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3월21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청주]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창세 17, 3 - 9
† 복음 : 요한 8, 51 - 59
★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신다. 그분께서는
아브람에게 후손과 땅을 약속하시며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고 계약을 지키라고 명령하신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당신 말씀을 지켜 영원히 죽지
않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믿지 못한
채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조상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께서 계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는 지난주부터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대립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유다인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격분하여
그분을 죽이려고 한다는 내용의 복음을 계속 듣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립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 말씀에 그 답이 있습니다. “너희는 그분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
어째서 예수님께서만 하느님을 아시고 유다인들은
모른다는 것인지, 다음의 두 가지를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영원으로
부터 나신 분이시지만, 유다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시지만, 그들은 모릅니다.
우리는 ‘내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지만, 하루살이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두 번째는 태도의 차이입니다. 사실 이것이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성경의 요한 1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4,7-8). 이와 비슷한 말씀이 오늘 복음에도 나옵니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그렇습니다.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곧 사랑할 때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 수 없습니다.
유다인들이 하느님에 대해 모르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매일 미사 -
◈ [청주]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3월21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 요한 8,51-59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시는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완고하고 편협한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가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죽음마저 극복하는 진정한 해방과 행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광과 명예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통교 안에 초대받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만드셨으니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시선의 폭과 받아들임의 관계
2013년 다해 3월21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시선의 폭과 받아들임의 관계>
어느 날 버스에 한 초라한 신사가 탔습니다. 멈칫멈칫 하는
것을 보니 사람들에게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자신이
없어 보입니다. 전화를 하는 아주머니, 친구들과 떠드는
학생들, 혼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는 청년, 그저 멍하니
한 곳만 바라보는 사람, 이들은 그 초라한 사람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 분은 용기를 내서 버스 중앙을 향하였고 입을
떼고 기어가는 목소리를 말합니다. “여러분 오늘 제 아내가
심장병 수술을 받습니다. ... ”
이 때 전화를 걸던 아주머니는 다 들리란 듯이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어이구, 이젠 지 마누라까지 팔아먹네...
창피하지도 않은가?”
다른 사람들도 왠지 자신들이 지금까지 해 오던 것에 더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아마도 자신들을 방해하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학생들은 더 크게
떠듭니다. 그 신사의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그리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무관심한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제 아내가 수술을 받습니다. ... 단 1초만이라도...
단 1초만이라도... 함께 기도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분은 돈이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1초의 관심을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들도 이 바쁜 세상에서 남의
이야기에 단 1초도 관심을 가져줄 수 없도록 앞만 보며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장 앞만 보고 깊고 넓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구의 고수들은 공을 치면 어떻게 모여서 다음에 어떻게 또
칠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지만, 저 같은 하수들은 하나만 처도
만족하기 때문에 당장 앞에 보이는 것만 칩니다.
장기나 바둑, 심지어는 고스톱까지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먹는다면 결국 게임에서는 승리할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래서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장기를 둘 때는 잘 못 두지만 훈수를 둘 때는 잘 두게
되는 것이 멀리서 더 넓은 시선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고수들은
모두 넓은 시선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장 일어나는 일이나
당장 들은 이야기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사람을 판단해
버리는 것은 인생의 하수들이나 하는 일입니다.
저도 사제가 될까 말까 현재만 바라보고 현재만 고민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조부모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행복이란 모토를 통해 내 생의 시작부터 나를 사제의 길로
부르고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는 확신이 생겨
흔들림이 없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고수가 되는 길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의 섭리가 나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당장 앞만 보는 것은 자신의
시선이고, 시공을 초월해서 보는 것은 하느님의 시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보다 있었다가 아니라 ‘있다’라고
현재형을 쓰십니다. 하느님에게는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습니다. 모두가 현재입니다. 이는 과거와 미래가 서로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과거가 없는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시선은 이렇게 모든 원인과 결과를 동시에 보고 계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냥 나를 무조건 싫어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나를 싫어하는 이유나 알자고 따질지
모릅니다.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왜 나를 미워하느냐고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는 너무 근시안적으로
바라보아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에 [안녕하세요]란
프로에 어머니에게 2년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청년이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에게 도대체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해결해 달라고 방송 신청을 한 것입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고등학교 때 자신을 너무나 괴롭히던
친구의 모습이 어머니에게서 보였기 때문이란 것이었습니다.
어머니에겐 사실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
때문에 상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화부터 냈다면 문제는 더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이해가 안 돼!’라고 말한다면 본인의 시야가
협소하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당장 일어나는 현상만 보고
판단하지 맙시다. 그렇게 좁은 시선으로는 협소한 판단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넓게 봐야 더 많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볼 때 당장 눈앞에 보이듯이 그저
요셉의 아들로밖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시야가 그만큼
좁았기 때문입니다. 시야가 좁은데 어떻게 그 크신 하느님이
보일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시선으로 보면 인간이 보이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아야 하느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멀리 떨어져서 바라봅시다. 보는 만큼
이해하고 보이는 만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인천]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떠한가요?
새벽에 일어나 녹차 한 잔 마시기 위해 물을 끓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에 집중하다 보니 끓었던 물이 다 식고
말았네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녹차 티백을 완전히 식어
버린 차가운 물속에 넣고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이
정도면 됐겠지?’하면서 차를 마시는 순간, 기대했던
따뜻한 물에 잘 우러난 녹차의 맛이 아니었습니다. 차가운
물과 함께 떫은맛이 입 안을 가득 메우면서 도저히 마실
수가 없더군요.
사실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중에서 어떤 물이 더 마시기
쉬울까요? 당연히 차가운 물이 마시기는 편합니다. 그러나
녹차를 우려낼 때에는 차가운 물이 아니라 뜨거운 물에
우려야 깊고 진한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차가운 물이
마시기 편하다고 그 안에 녹차를 넣으면 기대했던 맛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사실 많은 이들이
쉽고 편한 것만을 쫓습니다. 그 누구도 어렵고 힘든 삶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과정 안에서의 아픔과 상처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삶을 돌이켜보면
어렵고 힘든 시간을 잘 극복했을 때 스스로 더 성장했었음을
발견할 수 있지요. 뜨거운 물에 우려난 차가 더 깊고 진한
맛을 내는 것처럼, 고통과 시련 속에서 더욱 더 깊고 진한
삶의 모습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 닥칠 운명의 날을 알고 있었습니다. 즉,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알고 계셨지만 이를 피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이 고통과 시련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으며 아버지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입으로는
말하지만, 생활은 오히려 그분의 뜻을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을 세상의 관점으로만 하려고 하니, 특히
자신의 입장에 비추어 말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세상의 관점으로
이야기하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영원한 구원의 입장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대화가 통할 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버지의 뜻이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과 시련도 마다하지
않으셨던 예수님. 그렇기 때문에 깊고 진한 부활의 큰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떠한가요? 내 삶에 깊이와 진한 향기를
더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간절히 원하고, 갖고 싶고, 기다린 것은 조금 더 늦게 와도
좋겠다(조경란).
어제 수원교구청에 다녀왔습니다. 초라한 인천교구청과
비교되네요.
연애박사가 됩시다.
인터넷에서 본 글인데, 글쎄 이런 사람이 연애를 잘 한다고
하네요. 그 조건은 다음의 다섯 가지입니다.
사과를 잘 쪼개는 사람.
사탕을 끝까지 녹여먹는 사람.
유리창을 닦아본 사람.
찬밥도 맛있게 먹는 사람.
혼자서도 잘 노는 사람.
왜 연애를 잘 할까요? 그 조건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과를 쪼갤 수 있다는 건, 서로 나눌 줄 안다는 것.
사탕을 녹여먹는다는 건, 기다릴 줄 안다는 것.
유리창을 닦는다는 건, 정성을 들이는 것.
찬밥도 맛있게 먹는다는 건, 사랑이 초라해도 맛있게
소화한다는 것.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딘다는 건, 타인을 배려하고 자기
욕심으로 상대를 만나지 않는다는 것.
처음에는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해설을 들으니 고갯짓을
할 수밖에 없네요. 나누고, 기다리고, 정성을 드리는 모습.
또한 작은 것에도 기쁨을 간직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사랑을
갖춘 사람이 어떻게 연애를 못할 수 있겠습니까?
연애박사를 부러워하기보다, 여러분이 먼저 위의 조건들을
지켜서 연애박사가 직접 되어보면 어떨까요? 특히 내 가족
안에서부터 말입니다.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가장 의미 있는 선물
2013년 다해 3월20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요한 8,51-59
가장 의미 있는 선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류에게 주신 수많은 선물
가운데 가장 크고 의미 있는 선물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이것이 아닐까요? 죽을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유한한 우리 인간들을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시켜
주신 것.
왜냐하면 예수님의 육화 강생 이전의 인류는 너나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조(聖祖)
아브라함도 죽었습니다. 이집트 종살이하던 유다 백성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위대한 영도자
모세도 죽었습니다. 왕 중의 왕 다윗도 죽었습니다.
지혜롭기로 따지자면 누구도 당해낼 자 없었던 솔로몬
왕도 죽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 누구라도, 아무리 잘 나가던 사람이라도
‘죽음’이라는 장벽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세상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모든 것을 손에 넣었던 황제들, 권력자들,
세도가들도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통의 연속이지만, 한번 뒤집고 생각해보면
이 좋은 세상, 조금 더 사는 것, 더 사는 것을 넘어 영원히
사는 것, 이 땅위에서 불멸하는 것은 인류가 시작되어온
이래 계속되어온 염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그 누구도
죽음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죽음을 물리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은혜롭게도 예수님의 이 세상 육화강생으로 인해
그 오랜 인류의 염원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다행스런 일이 하나 있습니다. 부족한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영원성에 참여하는 길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영원한
생명, 곧 구원과 하느님 나라로 초대하시며 과제를 하나
주시는데, 그것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유다인들은 그 과제가 너무 쉬워 외면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라는
진리를 믿는 일, 예수님께서 곧 약속하신 구세주임을 믿는
일, 예수님은 세세대대에 살아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임을 고백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모두를 하느님 나라의 영원성, 곧
천국으로 초대하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그리고
영원히 살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소개해주십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특별한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창조자이시니
당연히 아브라함보다 먼저 태어나신 분이신데, 그것을
믿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셨으니 당연히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명명백백히
알고 계십니다. 바로 그 사실을 믿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에게 보내주신 선물이라는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와 일심동체라는 진리, 예수님,
그리고 그분 입에서 선포되는 말씀이야말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명제를 가감 없이 수용하고 굳게 믿는 일에서
구원이 시작되며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가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요. 예술은 사람들 마음에서
이어집니다. 몇 대 째 이어가는 가업도 그 가업은 몇 대 째
살아 있지 않습니까. 조상들의 얼도 후손들에 살아있고
열사들의 애국심도 아직 살았고요.
예수님 말씀을 따른 이웃사랑의 봉사도 다음 신앙인들로
이어가고요 여러 수도원 수녀원들도 설립자의 정신 따라
그대로 살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대로 살아가면 창조주의
큰 힘 따라 초월세상 속에 살 겁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부산] 아버지라고 부르는 분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다.
도대체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누구이기에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겁 없이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제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맞는가?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는
말부터, ‘그분을 안다’는 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말이다. 이런 당당함과
자신감의 근원은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에 대한 확신에서
온다.
예수님의 말과 행위, 그 모든 것은 그가 아버지라 부르는
분과의 관계 안에서만 온전히 이해된다. 아버지를 보여주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 그분의 사명이다.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설명이 안 된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아버지와 하나라는 데서 시작하고 끝난다. 신약성경의
모든 내용은 이러한 관점을 기본 축으로 삼아 전개되고
있다. 이런 예수님의 정체는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는
고백이 아니면 그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안 된다. 그러나
이 삼위일체는 이성적 추론의 영역이 아니라 초이성적
신념과 고백의 영역이다. 이성과 논리를 벗어난다고
해서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을 넘어서는
초이성적인 영역도 분명히 있으며, 이 영역은 이성과
논리의 틀에 묶여 있지 않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말씀은 이성을 넘어서 있는 것들에 대한 완전히 다른
태도를 요구한다. 이제 스스로 물어볼 일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을 그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잣대로만 재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
- 홍경완 신부(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교수) -
◈ [기타] 소나무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2013년 다해 3월21일 목요일 복음묵상
목요일 복음묵상
“그러자 그들은 돌을 들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요한8,59)
----
우리 인류는 너무도 많은 폭력으로 스스로의 역사를 만들어
왔고, 그 폭력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 폭력
안에는 서로가 피해자이며 동시에 가해자인 우리가 있다.
어떤 형태 어떤 내용의 폭력도 정당화 될 수 없고, 그것은
죄악이다.
일단 복음적으로 폭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무엇을 폭력이라고 하는가? 한마디로 폭력은 상대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넘어뜨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폭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언어의 폭력이던
물리적인 폭력이던, 그 어떤 표현 가능한 폭력이던 간에,
하나같이 모두 일그러진 마음에서 만들어진다.
그러기에 우리는 늘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한다.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을 덕담처럼 들어왔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자라왔다. 하지만, 마음은 지금까지의 삶을 통해
만들어진 자신의 모습이나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감정이나 마음의 움직임을 비록 숨길 수는 있다 하더라도,
이미 일어난 감정은 그대로 남기 마련이다. 마음은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앞날의 시간을 위해서 ‘가꾸어야
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폭력에 대한 식별이다.
사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민감하지 않다. 때로는 필요한
것조차 폭력이라고 단정하는 수도 있고, 때로는 폭력임에도
자연스럽게 방관의 태도를 보인다.
부모나, 스승이 진정으로 자녀나 제자를 위해 매를 들었다면
그것은 폭력이 아니다. 사랑으로 매를 들어야 하는 이의
마음이 더욱 아픈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반대로, 자리나
위치가 주는 권위를 폭력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병적 히스테리로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부모들도 있음을 알고 있다. 인성교육이 전혀 안 된 선생들의
폭력이 있음도 알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 했던 이들의 병든
마음을 생각해본다. 그들은 분명히 돌을 던져서라도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공감이 있었을 것이다. 돌을 든
명분은 하느님에 대한 모독에 대하여 참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 역시 잘못된 명분 잘못된 분위기에 공감할
수 있는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기에 기도해야 한다. 올바른 식별의 지혜를 청해야 한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기타] <거룩한내맡김영성>'거룩한 내맡김'의 종합
-이해욱신부
<지금까지 "거룩한 내맡김"의 종합>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에 대해서 지금까지 세 가지의
제목으로 올려 드린 글들,"거룩한 내맡김의 영성(23항)",
"후속(23항)", "斷想(23항)"등을 다시 한 번 더 읽어 보시면
결국은 모든 글의 주제가 다 "내맡김"입니다.
이미 다른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글은 저의 글이 아니며, 하느님에 대한 글입니다.
제가 늘 글을 쓸 때마다, "주님, 이 글은 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에 관한 이야기이니, 당신이 직접 써주십시오.
당신이 잘 쓰시면 당신도 좋고 저도 좋고 하니 말입니다.
당신이 못 쓰시면 제 책임이 아니라 당신 책임입니다.
그러니 잘 쓰십시오!"라고 말씀드리고 썼으니
이 글은 주님이 쓰신 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신다구요?
아님말구 말입니다.
하여튼 이 글을 몇 차례 반복해서 읽으시면 이 글은
당신의 것이 되며, 글이 살아 움직여 여러분을 변화시켜
줍니다.
"거룩한 내맡김"은 참으로 신비함 그 자체입니다.
내맡김은 현대사회 속에서 신비를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내맡김의 영성을 남들이 별
볼일 없이 우습게 여긴다 하더라도 그것에 그리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들이 내맡김의 진가를 몰라서 그렇게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내맡김의 진가를 알려면 지식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영을 열어 지혜를 넣어 주셔야 비로소 영안이 열려 그
진가를 알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는데, 영적인 생활을 하시는
신부님이나 수녀님들께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소개해
드리면 이 카페에 잘 들어오시지도 않으시며, 곧 시쿤둥
하며 잊어버리시는 모양입니다. 내맡김의 영성이 마음에
와 닿지 않으시는 눈치입니다. 더 높은 차원의 무엇이
있으신지 아니면 제 글이 우스우신지 모르겠습니다.
언젠가 TV에서 리어카꾼의 말이 제 마음에 와 닿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 리어카를 우습게 봐서는 안 됩니다.
제가 저 리어카로 좋은 집도 사고, 우리 애들 몇 명씩을
다 대학에 보낸 아주 훌륭한 리어캅니다!"라는 말이
말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을 우습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내맡김으로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소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통로 중에 가장 훌륭한 통로입니다.
이곳에 올려진 글들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더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글들이 여러분에게 다가가
여러분을 하느님의 사랑 안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느님을 뜨겁게 아주 뜨겁게 사랑하실
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 동경한인성당 이해욱 프란치스코 신부 -
거룩한 내맡김의 집 <마리아처럼>
http://cafe.daum.net/likeamaria/
◈ [기타] 사순 제5주간 목요일
2013년 다해 3월21일
어제 오후에는 방송사와 은행의 전산망이 마비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현대인들에게 전산망의 마비는 경제, 문화, 산업에
큰 타격을 주는 일입니다. 저도 인터넷이 접속이 되질 않으면
강론을 써도 함께 나눌 수 없고, 제가 있는 이곳 용문에서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없고, 은행거래도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전산망이 연결되면 인터넷 뱅킹으로 은행 업무를
보고, 서울 가는 기차표를 예약 할 수 있고, 보고 싶은 책도
검색해서 주문하고, 김연아 선수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연기도
볼 수 있습니다. 전산망의 마비는 많은 이들에게 눈은 있지만
어둠을 체험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유시민씨가 새로 쓴 책을 읽었습니다. 제목은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마이클 샐던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최근에 읽은 책입니다. 두 책 모두 우리의 삶과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감성으로
볼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는 우리의
‘뇌’ 구조를 잠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뇌는 뇌간,
변연계, 대뇌피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프로이드는
생물학적으로 연구를 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의식을 이드,
에고, 슈퍼에고로 구분하였는데 이는 뇌간, 변연계 그리고
대뇌피질의 구성과 비슷하다고 말을 합니다.
누군가를 돕고, 자기를 희생하고, 하느님을 생각하고,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가는 능력은 고도로 발달한 우리의 뇌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죽음 역시 호흡을 못하고, 심장이
정지하고, 뇌파가 멈추는 생물학적인 죽음이 있습니다. 이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생물학적인 죽음 이외에 철학적인 죽음을 생각합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하는지를 모릅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한 인격으로, 품위 있는 지성을 사용 할 수 없기에 철학적인
죽음에 이르렀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생물학적인 삶은 누구나 유한합니다. 철학적인 삶 또한
생물학적인 죽음에 이르면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은 또 다른 차원의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와 똑같은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해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사회 그리고 문화와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오늘 그 실마리를 제1독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비록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은 생물학적인
삶은 다 했지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았기에 신앙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반대로 자신의 욕망대로
살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어도 이는 신앙적인 죽음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저 역시도 언젠가 저의 생물학적인 삶이 끝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기억하고 있던 모든 것들도 저의 죽음과 함께 사라 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회가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생물학적인 삶을 무한이 이어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우리들의 희생과
우리들의 나눔을 통해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 모두가 신앙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복음의 가치를 상실한다면 좋은
단체는 될 수 있겠지만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신앙의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나의 모든 것을 나누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 조 재형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