렸다고 하네요.^^
이 모든 감자 이야기의 결론은 결국 감자가 그 숱한 우여곡절을 거쳐 서구인들의 식탁을 점령했다던가, 그것으로 인해 증명된 감자라는 식물 종자의 우월성 같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저자는 감자를 비롯한 모든 식물들을 인간과 같이 의지와 욕망을 가진 생명체로 인식하고 생존과 종족 번식이라는 지극히 겸손하고 정당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 식물들이 걸어 온 역사를 조망합니다. 그 식물들의 욕망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간의 욕망에 관한 이야기는 언뜻 곁가지인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의 욕망이 펼쳐가는 경제의 논리가 자연의 논리를 변형시키고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일군의 사람들이 유전자 변형 식물을 재배하고, 인간의 이기심에 부합하는 그 식물들을 단일재배하려 드는 것, 그 시도의 성공으로 인해 지금 우리들은 길고 늘씬한 맥도날드 프렌치프라이의 원료인 러셋 버뱅크 種 감자가 점령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 감자라는 어엿한 하나의 생명이 가진 다양하고 소박한 디오니소스적인 욕망을 억압하기 시작한 인간의 아폴론적인 욕망이 가져올 감자와 인간 모두의 위기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온 세상에 널리 퍼진 교회 만큼이나 널리 퍼진 맥도날드 社가 미국 농부의 광활한 감자밭을 러셋 버뱅크로 도배한 장면은, 그 획일적이고 거대한 아폴론의 질서로 가득찬 수십 만 에이커의 농지는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1800년대 중엽 아일랜드를 휩쓴 기근의 원인은
아일랜드 전역에 럼퍼라는 단일 품종의 감자만이 재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일랜드 전역의 모든 감자가 유전적으로 동일했다는 뜻이죠. 감자 잎마름병이 아일랜드에 상륙하자 하루아침에 아일랜드 전역의 감자가 모두 썪어 문드러졌고 100만 구의 시체가 아일랜드를 뒤덮었습니다. 자신들을 지배하고자 한 인간에게 감자가 가한 처철한 응징(?)이었죠.^^ 작가는 결국 감자의 욕망을 결코 저지할 수 없는 인간 욕망의 허점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경제 논리가 자연의 논리를 거스르고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감자와 튤립과 사과, 그리고 대마초의 욕망에 관해 읽으면서 저는 인간의 욕망에 관해, 나 자신의 욕망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그 욕망들의 형상과 그것들의 자연스러움에 대해, 혹은 부자연스러움에 대해 생각했지요. 잉카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던 덩이줄기 식물이 인간을 유혹해 자신의 종자를 전 세계로 퍼뜨렸다는 점에서 감자의 욕망은 강력하고도 위대합니다.^^ 그러나 감자의 그 강력하고 위대한 욕망은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소박하고 겸손한 것이었습니다. 감자는 <럼퍼>의 이름으로, 혹은 <러셋 버뱅크>의 이름으로, 혹은 <맥도날드>의 이름으로 온 세계를 정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감자는 자신들의 고유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온 세상을 여행하고 온 세상에 널리 퍼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잎마름병으로 죽어가는 <럼퍼>에게 <가넷 칠레>의 이름을 가진 감자가 그의 꽃가루를 나누어주었을 때, 아일랜드에는 전혀 새로운 감자가 자라나 하나의 구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럼퍼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이름을 얻었고 그 새로운 이름으로 부활의 삶을 열어갔습니다. 자신의 종자를 퍼뜨리고자 하는 모든 생물들의 열렬하고도 변함없는 욕망은 늘 그것이 뿌리내린 대지에 가장 적합한 욕망으로 새로이 태어났습니다. 낯선 대지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다양하고 유연하게 변화하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자기 생명의 존엄을 욕망할 줄 아는 미물들의 이야기는 제게 깊은 감명과 경외감을 느끼게 했지요. 저는 자연스러움을 잃고 강박과 집착의 형상으로 변해 버린 인간의 욕망이 부끄러웠고,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똑같은 형태로 제공되는 맥도날드 프렌치프라이와도 같은, 표준화된 인간의 욕망이 서글퍼지는 것이었습니다. . . .
원인은 없습니다. 외부로부터의 감염이 아닌 질병은 거의가 선천적인 겁니다. 유전이라는 얘기죠.......
대학병원의 의사가 그렇게 말해 주지 않아도, 위암으로 돌아가신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보아도, 간암으로 돌아가신 시 할머님과 두 분의 시 작은아버님을 보아도, 부활축제를 앞두고 서른여덟의 나이로 영안실에 누워있던 철이와 그에게 암 유전자를 물려준 그 아버지를 보아도 그것은 맞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인 스트레스로 인해서 발병의 시기가 앞당겨질 수는 있지만 언제 오더라도 올 것은 반드시 오고야 마는 것이었습니다. 예측 가능한 유전적 질병에 대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현명함은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서 발병 시기를 가능한 늦추는 것 외에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젊은 날들이 노동과 자녀 양육을 무난히 감당하고 더불어 생(生)의 환희를 드물게나마 누릴 수만 있다면 병과 함께 고즈넉이 늙어가는 것은 오히려 은총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내게 이식되는 낯선 삶이 견딜 수 없었던 날들, 내게 낯선 삶을 이식하려는 존재에게 분노했던 날들로 인해, 그 스트레스로 인해 언젠가 오고야 말 것이 서둘러 당도했다면 그것은 인간의 그 유일한 현명함조차 지니지 못한 어리석음의 소치였겠지요.
나는 왜 그토록 내가 원했던 삶만을 고수했던 것일까, 하루아침에 섬 전체를 황폐하게 한 잎마름병의 질병을 견디는 길은, 그 삶의 길은 내게로 이식되는 것들에게 기꺼이 문을 열어주는 것이었는데, 나는 왜 그것들을 그토록 거세게 거부하면서 내 유전자에 집착했을까, 기껏해야 당뇨나 위암 발병 유전자를 지니고 살아가거나 대머리나 간암 유전자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생들이라는 것을 나는 왜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일까, 나는 왜 나의 삶을 럼퍼라는 단일종으로 뒤덮인 척박한 섬처럼 만들었던 것일까, 어느 날 문득 덮쳐올 잎마름병을 예측하지도 못한 채 그것에 대한 일말의 내성도 가지지 못한 단일하고 유약한 유전자로 살아왔던 것일까........ 나는 나의 그 깊은 어리석음을 탄식합니다. 생각해보면 달라진 것은 없는데, 갈릴래아에서 그분을 처음 만나 나를 앞서 갈릴래아로 가신 그분을 따라 다시 갈릴래아로 향하는 삶이었을 뿐인데, 물고기를 낚던 삶이 사람을 낚는 삶으로 옮아갔을 뿐인데, 그 그물질이 지난(至難)했을지언정 나는 여전히 비루한 삶의 현장에서 비루한 어부의 이름으로 평화로와야 했는데, 무엇이 크게 달라졌다고, 아니면 무엇을 크게 다르게 만들고 싶어서 나는 그토록 나의 존재와 나의 이름을 버릴 수 없었던 것일까. 나를 움켜 쥔 내 손 안에서 내가 으스러지는 줄도 몰랐던 것일까. 럼퍼의 부활은 멀고 먼 잉카의 가넷 안에 있었는데, 그 다름과 다양함과 낯설음 안에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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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해설단 가족 여러분, 기쁜 부활을 기원드립니다. 그리고 서로의 다양한 부활을 잡종교배합시다.^^
나도 동감....ㅎㅎㅎㅎ
늘 부활의 마음을 간직해야하는 아녜스에게 특별한 부활을 기대합니다. 근디 잡종교배의 결과는 잡잡종으로 나오는 것이 아닌가......ㅎ~~
늘 언니의 여유와 당당함을 사랑했고, 잡종교배를 통해 그것을 닮고 싶어요.^^ 기쁜 부활 맞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