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29일
북한 해군, 서해안에서 무력도발 (제2연평해전)
1999년 6월 15일 참수리 고속정이 부딪혀 막는 일명 "밀어내기 작전"으로 대응하던 중 남북간
전투가 발생하여제1연평해전이 일어났다. 같은 해 9월 2일, 북한은 서해 북방한계선(NLL)은 무효임을
주장하고, 인민군측 해상 군사통제수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제1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25분쯤 서해 연평도 서쪽 14마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침범한 북측
경비정의 기습 포격으로 남북 해군간에 교전이 발생했다. 이 때는 한일월드컵으로 한국은 물론 전세계가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었던 시기였다.
제1차 연평해전의 모습
2002년 6월 29일 도발 준비를 끝낸 북한 경비정 2척이 9시 54분 연평도 서쪽 해상에서 북방한계선을
침범한다. 이에 우리 고속정 편대가 차단기동을 실시하기 위해 접근하자, 북한 경비정은 북상했다. 하지만
북한 경비정들은 다시 남하하여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뒤 10시 25분, 참수리 357호에 기습 선제 사격을
가했다. 우리 참수리 357, 358호는 급작스러운 피격 상황에도 불구 즉각적인 대응사격을 하며 응전했다.
몇 분 후 10시 30분경 인근 해역에 위치하던 해군 고속정과 초계정들이 모두 격파사격을 실시하며 교전에
합류, 북한 경비정을 대파했다. 큰 피해를 입은 북한 해군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도주하면서 교전은 25분
만에 종료되었다.
참수리호 357
2002년 8월 21일, 해군이 제2연평해전에서 침몰한 참수리 357호를 인양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의 '참수리 357호'는 교전 후 예인 중 침몰했고, 승무원 중 6명이 사망, 19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 우리의 소중한 아들인 윤영하 소령, 한상국 중사, 황도현 중사, 서후원 중사, 조천형 중사, 박동혁
병장이 전사했다. 북한 피해에 대해 군 당국은 50명승선 규모인 이 경비정에 탔던 북한 병사들 가운데
적어도 10명 이상 사망하고 상당수가 부상을 입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발표했다.
사건이 발생하자 군 당국은 전군에 경계 강화령을 내리고 서산 상공에서 초계비행하던 KF-16 전투기
1개 편대를NLL 인근 해상으로 긴급 파견해 확전에 대비했다. 청와대 또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를 소집하는 등 비상태세에 들어갔다. 그리고 6월 29일 저녁 국무위원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에서 한국과
터키의 월드컵 3ㆍ4위전 경기를 시청하려던 계획을 취소했으며,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30일
일본을 방문하는 일정도 다시 검토됐으나 일정 취소가 국민 불안감을 높이고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를
촉발시킬 수 있다고 판단해 그대로 진행시키기로 했다. 그리하여 김대통령은 공동 개최국 대표로서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경기에 참석하고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지러 6월 30일 오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
그러나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유족들을 찾아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손을 잡아주긴커녕 일본으로
출국, 일본국왕 내외와 함께 월드컵 결승 경기를 관람한 것에 대해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서 본분을
망각한 행동이라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
이날 교전으로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해·협력 분위기를 보였던 남북관계가 급속히 냉각냈다. 국
방부 합동참모본부는 이날 오전 11시, 전 군에 경계강화 지시를 내렸다. 유엔사령부는 북한측에 경위
설명을 요구하기 위한 장성급 회담을 이날 오후 6시에 갖자고 제의했으나 북측의 불응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북한은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모두 11차례에 걸쳐 군사적 도발을 했으며, NLL 침범은 2002년
들어 14차례, 6월달 만 6번째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2002년 6월 30일 한일 월드컵 결승전 겸 폐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이
하네다 공항에서 영접나온 가와구치 요리코 일본 외상과 악수를 하고 있다.
2002년 7월 1일 오전 분당 국군수도통합병원에서 열린 제2연평해전 전사자 합동영결식. 이 곳에
대통령, 국방부장관, 합참의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월드컵 축구 3.4위 전 경기에 앞서 제2연평해전 사망자를 위해 묵념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