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2723]유우석(劉禹锡)시-金陵五題(금릉오제)-5首
* 유우석(劉禹锡)
(772~842, 70세). 당나라 문학가, 철학가. 자는 몽득(梦得).
낙양 사람. 환관과 번진할거 세력을 반대해 낭주사마(朗州司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연주자사(连州刺史)가 되었다.
후에 배도(裴度)의 유력한 추천으로
태자빈객(太子宾客, 황태자를 보필하는 동궁 소속의 관원)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그를 劉宾客이라 불렀다.
중국 중당(中唐)의 시인으로 백거이의 장년 이후 시를 알아주고
격려하는 소올 메이트였고, 백거이는 젊은 날의 절친 원진이 작고한 후
유우석과 함께 시를 읊조리고 술잔을 기울이며 세월을 보냈는데,
백거이가 늘그막의 세 가지 소원을 노래한 시를 보면 태평한 세상,
건강한 신체, 유우석과 자주 만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젊은 날 정원 연간의 정치 혁신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개혁이 실패로 끝나면서
23년간 장강 이남으로 좌천되어 오지를 떠돌아다녔고,
불우한 인생이 작품을 더욱 단련시켜 백거이와 함께
‘유백(劉白)’으로 병칭되었으며, 민가의 창작기법을 배워서 애틋하고
순박한 감정을 자연스럽고 정치하게 표현하였고, 깊은 뜻을 기탁하여
당시 사회의 부조리를 우회적으로 고발한 우언시 역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 있으며, 작품으로는 지방관으로 있으면서
농민의 생활 감정을 노래한 “죽지사(竹枝詞)”, 그외 누실명(陋室銘) 시문집으로
“유몽득문집(劉夢得文集)(30권)” “외집(外集)(10권)” 등이 있습니다.
金陵五題
其一首.
石頭城(석두성)
山圍故國周遭在(산위고국주조재)
산은 금릉 감싸 예 그대로인데
潮打空城寂莫回(조타공성적막회)
물결만 허물어진 성을 치고 적막 더하네
淮水東邊舊時月(회수동변구시월)
회수 동쪽 예전 달이 떠올라
夜深還過女牆來(야심환과여장래)
깊은 밤 성가퀴 넘는구나
石頭城(석두성):남경 서쪽 청량산 일대 삼국시대 오나라가 성을 쌓음
故國(금릉) : 지금의 남경
其二首.
烏衣巷(오의항)
朱雀橋邊野草花(주작교변야초화)
주작교에 들풀 무성하고
烏衣巷口夕陽斜(오의항구석양사)
오의항에 석양 내리네
舊時王謝堂前燕(구시왕사당전연)
예전 왕도.사안의 집에 날던 제비
飛入尋常百姓家(비입심상백성가)
이젠 뭇사람 집에 날아드네
朱雀桥(주작교):육조시대 금릉 즉 남경에 세운 다리임.
烏衣巷(오의항):지금의 강소성(江蘇省) 남경시(南京市)
진회하(秦淮河) 남쪽에 있고 주작교가 있다.
王謝(왕사) : 왕도(王導).사안(谢安):
육조(六朝 : 東吳, 東晉, 宋, 濟, 梁, 陳)시대의 대표적인 귀족 정치인이다.
其三首.
台城(대성)
台城六代競豪華 (대성육대경호화)
대성은 육조시대 호화로움 다투고
結綺臨春事最奢 (결기임춘사최사)
결기루 임춘각 사치를 다했지만
萬戶千門成野草 (만호천문성야초)
수 많은 집들 함께 풀밭이 되었네
只緣一曲後庭花 (지연일곡후정화)
망국의 노래 한소절 남기고
台城(대성):육조시대 금성 禁城으로 황제의 집무실
結綺臨春(결기임춘): 결기루와 임춘각 진陳나라 후주(진숙보)가
세운 누각으로 호화로움
後庭花(후정화) : 원명 옥수후정화玉树后庭花로
남조 진 陳후제가 지은 곡으로 나라 망치는 노래라 평한다
其四首.
生公講堂(생공강당)
生公說法鬼神聽 (생공설법귀신청)
생공의 설법은 귀신도 듣나니
身後空堂夜不扃 (신후공당야불경)
죽은 뒤엔 비어 밤에도 문 닫지 않네
高坐寂寥塵漠漠 (고좌적료진막막)
높은 자리 먼지 쌓여 쓸쓸한데
一方明月可中庭 (일방명월가중정)
달빛 한 쪽 뜨락 비추누나
生公講堂(생공강당) : 生公은 동진의 고승 축도생의 존칭 강당은 설법하던 곳.
남경의 불교유적. 처음 설법할 때 듣는 이 없고 돌덩이가 듣고선
감동해서 고개를 숙였다고함.
生公說法 頑石點頭라는 속담이 있다
其五首.
江令宅(강령택)
南朝詞臣北朝客 (남조사신북조객)
남조의 문학 신하 북조의 나그네여
歸來唯見秦淮碧(귀래유견진회벽)
돌아와 멍하니 푸른 진회하 바라보네
池台竹樹三畝餘(지대죽수삼무여)
못가 누대에 대나무 세 이랑 남짓 남아
至今人道江家宅 (지금인도강가택)
지금 사람들 강씨집이라 하네
江令(강령) : 陳代진대의亡國宰相 망국재상 江總강총을 말함.
진의 후주와 정사는 돌보지 않고 매일 연회만 즐기다 나라가 망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