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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봄 체코 이유였다. 오래전 어느날 웅장하고 장엄한 나의 조국 몰다우라는 음악을 들었을때 아하 저것이 바로 교향악이라는 것이구나라고 느꼈을정도로 내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몰다우강과 까를교
체코 그리고 프라하
'북쪽의 로마,' '유럽의 심장,' '백탑의 황금도시,' '유럽의 음악원'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프라하는 체코의 수도이다. 프라하는 역사 상 수많은 갈등을 거치면서도 중세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신비의 도시이기도 하다. 프 라하는 천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로 웅장하고도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즐비하게 거느리고 있으며, 로마네 스크, 고딕, 르네상스 등 온갖 양식의 예술품들을 보유하고 있다. 밀로스 포먼(Milos Forman)의 영화 <아마데우스>의 무대가 될 정도로 도시의 구석구석에는 중세의 낭 만이 묻어있다. 동시에 프라하는 중·동부 유럽의 어느 도시보다 빠르고 역동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곳이 기도 하다.
10세기 프라하에 주교좌가 건설되면서 본격적인 프라하의 시대가 도래했다. 12세기에 들어서 프라하를 가로지르는 블타바(몰다우) 강에 다리가 놓였고 이후 프라하는 블타바 강을 사이에 두고 건설된 프라하 성과 비세흐라트 성을 중심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풍스런 도시로 변모되었다.
제국의 수도 - 프라하 1346년 보헤미아의 왕 카렐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렐 4세가 되었다. 이로써 이미 대주교구로 승 격되어 있던 프라하는 마침내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예술과 교육을 숭상했던 카렐 4세는 프라하를 명실상부한 유럽의 중심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노력했 다. 즉위와 더불어 그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등에서 유명한 건축가와 예술가를 프라하로 데려와 프라하에 신시가를 건설했다. 이 때 중부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렐대학과 30개의 석상이 다리의 좌우 양편을 장식하고 있는 석조다리 카렐교 그리고 프라하 성도 증축되었다. 현재 프라하에는 120만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보다 최소 10배 는 많은 관광객들이 매해 프라하를 방문하고 있다.
프라하의 중심 - 프라하 성 프라하 성은 프라하의 중심이라 할 수 있으며 천년 이상의 건축사를 보여주고 있다. 프라하 성은 역사적 으로 체코 통치자들의 거처로 이용되었으며, 현재는 대통령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프라하 성은 9세기에 처음으로 건축되기 시작했으며, 10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궁전과 여러 성당들 이 건축되었다. 13세기 중엽에는 초기 고딕양식이 여기에 덧붙여졌다. 14세기 보헤미아의 황금기를 구가하던 카렐 4세 시대에 고딕 양식의 왕궁과 성 비투스 성당, 성 십자가 교회 등이 건축됨으로써 프라하의 황금시대가 만 개했다.
15세기 말 브라티슬라프 2세 때 후기 고딕양식 요소가 첨가되었고, 1526년 합스부르크가 보헤미아를 지 배하면서부터는 르네상스 요소가 가미되어 점점 복잡하고 정교한 성이 되었다. 프라하 성의 건축양식 상 최종 완공은 바로크 시대에 이루어졌으며, 1753-75년 사이에 현재와 같은 외관 을 갖추었다.
프라하의 상징 - 카렐교 ( 아래 슬라이드 참고하세요) 블타바 강 양편을 잇는 카렐교는 중부유럽에서 레겐스부르크교 다음으로 오래된 석조교이다. 10세기 초 에 목조로 건설되었다가 12세기 중반에 석조교로 개축되었으나, 그 후 홍수로 유실되었다. 현재 카렐교는 1357년 카렐 4세 시기에 착공되어 15세기 초반(1402년)에 완공된 것이다. 현재의 카를교는 길이 516m, 폭 9.5m의 석조교인 카렐교 양끝에는 고딕양식의 탑이 있다. 양쪽 교각에 는 각각 15개씩 모두 30개의 고딕 및 바로크 양식의 석상이 줄지어 서 있다. 이것들은 모두 체코 최고 조 각가들이 제작한 것으로, 17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약 250년에 걸쳐 제작된 것이다.
체코인의 정신 - 구시가 광장 구시가 광장은 체코인들의 삶과 그들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이다. 이곳에서는 이미 11세기부터 상 거래가 행해졌고 시장도 열렸다. 그러나 체코에서 구시가 광장의 의미는 바로 이곳이 1621년 합스부르크 에 대항한 27명의 프로테스탄트 체코인 귀족들이 처형당했던 치욕의 장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구시가 광장은 1918년 5월 민족 해방을 위한 투쟁이 있었던 곳이며, 1948년 노동자들의 세상을 건 설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외치던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시작했던 곳이기도 하다. 구시가 광장 중앙에는 체코의 종교 개혁자인 얀 후스(Jan Hus)의 조각상이 있고 주위에는 중세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주거지가 남아있다.
구시가 광장을 중심으로 옛 시청, 틴 교회, 로코코 양식의 킨스키 궁 전 등이 있다. 구시가 광장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면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아르누보 양식까지 모든 건축 양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
옛 시청과 천문시계
프라하 천문시계의 역사는 14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에 따르면 시계를 만든 사람이 다시 시계를 만들지 못하도록 눈을 멀게 했는데, 눈먼 시계공이 시계에 손을 대자 시계가 멈추었다고 한다.
이후 400년 동안 멈추어 있던 시계가 다시 움직인 것은 1860년부터라고 한다.
시계는 상하 두 개의 원으로 되어 있는데, 제작 당시의 천동설에 입각한 우주관을 보여준다. 위에 있는 것은 칼렌다륨이라 하여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을 묘사한 것으로 1년에 한바퀴 돌며 년, 월, 일, 시간을 나타낸다. 아래쪽에 있는 원은 플라네타륨인데 이것은 12 계절별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보헤미아의 농경 생활과 관련이 있다.
매시 정각이 되면 죽음의 신이 벨을 울리면서 12사도들이 두개의 창문을 통과하여 한번씩 나타난다. 마 지막에는 닭이 울면서 시계가 시보를 나타내는 것으로 끝이 난다. 매시 정각에 이 시계를 보려고 많은 관 광객들이 이 앞으로 모여들어 장사진을 이룬다.
바츨라프 광장
바츨라프 광장은 프라하에서 가장 번화한 중심지이다. 이 광장은 광장이라기보다는 파리의 샹젤리제 거 리와 같은 모습으로 길이는 750m, 폭은 60m이다. 광장 양편으로 상점, 레스토랑, 호텔이 줄지어 있는 번화하고 호화로운 쇼핑거리이다. 보헤미아의 수호 성인인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광장의 위쪽 국립 박물관 앞에서 광장의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 광장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마시장으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체코 역사의 전환기에는 반드시 등장하 는 역사적인 장소이다. 1989년 반공산주의를 외치던 민주투사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외쳤던 곳으로 유명하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의 봄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자유화운동이 일어나자 이 운동을 막기 위하여 불법침략한 소 련군의 군사개입사건을 포함하여 ‘체코사태’라고도 한다. 1956년 소련 내에서 스탈린 격하운동이 있은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스탈린주의자 노보트니 정 권의 보수정책이 계속되었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들의 민주 ·자유화의 열망이 점차 고조되어 갔으나, 노 보트니 정권은 이를 외면한 채 소련만을 추종하였다.
1960년대 이에 반발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층이 중심이 되어 민주 ·자유화의 실현을 위한 조직적인 운 동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 물결에 밀려 마침내, 1968년 1월 노보트니 당 제1서기가 물러나고, 개혁파의 둡체크가 당 제1서기를, 체르니크가 수상을, 온건파 스보보다가 대통령직을 각각 맡았다. 이들 개혁파는 1968년 4월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중앙위 총회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 즉 민 주 ·자유화노선을 제창하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재판의 독립, 견고한 의회제도의 확립, 사전검 열제의 폐지, 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보장, 국외여행 및 이주의 자유보장, 경찰정치의 부활저지, 경제계획의 추진,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서의 연방제로의 이행, 자주 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등이다.
따라서 사실상 검열제가 폐지되고 많은 정당 ·정치단체가 부활되었 으며, 의회는 활발한 논의와 비판의 광장이 되었다.
이러한 자유화를 위한 정책적 변화가 있자 온 국민은 ‘프라하의 봄’이라 하여 공산체제로부터의 탈바꿈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이러한 체코사태가 동유럽 공산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이 체제변 화를 ‘마르크스 ·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불법으로 무력침공을 감행하였다. 이후 많은 민주인사와 시민이 학살을 당하였다. ▶ 프라하의 명물 천문시계 프라하의 명물이 된 천문시계는 해와 달 그리고 북극성의 위치를 가리키는 위쪽의 원과 12개의 계절별 장면을 묘사한 아래쪽의 원 등 두 개의 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시 정각이 되면 위쪽 원 형 시계 옆에 있는 해골 모형이 한 손에 모래시계를 들고 줄을 잡아당기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면 정복욕망을 상징하는 터키군인 인형,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유대인 인형, 허영 심과 망상을 상징하는 거울을 든 인형들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이 하나하나가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먼저 죽음을 의미 하는 해골모형이 들고 있는 모래시계는 인간이 쾌락과 부와 사치 와 허영에 몰두하고 있으나 결국은 죽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 또한 인형들이 고개를 가로젓는 것은 그것을 부정하고 싶은 인간의 무지함을 나타낸다고 한다.
종이 시간을 알리고 인형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시계 꼭대기에 있는 창문이 열리고 열두 제자 인형들이 하나씩 움직인다. 인형 들에게 순서가 다 돌아가면 마지막으로 황금색 닭이 나와 울면서 시계 쇼도 끝이 난다. 이 닭이 베드로의 닭이다.
시계를 이루는 두 개의 원 가운데 위쪽에 위치한 원은 1년에 한 바퀴씩 돌면서 연월일과 시간뿐 아니라 일출과 일몰, 월출과 월몰도 나타낸다고 한다. 그 과학적 성과에 또 한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시계는 누구 손에서 탄생 한 것일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프라하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하누슈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이 시계의 아름다움에 관한 소문이 유럽 전역에 퍼지자 이런 시계가 다른 곳에 생기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시의원들이 교수를 장님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장님이 된 후 교수가 시계탑에 올라가 시계를 만지자 시계가 멈추어 버렸 다는 슬픈 전설도 전해진다. 자신이 만든 아름다움 때문에 장님이 될 수밖에 없었던 천재 교수의 안타까움은 시계를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왠지 찡하게 만든다.
어찌됐든 시의원들의 의도대로 이 아름다운 시계는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프라하만의 명물로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이제는 프라하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천문시계를 비롯, 카를대교와 프라하성 등 많은 볼거리를 지닌 프라하. 지난 2004년 대한항 공이 취항한 이후 우리나라 관광객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관광지 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올 여름에는 항공편이 증편되어 프라 하의 천문시계를 찾는 우리 관광객들의 발걸음도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김경희·대한항공 승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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