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마을로 들어갑시다.
***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으면 사라진다고 합니다
오래전에 직장을 구하러 다닌적이 있었습니다. 장소는 원자력병원이었습니다
이곳을 가기위해서는 버스를 탔는데요 그 버스는 마치 시골동네를 지나는듯한
착각을 일으킬정도로 낙후된 마을이었습니다
마포에서 용산성당을 가기 위해서 언덕길을 올라갔습니다 그곳도 비슷한 광경이지만
지금은 그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것입니다
서울에 여러군데 있는 가난한 마을이 재개발이라는 미름으로 그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것입니다 서울역 맞은편 언덕위에 있는 쪽방촌도 그렇게 될것입니다
말이 좋아서 재개발이지 사실상 가난한 이들을 서울밖으로 몰아내고 가진자들이
그곳을 차지하게 만든것입니다.
가진자들은 목소리를 내게 마련입니다. 지난 두 번에 걸친 선거에서 보수당이 승리
했는데 그 가운데는 2030대 남성들의 지지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중에서 수도권에
사는 남자들이 과연 부자라서 이들의 정책을 지지했겠습니까? 이런 논리는 처음에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었습니다. 왜 가난하고 소외된 건강한 남성들이 그런 선택릏
하느냐입니다. 그것은 가난했던 한 남자가 어려움을 겪고 상경한것입니다. 그들의 성공은
기존 잘사는 이들에게 향해져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불편하고 가난한
동네에 살고 있지만 길건너 보이는 부유한 집으로 들어간다는 생각을 가진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지 서울외곽에는 가난한 이들과 부유한이들이 마치 공존해 보이는 듯했습니다
저는 빈민운동가가 아니기에 그런곳을 의도적으로 찾아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곳에 있는 호텔에서 하는 세미나를 듣기위해서 그리고 아는 교우가 다니는 성당을
가지위해서 그곳을 갔었던 것입니다
서울 북한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경로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만난 장소가 홍제성당이었습니다. 서울시내 경복궁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이
있었기에 미사가 끝나고 근처 유원지가 있는 북한산으로 올라갑니다
지금은 기억이 어스프레하게 나기에 어떤 산성문을 올랐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길이 없어서 성벽위로 다니기도하였지요
해가 지고 있었기에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습니다. 목표는 정릉유원지입니다
그런데 한참내려가다보면 어느틈인가 오르막길이 있고 이들이 되풀이되었지요
그러던 중 저멀리 큰 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렵게 나온곳이
국민대 옆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집으로 중심가로 나올수가 있었지요
우리의 신앙의 길도 우리가 원하든 말든간에 이런길을 거쳐나오게 됩니다
그때에 젊은 교우들과 지나가는 등산객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일행은
어떻게 되었겠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글은 그저 야담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불어서 살기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느끼기 위해서입니다
불편해도 사람이 좋아
노숙인들에게 주거 문제는 가장 절실한 문제입니다. 겨울엔 생사가 달려 있습니다.
시에서 주거지원을 하고 있는 쪽방과 고시원은 겨울엔 난방이 안 되고 여름엔
너무 더워서 차라리 노숙하는 게 낫습니다. 창문도 없어서 바람도 햇빛도 드나들지
못하는 폐쇄지옥입니다. 모기와 빈대가 서식하는 방에서 얇은 판자로 막아놓은
벽 너머에서 들리는 잦은 기침소리가 잠을 설치게 합니다. 그런데도 깔끔한 매입임대주택보다
쪽방촌을 더 좋하는 홈리스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는 말이 새삼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비마이너>에서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에 살다가 매입임대주택에 들어갔던 홈리스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이는 2015년에 서울 동자동 9-20 쪽방촌에 살다가 보수공사 때문에 퇴거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반발하다 서울시 자활지원과와 쪽방상담소의 설득으로 매입임대주택으로 들어갔습니다.
“반 토막 난 집에 살다가 막상 깨끗한 집을 보니 모두 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겁니다.
쪽방의 두 배는 되는 원룸에, 화장실과 싱크대도 방 안에 있어 편리해 보였습니다.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18만 원, 어디 가서 이 가격으로는 못 구할 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0년 동안 거주가 보장된다는 점이 안심이 됐습니다.
하지만 이사 이튿날부터 바로 현실적인 문제에 부닥쳤다고 합니다.
임대주택은 사내 외곽에 있어서 예전처럼 무료급식을 받으려면 1시간가량 이동해서
예전에 살던 동자동까지 가야합니다. 그곳에서 마을밥상 식도락을 이용하거나
인근의 무료급식소에서 끼니를 해결해야 합니다. 정기적으로 방문해야 하는 병원도
너무 멀리 있습니다. 서울의료원은 한 달에 한 번, 은평 정신병원도 한 달에 한 번,
영등포 요셉의원은 일주일에 한두 번을 방문해야 하는데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연고 없는 동네에서 섬처럼 고립된 생활을 하자니 너무 외로웠답니다.
그곳에선 문만 닫으면 누가 죽어나가도 모릅니다. 동자동에서 왔다는 젊은 친구는
임대주택에 살다가 죽고서 20일이 지나서야 알려졌습니다.
결국 그이는 입주 두 달 만에 50만 원의 보증금 중 반을 포기하고 다시 동자동으로 돌아왔습니다.
쪽방촌은 여전히 바퀴벌레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여전히 수급비로 꾸리는 삶은 팍팍하지만
마음만은 편안하다 했습니다. “이웃을 들여다보고, 내가 어려운 순간에 이웃들이 다가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쪽방촌에서도 흙이 있는 곳에선 꽃을 키우고 채소를
가꿉니다. 빈손 부비면서 담배 나눠 피우고, 때로 싸움질도 하지만, 눈 마주칠 사람들이 거기 있어
편안합니다. 그들 사이에서 나도 말 한 마디 주고받으며 미소 지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위도 장마도 태풍도 물러나니, 그들도 이제 조금 사는 게 나아질 것입니다.
출처 : 가톨릭일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