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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志
孫破虜討逆傳第一(1) 吳書 國志 四十六
孫策傳
○策字伯符(책자백부)堅初興義兵(견초흥의병)
손책은 자가 백부이다. 손견이 처음 의병을 일으킬 때,
策將母徙居舒(책장모사거서)與周瑜相友收合士大夫(여주유상우수합사대부)
손책은 어머니를 모시고 서현으로 옮겨 살았다. 주유와 함께 친구로 교유하며 사대부들을 모으자,
江淮間人咸向之(강회간인함향지)
장강과 회수 사이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들을 따랐다.
堅薨還葬曲阿已(견훙환장곡아이)乃渡江居江都(내도강거강도)
손견이 죽자 돌아와 곡아에 장사 지내고 나서 강을 건너 강도현에 살았다.
徐州牧陶謙深忌策(서주목도겸심기책)
서주목 도겸은 손책을 매우 싫어하였다.
策舅吳景時爲丹陽太守(책구오경시위단양태수)策乃載母徙曲阿(책내재모사곡아)
손책의 외삼촌 오경이 이때 단양태수를 하고 있어서 손책은 어머니를 수레에 태워 곡아로 옮겨 살게 하고
與呂範孫河俱就景(여여범손하구취경)因緣召募得數百人(인연소모득수백인)
손책은 여범, 손하와 함께 오경에게 의지하였다. 그런 인연으로 군사를 모집하여 수백 명을 모았다.
興平元年
흥평 원년(194)
從袁術(종원술)術甚奇之(술심기지)以堅部曲還策(이견부곡환책)
손책은 원술을 따랐는데, 원술은 손책을 매우 기특하게 여겨 소견의 부대를 손책에게 대부분 돌려주었다.
太傅馬日磾杖節(태부마일제장절)安集關東(안집관동)在壽春以禮辟策(재수춘이예피책)
태부 마일제가 절을 가지고 관동을 위로하고는 수춘에서 예로써 손책을 초빙하고
表拜懷義校尉(표배회의교위)術大將喬㽔張勳(술대장교유장훈)
표를 올려 회의교위에 임명하였다. 원술의 대장 교유와 장훈은
皆傾心敬焉(개경심경언)術常歎曰(술상탄왈)
모두 마음을 기울여 손책을 공경하였다. 원술은 항상 감탄하며 말하기를
使術有子如孫郞(사술유자여손랑)死復何恨(사부하한)
“술로 하여금 손랑과 같은 자식이 있다면 죽어도 또한 무슨 한이 있겠는가?”하였다.
策騎士有罪(책기사유죄)逃入術營隱於內廏(도입술영은어내구)
손책의 기병이 죄를 짓고 도망하여 원술의 진영에 들어가 마구간 안에 숨었다.
策指使人就斬之(책지사인취참지)訖詣術謝(흘예술사)
손책은 사람을 시켜 쫓아가 그를 죽이도록 지시하고 일을 끝낸 뒤 원술에게 가서 사죄하였다.
術曰(술왈)
원술이 말하기를
兵人好叛(병인호반)當共疾之(당공질지)何爲謝也(하위사야)
“병사들은 배반하기를 좋아하는데 당연히 함께 그들을 미워하거늘 무엇 때문에 사죄한단말입니까?”하였다.
由是(유시)軍中益畏憚之(군중익외탄지)
이로부터 군중에서는 손책을 더욱 두려워하고 어려워하였다.
術初許策爲九江太守(술초허책위구강태수)已而(이이)更用冊楊陳紀(갱용책양진기)
원술은 이전에 손책과 약속하여 구강태수가 되었으나, 뒤에 다시 단양의 진기로 바꾸었다.
後術欲攻徐州(후술욕공서주)從廬江太守陸康(종여강태수육강)求米三萬斛(구미삼만곡)
뒤에 원술이 서주를 공격하고자 여강 태수 육강에게 쌀 3만 섬을 요구하였다.
康不與(강불여)術大怒(술대노)策昔曾詣康(책석증예강)
육강이 주지 않자, 원술이 크게 화를 내었다. 손책이 전에 육강을 방문했지만,
康不見(강불견)使主簿接之(사주부접지)策常銜恨(책상함한)術遣策攻康(술견책공강)
육강이 만나주지도 않고 주부로 하여금 접대하게 하였다. 그래서 손책이 항상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원술이 손책을 보내 육강을 치게하면서
謂曰(위왈)
말하기를
前錯用陳紀(전착용진기)每恨本意不遂(매한본의불수)
전에 진기를 잘못 기용하여 매번 본래의 의도가 실현되지 않아 한스러웠습니다.
今若得康(금약득강)廬康眞卿有也(려강진경유야)
지금 만약 육경을 잡는다면 여강은 진정 경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策攻康拔之(책공강발지)術復用(술부용)其故吏劉勳爲太守(기고리유훈위태수)
손책이 여강을 공격하여 쳐부수었지만 원술은 다시 그의 옛 관리였던 유훈을 태수로 기용하자
策益失望(책익실망)先是(선시)劉繇爲揚州刺史(유요위양주자사)
손책이 더욱 실망하였다. 이에 앞서 유요가 양주자사가 되었는데
州舊治壽春(주구치수춘)壽春術已據之(수춘술이거지)
고을 옛 관소를 수춘이 다스렸는데, 수춘은 원술이 이미 점거하고 있어서
繇乃渡江治曲阿(요내도강치곡아)時吳景尙在丹楊(시오경상재단양)
유요는 바로 장강을 건너 곡아를 다스렸다. 이때 오경은 여전히 단양에 있었고,
策從兄賁(책종형분)又爲丹楊都尉(우위단양도위)
손책의 종형 손분도 또 단양 도위를 하고 있었는데,
繇至皆迫逐之(요지개박축지)
유요가 이르러 모두 겁박하여 쫓아냈다.
景賁退舍歷陽(경분퇴사역양)繇遣樊能于糜(요견번능우미)
오경과 손분은 물러나 역양에 살았다. 유요는 번능과 우미를 보내
陳橫屯江津(진횡둔강진)張英屯當利口(장영둔당리구)以拒術(이거술)
진횡을 강진에 주둔시키고, 장영을 당리구에 주둔시켜 원술을 막도록 하였다.
術自用故吏(술자용고리)琅耶惠衢爲楊州刺史(낭야혜구위양주자사)
원술은 자기의 옛 관리였던 낭야 혜구를 양주자사로 삼았다.
更以景爲督軍中郞將(갱이경위독군중랑장)與賁共將兵(여분공장병)
다시 오경을 독군 중랑장으로 삼아 손분과 함께 병사들을 이끌고
擊英等(격영등)連年不克(연년불극)策乃說術(책내설술)
장영 등을 치게 했으나 몇 년이 되도록 이기지 못하자, 손책이 바로 원술을 설득하여
乞助景等平定江東(걸조경등평정강동)
오경 등을 도와 강동을 평정하도록 요구하였다.
術表策爲折衝校尉(술표책위절충교위)行殄寇將軍(행진구장군)
원술은 표를 올려 손책을 절충교위로 삼고 진구 장군을 대행하게 하였다.
兵財千餘騎數十匹(병재천여기수십필)賓客願從者數百人(빈객원종자수백인)
병사는 겨우 천여 명이고 말은 수십 필이며 빈객으로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수백 명이었다.
比至歷陽衆五六千(비지역양중오륙천)
역양에 이르니 무리가 오륙천 명이나 따랐으며,
策母先自曲阿(책모선자곡아)徙於歷陽(사어역양)
손책은 어머니를 먼저 곡아로부터 역양으로 옮겼다.
策又徙母阜陵(책우사모부릉)渡江轉鬭(도강전투)
손책은 또 어머니를 부릉으로 옮기고 강을 건너 계속 싸워
所向皆破(소향개파)莫敢當其鋒(막감당기봉)
향하는 곳마다 모두 쳐부수니 감히 그 예봉을 당할 자가 없었다.
而軍令整肅百姓懷之(이군령정숙백성회지)
그리고 군령은 정돈되고 엄숙하여 백성들이 편안 하였다.
策爲人(책위인)美姿顔好笑語(미자안호소어)
손책의 사람됨에 있어서 용모는 아름답고 우스갯소리를 좋아하며,
性闊達(성활달)聽受(청수)善於用人(선어용인)
성품은 활달하였고 잘 들었으며 용인 술이 좋았다.
是以士民見者(시이사민견자)莫不盡心(막불진심)樂爲致死(락위치사)
이 때문에 사민으로 만나는 자 마음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고,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劉繇棄軍遁逃(유요기군둔도)諸郡守皆捐城郭賁走(제군수개연성곽분주)
유요가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자, 여러 군수들도 모두 성곽을 버리고 달아났다.
吳人嚴白虎等(오인엄백호등)衆各萬餘人(중각만여인)處處屯聚(처처둔취)
오 나라 사람 엄백호 등이 무리 각자 무리 만여 명을 모아 곳곳마다 주둔하였다.
吳景等欲先擊破虎等(오경등욕선격파호등)乃至會稽(내지회계)
오경 등이 먼저 엄백호 등을 격파하고자 하여 회계에 이르자,
策曰(책왈)
손책이 말하기를
虎等群盜非有大志(호등군도비유대지)此成禽耳(차성금이)
“엄백호 등의 도적무리는 큰 뜻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 번에 사로 잡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遂引兵渡折江(수인병도절강)據會稽屠東冶(거회계도동야)
드디어 군사을 이끌고 절강을 건너 회계에 의지하여 동야를 함락시키고,
乃攻破虎等(내공파호등)
바로 엄백호 등을 공격해서 쳐부수었다.
盡更置長吏(진갱치장리)策自領會稽太守(책자령회계태수)
모두 다시 관원을 바꾸고 손책 자신은 회계 태수를 겸하였다.
復以吳景爲丹楊太守(부이오경위단양태수)以孫賁爲豫章太守(이손분위예장태수)
다시 오경으로 단양 태수로 삼고, 손분을 예장 태수로 삼았다.
分豫章爲廬陵郡(분예장위여릉군)以賁弟輔爲廬陵太守(이분제보위여릉태수)
예장을 나누어 여릉군으로 하고 손분의 동생 손보를 여릉 태수로 삼고,
丹楊朱治爲吳郡太守(단양주치위오군태수)彭城張昭廣陵張紘秦松陳端等爲謀主(팽성장소광릉장굉진송진단등위모주)
단양의 주치를 오군 태수로 삼았다. 팽성의 장소, 광릉의 장굉, 진송, 진단 등은 모주가 되었다.
時袁術僭號(시원술참호)策以書責而絶之(책이서책이절지)
이때 원술이 분에 넘치는 칭호를 쓰자 손책은 글로써 책망하고는 절교하였다.
曹公表(조공표)策爲討逆將軍(책위토역장군)封爲吳侯(봉위오후)
조조는 표를 올려 손책을 토역 장군으로 삼고 오후로 봉하였다.
後術死(후술사)長史楊弘大將張勳等(장사양홍대장장훈등)
뒤에 원술이 죽자 장사 양홍과 대장 장훈 등은
將其衆(장기중)欲就策(욕취책)廬江太守劉勳要擊(여강태수유훈요격)
그들의 무리를 이끌고 손책에게 가려고 하였으나, 여강 태수 유훈이 공격하여
悉虜之(실로지)收其珍寶(수기진보)以歸(이귀)
모두 포로로 잡고 그들의 보물을 거두어 돌아갔다.
策聞之(책문지)僞與勳好盟(위여훈호맹)勳新得術衆(훈신득술중)
손책은 소식을 듣고 거짓으로 유훈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유훈은 새로 원술의 무리를 얻었고,
時豫章上繚(시예장상료)宗民萬餘家在江東(종민만여가재강동)
이 무렵 예장의 상료에서 같은 종교를 믿는 백성 만여 집이 강동에 있었는데,
策勸勳(책권훈)攻取之(공취지)勳旣行(훈기행)
손책이 유훈에게 공격하여 빼앗기를 권하였다. 유훈이 떠나고 나자
策輕軍晨夜襲拔廬江(책경군신야습발여강)勳衆盡降(훈중진흥)
손책은 정예병으로 밤낮없이 습격하여 여강을 점령하자, 유훈의 무리는 모두 항복하고
勳獨與麾下數百人(훈독여휘하수백인)自歸曹公(자귀조공)
유훈은 휘하 수백 명과 자신은 조조에게 돌아 갔다.
時袁紹方彊(시원소방강)而策幷江東(이책병강동)
이때 원소가 막 강하여 졌고, 손책은 강동을 병합하여
曹公力未能逞(조공력미능령)且欲撫之(차욕무지)
조조는 힘이 닿을 수가 없자, 그들을 다스리고자 하여
乃以弟女配策小弟匡(내이제녀배책소제광)
동생의 딸로써 손책의 작은 동생 광과 결혼시키고
又爲子章取賁女(우위자장취분녀)皆禮辟策弟權翊(개예피책제권익)
또 아들 조장을 손분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여 손책의 동생 손권과 손익을 모두 예로써 초대하였으며,
又命揚州刺史嚴象(우명양주자사엄상)擧權茂才(거권무재)
또 양주자사 엄상에게 명하여 손권을 무재에 추천하게 하였다.
建安五年
건안 5년(200)
曹公與袁紹相拒於官渡(조공여원소상거어관도)
조조가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策陰欲襲許(책음욕습허)迎漢帝(영한제)
손책이 은밀하게 허도를 습격하여 한나라 헌제를 맞이하려고 하였다.
密治兵部署諸將(밀치병부서제장)
비밀리에 병부를 두고 여러 장수들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未發(미발)會爲故吳郡太守許貢客所殺(회위고오군태수허공객소살)
출발하기 전 옛 오군 태수 허공의 자객에게 살해되었다.
先是(선시)策殺貢(책살공)貢小子與客亡(공소자겨객망)
이에 앞서 손책은 허공을 죽이자, 허공의 어린 아들과 자객이 도망쳐서
匿江邊(닉강병)策單騎出(책단기출)卒與客遇(졸여객우)客擊傷策(객격상책)
장강가로 달아나 숨었다. 손책이 혼자 말을 타고 나가 갑자기 자객과 만나자 자객은 손책을 쳐서 상처를 내었다.
創甚(창심)請張昭等(청장소등)謂曰(위왈)
상처가 매우 심하여 장소 등을 불러 말하기를
中國方亂(중국방란)夫以吳越之衆(부이오월지중)三江之固(삼강지고)
“중국은 지금 혼란에 빠져있으나, 오와 월의 군중과 삼강의 견고함으로
足以觀成敗(족이관성패)公等善相吾弟呼(공등선상오제호)
충분히 성패를 볼 수 있을 것이오. 공들은 내 동생들과 서로 잘해보도록 하시오.” 하고는
權佩以印綬(권패이인수)謂曰(위왈)
손권에게 인수를 차게하고 말하기를
擧江東之衆(거강동지중)決機於兩陳之間(결기어양진지간)
“강동의 백성으로 거병하여 양진 간에 기회를 보아 결단을 내려
與天下爭衡(여천하쟁형)卿不如我(경불여아)
천하를 다투어 저울질함은 그대가 나만 못하나,
擧賢任能(거현임능)各盡其心(각진기심)以保江東(이보강동)我不如卿(아불여경)
현재를 선발하고 능력자를 임용하여 각자 자기의 마음을 다하도록 하여 강동을 보호함은 내가 그대만 못하다.” 하였다.
至夜卒(지야졸)時年二十六(시년이십육)
밤이 되어 죽으니, 이때 나이가 26살이었다.
權稱尊號(권존칭호)追諡策曰(추시책왈)長沙桓王(장사환왕)
손권은 제로 일컬은 뒤 손책의 시호를 추증하여 장사환왕이라 하고
封子紹爲吳侯(봉자소위오후)後改封上虞侯(후개봉상우후)
아들 손소를 오후에 봉하고 뒤에 상우후라 고쳐서 봉하였다.
紹卒(소졸)子奉嗣(자봉사)孫皓時(손호시)訛言謂奉當立(와언위봉당입)誅死(주사)
손소가 죽자 아들 손봉이 뒤를 이었다. 손호 때 손봉이 마땅히 제위에 올라야 한다는 유언비어가 있어 손봉은 주살되었다.
評曰
평하여 말한다.
孫堅勇摯剛毅(소견용지강의)孤微發迹(고미발적)
손견은 용감하고 강인하며, 외롭고 미약한 집안에 자취를 일으켰다.
導溫戮卓(도온륙탁)山陵杜塞(산릉두색)有忠壯之烈(유충장지열)
장온을 인도하여 동탁을 죽이고, 동탁이 파헤친 산릉의 능묘를 가지런히 하였으며, 충성과 장렬한 절개를 가지고 있었다.
策英氣傑濟(책영기걸제)猛銳冠世(맹예관세)
손책은 기개가 뛰어나고 이루어 나감이 뛰어났으며, 용맹과 날카로움이 세상을 덮었다.
覽奇取異(람기취이)志陵中夏(지릉중하)
기이함을 살펴 비범한 인물을 취하였으며 중국을 통일함에 뜻을 두었다.
然(연)皆輕佻果躁(개경조과조)損身致敗(손신치패)
그러나 모두 경솔하고 성급하여 몸을 잃고 패배에 이르렀으니,
且割據江東(차할거강동)策之基兆也(책지기조야)
또 강동을 할거한 것은 손책이 기초한 것이지만
而權尊崇未至(이권존숭미지)子止侯爵(자지후작)於義儉矣(어의검의)
손권의 손책에 대한 존숭은 지극하지 못했고 그 아들이 후작에 멈추었으니, 의리상 인색하다 할 것이다.
孫破虜討逆傳第一
吳書 國志四十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