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권선애
귓밥 파기
강인한
나는 아내의 귓밥을 판다.
채광가(採鑛家)처럼 은근히
나는 아내의 귓구멍 속에서
도란거리는 첫사랑의 말씀을 캔다
더 멀리로는 나에 대한 애정(愛情)이 파묻혀 있는
어여쁜 구멍
아내의 처녀적 소문을
들여다보다가
슬며시 나는 그것들을 불어버린다.
아, 한숨에 꺼져버리는
고운 여인의 은(銀)부스러기 같은 추억(追憶).
-------------------------------
귓밥 파기 / 자작시 해설
<시의 표정, 말의 몸짓>
이 「귓밥파기」라는 시는 1965년에 발표된 작품이다. 내 나이 스물 두 살, 물론 결혼 전이다. 문단이라는 곳에 정식으로 명함을 내민 것이 1967년이므로 이것은 사실 비공식적 처녀작이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대학교 재학 중이었는데, 그 무렵 나는 열병 이상으로 치열한 시병(詩病)에 걸려 있었다. 그 때 김광림 시인이 주간으로 계시던 「현대시(現代詩)」라는 제호의 얄팍한 시지에 '신인 작품'으로 활자화된 나의 처녀작은 이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의 나를 아는 사람들이 지금도 곧잘 이 시를 이야기할 때가 많다. 말하자면 체질적으로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시의 표정을 이 시가 지니고 있다는 걸 뜻함이리라.
'귓밥'이란 말은 표준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귀지'라는 표준어를 쓴다면 이 시는 상당히 다른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귀지 파기'와 '귓밥 파기'를 구별해서 발음해 보라. 전자가 왠지 추하고 축축한 느낌이 드는 것에 비하면 후자는 훨씬 시원하고 파삭거리는 느낌이 강하다. 그것은 '귓밥 파-'에서 울리는 자음끼리의 결합에서 파열음이 연속적으로 세 개나 발생하기 때문이다.
'귓밥'과 '귀지' 사이에서 나는 상당히 많은 갈등을 겪은 끝에 결국 '귓밥'을 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시에 쓰이는 국어는 물론 표준어라야 한다. 하지만 시의 빛깔이나 표정을 위해서는 때로 사전에 올라 있지 않은 말일지라도 꼭 필요하다면 주저해서는 안 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것은 꼭 필요한 경우라야 한다. 이를테면 내가 살고 있는 전라도에선 솥단지 바닥에서 긁어낸 바삭거리는 '깜밥'과 물을 부은 '눌은밥'이 분명히 구별되는데, 중부 이북에선 이 둘을 '누룽지'로밖에 달리 표현하는 말이 더 없음을 생각할 것이다.
시는, 아니 문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굳이 인용할 필요도 없이 상상력에 의한 소산이다. 그것이 반드시 자신의 체험에만 국한되는 것이라면 예술성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 된다. 그것이 또한 말(언어)로 표현되는 관계로 말 자체가 지니는 그윽한 울림과 몸짓도 충분히 살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더욱이 시에 있어서는 말의 울림과 몸짓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단지 의미의 부호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
1. 클로버(토끼풀)가 푸르게 펼쳐진 언덕이 있다.
2. 그 언덕 위에 바람이 분다.
이것을 시로 쓸 때 먼저 '클로버'로 써야 할 경우도 있으며, 또 '토끼풀'로 써야만 할 때도 있다. 어떤 시에 나는 이것을 "언덕빼기에 토끼풀이 바람보다 푸르다."고 썼었다. 일 년 뒤에 나는 이것을 또다시 "언덕빼기에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고 고쳐 썼다.
그 시행의 바로 위에는 "어린 쑥잎이 돋아나고"라는 구절이 걸려 있었다. "쑥잎이 돋아나고…토끼풀이…푸르다." 주격조사 '이'의 중복을 고치는 데 나는 일 년을 소비한 셈이었다.
토끼풀은 바람보다 푸르다.― 이 말은 토끼풀이 푸르다는 사실에 앞서 선행적으로 바람이 푸른 것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그러니까 이 속에는 '바람이 푸르다'고 하는 은유가 내재해 있다.
「귓밥 파기」에는 일련의 공통성을 띠는 말들이 있는데 그것은 '판다', '캔다', '파묻혀 있는'과 '채광가', '은(銀) 부스러기' 따위의 광물성의 어휘가 그것이다. 이 반대편에 놓인 시어들은 '귓밥', '귓구멍', '첫사랑', '애정', '소문', '추억'과 같은 여성적 어감의 어휘라 할 것인데 이 두 가지의 서로 속성을 달리하는 말들이 사이좋게 어울린 데서 약간은 곰살맞고 섬세한 표정의 「귓밥 파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부터 시인은 아름다운 작품을 쓰겠다거나 뛰어난 작품을 써보겠노라고 선언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마음속으로 호흡을 조심스레 가늠하며 시를 쓸 뿐이다. 마음의 심연에서 충분히 발효가 된 다음이라야 시는 그윽한 향기를 발하며 스스로의 빛깔과 표정을 가지게 된다.
귓밥(귀지)을 파는 일, 나는 그에 대해서 추억해 본다. 어렸을 때 시집가기 전 누나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누나가 내 귓밥을 파줄 때의 간질간질하고 조마조마한 즐거움. 그 반대로 젊은 아내의 귓밥을 내가 파주는 즐거움은 또 어떠할 것인지를 상상해 보았다. 달팽이집처럼 작고 예쁜 귓구멍을 들여다보며 조심스럽게 후벼 귀지를 팔 때의 조용한 몰입. 가만히 내 무릎을 베고 내맡긴 채로 눈을 감고, 숨조차 크게 쉬지 못하는 은밀한 믿음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것이겠는가. 대학 시절 스물 두 살에 생각해 본 아내의 모습이었다.
강인한
첫댓글 차츰 깊어가는 단어의 그리움에 접근
그래서 더 자꾸 파고드는 시의 자리.
귓밥에서 파생된 언어들이 참 다정하다
권샘 ~~~
고맙소이~~~~!!!
참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