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마치며ㅡ 심흥보 (베드로) 신부 차 례
도움의 말 저는 양이오니, 주님은 저의 목자이십니다 Ⅰ. 주님과의 추억 되새기기
1. 저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2.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 3. 인간이 무엇이기에 4.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5. 주님을 애틋이 찾나이다 5-1. 주님은 나의 목자
Ⅱ. 주님의 부르심
6.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7.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8. 제가 무엇인데 감히 9. 보내실 만한 사람이 따로 10.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10-1. 주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11. 비를 땅위에 내리리라 12. 어디 계십니까 13. 저를 보내십시오 13-1. 가난은 왜 14.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15.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15-1. 찬미하여라 16.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16-1.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17.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18.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19. 나를 따라 오라 20. 구원을 얻었다 21. 곁에 있게 22. 부활의 증인 23.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24. 당신은 누구십니까
부 록
1. 1997년 제34회 성소주일 교황담화문 2. 성소를 성숙시키기 위한 영성 생활 3. 성소의 징조 4. 동정녀 축성 예식 5. 성소 관련 기도문
도움의 말
이 책은 주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일을 할 사람들을 부르시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응답하게 되는지를 성서 안에서 찾아 살펴보기 위해 꾸민 책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가 다시 한 번 주님의 뜨거운 사랑의 포로가 되고, 그분의 협조자와 파트너가 될 정도로 그분께 반해 우리 자신을 봉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부르심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주님의 인격적인 부르심이 구체적으로 우리 안에 새겨지고, 그분께 향한 우리의 갈증과 갈망이 더욱 심화되어 그분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홍역을 앓으면서 성숙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이 되기로 합시다.
매 기도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이 나름대로 지금까지 맺어 온 주님과의 정을 되새기십시오. 그리고 도움이 되신다면 주님 앞에 나아가 (또는 홀로 묵상할만한 조용한 시간을 내서, 그것도 가급적이면 무책임하다고 말할 정도로 주님과의 충분한 시간을 가지면서) 주님과의 관계를 우리 인생의 순간별로 정리한 '저는 양이오니, 주님은 저의 목자이십니다.'를 먼저 가볍게 소리내어 읽으면서 훑어보십시오. 또는 여러분만의 기도문을 만들어 바치십시오. 그리고 성서의 '말씀'을 읽고 성서의 인물이 어떻게 주님과 관계를 맺고 부르심에 응답하게 되는지 '관상'기도를 통해 보십시오. 관상기도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성서의 본문을 3회 정도 읽어서 그 내용을 충분히 익히십시오. 그리고 그 내용과 연관하여 주님께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청하십시오. 기도에 들어가서 성서 본문에 나타나는 장면과 상황을 마치 영화의 배경화면을 만들듯이 상상으로 그리십시오. 그리고 성서의 등장인물들을 배치하십시오. 그리고 그 화면 안으로 들어가서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하며 어울리면서 느끼십시오. 한편 관상기도를 하실 때, 성서의 본문에 기록된 내용을 벗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할 때는 자신이 성서의 기사를 상상으로 연상하지만, 기도에 들어가서는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대로 보도록 하셔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서의 내용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 상상으로 그리면서 들어가지만, 들어가서는 글로 씌어져 있는 성서의 내용을 직접 겪어봄으로써 마치 자신이 성서의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확실히 믿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도 성서의 주인공 옆에 서서 주님께 간청하고 주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답을 얻기 위해 관상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묵상'기도를 통해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내 모습을 꼼꼼히 그리고 구체적으로 되새겨 보시고, 주님께 향한 나의 사랑과 주님의 사랑을 내 안에 한 켜씩 차곡차곡 쌓아 나가십시오. 그리고 필요에 따라 가끔은 '부칙'을 통해 방향을 조정하실 수도 있으실 것입니다. 아울러 부칙에 나오는 참고 성서구절을 한 주간 동안 함께 살펴봄으로써 기도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십시오.
이 때 각자의 영신사정을 노트에 기록하면 좋겠습니다. 일정기간마다 그 동안의 기록을 되돌아보면, 자기 영혼의 상황과 자신을 이끄시는 주님을 더 확연히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혹시 가능하다면 본당 신부님이나 지도해주시는 분께 정기적으로 이 노트를 가지고 가서 지도를 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이 과정 속에 있을 때 더욱더 주님께서 여러분을 끌어당겨 주셔서 여러분의 가슴 속 깊숙이 주님의 사랑을 심어 주시고, 여러분이 주님의 정을 느껴 주님과 복음의 사도직을 수행하고 싶은 염원과 열정 그리고 그 사도직을 수행할 힘을 기꺼이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저는,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소에 대한 막연한 기대만으로 성소의 길을 두드렸다가 그 고귀함과 중요성에 비해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서는 이들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비록 이 작업이 여러분에게 성이 차지 않을지라도 여러분 나름의 관상과 묵상으로 채워나가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최부식, 라병국, 김귀웅, 홍상표, 전대규 신부님을 비롯한 후배 사제들과 이석균, 오신석, 류달현, 이정민, 김형근, 이정우, 신동진 학사님을 비롯한 신학생들, 조 아가다, 심 가타리나 수녀님을 비롯한 수도자들과 이 과정에 함께했었던 'ㅈㅎ'양과 'ㅅㅈ'양을 비롯한 성소자들이 충실히 주님의 사도가 되어 나가기를 빕니다. 그리고 이 책에 성소와 관련된 자료들을 이용하도록 허락해주시고 격려해주신 서울대교구 성소국과 이 책의 취지를 기꺼이 받아 출간하여주신 성바오로 출판사 이창욱 신부님과 편집실에 감사드립니다.
천주강생 1997년 1월 서울대신학교에서 차부제 30일 이냐시오 영신수련을 마치며 천주교 공항동 성당 심흥보 (베드로) 신부
차례
저는 양이오니, 주님은 저의 목자이십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의 매 순간 매 자리에 함께 해주셨음을 저는 압니다.
제가 양이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의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을 때 주님은 저를 끌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알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깨우쳐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옵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느끼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안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저를 바쳤을 때 주님은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교리를 가르칠 때 주님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미사에 참례할 때 주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성사에 참례할 때 주님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가 환자를 방문할 때 주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제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제가 곤경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제 편을 들어 주셨습니다. 제가 악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제가 분노와 갈등으로 밤을 지새울 때 주님은 휴식을 주셨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주님은 저를 위로해 주셨습니다. 제가 고독해할 때 주님은 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제가 텅비고 허전해진 가슴으로 먹을 것을 찾아헤맬 때 주님은 말씀으로 배불려 주셨습니다. 제가 목말라 할 때 주님은 성체성사로 적셔 주셨습니다. 제가 실수했을 때 주님은 못 본 체해 주셨습니다. 제가 피곤에 지쳤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일해 주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을 때 주님은 채워 주셨습니다. 제가 유혹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제가 유혹에 걸려 넘어졌을 때 주님은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또 범죄하였을 때 주님은 저와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제가 거듭 범죄하여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저를 불러 주셨습니다. 제가 제 죄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생기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 곁을 떠나 도망치고 싶을 때 주님은 성령의 힘으로 나를 휘감아 나도 모르는 새에 다시 주님 앞에 앉아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주님, 저는 지금 주님 앞에 와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을 더욱 더 깊이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십시오. 저를 휘감아 주님의 품 안에서 평안히 쉬게 해주십시오. 아멘.
24. 당신은 누구십니까
말씀 사울을 부르심(사도 9,3-12.15鑁-20) 9 3사울이 길을 떠나 다마스커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다. 4그가 땅에 엎드리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 왔다. 5사울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6일어나서 시내로 들어 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대답이 들려 왔다. 7사울과 동행하던 사람들도 그 음성은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벙벙해서 서 있기만 하였다. 8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커스로 데리고 갔다. 9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10다마스커스에 아나니아라는 제자 한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주께서 신비로운 영상 가운데 나타나 "아나니아야!" 하고 부르셨다. 아나니아가 "예, 주님, 말씀하십시오." 하고 대답하자 11주께서는 "어서 일어나 '곧은 거리' 라는 동네에 사는 유다의 집으로 가서 다르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사울은 지금 기도를 하고 있는데 12그는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 와서 손을 얹어 다시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을 신비로운 영상으로 보았다. 15그 사람은 내가 뽑은 인재로서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제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할 사람이다. 16나는 그가 내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17그래서 아나니아는 곧 그 집을 찾아 가서 사울에게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하였다 "사울 형제, 나는 주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여기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보내시며 당신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18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19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하였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커스에 있는 신도들과 함께 지내고 나서 20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관상 사울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커다란 영광으로 알았고, 가장 좋은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 하느님께 자신의 일생을 봉헌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라는 한 인물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며, 그가 그리스도다.'라고 외쳐대며 백성을 혼란에 빠뜨리고 유다교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사울은 의협심에 불타 대사제에게 가서 다마스커스에 있는 여러 회당에 보내는 공문을 청해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은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눈에 띄는 대로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끌어 올 수 있는 권한을 받아 길을 떠납니다. 사이비 지도자들을 다 잡아서 올바른 종교교육을 시키고, 백성들을 혼란에서 구해내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장정을 나선 것입니다.
사울은 다마스커스를 바라보며, '이제 다 왔다. 이제 시작이다.' 하며 마음을 다시 가다 담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자기 둘레를 환히 비춥니다. 사울은 주 하느님께서 자기의 장정을 축복해주시기 위해서 오신 줄 알고 땅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니 이게 왠 말인가? 내가 주님을 박해하다니! 난 지금 주 하느님의 영광이 온전히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 사이비들을 잡으러 왔는데, 아니 어떻게 된거야?' 그리고 언뜻 머리에 불길한 생각이 떠오릅니다. '내가 몸바친 주 하느님 말고, 다른 하느님이 또 있었나?' 이런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그에겐 지금 자기 앞에 현존하시는 주님 외에 자기가 지금까지 알아 모셔왔고 자기를 봉헌한 주 하느님에 대한 감각도 생각도 잡을 수 없습니다. 사울은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일어나서 시내로 들어 가거라. 그러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사울은 마음 속으로 '이젠, 죽었다.'했는데, 다행히 벌은 없고 대신 그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해 준다니 불행 중 다행입니다. 주님의 빛을 본 사울은 눈이 멀고,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커스로 들어갑니다. 심판관으로서 당당하게 들어가려던 사울이 갑자기 남 볼까 무서워 죄인처럼 환자처럼 처량하게 사람들에게 끌려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신 후 고성소(저승)에 내려가시어 사람들을 건지시고 부활하시기까지 3일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세상은 빛을 잃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울은 주님의 은총으로 새 생명을 얻어 다시 태어나게 되기까지 죽어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온 몸을 다 바쳐 헌신해왔던 모든 것이 허물어지고 무너져내려서 그는 어둠에 처해져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은채 사흘을 보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을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사흘만에 그를 다시 살리시기로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찾으십니다. "아나니야야!" 아나니아가 "예, 주님, 말씀하십시오."하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는 "주님, 그 사람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에게서 들은 바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사는 주님의 성도들에게 많은 해를 끼쳤다고 합니다. 더구나 그는 대사제에게서 주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갈 권한을 받아 가지고 여기 와 있습니다."(사도 9,13-14)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 사람은 내가 뽑은 인재로서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제왕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할 사람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아나니아는 곧 그 집을 찾아 가서 사울에게 손을 얹고 말합니다 "사울 형제, 나는 주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여기 오는 길에 나타나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보내시며 당신의 눈을 뜨게 하고 성령을 가득히 받게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그러자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사울은 다시 보게 됩니다. 사울은 감격과 통회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 동안의 방황과 고통을 씻고 새로운 빛이 비추어주는 길로 새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회복합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커스에 있는 신도들과 함께 지내고 나서 곧 여러 회당에서 '예수가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다.'라고 전파합니다. 사울의 말을 들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유다인들은 "저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못 살게 굴던 자로서 신도들을 잡아서 대사제들에게 끌어가려고 여기 온 자가 아닌가?"(사도 9,21) 하고 어리둥절해집니다. 당황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사울은 더욱 힘있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언합니다. 이제 거꾸로 박해자였던 사울이 박해의 표적이 됩니다. 오랜 방황 속에서 사울은 참 주님을 찾았고, 이제 바오로가 된 사울은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운명을 같이하게 된 것입니다.
묵상 주님을 거부하거나 의심했던 적이 있습니까? 주님이나 주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했던 적이 있습니까? 사랑해야 하는데 사랑할 수 없었고, 결국 사랑하지 못한 채 넘어갔고, 아직까지도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담고 있는 순간들과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속에서 미움의 악이 사라지고 다시 주님의 사랑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주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1요한 4,20) 사랑과 용서의 은총을 내려주시기를, 그래서 내 마음에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사랑만이 자리잡아 내가 평화를 누리며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도록 간청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해서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 3,16) 그리고 나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일하는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도록 나의 봉헌을 받아 달라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우리는 말로나 혀 끝으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함으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1요한 3,18-19) 그래서 우리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구원을 위해 희생하는 주님의 진정한 사도가 되십시오.
부칙 참고로 로마서 12장 1절부터 21절까지 나오는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을 보십시오. 그리고 고린토 전서 13장과 요한 1서 4장 7절부터 5장 21절까지 천천히 묵상하듯 읽어보시고, 자신의 삶에 그 말씀들을 하나씩 이루어 나가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23.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말씀 일곱 보조자의 선택(사도 6,1-6) 6 1이 무렵 신도들의 수효가 점점 늘어나게 되자 그리이스 말을 쓰는 유다인들이 본토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그들의 과부들이 그날 그날의 식량을 배급받을 때마다 푸대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2그래서 열 두 사도가 신도들을 모두 불러 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제쳐 놓고 식량 배급에만 골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3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서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 내시오. 이 일은 그들에게 맡기고 4우리는 오직 기도와 전도하는 일에만 힘쓰겠습니다." 5모든 신도들은 이 말에 찬동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테파노와 필립보와 브로코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르메나와 또 안티오키아 출신으로 유다교로 개종한 니골라오를 뽑아 6사도들 앞에 내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관상 사도행전 2장 43절부터 47절에 나오는 신도들의 공동생활을 보면,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고 쓰여 있습니다. 신자들이 다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함께 기도하며 정겹게 지내는 모습을 관상하십시오. 그리고 신자들이 자신의 것을 사도들 앞에 내놓고, 사도들은 그것을 모아 없는 이들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줍니다. 그리고 점점 행복을 얻기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고 필요한 것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줄지어 늘어섭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나누어주다 보니 그리이스에서 온 그리이스 말을 쓰는 유다인들이 불평을 터트리기 시작합니다. '모두 똑같다더니, 뭐가 똑같아?! 이스라엘 땅에 사는 토박이들이 더 많이 가지고 있잖아. 먹는 것도 더 기름기 많은 것을 받잖아. 이거, 그리이스 말을 쓰는 우리들을 무슨 거지 취급하잖아.' 본토 유다인과 그리이스에서 살던 유다인들의 생활양식이 서로 달라지기도 했지만 실제로 생활의 정도와 수준이 달랐습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도 그렇고, 나누어 받는 배급의 양과 질에 있어서도 차이가 납니다.
사도들이 신경 써서 나누어준다는 것이 오히려 더 불평만 터져 나오게 하는 결과가 돼버렸습니다. 사도들은 고민합니다. '우리가 할 일이 이게 아닌데, 우리가 할 일은 전도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일에 발목이 잡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지도 못하고 마치 재산 싸움에 끼어 들게 된 것처럼 이게 뭐람!' 그래서 사도들은 사도회의를 거쳐 이런 결정을 내립니다. '사도들은 기도와 전도에 전념하고, 전체 신자를 일곱으로 나누고 그 일곱 조의 대표 일곱을 뽑아 보조자로 임명하여 그들이 식량을 배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 공평하게 물건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뽑아 주십시오. 신망이 두텁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을 뽑아 주십시오. 여러분이 원하는 사람들이 재물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일곱 명의 대표를 뽑아 사도들 앞에 내 보냅니다. 그리이스 말을 쓰는 유다인들의 대표로 니골라오가 나갑니다. 사도들은 기도한 후 일곱 명의 대표들을 사도들의 보조자로 삼아 안수를 하고 재물을 나누어주도록 합니다.
묵상 사도들이 기도와 전도에 전력하기 위해, 식량 배급을 하는 봉사자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을 식탁의 봉사자라고 하며, 이 보조자들은 사도들의 여러 업무 중 일정 부분을 위임받아 수행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보조자들을 부제(deacon)의 시작으로 보기도 합니다. 오늘날 사제 지망 미혼자들의 경우에는 사제직을 받는 한 과정으로 부제직을 거치기도 하고, 성인 기혼자들의 경우에는 평생토록 부제로 지내면서 사제들의 업무를 돕습니다. 사도행전 21장 8절에서는 보조자 필립보를 전도자라고 부르고 있고, 사도 바오로는 이 보조자에 대해 필립비 1장 1절과 디모테오 전서 3장 8절부터 13절까지 나오는 '보조자의 자격'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도의 길을 걷는 성소자로서 사제들을 도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고, 담당 신부님과 소속 장상과 상의해 활동합시다.
부칙 부제들의 활동을 찾아 살펴보십시오. 스테파노 부제가 유다인들에게 체포당하여 대사제 앞에 잡혀가 이스라엘의 신앙이 예수님에게서 완성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서 계시다는 것을 선포하고, 죽음 앞에서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하면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 주십시오."하고 외치며 순교하는 장면을 사도행전 7장 1절부터 60절까지에서 보십시오.
참고로 부제서품 예식 때 주교님께서 부제후보자에게 부제직무에 대해 설명하시는 내용을 잘 묵상해 보십시오.
"부제는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말씀과 제단과 자선사업에 봉사함으로써 주교와 사제를 도와 드리며 자신을 모든 이의 종으로 보여 줄 것입니다. 즉, 제단의 봉사자로서 복음을 봉독하고, 미사성제를 준비하며,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신도들에게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주교의 명을 따라 신도들과 비신도들을 권면하고, 그들에게 거룩한 교리를 가르치며, 기도 예식을 주관하고 성세 성사를 집전하며, 혼인 성사를 주례하고 축복해주며, 임종하는 이들에게 노자 성체를 모셔가고 장례식도 주관할 것입니다. 부제는 또한 사도로부터 전해오는 안수로 축성되고 제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어, 주교나 주임 사제의 이름으로 사랑의 봉사를 다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부제는 봉사를 받으러 오지 않으시고 도리어 봉사를 하러 오신 그리스도의 참 제자임을 여러분에게 인정받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행동할 것입니다. 또 부제품에 오를 그대에게는 주님께서 몸소 모범을 보여 주셨으니, 그대도 주님의 봉사를 본받으십시오. 부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봉사자이므로, 당신 제자들 가운데 봉사자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처럼 그대도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랑으로 주님과 사람들에게 기꺼이 봉사하십시오. 아무도 능히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법이니, 그대도 온갖 부정과 인색은 바로 우상을 섬기는 일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도들에게 사랑의 봉사자로 간택되었던 그분들처럼 그대도 사람들의 호평을 받으며, 성령과 지혜로 충만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에 뿌리를 박고 신앙 위에서 결백하게 살며,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책잡힐 것 없는 그리스도의 봉사자로서 하느님의 신비를 관리하며, 복음의 소망을 저버리지 마십시오. 복음을 들을 뿐 아니라, 또한 복음을 들려주는 데에 봉사하십시오. 신앙의 신비를 깨끗한 양심에 보존하며, 입으로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백성이 성령으로 활력을 얻어 하느님 마음에 드는 깨끗한 제물이 되고, 그대 자신도 마지막 날에 주님을 맞이하게 될 때, '착하고 충실한 종아, 네 주님의 즐거움에 들어오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22. 부활의 증인
말씀 마티아를 부르심(사도 1,14-26) 1 14그 자리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비롯하여 여러 여자들과 예수의 형제들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모아 기도에만 힘썼다. 15그 무렵 어느 날 교우가 백 이십 명 가량 모여 있었는데 그 자리에 베드로가 일어나 이렇게 말하였다. 16"교우 여러분, 예수를 잡은 자들의 앞잡이가 된 유다에 관하여 성령께서 다윗의 입을 빌어 예언하신 말씀은 정녕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17그는 본래 우리 열 두 사람 중 하나로서 우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18그는 주님을 판돈으로 밭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는 땅에 거꾸러져서 배가 갈라져 내장이 온통 터져 나왔습니다. 19예루살렘의 시민들이 모두 이 사실을 전해 듣고 그 밭을 그들 말로 '아겔다마'라고 불렀습니다. '피의 밭'이란 뜻입니다. 20시편에, '그의 집을 폐허로 만드시고 아무도 거기에 드는 이 없게 하여 주십시오.'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21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 오시는 동안,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우리 곁을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줄곧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 중에서 22하나를 뽑아 우리와 더불어 주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23그들은 바르사빠라고도 하고 유스도라고도 하는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천거한 다음 24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 주님께서 이 두 사람 중 누구를 뽑으셨는지 알려 주십시오. 25유다는 사도직을 버리고 제 갈 곳으로 갔습니다. 그 직분을 누구에게 맡기시렵니까?" 26그리고 나서 제비를 뽑았더니 마티아가 뽑혀서 열 한 사도와 같이 사도직을 맡게 되었다.
관상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염두에 두시고 많은 제자들 중에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 베드로는 배반했어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왔지만, 유다는 배반한 후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자살해버렸기 때문에 한 자리가 비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교회의 이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사도를 뽑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내세운 자격 조건은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 오시는 동안,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예수께서 우리 곁을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줄곧 우리와 같이 있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의 신원과 목적이 '주 예수의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해야 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셉과 마티아를 후보자로 올려놓고 주님의 사도이기 때문에 주님께 묻기로 했고, 같은 조건의 두 명 중에 누구를 주님께서 원하시는지 알기 위해 그 방법을 제비로 뽑아 결정했습니다. 제비뽑기란 일견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의 뜻이 제비뽑기를 통해 드러나도록 청했고, 주님께서는 사도들이 선정한 방법을 통해 주님의 뜻을 드러내 보여주셨습니다.
'주님 부활의 증인'을 만들기 위해 교회는 오늘도 많은 이들을 뽑아 주님의 사도자리에 앉히고 축성합니다. 주님의 사제들은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기 위해,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에게 배운 가르침을 적어 놓은 사도들의 증언을 교회는 성서와 성전을 통해 보존해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제 후보자들에게 성서와 성전에서 주님을 보여주고 가르칩니다. 후보자들은 교회에서 주님을 배우고, 자신이 배운 내용을 기도와 실습을 통해 익혀 주님의 사제가 될 준비를 합니다. 사제가 된 이들도 자신들의 사목현장에서 '무엇이 주님의 뜻이고, 주님께서 구체적인 이 현실에서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늘 기도합니다. 이렇게 성서와 성전과 기도를 통해 얻은 주님의 뜻을 현실에서 선포하고 이루어냅니다.
열 두 사도를 뽑기 위해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 가 밤을 세우시며 하느님께 기도"(루가 6,12)하셨던 주님의 모습을 관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뒤를 이어 주님 부활을 증언하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실현해야 할 '빈 사도자리의 후계자가 될 사람이 누구인지'를 주님께로부터 듣기 위해 마리아와 함께 모여 기도하는 사도들의 모습을 관상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현실에 내리시는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우리의 사제들을 관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사제들 곁에서 함께 기도하는 협력자들과 내 모습도 아울러 관상하십시오.
묵상 한 사제는 자신이 자신의 사목생활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느님께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알기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밤에 잘 때 내일 아침 주님께 기도하러 가는 것을 꿈꾸며 잠자리에 들고, 아침 일찍 주님께 기도하러 가기 위해 기쁘게 일어나 주님의 세례를 연상하며 샤워를 하고, 주님 대전에 나아가는 생활을 자기 삶의 리듬 속에 완전히 정착시키는 데만 약 10년이 걸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생활을 하고 사도직 활동을 한다고 해서 모두 만족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사도들이 만족할 수 있는 것은 사도적 활동의 질과 양에도 달려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주님께서 채워주셔야만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생활과 사도적 활동의 종류와 부문과 면면은 다양합니다. 그러나 그 다양함 안에서도 공통적인 것은 '사도생활을 하면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주님께 대한 갈증이며, 그 갈증을 채우고 자신의 사도적 활동을 주님 안에서 이루기 위해 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로는 사도들은 '기도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주님께로부터 갈증을 채워 받기 위해 기도합니다. 매일 아침 주님께 자기를 바치며 자기 사도생활과 자신의 사도적 활동에 주님께서 함께해주시기를 청하며, 자신에게 맡겨진 주님의 양떼들과 그 가정 그리고 그들이 사회에서 하는 일을 열매맺어주시고 지켜주시기를 청합니다.
기도한다고 지금 당장 주님께서 귀에 들리도록 말씀해 주시는 것도 아니오, 지도에 금을 긋듯이 갈 길을 선명하게 제시해 주시는 것도 아니며, 또 금방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추구하는 이 것이 주님의 뜻 안에 있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주실 것입니다. 이루어질 일인데도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내가 주님 안에서 하고자 하는 일을 수행할 정도의 준비가 되지 않았거나 또는 세상의 환경과 조건이 그 일이 이루어지기에 합당하지 않은 이유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주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면, 주님께서는 내 원의를 주님의 뜻에 맞게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기도 속에서 자리매김 됩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 8,28)라고 말했습니다. 또 "사랑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 완전하게 합니다."(골로 3,14遁)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시간과 의지를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주님께 바친다는 것이며, 주님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 뵈옵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에게 들려주신 주님의 말씀을 이룰 힘을 얻기 위해, 주님께 끊임없이 그리고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부칙 주님의 부활을 증언하도록 하기 위해 사제로 뽑아 축성하면서, 주교님께서 사제 후보자들에게 주시는 훈화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사제서품 예식 중에서 주교님의 훈시
첫째, 예언직에 대하여, "여러분은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교도직을 책임지고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기꺼이 받아들인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이에게 전하십시오. 하느님의 법을 깊이 묵상하며 읽는 것을 믿고, 믿는 것을 가르치며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이 가르치는 교리는 하느님의 백성에게 양식이 되고, 여러분의 성실한 생활은 신자들에게 기쁨이 되도록, 말과 모범으로 하느님의 교회를 건설해야 합니다."
둘째, (성화)사제직에 대하여, "여러분은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의 임무도 수행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봉사로써 신자들의 영적 제사가 그리스도의 제사와 결합되어 완성될 것입니다. 제단에서 여러분이 거행하는 미사는 바로 여러분이 신자들과 함께 피흐름 없이 봉헌하는 그리스도의 제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이 거행하는 것을 알고 그 내용을 실천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거행하는 것이므로 새로운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세례로 사람들을 모아 하느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교회의 이름으로 죄를 사해주며, 병자성사로 병자들의 고통을 덜어 주십시오. 또한 여러 가지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고, 하느님의 백성뿐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매일 여러 차례 감사와 찬미의 제사를 드리며 여러분 자신이 사람을 위하여 사람 중에서 선발되어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임명되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참된 사랑과 변함없는 기쁨으로 사제이신 그리스도의 직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이익을 찾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도록 하십시오."
셋째, 왕직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여러분은 머리이시요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십시오. 주교와 결합하여, 그 지도에 따라 신자들을 한 가족으로 일치시키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그들을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봉사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러 오셨고 길 잃은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착한 목자이신 그리스도를 언제나 모범으로 삼기 바랍니다."
참고로 사도들이 가져야할 자세를 필립비서 2장 1절부터 18절까지 나오는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과 디모테오 전서 3장 1절부터 7절까지 나오는 '교회 감독의 자격'에서 보십시오. 여유가 되면 디모테오 전·후서와 디도서 전체를 보십시오.
21. 곁에 있게
말씀 열 두 사도를 부르심(마르 3,13-19) 3 13예수께서 산에 올라 가 마음에 두셨던 사람들을 부르셨다. 그들이 예수께 가까이 왔을 때에 14예수께서는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고 당신 곁에 있게 하셨다. 이것은 그들을 보내어 말씀을 전하게 하시고, 15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을 주시려는 것이었다. 16이렇게 뽑으신 열 두 사도는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과 17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둘 다 보아네르게스라고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18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혁명당원 시몬, 19그리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이다.
관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정하기 위해 애쓰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누가 아버지께서 점지해 주신 사람들인지 기도 중에 아버지께 청하는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예수님의 기도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아버지의 뜻이 누구에게 있는지 찾는 모습. 아버지께서 누구를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고자 뽑아 보내준 사람인지를 확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그냥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뽑는 것도 아니요. 아버지께서 누구를 보내셨는지 이것 저것 재며 사람들 중에 고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맡겨주시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버지께 직접 물어보시며,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릴 때까지 아버지께 귀 기울이고 계시는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기도 중에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그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제자들의 얼굴과 그 마음을 보십시오. 뽑힌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무쓰에 염색된 머리카락? 곱살하게 로션을 바른 예쁜이? 예수님께서 누구를 뽑으셨을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예수님께 보여달라고 청하십시오. 누구를 뽑으셨는지? 그리고 여러분을 향해 손짓하는 예수님께 여러분도 응답하시고 예수님께로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여러분의 이름이 불렸을 때의 느낌과 기분을 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가까이 오시자, 그들을 어루만져 주십니다. 기쁘고 환한 웃음으로 그리고 한편 대견해 하시는 눈길로 제자들을 하나씩 쓰다듬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반가워하시고, 주님 곁에 있도록 하십니다. 어디든지 데려가시려고 하시고, 무엇이든 가르쳐 주시려고 하시고, 챙겨 주시고, 신경 써 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속에 들어 있는 제자들이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인지 보십시오.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께서 사시는 모습을 배웁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당신을 내어주시는 그 삶. 다가오고, 건네고, 풀어주고, 감싸주고, 편안하게 안아 주는 삶.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누리려 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내어주시는 그 모습에 처음엔 당황하고 송구스러워 하는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말로 가르치시기 보다 보여주십니다. 여러분이 한 번 여러분의 기억 속에 있는 기적 사건 등을 떠올리며 그것을 신기롭게 바라보고 놀라면서, 주님의 진면목을 발견해 나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발견해 보십시오.
묵상 여러분도 일 주일 내내 주님 앞에 나아와서 주님 곁에 앉아 주님을 배우십시오. 주님과 함께 하시면서 주님과 함께 할 때 얻을 수 있는 행복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삶을 보여달라고 청하고, 보여주시는 주님의 삶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열 두 사도의 명단에 여러분의 이름을 써넣으십시오.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과 천둥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둘 다 보아네르게스라고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혁명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를 팔아 넘긴 가리옷 사람 유다." 그 옆에 여러분의 이름을 넣으십시오. 여러분이 불리고 싶은 이름을. 여러분의 희망과 삶이 어우러진 인격을 담은 이름을 써넣으십시오.
부칙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의 길로만 얼룩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하실 때 예수님이셨습니다. 여러분도 예수님과 함께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예수님 앞에 나아와, 예수님만을 생각하면서 예수님께 집중하고, 예수님을 느끼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안식의 순간을 여러분 삶의 원동력으로 받으십시오.
참고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백 배의 상을 마태오 복음 19장 27절부터 30절까지에서 보시고,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씀하신 반면 제자들에게는 자세히 뜻을 밝혀주시며 남달리 정을 쏟아 부어주시는 장면을 마르코 복음 4장 10절부터 12절까지와 4장 33절부터 34절까지에서, 루가 복음 10장 17절부터 23절까지에서 보십시오.
20. 구원을 얻었다
말씀 자캐오를 부르심(루가 19,1-10) 19 1예수께서 예리고에 이르러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2거기에 자캐오라는 돈 많은 세관장이 있었는데 3예수가 어떤 분인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리워 볼 수가 없었다. 4그래서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길을 앞질러 달려가서 길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5예수께서 그 곳을 지나시다가 그를 쳐다보시며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6자캐오는 이 말씀을 듣고 얼른 나무에서 내려 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 7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 가 묵는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다. 8그러자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9예수께서 자캐오를 보시며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관상 자캐오는 적극적입니다. 자기가 원하고 추구하는 것을 얻고자 무진장 노력합니다. 그는 돈뿐만 아니라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열심입니다. 오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예수님께서 자기 마을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뵈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은 자캐오는 자기 수준에서 그냥 예수님을 뵙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길을 앞질러 가서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애를 쓰는 자캐오를 봅니다. 그리고 그의 갈증을 봅니다. 돈도 많이 벌고, 세관의 장이면서도 자기 삶의 조건과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큰 갈증을 가지고 있는 자캐오의 영혼을 보십니다. 미래에 대한, 무한에 대한, 영원에까지 이르는 가치에 대한 갈증을 가지고 있는 자캐오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그 가치를 채워주시기 위해 말씀하십니다.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당황하고 한편 감격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분개하고 시기, 질투합니다.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
그러나 자캐오는 이제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는 죄인으로 취급받기를 거절합니다. 이제 의인이 되었습니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 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고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사랑 속에서 넘쳐 나온 진리를 맞아들인 자캐오는 구원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을 얻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
묵상 자캐오는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아니 그보다 먼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예수님께서 전적으로 나를 사랑하시고 계시고, 이미 나를 위해 당신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을 만큼 뼈저리게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변화되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변화되기 시작해서 자캐오처럼 구원을 얻고, 다른 사람들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 나서신 것이겠지요!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서 건져주셨다는 것을 믿고 또 주님을 따르면 주님께서 나를 당신 곁으로 이끄실 것이라는 것을 신뢰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웃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실현하면 우리 모두 주님께서 약속해 주신 하늘 나라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과 그 확신에서 우러나오는 희망으로 주님 안에서 나를 버리고 너를 사랑합니다. 가서 구원의 복음을 전하십시오. 사회에서 의인으로 자처하고, 주인처럼 행세하는 사람들에게, 마음 속으로는 부러워하면서 겉으로는 죄인이라고 비난하고 단죄하는 세태에 합류하지 말고 구원의 복음의 길로 들어서도록 권하십시오. 하늘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 제외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2베드 3,9遁)에 늦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도 모든 사람에게 구원받을 기회를 주시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2베드 3,15衁) 주님 사랑의 방문을 받은 후에야, 자캐오는 의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를 방문하고 그에게 구원에의 길을 제시해 주십시오. 그는 변화될 것입니다. 가서 주님의 입과 손과 발이 되십시오.
부칙 사도 바오로는 고린토 후서 8장 9절에서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은혜로우신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이 가난해지심으로써 여러분은 오히려 부요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당신 몸소 가난하고 약한 아기로 태어나시고 한 생을 '이웃에게 다 나누어주었기 때문에 가난해진 예수님의 모습'을, 마태오 복음 5장 3절부터 12절까지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산상수훈에서 음미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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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나를 따라 오라
말씀 마태오를 부르심(마태 9,9-13) 9 9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 오라." 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10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세리와 죄인들도 많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게 되었다. 11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하고 물었다. 12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13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하고 말씀하셨다.
관상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오의 모습을 보십시오. 세리 마태오. 지나 가는 사람들을 마치 감시라도 하듯이 한 명씩 훑어보고 있습니다. 그는 '사람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한 번 보면, '그가 돈을 꾸러 오는 것인지', '연기해 달라고 오는 것인지', '갚으러 오는 것인지', 심지어는 '얼마나 꾸려고 하는 것인지' 훤히 안다고 자부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자금 동원 능력과 대출금을 회수하고 순환시킬 능력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다른 동료들에게서도 인정을 받았고 지금 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일종의 '금융 전문가'인 셈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앞에 선 예수님의 모습은 어딘지 낯설고, 가늠하기조차 이상했습니다. 마치 그가 지금까지 취급해온 일처리 방식이나 살아온 방식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 듯했고, 흥정할 수 없는 영역인 듯했고, 인위적으로 산출할 수 없는 열매를 가지고 있는 듯한 전연 다른 새로움이었습니다. 그가 자기 앞으로 오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빨려 들어가기라도 하듯 예수님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의 부류에 드는 세리라서 다른 사람들에게서 비난을 받고 있는 마태오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 오라." '세리가 뭐야? 어부 같이 가난한 사람이라면 이해가 되겠는데?! 저런 사람도 부르시는가? 무엇 때문에 부르시는가? 예수님도 돈을 원하시는가? 죄인과 죄인들의 돈을 원하시는가? 무슨 일을 했든, 어떤 방법으로든 성공한 사람이면 다 예수님의 제자로 설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마태오를 단죄하고 마태오와 그의 동료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예수님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현세적이고도 물질적인 가치를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마태오를 이제 그 열정을 가지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를 변화시켜 주님의 사도로 만들고, 복음 선포와 인간 구원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마태오의 재물이 아니고, 마태오의 돈버는 기술도 아니고, 그의 정열적인 투신입니다. 그 열정을 보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복음의 투사로.
묵상 예수님 시대에 세리는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세리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 먼저 로마에 백성들의 세금을 내고 자기가 낸 세금을 백성들에게 고리대금을 쳐 받듯이 되돌려 받았습니다. 백성들 중에는 마치 농민들이 농산물을 추수하여 판매한 후에 돈을 손에 쥐게 되면 일년치를 정산하듯이 수중에 돈이 없어 제 때에 세금을 못바치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들은 실제로 고리대금업도 겸했습니다. 그리고 그 돈을 회수하기 위해 폭력적인 방법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고리대금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돈을 꾸어주기 위해 담보를 잡더라도 그 담보가 그 사람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면 되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성서는 옷이 한 벌뿐인 사람에게는 저녁에 얼어죽지 않게 되돌려 주도록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이래 현재까지 고리대금업이 없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심지어 '희년이 되도 이 계약은 무효화되지 않음'이라는 단서조항 아래 계속되고 있답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불을 못때도 외국인을 위한 호텔이나 외국인의 집에 가서 사먹으면 더운 음식을 먹을 수 있답니다. 예외 규정인지 비상 규정인지 모르지만요…. 이렇게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과 자질을 자기 좋을 데로 사용하고자 하면 한이 없겠지요. 그리고 그 굴레 속에서 힘들고 고달프게 살게 되겠지요.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창세 3,17鑁)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 먹으리라."(창세 3,19鑁)란 구절을 연상할 수 밖에 없겠지요. 칠층산의 저자인 '토마스 머튼'은 작가였답니다. 그는 그의 직업인 글쓰는 일을 피해 수도원에 들어갔는데, 정작 수도원에서는 그에게 성서 필사를 시켰답니다. 그후 그는 믿음에 대한 글을 쓰는 트라피스트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은총으로 내려주신 내 재능과 자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형제 자매들과 세상을 구하는 일에 사용하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데려다 주신 하나 하나에게 이름을 붙여주고"(창세 3,19遁 참조),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인 교회 "가족이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고,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리"(창세 1,28 참조)면서,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어디에다 어느 방향으로, 무엇을 위해 사용하시렵니까?
부칙 참고로 루가 복음 4장 18절부터 19절까지 나오는 예수님의 사명을 읽으십시오.
4 18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19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하신 주님의 말씀을 복음의 방법에 따라,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내가 머물고 있고 몸담고 있는 이 사회, 이 민족들 안에서 이루기 위해 투신하시길 바랍니다.
18.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말씀 베드로를 부르심(루가 5,1-11) 5 1하루는 많은 사람들이 겐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는 예수를 에워싸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2그 때 예수께서는 호숫가에 대어 둔 배 두 척을 보셨다.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다. 3그 중 하나는 시몬의 배였는데 예수께서는 그 배에 올라 시몬에게 배를 땅에서 조금 떼어 놓게 하신 다음 배에 앉아 군중을 가르치셨다. 4예수께서는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하셨다. 5시몬은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고 대답한 뒤 6그대로 하였더니 과연 엄청나게 많은 고기가 걸려 들어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7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고 하였다. 동료들이 와서 같이 고기를 끌어 올려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두 배에 가득히 채웠다. 8이것을 본 시몬 베드로는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9베드로는 너무나 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 겁을 집어 먹었던 것이다. 그의 동료들과 10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도 똑같이 놀랐는데 그들은 다 시몬의 동업자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시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11그들은 배를 끌어다 호숫가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다.
관상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눈여겨 보시고 계시는 모습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정 베드로의 배를 골라 배위에 올라 앉으시고 군중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베드로는 일을 하다 말고 간간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솔깃 솔깃하지만 큰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그는 지금 밤 새 수고했지만 한 마리도 못잡고 허탕을 친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불평스러워 얼른 그물이나 치우고 가서 술이라도 한 잔 먹고 퍼드러지게 엎어져 자고 싶은 심정 뿐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시몬에게 말을 건네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 시몬은 심통 가득한 툭 튀어나온 입술로 볼멘 소리를 지릅니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 더 말을 건네십니다. 베드로는 아주 말하기조차 싫어하는 모습입니다. '지가 뭘 안다고, 네가 알면 더 알지. 지가 고기잡이에 대해서 알긴 뭘 안다고 지껄이는 거야. 이 바닥은 내가 더 훤한데.'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속 재촉하십니다. "잘 알아야 뭘해, 오늘은 한 마리도 못잡았잖아. 한 번 내가 해 보라는 대로 해봐!" 베드로는 울화가 치밀어 올라 있지만 또 한편 고생만 한 것이 너무나 아쉽고 한 번만 더 하고 올까 말까 하던 미련이 다시 동하고 또 돈도 궁한지라 다시 출선을 위해 일어섭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베드로는 마음 속으로 혹시나 하는 기대도 있지만, 나가면서 계속 불평만 퍼붓습니다. 그런데 웬 걸, 씨알머리도 보이지 않던 고기가 이젠 날 잡아 잡쑤 하듯이 계속 뱃전으로 덤벼드는 것이 아닙니까? 엉겁결에 그물을 쳤지만, 얼마나 많이 걸려들었는지 건질 수도 끌고 갈 수도 없는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옆 배의 야고보와 요한을 소리쳐 부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달려왔지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만 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소리칩니다. "뭐해 쳐다만 보지 말고 빨리 걷어 올려!" 허겁지겁 걷어 올리던 베드로는 갑자기 예수님 생각이 났습니다. 베드로가 힐끗 보니 예수님께서 저 바닷가에서 자기를 쳐다보고 계십니다. 갑자기 베드로에게 고민이 생겼습니다. '어떻하나? 가서 뭐라고 하지. 나올 때 그렇게 심술을 부리고 왔는데…. 그건 그렇고 저 양반이 고기가 이렇게 많이 잡힐지 알고나 시킨거야…? 도대체 저 이가 누구지?' 점점 마음 한 구석에 두려움이 들기 시작합니다. '죽었구나!' 배를 몰고 바닷가로 돌아오며, 베드로의 가슴 속에선 만감이 교차합니다. 고기는 많이 잡았지만, 저 양반 앞에서 어째야 되나. 원하는 대로 잡긴 잡았어도 걱정입니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베드로는 차마 "저를 굽어보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저를 거두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기엔 너무 낱뜨거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야고보와 요한, 그들은 아무 소리도 못한 채, 아니 어느 누구도 서로 말을 나눌 새나 나눌 것도 없이, 마치 끌리듯 거기 그렇게 배를 호숫가에 끌어다 대어 놓고는 그냥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 길이 자신의 길인양, 누구 하나 먼저 이래 저래 말하지도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가야만 하는 것인양, 자석에 끌리는 쇳가루처럼 옴짝달싹 못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묵상 내 생애 한 가운데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나도 베드로처럼 내 일에 나름대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일하던 차에, 갑자기 터져 버린 사건 앞에서 주님을 뵈었습니까? 내 화려함과 성공 앞에 한 낱 내 꿈이 허무하게 느껴졌습니까? 갑자기 무상하게 되버린 내 앞에 주님이 우뚝 서 계셨습니까? 나도 모르게 나를 끌어당겨 지금 이 자리에 그냥 이렇게 서도록 만드셨습니까?
부칙 베드로를 휘감는 깊은 체험을 여러번 관상기도를 반복하면서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그 옆에 서서,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도 들어보십시오. 이 소명 기사에 이어 베드로와 예수님의 관계를 찾아 깊이 잠겨 보십시오.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마태오 복음 14장 22절부터 33절까지의 베드로의 '주님'에 대한 체험에서, 수임을 마태오 복음 16장 13절부터 28절까지의 베드로의 고백과 수임에서, 사도-십자가의 길을 마태오 복음 16장 21절부터 28절까지의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예수를 따르는 길에서 보십시오. 그리고 '갈등과 배반'이라는 주제 속에서 갈등을 요한 복음 6장 22절부터 69절까지의 '생명의 빵'에서, 장담, 그러나 배반을 마태오 복음 26장 31절부터 35절까지와 69절부터 75절까지의 베드로의 장담과 예수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서 보십시오. 그리고 '사도로서의 재출발'이라는 주제 속에서 예수와 베드로의 재회의 기쁨을 요한 복음 21장 1절부터 13절까지의 일곱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에서, 신앙고백과 재수임을 요한 복음 21장 15절부터 19절까지의 예수와 베드로에서, 요한 21장 20절부터 25절까지의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에서 보십시오. 이상의 기사에 대한 자세한 묵상 안내 내용은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출간된 책, '예수님과 베드로, 주님과 나'에서 참조할 수 있습니다.
17.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말씀 요셉을 부르심(마태 1,28-25) 1 18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경위는 이러하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잉태한 것이 드러났다. 그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19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다. 20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주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22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23"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24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일러 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25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 않고 지내다가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그 아기를 예수라고 불렀다.
관상 마리아의 남편이 될 약혼자 요셉의 하루를 보십시오. 요셉은 아내를 맞이하는 기쁨에 매일이 날아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리아를 가슴에 안고 살 수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그의 하루는 좋았습니다. 기다림의 설레임이 그를 조급하게도 만들지만 곧 결혼할 꺼니까, 견딜 만했습니다. 싱글벙글, '내가 직접 당하는 것이지만 이렇게도 좋을 수가 있을까?' "결혼하면, 인제 여자 손에 꽉 잡혀 사는 거야!" 하고 주위 어른들이 놀려댔지만, 자신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고 마냥 좋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웬일인가. "마리아가 아기를 밴 것 같던데, 자네 혹시…?" 자기에게 그 말을 한 어른은 요셉이 사고 친 줄 알고 놀리듯 던진 이야기지만, 요셉은 아찔했습니다. 그리고 믿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그 어른 앞에서 아무런 내색도 할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 와 누워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마리아가 아기를 배었다니? 난 그런 적 없는데. 그 양반 날 놀리려고 한 이야기 아냐? 이것 참!' 그렇다고 마리아더러 직접 물어볼 수도 없고! '날 의심하느냐?'며 반대로 물으면 괜히 다 된 장사에 코 빠지는 격이 될 것 같고. "결혼하기도 전에 의처증 걸린 거냐?"고 사람들의 웃음거리나 될 것 같았습니다. 몸살이 날 정도였습니다. 며칠동안 요셉은 유난히 마리아를 지켜보았는데,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하고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마리아가 변한 것 같습니다. 왠지 머뭇 머뭇거리고, 뭔가 말하려고 하는 것 같고. 요셉은 사뭇 걱정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무슨 일이지? 정말이면 어떻하지? 정말이면, 그걸 알고도 누구 아인 지도 모르는데 그냥 결혼할 수도 없고, 파혼하자니 이 집 저 집 다 망신이고 마리아는 그날로 돌 맞아 죽을 텐데. 결국 그 집안도 이 동네에서 살긴 다 틀렸는데….' 어디고 자리에 앉기만 하면 분노와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솟구쳐 오르고, '어떻게든 마치 없던 일처럼 지나가는 일이 없을까?' 하늘이 원망스럽기까지 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만 하나?' 낮에 일은 손에 안 잡히고, 며칠 밤을 꼬박 새며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속도 모르고 더욱더 놀리기나 하고. 정작 요셉은 이것 저것 생각하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결혼하는 날부터 지옥이라더니, 결혼하기도 전에 이게 무슨 맘고생이란 말야?' 그냥 결혼하자니 간음하는 것이고 파혼하자니, 한 사람 죽이는 것이고…, 법을 어기지도 않고 마리아를 죽이지도 않으면서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요셉은 결국 하느님께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에게 평화를 주소서!" 결국 요셉은 마리아의 부모에게 가서, '내가 입다물 테니 그냥 아무도 몰래 이사가 버리라고 말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 들이어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습니다. 안도와 원망의 만감이 교차하는 요셉을 보십시오. '이 무슨 얄궂은 장난인가? 차라리 미리 알려나주지, 나를 주님의 아버지로 뽑고 준비시키는데 이렇게도 모진 수련이 필요했던가?' 요셉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기력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성적으로 생각하여 최선책으로 결정한 것은 더 이상 요셉에겐 아무 의미를 지닐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다행이지 뭐,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데….'
묵상 내가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정지었던 일을 신앙의 이름으로 다시 조명해 보십시오. 내가 보기에 못마땅한 부모님의 처사, 친우들, 세상사들 그 중에 우리가 모르는 새에 하느님 신비의 영역 안에서 배려되고 이루어진 일이 혹시 있습니까? 그 정도는 고사하고 라도, 내 시각 말고 하느님의 시각에서는 그 일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다 신앙 안에서 충실했습니다. 마리아는 처녀가 아이를 밴다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되는 일을 하느님의 뜻이라 하여 받아들였고, 요셉도 자기와 약혼한 여인이 아기를 배었다는 사실 앞에서 그냥 결혼해서 자신이 간음죄에 걸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랑하는 여인을 자기가 보복하는 마음으로 고발하여 사형시킬 수도 없어서 그냥 넘어가려고 하다가, 하느님의 뜻이라 하여 모든 것을 다 덮어두고 자기 책임 하에서 마리아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잉태된 그 아기의 보호자가 되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동정이신 마리아의 배필이 아닌 보호자로서 그에게 주어진 고자의 길을 그냥 받아들였습니다. 예수의 아버지로서 또한 아기 예수를 위협하는 세력의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그 위험천만한 가시밭길을 신앙의 이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아들 예수에 앞서, 십자가를 먼저 살아야 했던 요셉과 마리아 두 분의 성소를 기억해 봅시다. 우리가 흔히 말하고 누려왔던 '인간의 낙이란 것과 행복이란 것' 하고 어떻게 다른지! 심각하게 생각해 봅시다.
부칙 예수님의 양 아버지 요셉은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 2장 1절에서부터 12절까지에 나오는 동방 박사의 방문에서 간접적으로 나타나고, 마태오 복음 2장 13절부터 15절까지 이집트로 피난가고 마태오 복음 2장 19절부터 23절까지 다시 이집트에서 돌아오는 나자렛 성가정의 가장이요 보호자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루가 복음 2장 39절부터 40절까지와 41절부터 50절까지, 51절부터 52절까지 나오는 예수님의 유년시절 기사에 간접적으로 등장합니다.
참고로 가톨릭 출판사에서 펴낸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신부의 일대기를 읽어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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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말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노래를 부르다(루가 1,39-55) 1 39며칠 뒤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걸음을 서둘러 유다 산골에 있는 한 동네를 찾아가서 40즈가리야의 집에 들어 가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드렸다. 41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았을 때에 그의 뱃속에 든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을 가득히 받아 42큰 소리로 외쳤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43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44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45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마리아의 노래(최민순 신부 역) 46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 47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48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49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 50그 인자하심은 세세 대대로 * 당신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51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52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 53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54자비하심을 아니 잊으시어 *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55이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하여 * 영원히 우리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로다."
관상 되도 걱정이고 안돼도 걱정이었던 마리아의 처지를 바라보십시오. 아기 못 낳는 석녀라고 하던 아니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 마리아의 입장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녀의 감정 처리를.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지지 않았다면, 자신에게 왔던 천사는 아니 그 사건은 그냥 허깨비를 본 것으로 그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 동안 그가 고민하고 방황하면서도 애써 재다짐하고 신앙 안에서 받아들이려고 했던 그의 행위는 어처구니없게도 모두 우스운 꼴로 그쳐 버린 것이었을 게고. 그러나 그것은 아무 문제도 안됩니다. 아니 문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만삭인 엘리사벳의 배를 보는 순간, '아이고, 정말이었구나! 이젠 다른 방도도 없구나.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진정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었구나.' 이제 막 드러날 하느님의 사랑과 신비에 대한 기대와 그 신비 안에 자기가 참여하게 된다는 그 기쁨에 설레기도 했던 마리아. 그러나 다른 한편 의구심처럼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제어할 수 없는 두려움. 곧 현실에서 그가 당하게 될지도 모를 수모와 단절이라는 인간적인 처지. 그가 상상하고 두려워했던 사건들, 부모님과 요셉과의 관계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의 관계가 자기 생애의 마감에까지 이를 수 있는 파국으로, 한 순간에 치닫게 될 것 같은 불안감과 절망감이 이제 곧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는 절박함 속에 신음하듯 하는 마리아. 이러한 마리아의 처지를 너무나도 잘 안다는 듯이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거의 추켜세운다 싶을 정도로 띄워주고 있습니다.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주님의 어머니께서 나를 찾아 주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에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그런데 다행이 이는 성령의 인도로 알게 된 구세주 탄생 신비와 자기도 모르게 열려진 입에서 나온 찬미니라. 그렇다. '어떻게 해!' 하며 고개와 함께 온 몸의 기를 떨구는 마리아에게 엘리사벳을 통해 들려주신 성령의 말씀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정녕 복되십니다." 이 순간 엘리사벳은 마리아 일생의 최대의 보호자요 담보자가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조심스러움과 두려움을 무색케 하는 엘리사벳의 격려와 마리아의 인간적인 근심과 고뇌를 일시에 제압하는 성령의 이끄심.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마리아의 노래는 시작합니다. 그 옛날부터 '미리암의 노래'와도 같이 민요처럼 불려왔던 이 노래가 마리아에게서 새로운 의미를 가진 채 마리아의 가슴 속에서부터 마리아 자신의 노래로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며 주님의 구원을 조심스럽게 기대하고 기다리던 이스라엘 선인들에게 주님께서 드디어 오시어 자비를 베푸시리라는, 세상이 모두 제것인양 제 맘대로 할 수 있는 양 떠벌리던 이들이 쥐구멍을 찾고 사라지리라는, 가졌다고 으쓱대거나 갖지 못했다고 위축되는 것만 같았던 모든 물질과 현세 세상의 노예살이에서 해방되어 새 인간이 되리라는 기쁜 소식이 역사 안으로 울려 퍼지기 시작합니다.
부칙 마리아는 석녀였던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졌다던 천사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고 엘리사벳에게서 격려와 축복을 받는 순간 기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톨릭 성가 269번 마리아의 노래(마니피깟)'를 노래로 불러 보시고, 여러분의 성소를 느끼는 순간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라고 노래한 마리아를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마음이 설렘과 기쁨으로 주님께 한 층 더 다가설 수 있도록 마음을 경건히 하시고, 주님의 소명이 여러분 안에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하여 정말 주님의 소명을 기쁨에 넘쳐 받아들이고, 그 일이 현실적으로 여러분에게 실제적으로 주어졌을 때 기꺼이 여러분 자신을 헌신할 수 있도록 준비하십시오.
한편 성전에 아기 예수를 봉헌하던 날, 시메온은 예수 아기를 두고 구세주라고 밝히며 찬사를 올리고 나서는,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루가 2,34-35) 이렇게 처음부터 수난의 그림자를 짊어지고 걸어나가기 시작하는 마리아의 모습에 이어, 주님의 십자가 수난에 참여하는 마리아의 모습을 요한 복음 19장 25절에서, 주님께서 마리아를 우리 교회의 어머니로 주시는 모습을 요한 복음 19장 26절부터 27절에서, 교회 공동체와 함께 성령을 청하시는 마리아의 모습을 사도행전 1장 13절부터 14절까지에서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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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말씀 마리아를 부르심(루가 1,26-38) 1 26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보내시어 27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 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 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29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하지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31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에게 조상 다윗의 왕위를 주시어 33야곱의 후손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겠고 그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하고 일러 주었다. 34이 말을 듣고 마리아가 "이 몸은 처녀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35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나실 그 거룩한 아기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게 될 것이다. 36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들 하였지만, 그 늙은 나이에도 아기를 가진 지가 벌써 여섯 달이나 되었다. 37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38이 말을 들은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 갔다.
관상 수천년 전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하느님으로부터 낙원에서 쫓겨날 때,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악을 집어넣은 뱀에게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15) 라고 하시면서 악을 제거하고 구세주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바로 그 순간부터 점지되고 준비된 마리아를 보십시오. 마리아에 대한 하느님의 시선과 그 사랑. 드디어 때가 되어 하느님께서 구세주의 어머니를 찾아가 그 사명을 알리라는 명령을 받아 "다윗 가문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는 가브리엘 천사의 움직임을 느껴보십시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 기쁨에 넘쳐 다가갑니다. "은총을 가득히 입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말을 듣고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곰곰이 생각" 하며 긴장하고 경계합니다. 천사는 다시 명확히 마리아에게 그 사명을 알려줍니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전혀 이해되지도 않고, 납득되지 않는 천사의 이 말을 듣고 마리아는 놀랍니다. 처녀가 아이를 밴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지만, 그 아이가 하느님의 아이라니! "이 몸은 처녀입니다." 마리아 역시 즈가리야처럼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지만, 그는 거부의 차원보다는 호기심(?)의 차원에서 묻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천사는 하느님의 능력에 빗대어 단호하고도 힘있게 말합니다. "성령이 너에게 내려 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안 되는 것이 없다." 그러자 마리아는 신심 가득한 순명의 마음으로 겸손되이 자신의 성소와 사명을 받아들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천사가 떠난 후 홀로 남아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하느님께 기도하는 마리아를 지켜보십시오.
묵상 천사는 마리아 곁에 서있는 나에게 어떤 사명에 대해 말을 할까요? 나에겐 어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까? 그것이 실현되기에는 당신에게도 불가능하게 보입니까? 또 여러분의 머리 속에, 여러분의 가슴으로는 감싸주기 힘든 가정의, 세상의, 교회의 아픔이 담겨 있습니까? 또는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처녀가 아이를 배면 돌로 맞아 죽어야 했던 마리아의 처지처럼, 여러분의 현실적이고도 실존적인 위치와 생애가 위협받거나 손상될까 걱정스런 부분이 있습니까?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던 마리아의 자세를 기억하십시오. 그 마리아의 응답, 한 마디가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향하는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시키게 되었습니다. 구세주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하는 새 역사를 열게 되었습니다. 한 여인의 자기 희생을 감수한 순명으로 하느님께서 다시 인간 세상으로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나의 응답이, 나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의 선택이, 나의 그리스도교적 행동 결정 방식이, 나의 하느님 사랑 중심의 가치관과 행동방식이 나와 나의 가족, 나의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생각해 보고 나와 나의 삶, 나의 행동 방향을 선택하십시오.
부칙 한 사람의 행동은 그가 머무는 사회의 연대성으로 인해 그 한 사람의 일로 그치지 않고 그가 머무는 사회의 사람들과 제도에 영향을 끼칩니다. 마치 집안에 어떤 사람이 아프면 온 집안이 다 우울하듯이. 사도 바울로는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담'과 '그리스도'의 행위를 사회의 연대성 안에서 비교하여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 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져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로마 5,12.15遁.18-19) 또한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죄를 없이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죄를 없애 주셨고 다시 나타나시 때에는 인간의 죄 때문에 다시 희생제물이 되시는 일이 없이 당신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실 것입니다."(히브 9,26遁.28)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아담과 새 아담 그리스도, 죄를 지은 사람과 죄를 지어 갈라진 세상을 다시 화해시키고 회복시켜 일치시킨 사람으로 비교한 사도 바울로의 시각에 맞춰, 마리아를 처음 하느님의 계명을 저버린 하와에 비교하여 '새 하와'라고 불렀습니다.
참고로 성서 안에 나타난 마리아의 생애와 활동을 찾아보십시오. 우리 현실의 어려움을 주님께 알려드리고, 주님께서 오시도록 청함으로써 주님의 첫 번째 기적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로 "나자렛에서 무슨 신통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하고 믿지 않던 나타나엘을 비롯한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도록 한 마리아의 모습을 요한 복음 2장 1절부터 11절까지에 나타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보십시오. 한편, 아들 예수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사촌 형제들과 함께 예수를 찾아다니던 마리아의 모습을 마르코 복음 3장 31절부터 35절까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이냐?'에서 보십시오.
15-1. 찬미하여라
말씀 즈가리야의 노래(루가 1,67-79) 67아기 아버지 즈가리야는 성령을 가득히 받아 예언의 노래를 불렀다. 68"주님 이스라엘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 주님은 당신 백성을 찾아 속량하시고, 69당신의 종 다윗의 가문에서 * 능하신 구세주를 저희에게 일으키시어, 70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으로 * 옛부터 말씀하신 대로, 71저희 원수들에게서 또 저희를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손에서 * 저희를 구원하시리이다. 72저희 조상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 거룩한 당신 계약을 아니 잊으시려, 73저희에게 주시기로 * 저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대로, 74저희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시어 * 어전에서 겁없이, 75성덕과 의덕으로 우리 모든 날에 * 주님을 섬기게 하심이로다. 76아기야, 너 지존하신 이의 예언자 되리니 * 주님의 선구자로 주님의 길을 닦아, 77죄 사함의 구원을 * 주님의 백성에게 알리리라. 78이는 우리 하느님이 자비를 베푸심이라 *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저희를 찾아오게 하시고, 79어둠과 죽음의 그늘 밑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며 * 저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시리라."
부칙 한 주간 동안 매일 기도 시간 내내 '즈가리야의 노래'를 읊으며, 불가능을 가능케 해주시고 또 결국 인간의 소원을 들어 허락해 주시며, 결핍과 부족을 채워주시려고 다가오시는 그리고 인간의 꿈이 이루어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갈고 닦아서 준비하여 주님의 일꾼으로 삼으시는 주님을 기억합시다. 또 다른 한편 주님은 즈가리야의 노래에 나타난 것처럼 개인의 원수를 갚아주시기 위해 오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쳐 없애 주실 원수는 어떤 사람이거나 이웃 민족이 아니라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악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악의 손아귀에 잡혀 증오와 미움 그리고 삐뚤어진 영혼을 악에게서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럼으로써 겉으로 드러난 모든 허물과 비정상적인 관계를 복원시켜 주십니다. 우리는 채워지지 않고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근원적인 갈증과 메마름을 적셔줄 분이 오시리라는 것을 알리는 전령입니다. 우리를 채워주러 오시는 주님을 알리기 위해 우리가 먼저 주님으로부터 얻기로 합시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 우리의 신앙이 주님의 은총으로 채워짐을 경험해 봅시다. 즈가리야의 경우를 기억하고 포기하거나 낙담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원하시고 또 필요하시다면, 언젠가는 인간 그가 애타게 기다리던 그것을 들어주시리라는 것을.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 그것에 지향을 두고 꾸준히 기도하고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나에게 주어졌을 때 부끄럽거나 부족함이 없도록, 그것과 연관하여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조금씩 조금씩 준비하십시오.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고 수용하여 운용할 자격과 수준이 삶으로 채워졌고, 그리고 주님께서 그것을 원하시고 쓰시려고 하시는 순간이 맞아 떨어질 때 그 것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준비된 자리를 위해 즈가리야의 노래를 겸손되이 바칩시다. 감성과 곁들여 온 몸으로 바치기 위해 '가톨릭 성가 85번 즈가리야의 노래'를 찾아 노래로 바쳐도 좋습니다.
참고로 세례자 요한의 활동시작을 루가 복음 3장 1절부터 20절까지(22절까지 참조)에서, 세례자 요한의 예수에 대한 구세주 확인과 증언을 루가 복음 7장 18절부터 23절까지와 요한 복음 1장 19절부터 34절까지와 3장 22절부터 30절까지(36절까지 참조)에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증언에 대해 7장 24절부터 35절까지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마태오 복음 14장 1절부터 12절까지에서,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에 빗댄 예수님의 설명을 마태오 복음 17장 9절부터 13절까지에서 보십시오.
15.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말씀 즈가리야를 부르심(루가 1,5-20.24-25.57.59.62-64) 1 5헤로데가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아비야 조에 속하는 사제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 이름은 즈가리야였고 그의 아내는 사제 아론의 후예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6이 부부는 다 같이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율을 어김없이 지키며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다. 7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엘리사벳은 원래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자인데다가 이제는 내외가 다 나이가 많았다. 8어느 날 즈가리야는 자기 조의 차례가 되어 하느님 앞에서 사제 직분을 이행하게 되었다. 9사제들의 관례에 따라 주님의 성소에 들어 가 분향할 사람을 제비뽑아 정하였는데 즈가리야가 뽑혀 그 일을 맡게 되었다. 10안에서 즈가리야가 분향하고 있는 동안 밖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11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즈가리야에게 나타나 분향 제단 오른쪽에 서 있었다. 12이것을 본 즈가리야는 몹시 당황하여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13그 때에 천사가 이렇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라. 즈가리야, 하느님께서 네 간구를 들어 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터이니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 14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사람이 또한 그의 탄생을 기뻐할 것이다. 15그는 주님 보시기에 훌륭한 인물이 되겠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나 그 밖의 어떤 술도 마시지 않겠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받을 것이며 16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들의 주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데려 올 것이다. 17그가 바로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먼저 올 사람이다. 그는 아비와 자식을 화해시키고 거역하는 자들에게 올바른 생각을 하게 하여 주님을 맞아 들일 만한 백성이 되도록 준비할 것이다." 18이 말을 들은 즈가리야가 "저는 늙은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말하자 19천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하느님을 모시는 시종 가브리엘이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분부를 받들고 너에게 와 일러 주었는데 20때가 오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24그 뒤에 그의 아내 엘리사벳은 아기를 가지게 되어 다섯 달 동안 들어 앉아 있으면서 25"마침내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도와 주셔서 나도 이제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57엘리사벳은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59아기가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던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왔다. 62아기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63즈가리야는 작은 서판을 달라 하여 "아기 이름은 요한." 이라고 썼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64바로 그 순간에 즈가리야는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게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관상 아내 엘리사벳은 사제 아론의 후예이고 자신은 하느님 대전에 제사를 바치는 사제로서 외견상 아무런 흠이 없는 듯한데도, 알지 못할 무슨 흠이 있기라도 하듯 자식이 없는 즈가리야. 그의 아쉬움과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십시오. 인간으로서의 낙을 누려보지 못한, 어쩌면 그러기에 더욱더 하느님께 충실하고 자식을 주실 지도 모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잠시라도 돌릴 수 없는 성실함. 또 한편 인간에겐 겸손한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런데 그는 "두려워하지 말라. 즈가리야, 하느님께서 네 간구를 들어주셨다. 네 아내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을 터이니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 하여라."라고 한 천사의 말을 듣고, 윗 입술은 기뻐서 치 올라가지만 곧 그의 쓰라린 경험과 지친 기대와 이성이 그에게 신앙을 억누르게 합니다. "저는 늙은이입니다.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런 일을 믿으라는 말씀입니까?" 즈가리야의 현실과 일상에서 죽어버린 신앙. 머리 속에서만 남아 있는 신앙을 보십시오.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의 간구가 정작 들어진 그 순간에 하느님의 완전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안타까운 즈가리야.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자신의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뻗대버립니다.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 뻗대던 그는 결국 그 일로 입이 막히고 맙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분부를 받들고 너에게 와 일러 주었는데 때가 오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하게 될 것이다." 한편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지고 "마침내 주님께서 나를 이렇게 도와 주셔서 나도 이제는 사람들 앞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구나" 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한편으론 정말 나이 들어 부끄러울 수도 있는 상황인데, 오히려 입이 헤 벌어질 정도로 방글이가 된 엘리사벳을 보십시오. 그리고 아들의 명명식을 보십시오. 정상적이라면 아들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문의 조상들의 이름에서 따와야 할텐데 그러지 않고 주위에서 의아하게 여길 정도로 다른 이름, '요한' 이라고 짓는 장면을 보십시오. 곱지 않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들! 그러나 "아기 이름은 요한." 이라고 쓸 때의 즈가리야의 굳센 믿음을 보십시오. 그리고 즈가리야가 그 이름을 정하자마자,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주님 찬미를 전하오리다." 하듯 터져나오는 주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그의 입술이 열려 주님을 찬미하게 된 상황을 잘 그려보십시오.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게 됨으로써, 부르심의 현실이 이루어짐으로써 더욱더 확실히 믿게 된 즈가리야.
묵상 난 어떤 이유로 주님의 부르심과 신앙의 결단들을 외면하고 거절해 왔습니까? "난 외아들인데!" "난 병난 부모와 아직 졸업하지 못한 동생들 학비를 대 주어야 하는데!" "이 길은 내 전문성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데…." "이건 내일 쓰려고 남겨 놓은 돈인데…." 하며 믿음의 응답을 거절해 오지는 않았던가요? 내 현실이 아니 현실에 대한 집착과 고착이 믿음을 갉아먹고 있었던 건 아닙니까? 또 하느님께서 내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방법으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나중에 들어주셨을 때 또는 내가 원하는 방법보다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셔서 마련해 주신 일을 뻗대서 망쳐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 지금 여러분의 믿음이 확실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이 계기를 잘 새겨두십시오. 혹시 나중에 여러분의 믿음이 혼란스럽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 오늘을 기억하여 버틸 수 있도록 명료하고 확신 있게 정리해 두십시오.
부칙 참고로 본문에서 생략된 즈가리야가 벙어리가 된 상황을 루가 복음 1장 21절부터 23절까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내용(16-1과 참조)을 39절부터 45절까지와 56절, 세례자 요한의 출생 생략기사를 58절과 60절부터 61절까지와 65절부터 66절까지에서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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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말씀
예레미야를 부르심(예레 1,4-19) 1 4내가 받은 주님의 말씀은 이러하였다. 5"내가 너를 점지해 주기 전에 나는 너를 뽑아 세웠다.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 6"아! 주님 나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하고 제가 아뢰었더니, 7주님께서는 저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8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9그러시고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제 입에 대시며 이르셨다. "나는 이렇게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 준다. 10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 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
관상 예레미야를 점지하시는 주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점지하시는지. 그리고 그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뽑아 그에게 주님의 말을 전할 예언자로 쓰시기 위해 그에게 갖은 소질과 능력을 주어 준비시키시는 모습을. 어떤 소질과 능력을 불어넣어 주시는지 잘 보십시오. 그런데 예레미야가 주님께 자신은 자격이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이미 준비를 다 시켜 놓았는데 말입니다. "아! 주님 저의 주님, 보십시오.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얼마나 주님 앞에서 우스운 소리를 하고 있는 셈인지! 그래서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아이라는 소리를 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야 하고, 무슨 말을 시키든지 하여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 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손을 예레미야의 입에 대시며 이르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의 말을 너의 입에 담아 준다. 보아라! 나는 오늘 세계 만방을 너의 손에 맡긴다. 뽑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고 멸하기도 하고 헐어 버리기도 하고, 세우기도 하고 심기도 하여라." 주님의 손이 예레미야의 입에 닿자마자, 예레미야의 입이 열리는 광경을 보십시오.
묵상 주님께서 "네가 세상에 떨어지기 전에 나는 너를 만방에 내 말을 전할 나의 예언자로 삼았다."고 예레미야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입을 열어주시며 예언자로 만드셨다면, 나에게는 어떤 역할을 맡기셨겠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쓰시려고 이미 다 준비해 주신 내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어느 면에 가장 소질이 있고, 어떤 재주와 능력이 있는지 그리고 어떤 성품적인 장점이 있는지?
부칙 누구에게나 있다는 장점이 나에겐 어느 것인지 찾아보십시오. 남의 장점을 보면서 주눅이 들거나 열등감에 빠지지 말고 자신의 것을 발견해 보십시오.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탐욕과 권력을 향한 욕구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으로도 힘을 얻고 있으니까요!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잘 아는 것. 이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첫 걸음이자 하느님을 구체적으로 깊이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참고로 예레미야 예언서를 읽으면서 예레미야에게 내린 하느님의 말씀과 예레미야를 통해 일하시는 주님을 만나보십시오. 13-1. 가난은 왜
말씀
아담과 그리스도(로마 5,12.15遁.18-19)
5 12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 들인 것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15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습니다. 18그러므로 한 사람이 죄를 지어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은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올바른 행위로 모든 사람이 무죄판결을 받고 길이 살게 되었습니다. 19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는 달리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부칙 가난한 이들에게 가면서 신앙과의 관계에서 제일 먼저 부딪히는 것 중의 하나는 "왜 하느님께서 가난한 이들을 만들어 내시는가 내지 허용하시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다만 가난 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의 결핍과 그에 따른 고통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이면에는 죄와 악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첫째, 인간에 의한 것이라면, 개인적인 경우에 이기주의와 탐욕 그리고 그 탐욕을 이루기 위한 죄요, 사회적인 경우에는 이러한 개인의 이기적인 탐욕을 추구하고 얻기 위해 제도화된 악, 곧 사회악, 구조악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인간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유는 '선' 뿐만 아니라 '악'까지도 제한없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합니다.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우리 일상에서 드러나는 죄를 저지르는 자유에서부터 자기 자신의 목숨을 버릴 자유와 심지어는 창조주 하느님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까지. 이 인간의 자유 선택권이 오늘날 우리 눈에 결과로 드러난 현상들의 원인입니다. 그 중 부정적인 결과가 세상의 죄와 그 죄악의 현상인 (극복되어야 할) 가난과 굶주림, 질병, 고통, 죽음입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지배와 예속, 탈취와 소유의 전쟁입니다.
둘째,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죄의 상황을 인간이 겪도록 악에게 허락하시는 경우입니다. 욥의 상황이 이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욥기에서는 사탄이 욥을 시험하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장면이 두 번에 걸쳐 나옵니다. "주님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의 소유를 모두 네 손에 붙인다. 그러나 그의 몸(목숨)에만은 손을 대지 말아라."(욥 1,12(2,6)) 그런데 욥의 친구 데만 사람 엘리바즈에 의하면 "곰곰이 생각해 보게. 죄없이 망한 이가 어디 있으며 마음을 바로 쓰고 비명에 죽은 이가 어디 있는가?"(4,7)라고 함으로써 그는 인간 상황을 인과응보의 원인론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들의 입장은 욥의 무죄 변론으로 무효가 됩니다. "욥이 말을 받았다. '아, 이 원통한 심정을 저울질하고 이 재앙도 함께 달아보았으면. 좀 가르쳐 주게.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다면 깨우쳐 주게. 나 입을 다물겠네. 진심으로 하는 말은 힘이 된다는데 자네들은 어찌하여 나무라기만 하는가?'"(욥 6,1.2.24-25) 그러면 무엇입니까? 욥의 고백을 봅시다.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하여라. 네가 나의 판결을 뒤엎을 셈이냐? 너의 무죄함을 내세워 나를 죄인으로 몰 작정이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38,1.2; 40,7-8; 42,1-3) 이러한 면에서 볼 때 가난과 고통으로 대변되는 인간이 처한 악의 상황은 인간에겐 헤아릴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앞에서 보았듯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내리는 시험이나 시련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야고1,14.13遁) 실제로는 사탄의 시험에 욕심 많은 인간이 응답할 뿐입니다. 한편 사탄에게 시험을 받아 고통을 겪게 된 욥은 불평하는 자기 부인에게 대답합니다."'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았는데 나쁜 것이라고 하여 어찌 거절할 수 있단 말이오?'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일을 당하여 입술로 죄를 짓지 않았다."(욥 2,10) 신앙적인 면에서만 이 상황을 이해한다면 고통이 있다는 하나만으로 죄가 합리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죄악 앞에서 하느님의 선성(善性)을 부정하거나 거룩함을 손상시키려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왜 세상에 악을 허락하시는가?" 등의 부질없는 말로 주님의 뜻을 가리우는 경우가 되지 않도록 믿음을 키워야겠습니다. 스스로의 감수성으로 인한 염려요, 자기 논리나 당위적인 명제의 늪에 빠지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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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어디 계십니까
말씀 엘리사를 부르심(2열왕 2,1.6.8.-14) 2 1주님께서 엘리야를 회오리바람에 태워 하늘로 데려 가실 때가 되어 엘리야가 길갈을 떠나는데, 엘리사가 따라 나섰다. 그러자 6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자네는 여기에 머물러 있게. 나는 주님의 분부를 따라 요르단으로 가야겠네." 그러나 그가 대답하였다. "결코 안됩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절대로 스승님과 헤어질 수는 없습니다." 8엘리야가 겉옷을 벗어 말아 가지고 그것으로 물을 치자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마른 땅을 밟고 강을 건넜다. 9강을 건너면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물었다. "주님께서 이제 나를 데려 가실 터인데, 내가 자네를 두고 떠나기 전에 무엇을 해 주면 좋겠는가? 말해 보게." 엘리사가 청하였다. "스승님, 남기실 영검에서 두 몫을 물려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10엘리야가 말하였다. "자네는 아주 어려운 청을 하는군. 내가 떠나는 것을 자네가 본다면 소원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한다면 그렇게 안 될 것일세." 11그들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길을 가는데, 난데없이 불말이 불수레를 끌고 그들 사이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동시에 두 사람 사이는 떨어지면서 엘리야는 회오리바람 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다. 12엘리사는 그 광경을 쳐다보면서 외쳤다. "나의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이스라엘을 지키던 병거여, 기병이여…" 엘리야가 다시 보이지 않게 되자, 엘리사는 자기의 겉옷을 두 조각으로 찢어 버렸다. 13그리고는 엘리야가 떨어뜨린 겉옷을 집어들고 되돌아 와 요르단강 가에 서서 14엘리야의 겉옷으로 물을 쳤으나 물이 갈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야의 주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하면서 물을 치자 물이 좌우로 갈라졌다.
관상 엘리야와 엘리사가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위에서 하느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는 것도.
엘리사는 엘리야의 활동을 보고 배웠습니다. 그는 엘리야에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청합니다. "스승님, 남기실 영검에서 두 몫을 물려주십시오" 그러나 엘리야는 엘리사의 청을 들어줄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엘리야가 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맡는 것은 하느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단지 엘리야는 그 길을 걸어갈 방법이나 그 상황을 설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말합니다. "자네는 아주 어려운 청을 하는군. 내가 떠나는 것을 자네가 본다면 소원대로 되겠지만, 보지 못한다면 그렇게 안 될 것일세." 이 말은 마치 오늘 날, "주님의 뜻이라면 네가 주님의 사도가 될 수 있겠지." 또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너를 쓰시겠지!" 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과도 같습니다. 주님은 엘리사의 청원을 들어 아십니다. 주님은 엘리야가 일을 다 마쳤기에 그를 데려가십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청하고 있는 그 가운데로 불말이 끄는 불수레를 보내서 엘리야를 불러 올리십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청을 들어주실 하느님은 모르고, 자신이 아는 자기 우상 엘리야를 잃어버려 한 동안 넋이 나가 버렸습니다. 엘리야가 떠나 버린 세상에서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린 엘리사가 하늘을 쳐다보며 부르짖습니다. "엘리야의 주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엘리사에게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영감과 원의를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한 엘리야, 바로 엘리야에게 함께해주셨던 주님을 부릅니다. 마치 주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출애 3,15) 하신 데 반해, 지금은 거꾸로 엘리사가 하느님께 부르짖습니다. "엘리야의 주 하느님, 어디 계십니까?" 그제야 엘리사에게 하느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엘리사가 옷으로 요르단 강물을 치자 하느님께서 물을 좌우로 갈라지게 하십니다.
묵상 성인들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가끔 훌륭하게 사는 사람들을 접하게 되면 '나도 한 번 그렇게 살아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듭니다. 열심히 그리고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 행복하게 가정 생활을 꾸려 가는 부부들, 자신의 직업과 사명에 혼신을 불태우는 사람들 그리고 성인 성녀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우리 마음에 유난히 다가오고 오랫동안 머무는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을 번창시킨 사람들과 사회적으로 출세한 영웅들보다도 이웃을 위해 몸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왠지 가슴이 떨리고 고개가 숙여지고, 그런 분들을 만났다는데 그리고 또 경우에 따라서는 그런 분들을 안다는 것 자체만도 커다란 기쁨입니다. 한편 텔레비전이나 신문기사에 날 정도의 유명한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평상시에 비교적 가까이 대할 수 있는 분들을 통해서도 성소를 느끼게 됩니다. 우리 본당의 신부님, 수녀님, 교리교사, 평신도 지도자들을 보면서 우리는 복음에 헌신하고자 하는 열정과 주님께 일생을 바치고 싶은 마음이 불러일으켜 집니다.
오늘 나에게 성소의 길에 눈뜨게 하신 분은 누구이십니까? 나는 그분의 어떤 면을 통해 성소의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습니까? 어떤 면에서 하느님께서 그분과 함께하신다고 체험했습니까? 내 성소 체험의 뿌리를 찾아봅시다. 그리고 그 성소가 주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식별하고 정화하는 시간도 가져봅시다.
부칙 우리를 성소의 길로 인도하는 이는 우리에게 성소의 길을 제시한 신부님이나 수녀님, 신앙인이지만 진정 우리를 부르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분들은 단지 주님의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의 역할이나 중요성이 손상되지는 않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그분들보다 그분들을 부르시고 우리 눈에 뜨이도록 그분들을 보내주신 주님과 주님의 부르심에 눈을 떠야겠습니다. 나를 어떻게 쓰실 지는 주님께서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소는 하나지만 성소의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모두 다 주님을 섬기는 일이지만, 주님을 섬기는 형제·자매들이 많기 때문에 주님을 섬김으로써 우리가 봉사하게 될 분야는 여러 갈래가 되리라는 사실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더라도 모두 다 주님을 위한 하나의 성소의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 안에서 또 그 일을 주신 분은 주님이시라는 이유로 우리는 모두 한 교회를 이룹니다. 우리의 유일한 중개자요 지도자는 주님뿐이십니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그저 내가 할 일은 주님께 나를 쓰시도록 허락하고 봉헌하는 것임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과 달리 나를 독특하게 만드시고, 내게 맞도록 준비해 놓으신 길로 나를 부르시고 이끌어 가십니다. 내 눈에 띄는 어떤 좋은 훌륭한 분보다, 그와 함께 하시면서 그를 통해 열매 맺으시는 주님께 집중하도록 하십시오.
참고로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을 열왕기 상권 19장 19절부터 21절에서 보시고, 엘리사의 활동을 2장 전체와 4장부터 8장 15절까지에서 보십시오. 그리고 엘리사가 다른 사람을 시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장면을 9장 1절부터 13절까지에서 보시고, 엘리사의 마지막 예언을 13장 14절부터 20절까지에서 보십시오.
11. 비를 땅위에 내리리라
말씀 엘리야를 부르심(1열왕 17,1; 18,1.20-41) 17 1길르앗의 티스베에 살고 있던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왕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이 땅에 내리지 않을 것이오." 18 1삼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가서 아합을 만나거라. 내가 비를 땅위에 내리리라." 20아합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고 예언자들에게 가르멜 산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21엘리야가 백성들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주님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22엘리야가 백성들에게 다시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로서 살아 남은 사람은 나 하나요. 그러나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 오십 명이나 있습니다. 23이제 우리에게 황소 두 마리를 끌어다 주시오. 그들에게 한 마리를 잡아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지 않은 채 그냥 두게 합시다. 나도 한 마리를 잡아 장작 위에 올려놓고 불을 붙이지 않겠습니다. 24당신들은 당신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을 부르시오. 나는 나의 주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겠소. 어느 쪽이든지 불을 내려 응답하는 신이 참 하느님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그렇게 하자고 하였다. 25엘리야가 바알의 예언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수가 많으니 먼저 시작하시오. 황소 한 마리를 택하여 제물로 드리고 당신들 신의 이름으로 부르시오. 그러나 불을 붙이지는 마시오." 26그들은 준비한 황소를 받아 잡아 놓고는 아침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오, 바알이여, 대답하소서." 그러나 대답은커녕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들 예언자들은 자기네가 만든 제단을 돌면서 절뚝거리는 춤을 추었다. 27한낮이 되자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말하였다. "바알은 신이니까, 더 크게 불러 보아라. 깊은 사색에 빠져 계신지도 모르지. 외출중인지 아니면 여행중인지 혹은 잠이 드셨는지도 모르니 어서 깨워 보아라." 28그들은 더 크게 소리쳤다. 자기네 의식을 따라 칼과 창으로 몸에 상처를 내어 피까지 흘렸다. 29한낮이 지나 제사 시간이 될 때까지 그들은 신접한 모습으로 날뛰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답은커녕 아무 소리도, 아무 기척도 없었다. 30그러자 엘리야가 온 백성에게 자기 앞으로 다가 오라고 말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다가오자 그는 허물어진 주님의 제단을 고쳐 쌓았다. 31엘리야는 일찍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내려 주신 야곱의 열 두 아들들에게서 나온 지파의 수대로 돌을 열 두 개 모았다. 32엘리야는 그 돌 열 두 개로 주님의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단 주위에는 곡식 두 가마 정도 들어 갈 만큼 큰 도랑을 팠다. 33그는 장작을 쌓은 다음 송아지를 잡아 그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물을 네 동이 가득 채워다가 번제물과 장작 위에 쏟으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34그는 그렇게 한 번 더 하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대로 하자 다시 한 번 더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세 번을 붓자 35물이 제단 주위로 넘쳐흘렀고 옆 도랑에 가득 괴었다. 36제사드리는 시간이 되어 예언자 엘리야가 앞으로 나와서 외쳤다. "오,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 이제 당신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고 제가 당신의 종이며 제가 한 모든 일이 당신의 말씀을 좇아 한 것임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십시오. 37응답해 주십시오. 주님, 저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백성이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깨닫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신 분이 당신이심을 알게 해 주십시오." 38그러자 주님의 불길이 내려 와 제물과 함께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태웠고 도랑에 괴어 있던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말려 버렸다. 39온 백성이 이 광경을 보고 땅에 엎드려서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십니다." 40엘리야가 백성들에게 소리쳤다. "바알의 예언자들을 하나도 놓치지 말고 모조리 사로잡으시오." 엘리야는 백성들이 사로잡아 온 그 예언자들을 키손 개울로 끌고 가 거기에서 죽였다. 41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이젠 돌아 가셔서 음식을 드십시오. 내 귀에 비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관상 이스라엘 왕 아합과 그 백성이 주님의 계명을 버리고 바알을 받들어 섬기자(18,18遁),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에 비는 물론 이슬도 한 방울 내리지 않게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야 하는데 비가 안 오니까 여러 가지 방법으로 기우제를 지냈습니다. 특별히 농사를 잘 짓게 해준다던 '바알'신에게까지 기우제를 지냈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삼년'이 흘렀습니다. "어쩌다가 풀이 있는 곳을 만날지도 모르니 모든 샘과 계곡을 샅샅이 뒤져보자. 어떻게든 말과 노새를 살려야지 그냥 죽일 수는 없지 않겠느냐?"(18,5)고 왕이 다급하게 말할 정도로 전국에 가뭄이 극심했습니다. 그래서 왕은 오바디야를 데리고 물을 찾아 전국을 누볐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아합을 만나거라. 내가 비를 땅 위에 내리리라."(18,1) 그래서 엘리야는 길을 떠나 왕과 함께 물을 찾아 나선 오바디야 앞에 서게 됩니다. 오바디야는 주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왕후 이세벨이 주님의 예언자들을 학살할 때 예언자 백 명을 오십 명씩 동굴 속에 숨기고 먹을 것과 물을 날라다 주어 살려 낸 사람이었습니다.(18,3遁-4) 오바디야를 통해 아합 왕을 만난 엘리야는 왜 이스라엘에 가뭄이 왔는지 설명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삶은 바로 왕 자신과 왕의 가문입니다. 왕께서는 주님의 계명을 버리고 바알을 받들어 섬겼습니다."(18,18) 그리고 왕과 백성들 앞에 바알이 하느님이 아니고, 주님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서 왕과 바알의 예언자들과 백성들은 가르멜 산으로 모입니다.
죽음 앞에서도 굳건히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선 엘리야를 보십시오. 엘리야가 백성들 앞에 나서서 말합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작정입니까? 만일 주님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하느님이라면 그를 따르시오." 그런데 누가 그 말에 응답하겠습니까? "백성들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예언자들마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표징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살릴 참 하느님께서 주시는 표징을! 그래서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들을 맞서서 죽음을 담보로 맡기고 맞대결을 합니다. 엘리야의 믿음을 보십시오. 가뭄이 몰아친 이스라엘의 현실 앞에서 주님께서 비를 내려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자신이 믿는 바를 현실에서 행동으로 옮기고 마침내 이루어내고야 마는 믿음을! 전율하지 않습니까? 죽음과 나라의 운명을 자신의 손에 거머쥔 엘리야, 아니 그에게 그러한 사명을 맡기시는 하느님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엘리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과 데에 빠져있는 인간을 영원을 향한 새 인간으로 바꾸려는 엘리야. 그는 정녕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개의 돌을 모아 주님의 제단을 쌓고, 제단 주위에 도랑을 파고, 제단 위에 장작을 쌓은 다음 그 위에 송아지를 올려놓고 그 위에 물을 네 동이씩 세 번 총 열 두 번 붓습니다. 그러자 "물이 제단 주위로 넘쳐흘렀고 옆 도랑에 가득 괴었다." 그 정도라면 송아지에 불이 붙어도 아무도 그것이 속임수나 자연의 현상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리라. 그리고 나서야 엘리야는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저에게 응답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백성이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깨닫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신 분이 당신이심을 알게 해주십시오." 엘리야의 기도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하늘에서 "주님의 불길이 내려와 제물과 함께 나무와 돌과 흙을 모두 태웠고 도랑에 괴어 있던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말려 버렸다."(18,38) 그제야 백성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이심을 확인하고 주 하느님께 회개하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온 백성이 이 광경을 보고 땅에 엎드려서 부르짖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이십니다.'"(18,39) 그리고 약속대로 주 하느님께서 내려 주시는 비가 이스라엘 위로 쏟아져 내립니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이어 캄캄해지면서 바람이 일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큰비가 쏟아지지 시작하였다."(18,45) 아니, 비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참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불러일으켜 지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새 생명을 선사하신 것입니다.
묵상 엘리야의 기적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자신의 성소와 연관하여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기우제를 준비시키는 가운데, "물을 네 동이씩 세 번 제물 위에 부어 제단 주위로 넘쳐흘러 옆 도랑에 가득 괼" 정도로 물을 제물 위에 부으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 삼 년이나 가뭄이 계속되었는데 물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남은 물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다시 비가 내릴 때까지 고이고이 신주 모시듯이 아끼고 아껴야 할 물을 제물 위에 부으라니! 그것도 엘리야가 제단을 쌓을 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생각하여 열두 개의 돌을 모았다면, 네 동이씩 세 번 부은 물은 이스라엘에 남은 물 모두를 주님께 바치라는 요구가 아닙니까.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했겠습니까? 아까워서 그리고 불안해서 못 내놓는 이들에게 한 번 더, 한 번 더해서 결국 열두 지파의 것 모두를 바치라고 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나를 바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내가 가진 것 모두를 바치라면? 내가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내 삶 자체를 주님처럼 가난하고 업신여김과 모욕을 감수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께 맞추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약에서도 행실 나쁜 여인이 "매우 값진 순 나르드 향유 한 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아 드렸"(요한 12,3)을 때 "예수의 제자로서 장차 예수를 배반할 가리옷 사람 유다가 '이 향유를 팔았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었을 터인데 이게 무슨 짓인가?' 하고 투덜거렸다."(요한 12,4-5) 만일 엘리야와 함께 하느님께 기우제를 드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 하느님이 참 하느님이심을 믿지 못했다면, 믿더라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워 물마저 다 말라 버릴 줄 알고 아까워했더라면, 엘리야의 지시대로 물을 주님 대전에 가져다 부을 수 있었겠습니까? ("유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아 가지고 거기 들어 있는 것을 늘 꺼내 쓰곤 하였다." 요한 12,6 참조) 그리고 주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기적을 보여주신 다음에야 내 것을 바치겠다고 조건을 내세우면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겠습니까?
주님은 주님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는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비가 쏟아졌던 것입니다.
주님께 온전히 자신을 바칠 수 있습니까? '예'라고 대답하기 전에, 그러한 믿음을 달라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부칙 주님을 믿고 자신을 온전히 그리고 완전히 바치는 자세를 열왕기 상권 17장 8절부터 16절까지에 나오는 시돈 지방의 사렙다 과부에게서 보십시오. 가뭄 중에 엘리야가 과부에게 물을 달라고 하자 "저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뒤주에 밀가루 한 줌과 병에 기름 몇 방울이 있을 뿐"(7,12)이라고 답합니다. 그런데도 엘리야가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내 놓으라고 하자 "과부는 곧 집안에 들어 가 엘리야가 말한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엘리야와 과부 모자에게는 먹을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7,15)
참고로 하느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시고 먹이시는 과정을 열왕기 상권 17장 2절부터 7절까지(24절까지 각 기사마다 참조)에서,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하느님께로 이끄시어 예언자로 수련시키는 장면을 19장 1절부터 18절까지에서 보십시오. 그리고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과 이세벨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야를 열왕기 상권 21장에서 보시고 그 예언의 결과를 열왕기 하권 9장과 10장에서 보십시오. 그리고 여호람 왕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야를 역대기 하권 21장 5절부터 20절까지에서, 아하지야 왕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엘리야를 열왕기 하권 1장 1절부터 17절까지에서 보십시오.
10-1. 주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말씀 한나가 사무엘을 얻고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다(사무엘상 1,10-11.19-20; 2,1-10) 1 10한나는 마음이 아파 흐느껴 울며 주님께 애원하였다. 11그는 서원을 하며 빌었다. "이 계집종의 가련한 모습을 굽어 살펴 주십시오. 이 계집 종을 저버리지 마시고 사내 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평생 그의 머리를 깍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19주님께서 한나를 마음에 두시어 20임신하게 해 주셨다. 한나는 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주님께 빌어서 얻은 아기" 라고 하여 이름을 사무엘이라 지었다. 2 1한나가 이렇게 기도를 올렸다. "내 마음은 주님 생각으로 울렁거립니다. 하느님의 은덕으로 나는 얼굴을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듯이 내 가슴에 승리의 기쁨을 안겨 주시니 원수들 앞에서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2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은 없으십니다. 당신밖에는 없으십니다. 우리 하느님 같은 바위는 없으십니다. 3잘난 체 지껄이는 자들아, 너무 우쭐대지 말아라. 거만한 소리를 입에 담지 말아라. 주님은 사람이 하는 일을 다 아시는 하느님, 저울질하시는 하느님이시다. 4힘있는 용사의 활은 꺾이고 비틀거리던 군인은 허리를 묶고 일어나게 되리라. 5배불렀던 자는 떡 한 조각 얻기 위하여 품을 팔고 굶주리던 사람은 다시 굶주리지 않게 되리라. 아이 못 낳던 여자는 일곱 남매를 낳고 아들 많던 어미는 그 기가 꺾이리라. 6주님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신다. 7주님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시며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신다. 8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뒹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 자리에 앉혀 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땅의 밑동은 주님의 것, 그 위에 세상을 지으셨으니 9당신을 따르면 그 걸음걸음을 지켜 주시지만 불의하게 살면 앞이 캄캄해져서 말문이 막히리라. 사람이 제 힘으로는 승리하지 못하는 법, 10주님께 맞서는 자는 깨어지리라. 지존하신 이께서 하늘에서 천둥소리로 우렁차게 호령하신다. 주님은 땅 끝까지 심판하신 분, 당신께서 세우신 왕에게 힘을 주시며 기름 부어 세우신 임금의 이름을 떨치게 하신다."
부칙 준비되고 마련되는 성소 10과에서 충분한 관상이 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11과로 넘어가기 전에 여기 잠시 멈춰서 보충하셔도 좋습니다. 아직 사도직의 구체적인 체험이 없고 또 있다 하더라도 그 체험을 신앙 안에서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가끔 '묵상'에 나온 설문에 답하다가 정리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냥 막연한 몽상과 상상으로 많은 생각 속에서 시간을 허비하거나, 이 과정에서 제시하는 성서와 주제가 매 번 똑 같은 것 같아서 단계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하고 지루해 하거나 실천적인 투신 없이 혼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성서 본문을 좀 더 깊이 관상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성서 본문을 깊이 관상하다보면 자신의 것도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입니다. 여기 게재된 성서 기사가 짧으므로 사무엘 상권 1장부터 3장까지를 훑어보면서 사무엘의 성소가 그냥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어머니 한나가 사무엘을 하느님께 바치기까지, 자식 못 낳은 여인으로서 당해야 하는 박대와 수모 그리고 그 한 맺힌 여인의 애절한 소원과 그 소원이 성취되었음을 기뻐하며 다시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이 된 사무엘을 바치는 한나와 그러한 과정을 거쳐 사무엘의 봉헌을 받아 주시고 사무엘의 성소를 열매 맺어 주시는 하느님! 우리 자신의 성소를 돌이켜 보기 전에 우선 먼저 많은 시간 동안 사무엘의 성소를 주의 깊게 마음 속 깊이 신앙의 눈으로 지켜보시고 느끼신 후에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시오. 그러면 알게 모르게 우리 자신의 성소도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가계나 사회 안에서 하느님께서 이루어지도록 준비하시고 마련하셨다는 것을 되새겨 볼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삼손의 출생과정을 판관기 13장에서 보십시오. 그리고 모태에서부터 선택받고 부르심을 받는 것에 대해 시편 22장 9절부터 10절(25절부터 31절 참조)까지; 71편 5절부터 6절까지; 110편 1절부터 4절까지와 이사야 44장 1절부터 5절까지와 21절부터 23절까지(24절부터 28절 참조)에서 보십시오.
13. 저를 보내십시오
말씀 이사야를 부르심(이사 6,1-13) 6 1우찌야왕이 죽던 해에 나는 주님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 2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 다녔다. 3그들이 서로 주고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4그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 5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주님,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6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지게로 집어 가지고 날아와서 7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8그 때 주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9주께서 이르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말아라.' 10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와서 성해지면 어찌하겠느냐?" 11나는 "주님,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주께서 대답하셨다. "도시들은 헐려 주민이 없고 집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농토는 짓밟혀 황무지가 될 때까지다. 12주님께서 사람을 멀리 쫓아내시고 나면 이 곳엔 버려진 땅이 많으리라. 13주민의 십분의 일이 그 땅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들마저 상수리나무, 참나무가 찍히듯이 쓰러지리라. 이렇듯 찍혀도 그루터기는 남을 것인데 그 그루터기가 곧 거룩한 씨다."
관상 혼탁해진 세상을 내려다보시며 안타까워하시고 고민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나 몰라라 하는 세상과 자기들만 알고 자기 이익만 챙기려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외되고 오히려 착취당하는 가난한 사람들, 장애자들, 고아들, 과부들, 노인들, 가족들과 사회에서 버려진 이들의 아픔과 이들의 방황을 안타까워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담아 보십시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님 사랑을 전하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애타는 마음을 느껴보십시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그래서 주님의 일을 할 사람을 찾고 계신 하느님의 눈길을 보십시오. 그 때 이사야가 주님 앞에 나서서 주님께 자신을 봉헌합니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이렇게 큰 용기와 헌신을 봉헌하는 이사야를 바라보는 주님의 뿌듯해 하는 가슴을 느껴보십시오.
묵상 주님을 향한 봉헌 주님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 나서는 이사야의 용기와 헌신을 지켜보면서, 오늘 이 세대에 주님께서 안타까워하는 사람과 부분은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최근에 내 마음에 걸리고 신경이 쓰이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고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내게 전이라도 시키시듯, 내 눈에 띄게 하시고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신 주님께 응답합시다. 주님의 짐을 덜어드리기 위해 내가 부담 없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소박하고 겸손하게 찾아서 실천해 봅시다.
부칙 이사야 예언자의 흔적은 열왕기 하권 19장 1절부터 19절까지, 역대기 하권 26장 22절에서, 32장 20절과 32절에서 부분적으로 보실 수 있고, 이사야 예언서에서 그의 활동과 예언 전부를 보실 수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주님께서 오심을 '주님의 종'에 견주어 예언한 노래 4개를 찾아 읽으십시오. 이사야 예언서 42장 1절부터 9절까지의 첫째 노래, 49장 1절부터 6절까지의 둘째 노래, 50장 4절부터 9절까지의 셋째 노래와 52장 13절부터 53장 12절까지에 나오는 그 유명한 '고난받는 주님의 종'의 넷째 노래를 찾아 읽고 잘 새겨 보십시오
10.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말씀 사무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다(사무엘상 3,1-11衁) 3 1소년 사무엘은 엘리 밑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 때는 주님께서 말씀도 자주 들려주시지 않았고 계시를 보여 주시는 일도 드물었다. 2엘리는 이미 눈이 어두워 앞을 보지 못했다. 하루는 그가 자기의 자리에 누워 있고 3사무엘은 하느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자고 있었는데, 하느님의 등불이 꺼지기 전에 4주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셨다. 사무엘은 "예." 하고 대답하면서 5엘리에게 뛰어가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나는 너를 부른 일이 없다. 가서 자거라." 엘리의 이 말을 듣고 사무엘은 돌아 와 자리에 누웠는데 6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을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엘리는 "사무엘아, 나는 너를 부른 일이 없다. 가서 자거라." 하고 대답하였다. 7주님께서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적이 없으셨고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8주님께서 세 번째로 사무엘을 부르셨다. 그가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소년 사무엘을 부르시는 줄 알아차리고 9사무엘에게 "가서 누워 있어라. 그리고 다시 부르는 소리가 나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일러주었다. 사무엘은 돌아 와 자기 자리에 누워 있었다. 10그러자 주님께서 거기에 나타나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1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관상 주님께서 소년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사무엘아! 사무엘아!" 그러나 사무엘은 금방 알아듣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신 적이 없으셨고 사무엘은 아직 주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몇 번을 헛걸음치는 사무엘을 보십시오. 그리고 헛걸음치는 사무엘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는 주님을 보십시오. 마침내 사무엘은 엘리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엘리에게 사무엘을 준비시키도록 합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가서 누워 있어라. 그리고 다시 부르는 소리가 나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돌아 와 다시 자기 자리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거기에 나타나 서시어 아까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십니다. 사무엘이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고 사무엘의 귀가 열리기 시작합니다. 주님과 사무엘의 관계가 맺어졌고, 사무엘은 주님의 사명을 듣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이 주님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묵상 세상 안에서 일어나고 벌어지는 현상을 통해 부르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사무엘처럼 우리를 매일 부르시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부분 그냥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외면도 하고요.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들어봅시다.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 귀에 잘 들리도록 사람의 목소리로 직접 부르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직접 사람의 말로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부모님이나 이웃들을 통해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또 어떤 때는 사회 현상을 통해 부르시기도 합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가난한 사람이나 다친 사람, 어려운 사람을 보면 우리 마음 속에 불쌍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도와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불러일으켜 집니다. 이것을 '가난한 이들을 통해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그 일을 겪도록 미리 준비하시고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응답하도록 부르십니다.
주님께서 언제, 누구를 통해, 어떤 기회에 우리를 부르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어느 사도직 방향으로 부르고 계신지도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소명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며 이루어나갈지 설계해 봅시다. 그리고 본당 신부님이나 소속 장상에게 가서 자신의 부르심에 대한 식별과 성숙을 위해 나누어 보십시오.
부칙 소명은 가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루 아침에 그 부르심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도 온전히 준비되어 있지 않고, 나를 위해 주변이 그렇게 다 준비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협조자와 경비마저도 심지어는 내가 복음을 쏟아 부을 대상마저도 준비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그리고 내게 들려온 주님의 목소리를 가슴 속에 깊이 새기고 기도하면서 준비하십시오. 지금 당장 그 분야에 그리고 그 일에 몸담고 있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그 지향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때를 기다리십시오. 주님은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 때 그 일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도 준비하고 연습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한편 막연히 그런 일이 주어지기를 기대하며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마치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감나무를 심고 가꾸고 그 열매가 맺기를 기다리다가 열매를 맺어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추수할 수 있게 되는 농부의 심정으로 천천히 그러나 한 시도 잊지 말고 준비하십시오. 감나무 씨와 씨를 심을 땅과 거름 등을. 그러면 주님께서 동료와 협조자도 보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을 느낄 때마다 마음을 가다듬어 대답하십시오.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고 있습니다." 라고!
참고로 사무엘의 탄생과 소명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사무엘 상권 1장부터 3장까지(10-1 참조) 읽어보시고,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는 과정을 7장 3절부터 12절까지에서, 사무엘이 백성의 요구를 듣고 사울을 왕으로 세우는 과정을 9장 1절부터 10장 8절까지에서, 사무엘이 사울을 버리는 과정을 13장 7절遁부터 15절衁까지에서, 하느님께서 사울을 버리는 과정을 15장 1절부터 35절까지에서,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부어 왕으로 선택하는 과정을 16정 1절부터 13절까지에서 보십시오.
9. 보내실 만한 사람이 따로
말씀 하느님이 말 못하는 모세에게 아론을 붙여주다(출애 4,10-16) 4 10모세가 주님께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도무지 말재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고 당신께서 종에게 말씀하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워낙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입니다." 하고 아뢰자, 11주님께서 그를 꾸짖으셨다.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를 만들고 눈을 열어 주거나 앞 못 보는 장님이 되게 하느냐? 나 주님이 아니더냐? 12어서 가거라. 네가 입을 열 때 내가 도와 네가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가르쳐 주리라." 13모세가 다시 "주님, 죄송합니다. 보내실 만한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십시오." 하고 사양하자, 14주님께서 모세에게 크게 화를 내시며 말씀하셨다. "레위 사람인 네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내가 알기에 그는 말을 썩 잘하는 사람이다. 그가 지금 너를 만나러 오고 있다. 그가 너를 만나 기뻐할 것이다. 15네가 할 말을 그에게 들려주고 그의 입에 넣어 주어라. 나는 네가 말할 때나 그가 말할 때나 너희를 도와주리라. 너희가 할 일을 내가 가르쳐 주리라. 16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해 줄 것이다. 그는 너의 입이 되고, 그에게 하느님처럼 되리라."
관상 모세는 아직도 결심을 굳히지 못했습니다. 이미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습니까?" 하는 말로 주님의 사명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그에게 함께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고 또 지팡이를 뱀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손을 문둥병이 든 것처럼 하얗게 만들었다가 다시 새 살로 만들어주심으로써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두개나 보여주셨습니다(출애 3,16-4,9 참조). 그런데도 모세는 아직입니다. 주님의 사명을 흔쾌히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또 핑계를 댑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도무지 말재간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했고 당신께서 종에게 말씀하신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워낙 입이 둔하고 혀가 굳은 사람입니다." 모세의 뿌리 깊은 아픔과 버거워하는 마음을 읽어보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누가 사람에게 입을 주었느냐?"며 모세를 꾸짖으십니다. 그래도 모세가 다시 "주님, 죄송합니다. 보내실 만한 사람이 따로 있을 줄 압니다. 그런 사람을 보내십시오." 하고 고사합니다. 모세는 어떻게든 주님의 부르심을 면하고 도피하려고 합니다. 주님은 모세가 하도 이렇게 자신 없어하고 주저하자 더 이상 모세가 다른 핑계를 대지 못하도록 형 아론을 협조자 삼아 붙여주십니다. 더 이상 핑계 댈 것이 없는 모세를 보십시오. 더 이상 거부할 수 없는 모세!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신 주님 앞에 벌거벗고 서 있는지라 더 이상 어떻게 도저히 피해볼 수도 없고 누구 하나 어떤 사람에게 떠넘길 사람도 없는 모세를 보십시오. 자기의 안일과 백성들의 신음을 번갈아 되새기며 고민하는 모세를 보십시오. 그리고 그와 함께 그가 변화되어 다시 일어설 때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하느님의 배려도 바라보십시오. 며칠을 고민하다 일어나 모세는 새벽 아침 햇살을 받으며 하느님께 제사를 지냅니다. 이제 하느님의 분부대로 길을 떠나 노예살이를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향하는 모세의 뒷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처음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긴장과 주저함으로 쳐져 있던 어깨가 펴지고 굳게 쥔 주먹을, 그리고 그의 힘찬 발걸음을! 그리고 그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계신 주님도 보십시오.
묵상 망설임과 주저함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는 처음엔 모세처럼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면서 그 부르심을 모면하고 피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주님의 소명을 받아들이고 사명을 실천하러 나가게 됩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에게 커다란 십자가 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부르시는 분은 바로 나를 만드신 주님이십니다. 나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내 앞에 우뚝 서서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 주님, 주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하며 주님의 사명을 실현하러 나가겠습니까? 아니면 요나처럼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외면하고 배를 타고 도망치다 풍랑이 일어 큰고기 뱃속에서 3일을 갇혀 지내다가 결국 다시 잡혀와 주님의 사명을 실천할 때까지 고생하면서 주님과 주님의 사명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는 기간을 가지겠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바빠요!", "전 못해요!", "능력이 없어요!", "자격이 없어요!", "저는 외아들이에요!" …… 그러나 그 모든 대답은 핑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에게도 오늘 주님의 사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세처럼 주님의 사명을 실천하기에는 부당하다고 할 정도의 부족한 점이나 단점이 있습니까? 말못할 어려움이 있습니까? 내가 일어서기만 기대하고 기다리고 계신 주님만 지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무엇이 내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막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거나 보완할 어떤 협조가 필요합니까?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실현하는데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써보십시오.
부칙 참고로 모세가 미디안을 떠나 이집트로 돌아가는 모습을 출애굽기 4장 18절부터 23절까지에서 보시고, 모세가 마중 온 아론과 함께 돌아 와 장로들을 만나는 모습을 4장 27절부터 31절에서, 모세가 처음으로 주님의 말씀을 파라오에게 전하고 파라오가 대응하는 장면을 5장 1절부터 31절까지에서, 하느님께서 파라오와 이집트 인들에게 벌을 내리고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빠져 나오는 과정을 7장 14절부터 11장 10절까지와 12장 29절부터 42절까지, 13장 1절부터 15장 21절까지 보십시오
8. 제가 무엇인데 감히
말씀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께서 이름을 알려 주시다(출애 3,6-15) 3 6(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모세는 하느님 뵙기가 무서워 얼굴을 가렸다. 7주님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8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고 젖과 꿀이 흐르는 아름답고 넓은 땅, 가나안족과 헷족과 아모리족과 브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땅으로 데려 가고자 한다. 9지금도 이스라엘 백성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 온다. 또한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못살게 구는 모습도 보인다. 10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너는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건져내어라." 11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습니까?" 12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가 되리라. 너는 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 이 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리라." 13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그 하느님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14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15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다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이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
관상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보십시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생활에서 구할 사도로 누구를 삼으실까 하시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살펴보십니다. 그 하느님의 눈에 모세가 띄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건져내겠습니까?"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모세는 자신의 말 표현대로 엄두가 안 나는지도 모릅니다. '누가 자기를 알아주기나 할까? 왕이 자신의 말을 들어줄까? 아니 만나주기나 할까? 그냥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이 아닌가?' 모세는 생각만 해도 파라오 왕 앞에 서 있는 자신이 허무맹랑하고 어처구니없게 보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의 어른들에게도 어이없긴 마찬가지입니다. 또 다른 한편 모세는 어쩌면 자신이 자기 민족을 괴롭히는 이집트인을 죽이고 자기 민족을 구해냈어도 자기 민족은 자신을 인정해 주지 않고, 오히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우두머리로 삼고 우리의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이듯이 나를 죽일 작정이오?"(출애 2,14) 하며 자신을 살인자로 몰아 이집트 왕 파라오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도록 했던 동족들에게 배신감을 느껴서 그렇게 대답하고 있는가? 하느님은 이러한 모세의 태도와 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해 주시고 고개를 끄떡거리십니다. 그리고 마치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기라도 하듯이 한가지 방안을 제시해 주십니다. "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보냈다는 증거가 되리라." 그리고 다시 모세에게 사명을 구체적으로 알려주십니다. "너는 나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낸 다음 이 산에서 하느님을 예배하리라."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하느님께서 모세와 함께 있다는 것을 백성들 앞에서 드러내주심으로써 모세가 하느님의 사도로 임명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모세가 대답할 하느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곧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 라고 하시는 그분이다.' 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러라." 고민과 방황의 장고 속에 들어가 있는 모세를 보십시오. 그리고 모세 곁에 앉아서 모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모세를 위해 기도합시다. 주님, 모세에게 힘을 주십시오. 그의 분노를 삭혀주시고, 그의 마음에 성령의 불을 당겨주셔서 불타오르게 하소서!
묵상 실패로 인한 거부감 "좋아하는 만큼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 생애의 흔적 속에 혹시 모세처럼 '주님의 사도직을 수행한다는 것'에 대한 쓰라린 체험이나 거부감이 있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 주실지 기도 중에 들어보십시오. 그냥 기분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주님이 나를 부르신 것인지를 구별할만한 증거를 주님으로부터 받았습니까? 나에게 다가 오신 주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변하시지 않으시는 분이시지만 내가 만난 주님의 모습은 각자 다를 수 있습니다. 내게는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다가 오셨는지요? 용서의 하느님? 평화의 하느님? 아버지 같은 하느님?… 내가 만난 하느님을 어떻게 이름지어 설명할 수 있습니까?
부칙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의 구체적인 증거가 될 만한 것을 아직 발견할 수 없다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구체적으로 댈 수 없다 하더라도, 자기 생애의 다른 때와 다른 것과 비교하여 별다른 흔적을 삼으셔도 좋습니다. 내적인 체험이라도 찾아보시고 힘을 얻으십시오. 없다면 꾸준히 마음속에서 주님께 청하시면서 기다리십시오.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증거를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고통이 있었다고 해서 모두 피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편 고통은 우리를 성숙시켜 주기도 합니다. 오히려 고통이 깊으면 깊을수록 사도직에 대한 애착과 사명감이 사도적인 열성과 함께 되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노예였을 때 더욱더 큰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고통을 겪을 때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하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힘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겨냈을 때 그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더욱더 헌신할 계기로 삼으십시오. '상처받은 치유자'처럼!
참고: 모세가 부르심을 받기까지의 과정을 출애굽기 1장 1절부터 3장 5절까지, 사도행전 7장 23절부터 38절까지('스테파노의 설교' 중에서)와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 11장 23절부터 30절까지('믿음' 중에서)에서 보시고,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사명을 주시는 것을 출애굽기 3장 16절부터 22절까지 보십시오. //
7.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말씀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다(창세 12,1-4) 12 1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3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4아브람은 주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길을 떠났다. 룻도 함께 떠났다. 하란을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칠십 오 세였다.
관상 자기가 살던 고향을 떠나 하느님을 섬기는 사회를, 친척을 떠나 하느님의 자녀들, 하느님의 공동체를, 아비의 집을 떠나 하느님 나라를 향해 길을 떠나는 아브람을 보십시오. 주님께서 부르시자 주님의 부르심과 자신의 현실 앞에서 저울질하며 망설이고 주저하는 아브람을 지켜보십시오. 그러나 결국 자기를 지탱해 주었던 모든 것에서, 심지어는 자기가 한 평생 쌓아 놓았던 업적과 기반을 버리고 떠나는 아브람의 신앙을 보십시오. 이제 자신의 업적과 기반 위에서 쉴 수 있을 나이인 칠십 오 세에. 그것도 지금 당장 그 길이 선명하게 보이지도 않고 보장되어 있지도 않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가야만 하는 아브람, 그러나 장차 주님께서 보여주시리라는 믿음만으로 주님을 향해 자신을 떠나는 아브람을 바라보십시오.
묵상 선택과 버림 주님께서는 아브람을 사도로 삼으시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아브람을 큰 민족으로 만들어 세상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람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아브람의 덕을 입어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이렇게 온 세상 사람들에게 복의 상징이 되기 위해서는, 첫째, 주님께서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장차 보여 줄 땅으로 가기 위해서는 둘째, 자기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야 합니다.
한편 아브람을 그렇게 떠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은 주님께 향한 아브람의 믿음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주님께서 자기와 함께 해주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을 믿었고, 또 주님께 희망을 두었기 때문에 주님을 선택하고 자신을 떠났습니다. 그럼으로써 아브람은 '아브라함'(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럼 주님을 믿는 나에게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은 무엇이며, 그 길을 걷기 위해 내가 선택해야 할 것과 떠나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아브람의 경우처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부칙 지금 당장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길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더라도, 내가 주님을 따르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그리고 떠나는데 어떤 아픔이 있는지 느껴보십시오. 그리고 그 아픔을 겪어서라도 찾아 얻을 주님께 대한 깊은 애정과 믿음을 간직하십시오. 한편 부모를 떠난다고 해서 버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 경우에는 주님과 주님의 일을 부모님과 가족에 앞서 선택하고 수행하며, 부모님을 주님의 새로운 교회 가족들 중의 한 분으로 삼는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또 버렸다고 해서 떠났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만일 애착과 미련이 남아있다면 말입니다. 그런 경우엔 일생 계속 반복하여 떠나야 하겠지요. 훗날 아쉬움과 후회 속에 남아있지 않기 위하여, 첫째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악에서 온 것이 아니고 죄가 아니라면, 그 일의 일차적인 목표만을 성취하고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내 성취욕구만 충족시킨 채 떠나던지, 둘째 일정 기한을 정해놓고 최선을 다하듯이 뛰고 나서 내 계획대로 안되었을 경우엔 내 길이 아닌가보다 여기고 떠나던지, 셋째 이 길은 주님을 향해 나가는데 도움이 안되는 것이니 지금 당장 포기하고 떠나십시오.
참고로 창세기 15장 1절부터 21절(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다), 17장 1절부터 27절(계약과 할례), 18장 11절부터 15절(야훼 마므레에 나타나시다), 18장 16절부터 32절(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때문에 빌다), 22장 1절부터 18절까지(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를 함께 보십시오. //
주님의 부르심
6.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말씀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3) 2 13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관상 이번 주간부터는 나를 세상에 내시고 길러주시고 이끌어주신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는 소리를 귀담아 듣는 시간입니다. 요한 복음 6장 1절부터 13절까지 나오는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에서 제자들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모습과 변화되는 제자들의 모습을 잘 살펴보십시오. 제자들의 마음속에 주님의 뜻을 알도록 새겨 주시고, 그 일을 하고 싶어하시고, 그 일을 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그 일을 하러 나서게 하시는 주님을 그려보시고 그 주님의 명에 따라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아가는 제자들을 느껴보십시오.
묵상 부르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왜 부르셨는지 기도 중에 여쭈어 보십시오. 주님께서 나를 어디에 어떻게 쓰시고 싶어하실지 기도 중에 여쭈어 보십시오. 지금 내 마음 속에서 솟아나오고 있는 성소의 싹이 완전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부르심을 소중히 여기고 키워나가십시오. 위의 질문이 어려우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형제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염원이 왜 내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주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계시다.'는 느낌을 언제, 어떤 기회에, 누구와의 만남을 통해 갖게 되었는지?
부칙 지금까지 우리는 '성소'(聖召)라는 것은 자기가 하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부르셔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실제로 주님께서 바로 내 눈앞에 나타나셔서 "얘야, 넌 나를 따라라" 하고 부르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주님께서 나를 직접 부르신 것처럼 여기고 성소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 2장 13절에서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주님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8장 28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고 했습니다. 마치 어느 한 등산가가 "산이 있어 산을 오른다."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주님이 계시기에 주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말고, 망설이지도 말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주님을 향한 거룩한 생각'에 마음을 모아 그 생각을 현실 안에서 이루는 일에 충실하십시오. "그 생각이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 하는 의구심 속에서 방황하시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어떻게 하는 것이 그 생각을 현실 안에서 제대로 이루는 길일까?" 생각하고 선택하는 방법론이 오히려 나를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할지 아니면 제대로 걷게 할지 판가름해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마태 22,14) 주님이 어느 누구만을 따로 미리 정해놓고 부르시거나 누구를 내치신다고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소의 길은 그 생각이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떨어져 나가거나 퇴색되어 스스로 물러나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용기를 가지시고 자신의 소명에 충실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로마서 8장 18절부터 39절까지('고통에서 영광으로'와 '하느님의 사랑')를 함께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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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주님은 나의 목자
말씀 주님은 나의 목자(시편 22,1-6) 22 1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 파아란 풀밭에 이 몸 누여 주시고 2고이 쉬라 물터로 저를 끌어 주시니. 3제 영혼 싱싱하게 생기 돋아라 주님께서 주님 이름 그 영광을 위하여 곧은 살 지름길로 날 인도하셨어라. 4죽음의 그늘진 골짜기를 간다 해도 주님 함께 계시오니 무서울 것 없나이다. 주님의 막대와 그 지팡이에 시름은 가시어서 든든하외다. 5제 원수 보는 앞에서 상을 차려 주시고 향기름 이 머리에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외다. 6한평생 은총과 복이 이 몸을 따르리니 오래오래 주님 궁에서 살으오리다.
부칙 이끄시는 주님 기도를 어떻게 해야하는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냥 앉아서 40분이면 40분, 1시간이면 1시간만이라도 다 채우십시오.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끌고 가실 것입니다. 목자이신 주님을 그리며 기대하며 그냥 그렇게 앉아 계십시오. 그리고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맡기고 따라가십시오. 아무런 느낌도 없고 앉아 있기 힘들 때일수록 약 10분 정도 더 앉아 계십시오. 앉아 있는 연습도 하고, 주님께 더욱더 자기를 맡기는 훈련을 하십시오.
5. 주님을 애틋이 찾나이다
말씀 주님을 목말라 하는 영혼(시편 63,2-9) 63 2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제 영혼이 주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몸은 주님이 그립나이다. 3주님의 힘 영광을 우러러보옵고자 이렇듯 성소에서 주님을 그리나이다. 4주님의 은총이 생명보다 낫기에 제 입술이 주님을 찬양하리이다. 5이 목숨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며 주님 이름 부르며 두 손 치올리리이다. 6비계인 듯 기름인 듯 주님으로 제 흐믓하고 제 입술 흥겨웁게 주님을 노래하리이다. 7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의 생각 밤샘을 할 때에도 주님의 생각 8제 구원은 바로 주님이시니 주님 날개 그늘 아래 저는 마냥 좋으니이다. 9제 영혼이 주님께 의지하올 때 이 몸을 바른 손으로 붙들어 주시나이다.
관상 주님을 향하는 애타는 갈증을 사무엘 하권 22장 1절에서 51절까지 나오는 다윗의 찬양과 연결시켜 느껴보십시오. 다윗이 자신의 소망과 현실의 불안 속에서 늘 그와 함께 해주신 주님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감사드리는지. 그 기도 속에서 그의 갈증을 적셔주시던 주님과의 관계를 그려보십시오.
묵상 나의 주님 지금까지 우리는 주님께서 내 생애 동안 함께 해주시면서 나를 극진히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되새겨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주간에는 그 동안 주님께서 어떻게 나와 함께 해주셨는지를 정리하면서 신앙고백처럼 쓰십시오.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의 생각 밤샘을 할 때에도 주님의 생각"으로 "주님을 목말라 하나이다." 하는 시편작가의 청원처럼, 주님을 만나고 싶고, 주님과 함께 하고 싶고, 주님을 모시고 싶고, 주님께 몸바치고 싶은 염원과 열망이 담긴 편지를 써서 주님을 향한 내 사랑의 표현을 하십시오.(다음에 나오는 '저는 양이오니, 주님은 저의 목자이십니다'의 형태를 참조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양이오니, 주님은 저의 목자이십니다
주님, 주님은 제가 주님께 저를 바치겠다고 처음 결심했을 때, 제게 행복을 안겨 주셨습니다. 훗날 그 때의 저를 보셨던 어머니께서 말씀해주셨던 것같이 그 때 저는 제일 편안했고 가장 행복했습니다. 그 행복은 인간이 주님과 함께 할 때 얻을 수 있다던 바로 그 행복이었습니다. 저는 그 행복을 주님께로부터 받았습니다.
주님,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제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단 한가지 일만 있었습니다. 주님의 일은 바로 저를 향한 주님의 사랑 그 한가지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저의 매 순간 매 자리에 함께 해주셨음을 제가 압니다. 제가 양이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의 목자가 돼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다가서려고 했을 때 주님은 저를 끌어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알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깨우쳐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뵈옵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드러내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을 느끼고자 했을 때 주님은 저를 안아주셨습니다. 제가 주님께 저를 바쳤을 때 주님은 주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교리를 가르칠 때 주님의 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미사를 드릴 때 주님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의 성사를 집전할 때 주님의 권능을 주셨습니다. 제가 환자를 방문할 때 주님은 기적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제가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제 입을 열어 당신을 찬미할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제가 곤경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제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제가 악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싸워주셨습니다. 제가 분노와 갈등으로 밤을 지새울 때 주님은 휴식을 주셨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주님은 저를 위로해주셨습니다. 제가 고독해할 때 주님은 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텅비고 허전해진 가슴으로 먹을 것을 찾아헤맬 때 주님은 말씀으로 배불려 주셨습니다. 제가 목말라 할 때 주님은 성체성사로 적셔주셨습니다. 제가 실수했을 때 주님은 못본체 해주셨습니다. 제가 피곤에 지쳤을 때 주님은 제 대신 일해주셨습니다. 제가 잘못했을 때 주님은 채워주셨습니다. 제가 유혹 중에 있을 때 주님은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셨습니다. 제가 유혹에 걸려 넘어졌을 때 주님은 다시 일으켜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또 범죄하였을 때 주님은 저와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제가 거듭 범죄하여 수치감과 죄책감으로 시달리고 있을 때 주님은 저를 불러주셨습니다. 제가 제 죄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했을 때 주님은 저에게 생기를 주셨습니다. 제가 주님 곁을 떠나 도망치고 싶을 때 주님은 성령의 힘으로 나를 휘감아 나도 모르는 새에 다시 주님 앞에 앉아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님은 제가 다시 주님 사랑의 빛 안으로 나오도록 저를 용서해주시고 저를 끌어내주시고 이 모든 일들을 저에게 겪도록 하심으로써 저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이 모든 제 생애의 순간 순간들이 그리고 저의 전 생애의 역사가 주님의 오묘한 섭리 안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 주님 앞에 다가와서 청합니다. 주님이 제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와 주님이 저와 함께 해 주셨던 모든 순간들을 기억하며 청합니다. 말씀으로 저를 일러주시고 성체성사로 먹여주시는 주님 앞에 서서 청합니다. 주님, 저를 받아 주소서.
저는 주님밖에 매달릴 분이 없어서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세상 그 어느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제가 바라는 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주님뿐이시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저는 주님이 하시고자만 하시면 저에게 주님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믿기에 주님께 청합니다. 제가 주님의 일을 할 때 제가 주님의 사랑 안에 있게 되고 그 사랑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살아왔기 때문에 주님께 청합니다. 주님 저를 복음의 사도로 써주소서.
제 가슴속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펴주시어 주님을 사랑하게 해주소서. 언제나 주님께 다가와 주를 모실 수 있도록 저를 불러주소서. 주님은 내 영혼의 주인이십니다. 주님 제게 왕하셔서 저에게 당신이 원하신 일을 하소서. 아멘. //
4.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말씀 하느님,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3-21) 51 3하느님 자비하시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애련함이 크오시니 제 죄를 없이 하소서. 4제 잘못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허물을 깨끗이 없애 주소서. 5저는 제 죄를 알고 있사오며 제 죄 항상 제 앞에 있삽나이다. 6주님께 오로지 주님께 죄를 얻었삽고 주님의 눈앞에서 죄를 지었사오니, 판결하심 공정하고 심판에 휘지 않으심이 드러나리이다. 7보소서 저는 죄 중에 생겨났고 제 어미가 죄 중에 저를 배었나이다. 8주님은 마음의 진실을 반기시니 가슴 깊이 슬기를 제게 가르치시나이다. 9히쏩의 채로써 제게 뿌려 주소서 저는 곧 깨끗하여지리이다. 저를 씻어 주소서 눈에서 더 희어지리다. 10기쁨과 즐거움을 돌려주시어 바수어진 뼈들이 춤추게 하소서. 11제 죄에서 주님 얼굴 돌이키시고 제 모든 허물을 없애 주소서. 12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센 정신을 새로 하소서. 13주님의 면전에서 날 내치지 마옵시고 주님의 거룩한 얼을 거두지 마옵소서. 14주님 구원 그 기쁨을 제게 도로 주시고 정성된 마음을 도로 굳혀 주소서. 15악인들에게 주님의 길을 가르치오리니 죄인들이 주님께 돌아오리이다. 16하느님 절 구하시는 하느님이여 피 흘린 죄벌에서 저를 구하소서. 제 혀가 주님 정의를 높이 일컬으오리다. 17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 주소서, 제 입이 주님의 찬미 전하오리니, 18제사는 주님이 즐기지 않으시고, 번제를 드리어도 받지 아니하시리이다. 19하느님 저의 제사는 통회의 정신 하느님은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낮추 아니 보시나이다. 20주님 인자로이 시온을 돌보시고 예루살렘의 성을 다시 쌓아 주소서. 21법다운 제사와 제물과 번제를 그때에 받으시리니 그때에는 사람들이 송아지들을 주님 제단 위에 바치리이다.
관상 이 시편 51장은 다윗이 슬피 울며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던 시입니다. 사무엘 하권 11장 1절부터 12장 25절까지 나오듯이, 자기를 위해 전쟁에 나가 싸우는 부하 병사 우리야의 아내 바쎄바를 범한 파렴치한 다윗에게 나단 예언자를 통해 그의 죄를 보도록 지적해 주시고 회개하는 그를 용서해 주셔서 죄의 나락에서 건져주신 주님을 발견해 보십시오. 그리고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자비로 회개하여 다시 살 수 있도록 일으켜 바른 길로, 제 갈 길을 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주님께, 기꺼이 응답하여 자기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여 새로 나고자 하는 다윗의 용기와 큰 사람의 됨됨이도 함께 바라보십시오.
묵상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주님 오늘은 지난 우리 생활 속에서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을 감격하여 눈물이 흘러나올 만큼 깊이 되새기십시오. 그리고 한편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극진히 사랑해주셨는데 반하여 나는 제대로 보답하지도 못하고, 심지어는 주님을 잊거나 무시하고 배반하기까지 했던 나의 잘못을 뉘우치기 위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갖는 이유는 다시 주님의 사랑을 내 안에 회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내 지난 순간 순간 중에 주님을 등지고 배반했던 기억들을 되새겨 보십시오.
부칙 지은 죄가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지 말고, 먼저 주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하십시오. 주님을 마주하고 주님의 사랑을 느끼면 자신의 죄가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입니다. 사랑은 악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마치 빛이 어둠을 드러내고 몰아내듯이! 이 시간 동안 죄를 아파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러나 죄로 인해 낙담하거나 주님을 떠날 정도의 죄책감과 좌절감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오히려 죄의 뿌리와 죄를 가져오는 악의 유혹과 그 악을 반기는 내 안의 원죄적인 성향을 발견하도록 하십시오. 어느 유혹을 자주 받고 쉽게 빠지는지를 발견하도록 하십시오. 다른 측면에서 어떤 경우에 화를 내고, 어떤 경우에 쉽게 죄를 짓게 되는지 발견하십시오. 자신의 죄를 발견한 후에 그 죄를 바라보면서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주님 저를 죄악에서 건져주소서." 단순한 죄가 아니라 고해성사를 볼 것이 있으면 신부님을 찾아가 성사를 보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죄에서 떠나 주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나도록 하십시오.
참고로 에제키엘 36장 25절부터 29절까지에 나오는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새로워지도록 하십시오.
3. 인간이 무엇이기에
말씀 주님의 위엄과 인간의 존엄성(시편 8,2-10) 8 2하느님 제 주님이시여 온 땅에 주님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하늘 위 높다랗게 엄위를 떨치셨나이다. 3원수들 무색케 하시고자 불신자 복수자들 꺽으시고자, 어린이 젖먹이들 그 입에서마저 어엿한 찬송을 마련하셨나이다. 4우러러 주님 손가락이 만드신 저 하늘하며 굳건히 이룩하신 달과 별들을 보나이다. 5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6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7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삼라 만상을 그의 발 아래 두시었으니, 8통틀어 양 떼와 소들과 들짐승하며 9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며 바닷속 지름길을 두루 다니는 것들이오이다. 10하느님 내 주님이시여 온 땅에 당신 이름 어이 이리 묘하신고
관상 사무엘 상권 16장에서부터 하권 7장 29절까지 나오는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십시오. 그의 생애의 순간을 축복해 주시고, 왕으로 축성해 주시고 그의 여정에 진정 함께 하면서 돌봐 주시는 주님. 그리고 갖은 우여곡절 속에 왕위에 올라 마침내 주님의 법궤를 모시고 나단을 통해 축복을 내려주시는 아버지이신 주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묵상 보살펴 주시는 주님 이번 주간은 지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주님께서 나를 건져주셔서 내가 살 수 있었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다윗을 보살펴 주신 순간들에 빗대어서, 나의 지난 순간 순간 중에 고통스럽고 아팠던 기억들을 되새겨 보십시오. 내가 "인간이 무엇이기에 아니 잊으시나이까 그 종락 무엇이기에 따뜻이 돌보시나이까." 하고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릴 수 있을 때까지 내 생애의 의미 속으로 깊숙이 깊숙이 들어가, 되새겨 보고 감사드립시다. 그리고 왜 이다지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시는지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응답을 드릴 수 있으면 주님께 지금의 내 차원에서 답도 드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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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
말씀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되찾으신다(이사 43,1-7) 43 1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주님의 말씀이시다. 이스라엘아, 너를 빚어 만드신 주님의 말씀이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건져 주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2네가 물결을 헤치고 건너 갈 때 내가 너를 보살피리니 그 강물이 너를 휩쓸어 가지 못하리라. 네가 불 속을 걸어가더라도 그 불길에 너는 그을리지도 타버리지도 아니하리라. 3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내가 너를 구원하는 자다. 이집트를 주고 너를 되찾았고 에디오피아와 스바를 주고 너를 찾아 왔다. 4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 그러니 어찌 해안지방을 주고라도 너를 찾지 않으며 부족들을 내주고라도 너의 목숨을 건져 내지 않으랴! 5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보살펴 준다. 내가 해뜨는 곳에서 너의 종족을 데려 오고, 해지는 곳에서도 너를 모아 오리라. 6내가 북쪽을 향해서도 외치리라. '그들을 어서 내놓아라.' 남쪽을 향해서도 외치리라. '그들을 잡아 두지 말라.' 아무리 먼 데서라도 나의 아들들을 데려 오너라. 땅 끝에서라도 나의 딸들을 데려 오너라. 7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관상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손꼽아 그려보십시오. 주님은 이스라엘을 창조하셨습니다. 손으로 빚듯이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건져 주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으니, 너는 내 사람이다." 라고 할만큼 역사의 뒤 언저리에서 얼마나 큰 사랑과 자비를 받아왔습니까? 강물에 휩쓸릴까, 불길에 그을리기라도 할까, 노예살이의 벌은 내렸지만 혹시라도 패망할까봐 이집트와 지배국들을 쓰러뜨리면서까지 다시 구해주신 분, 주 하느님. 그분에게는 진정 이스라엘이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입니다. 그 무엇을 주어서라도, 그 무엇과 바꿔서라도 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참으로 이스라엘은 "그들은 내 백성이라고 불리는 것들,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한 내 백성, 내 손으로 빚어 만든 나의 백성이다." 라고 할 주님의 작품이요, 분신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자식을 껴안고 쓰다듬고 차버렸다가도 놓칠세라 곧 다시 안으시며 사랑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잘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묵상'으로 들어가 주님 앞에선 나의 모습도 보십시오.
묵상 사랑해 주시는 주님 이번 주간은 지난 우리의 생활 속에서 주님께서 나를 얼마나 끔찍이 사랑해주셨는지를 깨닫기 위한 시간입니다. 우리의 지난 순간 순간 중에 행복했고 기뻤던 기억들을 되새겨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나에게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라고 하십니다. 내 생애 속에 주님께서 정말 그렇게 해주셨습니까? 내가 "예, 주님. 주님은 진정 저를 끔찍이도 사랑해주셨습니다." 하고 인정할 수 있을 때까지, 내 생애의 의미 속으로 깊숙이 깊숙이 들어가 되새겨 보고 감사드립시다.
부칙 기쁜 기억과 함께 슬펐던 추억이 되살아나도 두려워하거나 망설이지 말고, 자신의 감정에서 떠나 주님을 보십시오.
참고로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25절까지에 나오는 창조기사를 살펴보면서, 나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내 앞에 펼쳐주신 세상에 대해서도 애정과 감사를 드리십시오.
Ⅰ. 주님과의 추억 되새기기
1. 저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말씀 주님은 저를 샅샅이 아시나이다(시편 139,1-18.23-24) 139 1주님 주님은 저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2앉거나 서거나 매양 저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제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3걸을 제도 누울 제도 환히 아시고 제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 4말소리 제 혀끝에 채 오르기 전에 주는 벌써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5앞뒤로 이 몸을 감싸주시며 제 위에 주님 손을 얹어 주시나이다. 6아심이 너무나 놀랍고도 아득하와 제 힘이 미치지 못하나이다. 7주님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주님 얼굴 피해 갈 곳 어디 오리까. 8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9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 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10거기에도 주님 손은 저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 이 몸을 잡아 주시리다. 11"어둠이나마 저를 덮씌워서 빛인 듯 밤이 저를 휘감는다면" 할 때에도, 12어두움 그것마저 주님께는 어둡지 않아 밤 또한 낮과 같이 환히 밝으며 캄캄함도 주님께는 빛과 같으오리다. 13주님은 오장 육부 만들어 주시고 어미의 복중에서 저를 엮어 내셨으니, 14묘하게도 만들어진 이 몸이옵기 하신 일들 묘하옵기 주님 찬미하오니 주님은 제 영혼도 완전히 아시나이다. 15은밀한 속에서 제가 지음 받았을 제 깊숙한 땅속에서 제가 엮어졌을 제, 주님은 제 됨됨이를 알고 계셨나이다. 16제 행위를 주님 눈이 환히 보시고 낱낱이 주님 책에 적으셨으니, 평생의 첫 하루가 있기도 전에 제 날수는 미리부터 정해 두셨나이다. 17하느님 주님 생각은 알아듣기 힘드오며 헤아릴 길 없을 만큼 많사오이다. 18세어 보자 하여도 모래보다 더욱 많고 끝까지 닿는대도 도로 주님이오이다. 23주님 저를 샅샅이 보시고 제 마음을 살펴 주소서 저를 시험하시고 제 은밀한 생각들을 아시옵소서. 24나쁜 길을 걸을세라 보아주시고 영원의 길을 따라 저를 인도하소서.
관상 나를 처음부터 알고 계시고 지금도 지켜봐 주시는 주님 나를 지켜보고 계신 주님을 떠올리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의 따뜻한 눈길 안에 내 몸 전체를 맡기십시오. 내 인격과 내 행동, 내 과거와 현재 그리고 내 꿈도… 나 자신을 송두리째 맡기고 주님의 빛을 마음 가득히 비추어 보십시오. 성체 앞에 앉아서 시편 139편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맒駕첼?
묵상 자기 영혼의 역사(Spiritual Life History) 쓰기 오늘 첫 주간에는 내 지난 생애 동안 주님께서 어떻게 나와 함께해주셨고, 또 어떻게 이끌어 오셨는지를 돌이켜 보기로 합시다. 성서를 읽으면서 주님께서 자신에게 보여주시는 자신의 과거를 바라보기 시작하십시오. 첫째, 자신의 지난 생애 중에 생각나는 사건과 상황들을 떠오르는 대로, 한 가지씩 적어보십시오. 둘째, 그 사건과 상황에 참여했던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그 사건과 상황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그 사건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그 사건이후 어떤 시각을 가지고 어떻게 생활하게 되었는지 등) 셋째, 그 사건과 상황을 통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이끄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왜 나에게 그 사건과 상황을 겪도록 하셨는지? 주님께서는 그 사건과 상황을 통해서 어떻게 나를 이끄셨는지? 주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이끄시려고 하셨는데, 나는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또는 알아차렸어도 따르지 않고 어느 쪽으로 갔는지? 그리고 그 때 만난 주님은 어떤 모습이셨는지?
부칙 "주님은 저를 샅샅이 아시나이다."는 이 시편 구절은 주님이 나를 감시하고 계셨다는 것을 의식하여 자기 죄를 고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나를 주님의 사랑 안에서 보호하셔서 지금 이 자리에 오도록 이끌어 주셨다는 것을 느낀 다음에 우리가 "주님은 저를 샅샅이 아시나이다."라고 감사드리는 측면에서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이 과정을 밟는 이유는 우리의 지난 과거를 반성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주님께 찬미드리고,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을 가져 주님 앞에 나오게까지 할 정도로 주님께서 내 생애를 이끌어 오셨다는 것을 우리가 뚜렷하게 느끼고, 그것을 깨달아, 우리가 주님께 내 생애의 경험을 통해 힘있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의 지난 생애 중에 잘못했던 일이 생각나더라도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십시오. 수치스럽거나 불쾌하여 복수하고 싶어하거나 자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감정은 우리를 주님 사랑 안에서 떨어져 나가고 주님을 피해서 떠나도록 하는 악마의 또 다른 장난일 수 있습니다. 윤리적으로 잘했느냐 또는 잘못했느냐를 따지지 말고 그냥 그 사건과 그 상황을 그대로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그 때 그 자리에서 나에게 어떻게 해주셨는지를 보십시오. 혹시 기도 중에 분심·잡념이 들거나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리게 되면, 시편 구절이 무슨 뜻인지 눈에 뜨이게 되고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일 때까지 성서본문을 계속해서 읽으십시오. 또 졸리면 노트에 성서 본문을 옮겨 쓰시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 주간 동안 점점 더 깊숙이 들어가십시오. 될 수 있는 한 많은 경험을 찾아내는 것도 필요하지만, 한 경험이라도 깊고 명확하게 주님과의 관계를 짚어 승화시키기 위하여 재구성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또 그 경험들을 하나의 고리로 엮어 연결해 봄으로써 내 생애의 역사와 함께 해 오시는 주님을 만나 감사드릴 수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