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1913년 티베트를 방문한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
1900년 티베트에 처음 들어 간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다가 왔지만 자료를 조사하면서 그가 갖고 있었던 '신념'과 '열정'에 대해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티베트에 밀입국하여 불교를 공부했고 두번째 길에서는 산스크리트어를 번역한 티베트 대장경을 갖고 일본에 돌아와 일본내 티베트학의 큰 주춧돌을 놓았습니다.
티베트를 가게 된 이유
가와구치 에카이는 25세때 출가하여 일본 황벽종(黃檗宗:일본 선종의 일파)의 승려가 되었습니다. 한문으로 된 경전을 읽으면서 그는 '이러한 어려운 문자인 한자로 적혀 있으면 일반 사람들은 불교를 이해할 수 없겠다.
반드시 일본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일본에 들어와 있던 일부 한역 경전은 원문인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 경전과 다른 부분도 있었기에 이것으로는 번역할 수 없고 반드시 원래 경전과 대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그때부터 티베트행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티베트일까요? 불교가 융성한 곳은 인도이지만 인도불교가 쇠락하면서 경전들이 없어져 그 형태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도 후기 불교가 고스란히 티베트로 옮겨져 있었고 경전 또한 인도에 없는 것이 티베트에는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부터 티베트어로 번역된 내용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티베트행을 결심했으며 당시 스리랑카에서 돌아 온 다른 일본 스님으로 부터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티베트, 멀고도 험한 길
요즘같으면 비행기를 타고 가면 넉넉잡고 이틀이면 도착하는게 티베트이지만, 그때는 사정이 뻔하지 않았을까요? 더욱이 일본은 섬나라여서 육로로 갈 수도 없고 그래서 배를 타고 우선 인도의 캘커타로 가게 됩니다. 일본 '고베' 항구를 출발할 때가 1897년경 이였고 이 때 그의 나이가 대략 32세가 되던 해입니다.
캘커타를 경유하여 북인도 '다르질링'이라는 곳에 가서 티베트인에게 1년여 동안 티베트어를 배우게 됩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여정도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몇줄의 문장으로 그의 여정을 뒤따르고 있지만 일본에서 인도까지의 뱃길, 낯선 캘커타에서 북인도까지의 쉽지 않은 여정 등을 상상해보면 아찔해집니다.
특히 인도를 다녀 온 분들은 알겠지만 처음 인도에 도착하면 문화적 충격, 입에 맞지 않는 음식과 기후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약110년전의 인도 여행길의 고충은 이루말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인도의 '다르질링'에서 1년여 동안 티베트어 공부를 한 가와구치 에카이는 34살때인 1899년 티베트를 가기 위해 네팔로 향하게 됩니다. 네팔로 들어가는 국경이 몇군데 있는데 아마 다르질링에서 실리구리를 거쳐 '카카르비타' 지역에서 카투만두까지 이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록상으로는 네팔에 최초로 입국하게 된 일본인이 바로 이 분이라고 하는군요. 이때 네팔에 입국할때도 일본인으로서가 아니라 네팔인으로 가장해서 들어오게 되는데 우리나라나 일본 사람들의 생김새가 네팔 소수민족인 '구릉족'이나 '세르파'들과 너무 닮아서 그리 어렵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네팔의 무스탕지역, 저 멀리 보이는 곳이' Mt. 다울라기리(해발 8,167m) 인데 기록상으로는
저곳을 지나 티베트로 들어갔다고 한다.
카투만두에서 티베트를 가기 위한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하던 중 포카라지역에서 무스탕왕국을 경유하여 히말라야를 넘어 서부 티베트에 있는 4대 종교 (불교,힌두교,자이나교,뵌교)의 성산인 '카일라스(수미산, 티베트어. 강린뽀체)'산을 순례하고 티베트의 수도, 라싸로 들어가게 됩니다. 카투만두에서 출발한지 약 4개월 후인 1900년경입니다.
라싸에서 그가 머물렀던 곳은 '세라사원'입니다. 스스로를 중국인 승려라고 소개하고 그 절에 들어가서 약 2년간 공부했습니다. 세라사원은 티베트 불교 종파 중 '겔룩빠'(현재 달라이라마 14대가 속한) 소속 사찰로서 승가대학과도 같은 곳으로 라싸 근교의 데뿡사원, 간덴사원과 더불어 티베트 불교중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절입니다.
1419년 쫑카빠 제자인 '싸꺄 예셰'에 의해 세워진 '세라'사원 입구 "세라사원의 전성기때
약 7,000여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다섯 개의 대학이 있었다고 하나
1959년 중국 침략 이후 세 곳으로 줄었다. 세라사원은 각 대학별로 전문분야를
공부하고 연구하는 승가 대학 역할을 하는 사원이였다"
이곳에서 공부하던 중 '가와구치 에카이'는 당시 일본과 영국은 동맹을 맺고 있었고 티베트는 영국과 사이가 좋지 않던 시절이여서 그 스스로 일본인임이 탄로나서 영국의 스파이로 오해를 받게 될까봐 결국 이곳을 떠나게 되어 1903년 인도를 거쳐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다시 티베트로 신념과 열정의 꽃 만개
1904년, 일본에 돌아온지 1년 반만에 길을 떠나는데 티베트어로 된 대장경과 산스크리트어 경전을 입수하여 일본어로된 경전을 만들기 위해서 이고 -1차 티베트행에서는 이를 갖고 오지 못했습니다.- 1차 여행 당시 네팔 국왕을 만났었는데 '한역대장경'을 헌상하기로 약속을 한 이유도 있었다는군요.
1915년 귀국한 그는 가져온 경전 번역과 포교 및 저술 활동에 전념하면서 이로써 일본내에 티베트 불교의 큰 주춧돌을 놓게 됩니다. 75세때 그는 재가불교가 세계평화의 기초이며 정토건립행이라고 표명해서 스스로 황벽종의 승적을 반납하고 티베트학 연구에 몰두하다가 1944년 도로주변에 파 놓은 방공호에 떨어져 머리를 다친 것이 원인이 되어 80세때인 1945년에 운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네팔에서는 '가와구치 에카이'를 기념하기 위해 포카라에 위치한 '국제산악박물관'에 그가이동한 루트가 전시되어 있고 2002년 '가와구치 에카이' 기념 우표가 발매되었다"
그가 출가이후 가슴에 품고 있었던 신념과 열정의 꽃은 일본에서 만개하였으며, 지금의 일본이 티베트학 부분에서 우리나라보다 상당히 앞선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길을 떠난 것은 오직 '타인을 위한, 중생을 위한 마음' 뿐이였습니다. 저서는 〈티벳 여행기〉를 비롯해서 20여 종류에 이르고, 신문 잡지에 발표한 논문이나 기술은 셀 수 없는 만큼 많다고 합니다.
17년간 인도, 네팔, 티베트 등에서 가와구치 에카이가 수집한 1,486점(불교 미술자료 818점, 민속자료 413점, 표본255점)의 자료는 일본 동북대학 종합 학술박물관(東北大学総合学術博物館)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첫댓글 무려 백년 전에....
어이구 !!
일본인들 중에 제가 존경하는 몇 안되는 인물입니다. 110년 전에 카일라스 꼬라를 성취한 사람으로 될마라 고개를 ,삼도해탈의 고개> 라고 명명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