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명(趙顯命) 신도비(神道碑)는 보령시 성주면 성주 5리 마을 노인회관 뒤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장방형(長方形) 대좌(臺座) 위에 오석(烏石)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이수를 올렸다. 조현명은 조선 영조 때의 문신(文臣)으로 자는 치거, 호는 귀록 또는 녹옹, 본관은 풍양이다.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亂)이 일어나자 도순무사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워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고 풍원군에 봉해졌다. 이어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도승지를 거쳐 1731년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에 올랐다.
그러나 그 이듬해 대마도(對馬島)의 화재(火災)로 조정에서 위문미(慰問米)를 보내려고 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파직(罷職)되었다가 1736년에 이조(吏曹) 판서(判書)에 오르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전임되었는데, 이듬해에 형정의 불공평(不公平)함을 상소(上疏)하였다가 다시 파직(罷職)되었다.
1738년 다시 관직에 들어서서 1749년 사은사(謝恩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왔고 1751년에는 좌의정에 전임되었는데 이 해에 박문수의 주장으로 호전법의 실시가 논의(論議)되자 균역청(均役廳) 당상으로서 그 구체적 절목(節目)을 결정하여 양역의 합리적(合理的) 개혁(改革)을 보게 했다.
노론(老論)에 속한 인물이었으나 탕평책(蕩平策)을 지지 영조(英祖)의 정책 수해에 적극 협조했고 청렴(淸廉)한 생활로 일관(一貫)했으며,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도 세워졌다. 그의 시조(時調) 1수가 해동가요(海東歌謠)에 전하며, 저서(著書)에는 “ 귀록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