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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간의 휴가가 주어지면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까? 저는 3주간의 시간과 경제적인 여건만 주어진다면 …… 저는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어디에 갈까? 무슨 일을 할까? 여러분은?
사도 바울은 3주간 동안 데살로니가에 있었습니다. 3주간은 어떻게 보면 긴 시간은 아닙니다. 어떤 일을 이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주간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위탁받은 복음 전하는 일에 매진했습니다. 핍박과 박해 가운데 있었습니다. 도무지 더 머물 수 없어서 야반도주를 해야만 했던 3주간이었습니다.
이 3주간 동안에 복음을 전했는데, 믿는 자가 일어났으며,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여기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에 있는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에 바울을 비롯한 동료들의 헌신을 사용하셨습니다.
3주간의 데살로니가의 생활 가운데 바울은 어떻게 쓰임 받았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해서 오늘 설교 제목처럼 정해 보았습니다. ‘어머니 같이, 아버지 같이’ 교회를 섬겼습니다.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 같이, 아버지 같이’라는 제목을 붙여 봅니다.
1. 바울은 어머니 같이 교회를 섬겼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7-8)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유순한 유모와 같이 아이와 같이 되어서 아이를 양육하는 것같이 했습니다.
어머니 같이 했습니다. 어머니는 대체적으로 잘 참고 유순합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자신의 권위를 부리면서 자식을 대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그렇게 살도록 DNA를 그렇게 창조하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인 저는 집에서 자녀들이 하는 것을 보면 속이 뒤집어 지는데, 어머니는 유순하게 대합니다. 자녀들의 입장에 서서 자녀들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아이를 기를 때에, 아이가 아프면, 아이를 대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태도는 다릅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갔는지, 약은 먹었는지, 이런 디테일한 것을 묻고, 처리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로서의 사랑 표현입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아이와 일심동체가 됩니다. 아이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생각하고 함께 아파합니다. 아픈 자식을 끼고서 함께 하면서 고통을 분담합니다.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요 태도입니다.
그 어머니의 마음을 아주 극단적으로 표현한 ‘범죄 영화’ 가운데 아직도 잊지 못하는 섬 듯한 장면이 있습니다. 아주 못된 아들이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강도로 위장해서 아버지를 살해합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나오는데 거실에서 그 어머니와 마주칩니다. 물론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봅니다. 아들은 완전 범죄를 위하여 그 어머니도 칼로 찌릅니다.
얼마나 못된 패륜아입니까? 아들이 찌른 칼에 죽어가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어떻게 나를 ….. 원망을 했을까요?
아들은 칼을 사용하다가 실수로 자신도 조금 다칩니다. 이때에 조그마한 아들의 살점이 바닥에 떨어집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칼에 죽어가면서도 무엇을 했는 줄 아십니까?
저의 어머니은 어린 저를 안고 ’대롱 대롱 김대롱’ 어루면서 ‘장군이 되라, 대통령이 되라’고 했습니다. 저가 성장할 때에 박정희 대통령이 장군으로서 쿠테타로 대통령이 되었거든요. 세상적으로 최고로 출세하여 권력을 누린다고 장군이 되라, 대통령이 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었습니다. 그저 잘되기를 바랍니다.
아들의 칼에 찔려 죽어가는 어머니는 마지막 남은 여력을 동원해서 바닥을 기어서 바닥에 떨어진 아들의 살점을 집어서 입안에 삼킵니다. 살인자의 단서를 없애려고 했습니다. 아들의 범죄가 발각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아들을 염려했습니다.
여기서 세상 어머니의 자식을 향한 극단적인 사랑을 저는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식을 향해서 최후의 순간에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것조차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때에 어머니는 무서울 만큼 강한 분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머니의 눈에는 자식이 허물이 보일까요? 안 보일까요? 저는 보일 것입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저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지만 저 못난 자식도 내 자식이라는 마음으로 가슴에 품습니다. 어머니이기에 ….
교회에도 이런 어머니가 필요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못난 사람이 교회에 와도, 모나고 흠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을 수 있는 사람, 상처입고 아파하는 사람을 가슴으로 품고 안아주는 사람, 살가운 말 한마디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 그리고 그들의 문제를 하나님에게로 가지고 가서 골방에서 고요히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는 교회는 따뜻합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어머니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데살로니가를 떠나 있지만그들을 기억하고 날이면 날마다 그들을 기도했을 것입니다. 어머니 같이 ….. 이런 어머니 같은 성도가 그립습니다.
2. 또한 바울은 아버지 같이 교회를 섬겼습니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11)
바울은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이’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래서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훈계)했습니다.
사실 바울의 데살로니가에서의 생활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바쁜 생활을 했습니다. 바쁜 아버지였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9)
밤낮없이 하였습니다. 사도로써 당연히 교회의 도움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지만 환란 속에 있으며 아직도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교회와 성도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을 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텐트 메이커로써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쉬어야 할 시간에 또 하나님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얼마나 피곤하고 바쁜 사람입니까?
요즘 같으면 직장에 업무에 지친 아버지가 주말이면 거실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젼을 보다 자다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아이들로부터 바쁜 아빠, 지친 아빠를 두고서 ‘아빠 나빠’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밤낮으로 일하면서 쉬는 시간도 없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에게 하듯이 성도들에게 심방하여 권면하고 위로하고 훈계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관계 속에서 권하고 위로하고 훈계를 하면서 성도들을 세워갔습니다. 아버지 같이 ….
요즘 많은 젊은이들을 아버지를 두고 ‘꼰대’라는 은어를 사용합니다. 꼰대가 뭡니까? 이 말은 보통 보수적이고 소통이 안되는 어른, 혹은 상사를 조롱할 때에 사용합니다. 꼰대라 불리는 사람은 좋은 사람과 거리가 멉니다. 밑에 있는 사람과 소통하려 하지도 않고, 어른으로서 모범을 보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꼰대들에게 보이는 6하원칙이 있다고 합니다.
6하원칙이란 ‘누가 무엇을 어디서 언제 어떻게 왜’이지 않습니까? 꼰대들이 많이 사용하는 언어입니다.
Who. 내가 누군 지 알아
What. 니가 뭘 안다고
Where. 어딜 감히 나에게
When. 왕년에
How. 어떻게 나한테
Why. 내가 그걸 왜
이 말을 보면서 저에게도 이런 꼰대의 모습이 참 많습니다. 꼰대에서 진정한 아버지로의 회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서구화가 된 가정문화를 보면 대체적으로 부계중심의 문화에서 모계중심의 문화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자리가 좁아지거나 적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미국의 통계에 의하면 십대 살인범의 72%가 아버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장기 복역수의 70%도 아버지 없는 가정이더라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중요합니다. 꼰대질 하는 아버지라도 …. 아버지를 세워주십시오.
아버지는 가정을 위해서 밤낮으로 일하므로, 가정을 지키고, 자녀들을 키우는 일로 생각합니다. 이것을 보람으로, 사랑으로 여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직장생활 가운데 그 많은 스트레스와 수모에도 술 한 잔을 입에 떨어 넣으므로 견디려고 합니다. 이것이 가정을 살리고 자식을 키우는 일인 것으로 믿습니다. 이런 단순한 아버지들이 많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서 어떻게 노력했는지를 보십시오.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10)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모범으로 행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성도들이 증인이 되고, 하나님도 그러하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살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천하에 인간 모두는 부정하고 그릇되고 흠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인간의 본성에 따라 살지 않기를 노력했습니다. 하나님을 닮아 의와 거룩과 진리로 살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바로 그러합니다. 자식들 앞에 이렇게 살기로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살기를, 보여주기를 노력합니다. 그러지 못한 부분도 많지만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 자식들이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면 아버지들은 자식을 탓하기 전에 ‘저 아이가 나를 닮아 그런 것이 아닌가 조바심을 가지고 반성합니다.’ 자식은 자신을 비추이고 있는 거울로 여기면서 자기를 돌아봅니다. 그리고는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가지고 권면하고 위로하고 훈계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DNA입니다. 꼰대질로만 받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자신이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이 권면하고 위로하고 훈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12) 바울의 분명한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함’에 있습니다. 이게 바로 바울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장래 목적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영광’입니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욕망의 돌파구나 한 풀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로 인해서 자식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제가 잘 알고 있는 한인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는 여러 번 교역자가 바뀌고, 성도들이 왔다 갔다 하는 세월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교회가 아름답고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면서 좋은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어떤 요인이 있을까요?
많은 요인이 있을 수 있지만 저에게 가장 큰 요인을 꼽으라고 하면 ‘자기 자리를 지키고 묵묵히 섬기고 있는 아버지 같은 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우리 목사님이 어쩌고 저쩌고 …. 누가 무엇이라고 하던데요’라고 많은 불만을 가지고 오면 장로님은 다 들어주십니다. ‘그래요’하면서 들어주고 위로해 줍니다. 그리고 스스로 삭입니다.
그리고는 목사님께 해야 할 말이 있으면 기도하면서, 목사님의 연약함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것도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게 장로님께서 부드럽게 간곡하게 말씀 드려도 목사님은 생각이 있고, 고집이 있어서 다 들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장로님께서 상처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래도 기도 가운데 삼키고 장로님은 교회를 섬겼습니다. 교회가 흔들리는 가운데 성도들이 갈팡질팡해도 든든한 아버지와 같이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금방 안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 같이 장로님께서 교회를 섬겼습니다.
저는 그 교회를 생각하면 다른 것 하나도 안 부렵습니다. 단 하나가 있다면 그 아버지 같은 장로님은 부럽습니다.
성도 여러분, 십자가는 예수님이 지셔야 하는 하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자리를 끝까지 지켜야 했습니다. 이때에 십자가 아래는 자기를 낳아주신 어머니 마리아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현장을 지키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어머니의 심장에 대목이 박히듯이, 새까맣게 타고, 함께 죽어가지 않겠습니까?
이때에 예수님은 자신으로 인해서 새까맣게 심장이 타 들어가는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 보았습니다. 입을 열어 말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어머니, 나는 어머니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당신은 내 어머니라고 ….’
그리고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어머니의 남은 생애를 부탁했습니다. 어머니의 노후를 부탁했습니다. 죽음의 자리에까지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끝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므로 하늘 아버지의 아들로써 세상구원을 위한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효자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니 마리아의 아들로서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노후를 챙기는 효성스러운 아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늘아버지와 마리아 어머니의 아들이신 효자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믿고 따릅니다.
그러기에 만약에 우리가 살아계신 우리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노후를 챙기지 않는 자가 된다면 불신자보다 더 못한 자가 됩니다. 그 믿음이 진정 옳은 것인지를 정검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지내도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부족하지만 자식을 도리를 다 해 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버이 주일로 지키면서 이제는 우리 모두가, 나이가 많든 적든 간에, 우리 모두가 어머니 같이, 아버지 같이 되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마치 어린 아이같이 여기고, 어머니같이 유순하게 사랑으로 섬겨 보십시오. 또 아버지 같이 우직하게 충성스럽게 섬겨 보십시오. 그 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세상에 지치고 상한 뭇 영혼들이 교회를 어머니 같은, 아버지 같은 안식처로 여기고 모여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머니 같이 아버지 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제목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매번 어린 아이같이 남의 도움만 받으며 유치하게 보채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본성인 어머니같이 아버지같이 사랑하며 섬기며 살아 가기를 기도하십시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하여 유순하게 해주시고, 끝까지 맡겨주신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처럼 우직하고 충성스러운 자가 되게 해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십시다. 나를 낳고 길러주시며 잘 되라고 훈계하시고 위로해주시는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려 살게 하시고, 그분들이 건강하게 믿음생활을 잘 할 수 있기를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늘 내 본위대로 살았습니다. 마치 아기처럼 유치하게 보채며 이기적으로 살았습니다. 키가 크고 나이가 먹었지만 어린 아이처럼 살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제는 예수님을 닮아 온유하고 겸손하게 어머니 같이 충성스러운 아버지 같이 교회를 섬기고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살아계신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하는 불효를 용서해 주십시오. 예수님처럼 효성스러운 아들과 딸이 되게 해 주십시오. 부모님들이 영육간에 강건하여서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을 주옵소서. 하늘 나라에 가실 때까지 정신줄 놓지 않게 하시고, 앉고 일어서며 출입하는데 강건케 해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