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한 문무왕의 마음이 깃든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hwp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한 문무왕의 마음이 깃든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
20142155 역사학과 권예진
필자는 본가가 대구에 있어 어렸을 때부터 자주 경주에 가서 그 풍경과 문화재들이 익숙하다. 그러나 이번 춘계답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과 함께 3박4일 내내 경주의 유적지를 탐구하러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전부터 많이 가서 친근한 대릉원, 석굴암, 불국사 등의 유적지 외에도 장항리 서오층석탑, 서악동 고분군, 황룡사지 등 이번 답사를 통해 처음 접하는 유적지들도 많아 기대가 컸다. 여러 유적지를 둘러봤는데 그 중 셋째 날 끝 코스였던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푸르고 광활한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대왕암과 문무왕의 호국 정신이 깃든 감은사지에서 그의 마음이 반영된 흔적을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스로 이 유적지들을 탐구해보면 문무왕과 그가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마음의 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을 것 같아 두 유적지에 주목했다. 그런데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는 문무왕과 긴밀하게 연관된 유적이기에 인물에 대하여 먼저 잘 알고 접근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 문무왕의 생애도 간략하게 알아봤다.
문무왕(文武王)은 신라의 제 30대 왕으로, 이름은 법민(法敏)이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로, 동생 보희의 꿈과 자신의 치마를 바꾼 설화로 유명하다. 문무왕은 총명하고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당에 사진을 다녀오기도 하고 병부령 자리에서 나라의 기강을 잡았다. 왕위를 물려받아서는 백제 부흥운동을 진압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당나라 군사까지 쫓아내는 과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중앙과 지방 행정조직을 개편했다. 그리고 사천왕사를 창건하여 당나로부터의 위협을 물리치고자 한 부분에서는 그가 불교적인 관심을 갖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문무왕은 통일의 주역으로 다방면에서 자신의 몫을 다한 것이다.
위의 생애가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기 위한 전반적인 노력에서 살펴봤다면, 필자의 답사기는 그의 생애 마지막과 연관된 유적지를 통해 문무왕의 죽음을 다루어보고자 한다. 먼저 방문했던 문무대왕릉에는 날이 흐리고 쌀쌀해서 파도도 거셌다. 매서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설명을 듣고 후에 사진을 찍을 때도 심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 때문에 애를 썼다. 멀리서 바라보니 문무대왕릉 역시 거센 파도를 맞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가까이에서 보진 못해 자세한 구조는 실감하지 못하지만 문무왕의 나라를 위한 마음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문무왕은 5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라 추측되는데, 그의 무덤이라고 일컬어지는 대왕암을 두고는 논란이 있다. 그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긴다...”고 하였고 『삼국유사(三國遺事)』 또한 “왕이 유언하신 말씀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라고 하여 이 기록들로 미루어 보아 문무왕 스스로 봉분을 만들어 매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듯하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으로만 봐서는 화장(火葬)을 해서 동해에 뿌렸다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현대에 와서 암초 중앙부를 인공적으로 수중릉을 만들어 중앙부에 물을 가두어 두기 위해 동서로 긴 수로를 마련했다고 하지만 인공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반박도 있다. 팽팽한 논쟁 속에 아직 문무대왕릉의 문무왕 매장에 대한 주제는 정설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숭고한 호국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며, 이러한 수중왕릉은 세계에서도 유례없는 독특한 것임은 틀림없다.
쌀쌀한 바람을 피해 얼른 버스에 올라 셋째 날 마지막 코스인 감은사지로 향했다. 두 유적지의 거리는 매우 짧아 차로는 1-2분만에 금방 도착했는데, 거리상으로도 가까운 만큼 문무왕의 유적임을 체감했다. 감은사지의 금당은 현존하지 않아 남아있는 터에서 그 구조만 짐작할 수 있었으나 동서에 있는 웅장한 두 탑은 고스란히 남아 있어 문무왕의 호국 정신과 더불어 아버지를 위한 아들 신문왕의 마음도 짐작할 수 있었다. 감은사(感恩寺)라는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여 사찰의 이름을 지은 것에서 예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금당 터에서 문무왕을 위한 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금당의 지하에는 용이 된 문무대왕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같은 시설은 유일무이했고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금당 밑 섬돌을 파고 동쪽으로 향하는 구멍 하나를 냈는데, 이 구멍으로 용(문무왕)이 들어와 돌아다니게 하였다.”라고 한 대목으로 봐서 그 공간은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는 성스러운 공간이었던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나 동해 바다를 지키겠다고 한 것은 신라가 동해에 접해 있고 왜구침략이 빈번했기 때문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문무왕을 위한 지하 공간은 환기 공간 겸, 용이 된 왕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으로 썼음을 현재에도 알 수 있으나 정작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출입 했다’는 통로는 지하 유구의 동쪽 모서리였다는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금당에서 탑 쪽으로 눈을 돌리니 뾰족하고 높은 찰주(刹柱)가 달린, 신라 최대 크기의 두 석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신문왕 2년(682)에 지어졌다는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수십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 만들어 조립식으로 세워진 탑이다. 동서로 똑같은 모양을 한 이 쌍둥이 탑을 보며 특히 찰주가 너무 뾰족해서 천 년이 넘는 세월동안 벼락을 여러 차례 맞았을 텐데 본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탑이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이러한 탑의 겉모습과 연대의 정확성만큼 발굴 도중 나온 사리장엄구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필자는 안타깝게도 답사에 늦게 참여해서 사리장엄구를 직접 박물관에서 보지 못했으나, 조사 도중 발견한 감은사 동서탑의 서로 다른 사리장엄구에 얽힌 이야기에 굉장히 흥미를 가졌다.
서탑에서는 사리병 장식물이 부처님의 열반을 향연하는 주악의 천인(天人)들인 반면, 동탑에는 문무왕을 상징하는 호법신중(護法神衆)인 사천왕이 장식되었다. 위에서 필자가 언급한대로, 문무왕은 재위기간동안 사천왕사를 건립했을 만큼 불교에 관심이 깊었다. 또한 동탑에는 문무왕을 상징하는 용 장식이 있고 동탑의 방위가 문무대왕릉에 직접 연결된다는 점도 흥미롭다. 하지만 사리장치에서의 가장 큰 이슈는 동탑에서 발견된 54과의 사리 중 일부는 문무왕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이었다. 혹자는 이를 부정하기도 하지만 보스턴 박물관에 있는 조선시대 사리기에도 불사리와 더불어 고승의 사리를 함께 봉안했다는 명문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동탑의 사리 일부가 문무왕의 사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어느 정도 있는 듯하다. 이처럼 문무왕, 대왕암과도 연관된 모습을 보여준 감은사지는 『삼국사기』에서 성전(成典)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감은사에 사천왕사, 봉덕사(봉덕사) 봉은사 등과 같은 중요사찰을 관리한 직관을 둔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던 사찰이니 왕실에서 특별히 대우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문무대왕릉, 감은사지를 중심으로 문무왕의 호국 정신이 깃든 유적지를 탐구해보았다. 이전부터 두 유적지가 문무왕의 나라를 위한 마음이 담긴 곳이라는 점은 알고 있었으나 스스로 답사에서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조사하여 보다 심층 있게 정리 한 적은 없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많은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다시 한 번 천년고도 신라의 화려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배울 수 있었다.
참고문헌
이기환·조유전, 『고고학자 조유전의 한국사 미스터리』, 황금부엉이, 2004.
일연 저, 신태영 옮김,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한국인문고전연구소, 2012.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돌베개, 1997.
* 사진과 각주는 붙여넣기가 안돼서 사진은 본문에 못실었습니다. 올려놓은 파일을 보시면 같이 볼 수 있습니다 *
첫댓글 다리가 아파서 감은사지유적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설명해주셔서 좋은것 같습니다 ! ㅎㅎ
유적지에 관하여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주셔서 모르고 있던 사실을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
감은사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동탑에서 발견된 사리가 문무왕의 사리라는 것은 처음 알게되었습니다.
많은 내용을 알기쉽게 정리해주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