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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7.09.月. 남쪽바다에서 밀려올라온 장마전선
07월08일, 일요법회 늬우스 데스크.
여보세요, 일요법회 앵커맨 밸라거사입니다.
‘는개’ 라는 이름의 비가 있습니다. 논개論介와 비슷해 보이지만 진주 의기義妓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를 부르는 말인데, 사실 이런 비를 일부러 눈여겨 쳐다보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상태란 이슬비나 안개비 또는 비가 멈추는 사이의 과정이라서 금세 형태가 바뀌어버려 는개라고 부를 만한 시점을 딱 잡아내기가 흔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드물지만 ‘아, 는개다’ 하는 경우가 있긴 있으나 보통 그 상태가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요즘처럼 장맛비가 쏟아질 때면 비의 종류나 모양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의 비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호우나 폭우나 장대비가 있고 작달비나 가랑비, 이슬비나 보슬비, 가루비도 있습니다. 혹은 장비처럼 때로는 좀비같이 내리는 비도 있지만 이것은 고유固有한 비 이름은 아닙니다. 남자男子와 여자女子의 관계를 부르는 말도 비만큼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있습니다. 우선 누구에게나 편안한 느낌의 동의어同義語인 친구나 동무가 있고, 동료나 동지도 있고, 부부나 연인이나 애인이 있고, 동창이나 선후배도 있고, 직원이나 회원이 있고, 용감한 전우戰友나 훌륭한 도반道伴도 있습니다. 남男과 여女가 관계하는 명칭에 따라 서로 대하는 방식이나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는 시선도 달라집니다. 어느덧 는개는 사라지고 비는 멈춰버렸지만 오늘은 장맛비라니 잠시 뒤에는 어떤 이름을 가진 비가 분명 다시 하늘에서 내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에게 불쑥 “박영복이라고 혹시 기억나세요.” 하면 “가만있자 거, 주변에 흔한 이름인데 글쎄요.” 하시겠지요. “그럼, 무역금융 사기대출 원조인 74억 대출사기사건이요.” 하면 “아하, 그 사람 말이로군.” 라고 한다면 아마 나이가 60대 이상이겠네요. 당시로는 초대형 금융사기사건으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리처드 닉슨 미국대통령이 사임하고 부통령이던 제럴드 포드가 38대 미국대통령으로 취임했던 일은요” 하면 “아, 그 사건이야 알고 있지만 그게 언제였더라.” 하겠지요. 한 번 더 기회를 드려보는 의미에서 “8월15일 문세광과 육영수” 라고 한다면 “어, 그게 ‘74년도 8월15일인데”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야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한 미국대통령 사임보다도 당시 우리나라 대통령이었던 어느 부부의 문제가 당연히 중요했을 테지요. 바로 그해가 ’74년이었거든요.
이제 친구들과 여름방학 휴가를 가려고해도 각자 어디선가 달려와 광주로 일단 모여야 했다. 나도 서울에서 집으로 내려가 시간에 맞춰 친구들을 만났다. 여름방학이면 함께 놀러 다니는 멤버가 늘 그놈이 그놈이지만 이번에는 몇 명 얼굴이 바뀌었다. 내가 바뀐 얼굴들과 가깝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 친구가 또 다른 친구를 데려 오다보니 자연스럽게 몇 명 추가된 것일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완도 명사십리를 향해 이고지고 또 출발했다. 그해 여름 휴가여행을 이름 해서 ‘명사십리鳴沙十里 괴담’ 이라고 하면 좀 그럴듯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렇게 들려야지 여름날이 잠깐 동안이라도 시원해지게 될 것이 분명해보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육지에서 완도까지 벌써 다리가 놓여있어서 그냥 버스를 탄 채로 완도 항까지 단숨에 들어갈 수 있었다. 완도항에서 명사십리 해수욕장이 있는 신지도까지 작은 배를 타고 30여분가량 바다 위를 떠서 달려가면 눈앞에 나타나는 기다란 모래밭 한켠 배를 옹기종기 대놓은 곳에 대충 내려주었다. 여기가 완도 신지면 명사십리 해수욕장이었다. 이름이 명사십리鳴沙十里였으니 당연 넓고 긴 백사장과 뒤편의 곰솔 숲이 해수욕장 입지로도 썩 훌륭해보였다. 배낭과 짐을 풀고 백사장 뒤편 숲이 가까워 그래도 시원할 듯한 장소에 텐트를 치고 저녁을 지어 먹고 났더니 역시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여름휴가의 첫 번째 법칙인 목적지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나면 날이 어두워진다.가 왠지 딱 맞아떨어지는 하루였다. 그런데 그 넓은 백사장과 곰솔 숲이 있는 아름다운 명사십리鳴沙十里에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고등학생 시절보다 우리들의 여름방학이 많이 빨라져있었기 때문인데 명사십리 해수욕장을 개장하려면 아직 며칠을 더 기다려야했다. 그러긴 했으나 슈퍼마켓이나 음식점, 사워장 등 편의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 수도꼭지가 앞뒤로 다섯 개씩 붙어있는 세면장 겸 식수대가 있을 뿐이어서 해수욕장 개장을 하든 말든 큰 상관은 없어보였다. 얼씨구, 이렇게 유명 해수욕장에 공중화장실도 없어서 해수욕장 개장 전까지 해우소解憂所를 지을 것 같지도 않았고, 때가 되면 우리는 곰솔 숲으로 들어가 야전삽의 용도를 다양하게 사용해야 했다. 밤이 되자 저만큼씩 떨어진 곳에서 두세 개 텐트만 불을 밝혀놓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완도항에서 타고 온 배가 모래밭 한구석에 승객들을 내려놓자 그 주변을 서성이던 마을 사람들이 별로 반갑다거나 환영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귀찮다는 듯한 뚱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짐을 풀고 텐트를 칠 때도 몇 명의 마을 사람들이 우리 주변을 슬슬 맴돌았으나 여행객인 우리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호의를 베풀려고 하는 모습 같지는 않았고, 뭔가 의도적으로 지켜본다거나 감시하는 듯해서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저녁을 먹으면서 내가 그 이야기를 슬쩍해보았더니 친구들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여하튼 마을 사람을 제외하면 여행객이라고 우리들뿐인 상황에서 단체행동이나 몸가짐에 신경을 써서 문제가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말들이 기름통에 캠프파이어용 석유까지 가득 담아갔지만 그날 밤에는 모여앉아 합창을 하지도 않았고 캠프파이어를 피워놓고 떼춤을 추지도 않았다. 우리들이 흥에 겨워 뛰어놀기에는 커다란 백사장이 지나치게 스산한 바람만 감돌아 한적했고,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뭐랄까 경계나 적의를 담고 있는 것 같아서 신명이 솟아나지도 않았다. 그 대신 우리들은 둥글고 밝은 달 아래서 바닷가 산책을 했는데, 파도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들려오지 않는 희부연 공간의 묵언默言 산책은 더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분위기를 가중시키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알고 보았더니 저만큼 세워놓은 텐트 두세 개도 마을 사람들이 설치한 것을 알고는 뭔가 더 이상하고 궁금해졌다. 그래도 해수욕장에 왔으니 해수욕은 해야지요...
아침에 일어나서 야전삽을 들고 곰솔 숲에도 다녀오고 세면장에도 다녀왔으나 일행의 부스스한 얼굴들이 맑게 펴지지가 않았다. 모두가 지난밤에 모기에게 시달렸기 때문인데 대부분 바닷가 모기가 산 모기나 들 모기보다 사납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명사십리 모기는 사납다기보다는 집요執拗 쪽에 가까웠다. 준비해간 모기약을 여기저기에 발라보았는데도 모기에게 물린 팔다리와 목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렇지만 떠오르는 태양을 구경하고 바닷가를 걷고 섬나라 맑은 공기를 힘껏 들이마시면서 힘을 내어 아침을 맛나게 먹고 나서는 모기에게 물린 자리도 소독을 할 겸 바닷물로 풍덩 뛰어 들어가 파도에 몸을 맡기든지 수영을 하든지 잠수를 하든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루 종일 백사장이 하얗도록 줄기찬 뙤약볕이 공중에서 비단처럼 내리쬐었다. 명사십리鳴沙十里가 정말 십리 모래밭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래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는 엄청 멀고도 길었다. 백사白沙가 소리를 내는鳴沙 한낮의 광폭한 시간이 지나자 머지않아 사방 하늘에 노을이 물들어갔다. 우리들도 시간에 맞춰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리따운 여자 사람들이 나타나서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인적이 드문 바닷가에서 반듯한 사람들끼리 만났으니 예의로라도 마침 우리들 저녁식사가 준비되어있는데 함께 식사라도 하지 않겠느냐고 정다운 말을 건넸더니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좀 이른 저녁을 먹고 나와서 식사는 할 수 없으나 식사 후에 차나 커피를 한 잔 먹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상황이 그렇다면 차나 커피를 구입하러 다시 배를 타고 완도항까지 다녀오는 일쯤이야 얼마든지 불사不辭할 수 있었으나 배낭을 속속들이 뒤져보면 역시나 한두 녀석이 챙겨온 차나 커피가 들어있기 마련이었다. 텐트 한쪽을 들어 올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남男과 여女가 둘러앉아 커피도 마시고 이야기를 하니 단박에 한밤중의 스산하고 한적하던 공기가 여러 갈래로 쪼개지면서 활기차고 화사한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여자 분들은 담양에서 휴가를 온 동료선생님들이었는데 그중 한 분의 고향이 이곳 신지면이라서 함께 오게 되었다고 했다. 잠시 후에 마을로 돌아가야겠다고 여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아쉬운 마음이야 우리들 사이에 가득했지만 밤이 되면 여자 분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모처럼 무언가 이상하고 어색하던 해수욕장 분위기에서 벗어나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으나 역시 밤새 모기에게 시달리는 고통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침이 되자 모두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나 몸 여기저기를 북북 긁어대고 있었다. 점심 먹을 때쯤 되어서 어젯밤의 그 여자 분들이 배낭과 텐트를 들고 우리들 텐트 옆으로 오자 함께 거들어 텐트 치는 일을 도와주었다. 아무래도 해수욕장에서는 바닷가에 텐트를 치고 놀아야 휴가기분이 나는 것인데 마을에서 민박을 했더니 바닷가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시간이 들고 재미가 덜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서로가 유일하게 친한 이웃이 되어 점심도 함께 지어먹고 바닷물에도 함께 들어가고 저녁도 함께 먹고 커피도 함께 마시게 되었다. 그리고 밤이 익어 잠을 자러 텐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여자 분들에게 모기에 대해서 약간의 경고를 해주었다. 우리의 두려운 경고를 여자 분들은 다정한 호의로 받아들였는지 별로 걱정하는 표정도 없이 맑게 웃으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우리는 내일 아침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일부러 보자고할 수는 없었지만 아침식사를 하면서 여자 분들의 발목을 보게 되었는데 그만 깜짝 놀라버렸다. 하얀 발등에서 발목까지 수십 개의 붉은 점들이 알록달록 물들어 있었는데 밤새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었다. 그 정도라면 발등과 발목이 가려워 견딜 수가 없었을 터인데도 손 한 번 대지 않고 지난 밤새 ‘그래 너희는 물어라 나는 참을 테니까.’ 하는 방식을 고수했다는 것이다. 그런 일들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혹은 여자라서 가능한 것인지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었지만 그렇게 집요한 모기들의 공격을 받아내는 의연毅然한 태도에서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금도 완도 명사십리하면 하얀 발등과 발목을 조심조심 조사놓은 알록달록한 붉은 점들을 떠올리게 된다. 닷새간인가 머물렀던 명사십리 휴가를 마치고 배낭과 짐을 챙겨들고 다시 완도항으로 나왔다. 완도에서는 흔하지만 집에서는 귀한 반찬이 되어주는 멸치를 몇 포대 사서 버스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모처럼 엄마께 칭찬을 받았다. 그 뒤로도 여자 분들과 편지와 엽서가 몇 번 왔다 갔다 하긴 했으나 군대를 다녀오고 어쩌고 하면서 다 잊어먹어 버렸다. 만나면 헤어지고 헤어지면 잊어먹고 하는 것이 다 사람 사는 이치라서 잊어먹지 않으려면 헤어지지 않아야하고 헤어지지 않으려면 만나지 않아야하는 것인데도 또 누군가를 이렇게 저렇게 만나게 된다.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