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윤 시집『너무나 선한 눈빛 --제주 4‧3 시집』 출간
나 안 죽었어요. 나 좀 한 방 쏴 주세요
―「한 방 쏴 주세요」 부분
강상윤 시인은 1958년 제주에서 출생했고,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으며, 2003년 {문학과 창작』으로 등단했다(추천작 [수평띠톱기계], [푸른 세상],「자기 생을 흔들다] 등) .
2004년 첫 시집 『속껍질이 따뜻하다』를 간행한 이후『만주를 먹다』,『요하의 여신』,『너무나 선한 눈빛』등을 출간했다. 2004년 문예진흥기금을 수혜했고, 한국시인협회,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주 4‧3 사건은 미군정기에서 발생했고, 6‧25 전쟁 다음으로 제주도민 2만 5000~3만여 명이 희생당한 대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다. ‘제주 4‧3 시집’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강상윤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인『너무나 선한 눈빛』은 이를 시적으로, 문학적으로, 예술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왜냐하면 역사의 기록이고, 진실의 울림이기 때문이다.
‘제주 4‧3 사건’은 7년 7개월 동안 진행된 일련의 사건들을 가리킨다. 곧 2000년 1월에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제2조)’에 따르면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된다.
강상윤의 시집에는 무고한 민간인으로서 희생당한 제주도 주민들이 등장한다. 총살 등의 방식으로 실제로 죽음을 당한 이들이 있고, 그들의 죽음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이 있다. 부모, 형제, 자식 등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수십 년의 세월 동안 두려움과 괴로움을 호소하였다. ‘4‧3’의 비극 앞에서 아기도 죽고, 여자도 죽고, 노인도 죽었다. 합리적인 근거나 마땅한 이유도 없이 그냥 죽어야만 했던 이들이 있었다.
‘제주 4‧3 사건’은 이제 더 많은 이들이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이해하며 파악할 수 있도록 조금 더 밝은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필자는 ‘4‧3’의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강상윤은 시적인 언어로 이를 달성하였다. 그가 제안한 진실로서의 기록 또는 최소한의 양심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 시인의 살아 있는 시가 앞으로 화해와 화합의 길을, 새로운 ‘4‧3’의 여정을 펼칠 수 있기를 바란다. --권온 문학평론가
서북청년단 이 놈들이 고얀 놈들이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 놈들이 사건을 악화시켰다. 그래서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른 것이다.”
탁성록은 원래 작곡가이고 나팔수인데 진주
논개의 노래를 작사 작곡할 정도였네.
그러나 진주 CIC대장을 할 때도 민간인들을 많이
죽였네. 얼마나 마약 주사를 많이 맞았는지 주사
바늘이 들어갈 곳이 없었다고 하네.
영화 ‘지슬’의 마약쟁이 군인이 바로 탁성록
대위를 모델로 한 것이네. ―「탁성록」 부분
강상윤이 이 시에서 주목하는 인물은 “탁성록 대위”다. “윤태준”의 “증언”에 의하면 “9연대 정보참모”였던 “탁 대위에게 잡혀가면/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다 죽었다.” ‘탁성록’은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았으며,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르도록 유도한 인물이다. 또한 그는 “진주 CIC”와 관련하여 진주 보도연맹 학살을 주도하면서 “민간인들을 많이/ 죽였”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죽이는 ‘탁성록’의 잔인성은 ‘아편’ 또는 ‘마약’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마약 주사를 많이 맞았는지 주사/ 바늘이 들어갈 곳이 없었”을 만큼 ‘탁성록’은 심각한 “마약쟁이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탁성록과 관련된 특이 사항으로는 그가 “원래 작곡가이고 나팔수”였으며 “진주/ 논개의 노래를 작사 작곡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떠올리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는 그림과 미술에 대한 관심이 컸으며 화가로서의 삶을 꿈꾸기도 했다. 히틀러와 그림, 미술의 관련성은 탁성록의 노래, 음악과의 관련성에 대응될 수 있다. ‘탁성록’이라는 특정한 개인의 내면에서 진행된 예술과 전쟁의 연결은 차후의 흥미로운 연구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4‧3이 무서운 것은 혐의를 밝히고, 시시비비를 가려 죄 있는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토벌대에게 밉보이면 죽이는 판이었네 김태수(金泰守, 당시 37세)는 서귀면 신효리의 유지였는데, 힘도 세고 결코 호락호락하게 당할 인물도 아니었네 그러나 1948년 11월 22일, 한 순경이 찾아와 “형님, 꿩사냥이나 하러 갑시다.”며 그를 끌고 가 총살해 버렸네
이듬해 그의 아내, 박인화(당시, 38세)도 경찰에 끌려가 총살을 당했네 김태수의 딸 김정자 씨가 여섯 살에 겪었던 일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네 “하루는 집 앞에서 놀고 있는데, 경찰 스리쿼터가 와서 어머니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옷을 갈아 입고 순경들을 따라갔습니다. 나는 차에 매달리면서 하소연을 했지만, 경찰들은 계속 밀쳐 내고 밀쳐 냈어요. 어머니는 나에게 ‘큰아버지 집에 가 있어라. 나는 일본에 다녀오는 것이다’고 하셨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에게 닥칠 일을 직감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주위에서는 “아이고, 불쌍한 것! 네 어머니는 그 때 쌀 두 말만 주지 않았어도 죽지는 않았을 텐데’라고 했습니다. 산 쪽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것이 총살당할 만큼의 죄가 될 수 있습니까?”
―「쌀 두 말」 전문
이번 시는 ‘제주 4‧3 사건’의 핵심 시기인 ‘초토화 작전 시기’ 또는 ‘강경진압 시기’를 다룬다. 1948년 10월부터 1949년 3월 사이의 기간에 다수의 제주도 주민들은 ‘토벌대’와 ‘무장대’ 사이에 끼어서 희생되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인물인 “김태수”는 당시 “서귀면 신효리의 유지”였고 “박인화”는 ‘김태수의 아내’였다. ‘김태수’와 ‘박인화’는 ‘초토화 작전 시기’에 “경찰” 또는 “순경”에 “끌려가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이들 부부가 총살당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딜레마(dilemma)’에 빠졌기 때문이다. ‘김태수’와 ‘박인화’는 ‘4.3’ 당시 제주도를 먼저 장악했던 “산 쪽” 곧 ‘무장대’의 요구에 따라서 “쌀 두 말”을 제공하였는데, 이것이 결국 나중에 ‘진압군’ 또는 ‘토벌대’에 의한 총살이라는 결과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김태수’와 ‘박인화’가 “산 쪽”에 ‘쌀 두 말’을 제공하지 않았다면 그들 부부는 ‘무장대’에게 희생되었을 수 있다. 당시 제주도 주민들은 ‘좌’와 ‘우’ 사이에서 이념의 선택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민간인들은 ‘좌’도 잘 모르고 ‘우’도 잘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결코 “총살당할 만큼의/ 죄”를 짓지 않았다. 그들은 “죄 있는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제주 4‧3 사건’의 실상에 관한 강상윤의 다음과 같은 판단은 주목된다. “4‧3이 무서운 것은 혐의를 밝히고, 시시비비를/ 가려 죄 있는 사람들을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토벌대에게 밉보이면 죽이는 판이었네”
그러나 그 명단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네 양경수 씨는 그 명단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네 “난 소개 내려온 후 이쪽저쪽에 시달리는데 지쳐서, 경찰에 지원하기로 하고, 서귀포 경찰서를 찾아갔어요.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비명 소리가 귀를 찢었고, 갖가지 고문은 눈을 뜨고 볼 수가 없었어요. 여자들은 일단 홀랑 벗기고 고문을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이름 빼앗기지 말라’는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즉 끌려가는 사람이 있을 때, 그를 앞서거나 근처에 있어서 그의 기억 속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매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가혹한 고문을 받게 되면 아무 이름이나 튀어나오는 법이니까요. 그러면 졸지에 폭도가 되는 겁니다.”
―「이름을 빼앗기지 말라」 부분
“현기상 씨”에 따르면 그의 동생 “현기호”는 “토벌대가 확보한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제주 4‧3 사건’의 ‘초토화 작전 시기’를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시에서 “서귀면 신효리/ 사람들”은 “총살을/ 당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어떤 명단에 있는 이들이었다. 그 명단은 토벌대에 “끌려가는 사람”이 “매”를 맞거나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아무 이름이나” 언급한 결과물이다. 누군가의 “이름”이 “고문”을 당하는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면 그 누군가는 ‘무장대’가 되거나 “졸지에 폭도가 되는” 것이다.
토벌대가 확보한 명단은 이른바 삶과 죽음을 나누는 기준으로서의 “살생부”가 되었다. 그러나 강상윤에 의하면 ‘살생부’ 또는 “그 명단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고문’에 시달리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신뢰할 수 있을까? ‘매’를 맞는 사람이 당장의 괴로움을 회피하기 위해서 머릿속에 떠오른 아무런 이름이나 언급했다면 어떻게 될까? 그러므로 우리는 ‘4‧3’ 당시 총살당한 민간인들 중 상당수가 “이름을 빼앗”긴 억울한 희생자들이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난 수기동 청년 20명과 함께 바늘오름 남쪽에 있는 ‘궤’에 숨어 지냈습니다. 사건이 나던 날, 오름 중턱에 올라 주변을 살피는데 오전 7시께 군인들이 교래리에서 와흘 2구로 들어가는 것이 훤히 보이더군요. 군인들이 집집마다 불을 붙이고 닥치는 대로 총을 쏘는 것도 보였습니다. 저녁 때 마을로 와 보니 처참한 모습이었습니다. 여동생(고성순高性順)은 이마에 총을 맞아 즉사했고, 아내(현정돈玄貞敦)는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아침에 먹은 음식이 밖으로 흘러나왔습니다. 그날 수기동에서만 16명이 희생되었습니다. 불에 탄 시신들은 배가 터져 창자가 다 나와, 개들이 그걸 보고 날뛰었습니다. 우린 개들을 쫓아내고 시신들을 가매장하였습니다.” (중략) ―「개들이 날뛰다」 부분
“고성춘 씨”의 증언에서 출발하는 이 시는 ‘제주 4‧3 사건’의 비극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당시 “젊은 남자들” 또는 “청년 20명”의 일원으로서 “토벌대가 와흘 2구”의 “마을”에 도착하기 전에 “숨어 지내”거나 “피신”할 수 있었다. 젊은 남자들을 제외한 주민들은 마을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군인들” 또는 ‘토벌대’는 “오전 7시” 무렵 마을에 들어서자 “집집마다 불을/ 붙이고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다.
‘고성춘 씨’가 “저녁 때 마을로 와 보니 처참한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여동생’은 “이마에 총을 맞아/ 즉사했고”, ‘아내’는 “가슴에 총을/ 맞았는데, 아침에 먹은 음식이 밖으로/ 흘러나왔”으며, “불에 탄 시신들은 배가 터져/ 창자가 다 나”왔다. 그리고 시신들을 “보고 날뛰”는 “개들”이 있었다. 아마도 그 현장은 시각, 청각, 후각 등 거의 모든 감각을 강렬하게 활성화하는 장소였을 테다. 젊은 남자들을 제외한 여자, 노인, 아이 등 “불가항력의 노약자들”을 향한 토벌대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독자들의 마음은 가늠하기 힘든 슬픔으로 차오른다.
‘4‧3’ 당시 “방화하고 학살한 군인”에 대한 단죄는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살아 있는 유족은 말을 한다
4.3은 살아 있다
그러므로 피해자 유족들은
영혼을 대신하여 말을 한다
(중략)
제주의 모든 마을을 모으면
엄청난 큰 부피의 피해일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역사는 진실을 기록하지
못하고 있으며 한라산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한숨과 눈물과 한의 기록일지라도 후세에 남기고
지금은 모두가 화합의 손을 맞잡을 때일 것이다 ―「4‧3은 살아 있다」 부분
강상윤의 이번 시집은 ‘제주 4‧3 사건’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이다. 이 시는 시인이 고민하고 탐색한 핵심 대상으로서의 ‘4‧3’을 향한 넓고 깊은 제안이다. 그에 의하면 ‘4‧3’은 “제주의 살아 있는 말이며/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기록이고/ 먼 훗날에 있을 제주인의 슬픈 이야기이다”
강상윤에 따르면 “죽은 자가 있고 죽인 자가 있지만/ 죽임의 가늠과 책임자가 없는 것이/ 4‧3의 특징이”다. “그 수다한 죽음”, 그 무수한 죽음은 왜 발생했고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누구도 속 시원히 대답할 수 없는 게 현실일 수 있다. 시인에 의하면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살아 있는 유족은 말을 한다” “엄청난 큰 부피의 피해”를 남긴 “4‧3은 살아 있다” ‘4‧3’을 생각하고 기억하며 그 흔적을 찾아보는 일은 어쩌면 “한숨과 눈물과 한의 기록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강상윤의 시를 읽으며 “진실”과 “화합”의 계기로서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다.
----강상윤 시집『너무나 선한 눈빛』, 도서출판 지혜, 값 10,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