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조 단군과 국시 홍익인간, 국기 단기, 국전 개천절을 재정립한 홍암 나철과 대종교는 우리의 미래를 가리키는 나침판과도 같다. 서일, 김좌진의 청산리대첩을 비롯한 항일무장세력의 본거지로10만의 순교자를 낸 것은 물론 주시경, 이극로, 신채호, 박은식 등 국어와 국사 운동의 출발도 홍암나철과 대종교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과정에서 국망도존(國亡道存, 나라는 망해도 정신은 살아있다) 기치 아래외교, 테러, 교육, 종교, 무장투쟁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싸웠고, 마침내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스스로 내놓았다.
1916년 추석인 음력 8월 15일 대보름, 홍암 나철이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한 지 100주기, 독립운동의 아버지이자 국학의 스승, 민족종교의 중흥자인 그의 발자취를 따라 벌교에서 서울, 도쿄를 거쳐 화룡, 영안, 밀산 등을 순례했다.
항일독립운동에서 1919년 3.1만세운동은 중요한 분수령이 된다. 그 직후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무장투쟁이 본격화된 것이다. 그런데 1919년 3.1(기미)독립선언의 효시가 된 1918년 대한(무오)독립선언을 바로 대종교가 주도했다.
대종교 측은 “4375년 무오(서기 1918) 봄에 기미 독립선언의 전주곡으로 서일, 김동삼, 김좌진, 유동설, 여준, 정신 등 39인의 동서(同署)로 독립선언을 발포”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학계는 통상 11월에 발표된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1917년에는 윤세복, 박은식, 신채호, 조성환, 홍명희, 조소앙 등 대종교 핵심인물 14명 명의로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한 바 있다.
무오독립선언 서명자에는 홍암의 뒤를 이어 대종교 2세 도사교가 된 무원 김교헌이 첫 번째로 자리잡았고, 이후 3세 도사교가 된 단애 윤세복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5천년 조정의 광휘(光輝)를 현양(顯揚)할 것이며”,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성할지어다”
등의 내용은 대종교의 역사의식과 무장투쟁관을 그대로 담은 것이다.
3.1만세운동의 결실로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해에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 당시 의정원 29명 중에서 대종교 원로가 21명이었고, 의장에 선출된 이동녕과 정부조직에 임명된 13명중에서 11명이 대종교 원로였다는 점만 보더라도 당시 대종교의 영향력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