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있어서 1982년 8월 20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무녀도(巫女島)의 #고군산중앙교회 전도사로 부임한 날이며, 결혼 20주년 기념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동 교회의 최인성 집사가 운행하는 12톤급 벧엘호에 이삿짐을 싣고
군산항 똥다리를 떠나 #고군산군도로 들어가던 그날 갑판 위로는 부슬비도 뿌렸다.
새벽에 출발한 배가 여러 시간의 항해 끝에 무녀도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중천에 있었다.
몇몇 교인들과 최 집사의 도움으로 이삿짐을 교회로 다 옮긴 후에 특이한 점을 보게 되었다.
이삿짐을 나르던 교인들이 처마 밑에 빈 그릇들을 주욱 벌려놓고 빗물을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집사 한 분이 지나가는 말처럼 "전도사님은 복을 몰고 오시는 군요!" 라고 말했다.
"왜요?" 하며 반문했더니 "비가 오쟎아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가물었는데 나는 한동안 그 말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짐정리를 대강 마치고 청소를 마친 후 도와주던 이들은 모두 귀가했고 덩그러니 우리 둘만 남았다.
안사람은 대충 살림을 챙기고는 그릇마다 채워 놓았던 빗물을 다 쏟아버렸다.
지붕을 타고 흘러내린 더럽고 시꺼먼 빗물이었기 때문에 청소용으로만 알았던 것이다.
그날 저녁 안사람은 부뚜막에 앉아서 소리도 못내고 내내 눈물을 쏟았다.
저녁밥을 지을 물이 아무데도 없었던 것이고, 그렇게 우리는 물이 귀한 섬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극심한 가뭄으로 행정선이 군산에서 실어다 배급하는 수돗물을 받아먹으며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출23:25) 하신 말씀을 실감하였다.
사실 양식은 몰라도 물에 복을 내리리라는 말씀은 이해를 못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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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와의 연락은 하루에 세 번 연결되는 마을 공동 전자식무선전화를 이용했다.
동네방송을 통해서 "아무개 전화 왔어요. 전화 받으세요!"하면 동네 이장댁으로 달리기를 해야 했다.
옛날 방앗간에서나 볼 수 있는 발동기를 이용하는 동네 자가발전은 저녁 어두워질 때 시동을 걸고
밤 열한 시가 되면 자연소등이 되었다.
그것도 발전기에서 거리가 제일 먼 교회는 껌벅대는 12볼트 짜리 전등과 신경전을 벌려야 했다.
그 발동기가 고장이라도 나면 육지에서 기술자가 들어와 고칠 때까지 촛불을 밝혀야 했고,
당연히 새벽예배에는 촛불을 밝히는 게 일이었다.
전기가 있거나 말거나, 켜지거나 꺼지거나 상관없이 세월은 숨가쁘게 흘러갔다.
이어서 전임자가 추진하다 중단한 종탑건설이나 합동결혼식을 주선해야 했고,
교회 옆에 붙어있는 사택방 대신, 새로운 사택을 마련해야 했고,
시도때도 없이 바다로 나가는 젊은 아낙들을 위해 그 자녀들을 맡아서 선교원을 운영했다.
부임 3년차에는 교회당을 크게 수리하고 의자와 강대상을 처음으로 구입했으며 커튼을 새로 치고,
선교원 놀이시설도 몇 가지 갖추고 헌당식을 하면서 여진헌 목사님을 모시고 기념 부흥회도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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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목회에서 어려웠던 점은 성례전이나 어떤 행사에 치리목사님을 모시는 일이었다.
그래서 "목회를 계속하자면 목사가 되어야겠구나." 결심하고 중단했던 신학교육을 다시 받고,
모든 과정을 이수한 후에 1992년 4월 모교회인 #청주서문교회에서 개최된
제 47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을 수 있었다.
목회를 시작한 지 10년 만이었고,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지 30여 년 만이었다.
그 짧지 않은 세월동안 안사람은 처음 부임하던 날과 마찬가지로 강대상 앞을 많이도 적셨다.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갈 수 없고, 보고 싶은 사람도 만날 수 없는 폐쇄된 섬이었고,
펑펑 쏟아지는 수돗물 대신 먹을 물도 구하기 힘든 환경으로 바뀌었으니 왜 안 그렇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너무 감사해서 많이 울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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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에서 한 때 사진관과 간판업을 해본 경험은 섬 목회활동에서 유용하게 활용이 되었다.
목회활동 중에 무녀도는 물론이고 이웃 섬에까지 신, 불신 간에 염습전문가로 불려 다니고,
아내는 산모를 도와 산파역을 맡아 주었다.
한 때는 선교원교사로, 집을 짓는 이웃들을 위해서는 상량문도 도맡아 써주거나,
교회의 대소사(大小事)에서는 목수, 간판제작, 청소부, 벽돌공, 미장공, 페인트공, 전기공으로 일하고
행사가 있을 때면 사진사로서 사진 기록을 남겼다.
이발소가 없기 때문에 때로는 이발사로, 교회 옆에 염전이 있어서 때로는 염전의 잡부(鹽夫)로,
힘에 부치긴 하지만 분쟁의 중재자로, 자전거나 오토바이 수리공으로, 고군산관광가이드로, 섬목회의 상담자로,
혹은 '붓가는 대로' 쓰는 집필자로, 그리고 딱 한 번은 묘소자리를 잡아주는 지관노릇도 했다.
이런 모든 일들은 섬이라는 취약성 때문에 전문인력을 구하기도 힘들었거니와
재정적인 부담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짐을 떠 맡다보니
거의 만능박사처럼 되어버린 측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동차가 없는 섬이어서 자동차 운전기사는 해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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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상황이 많이 호전되었다.
여객선운항은 여전하지만 24시간 전화가 가능해 졌고, 24시간 220볼트 전기가 들어와 TV나 냉장고,
컴퓨터 사용이 가능해 졌고, 무녀도에서 선유도를 건너 장자도까지 다리로 연결되어 활동범위가 세 배로 넓어졌다.
올 해는 지하수개발이나 저수지 공사가 성공을 해서 집집마다 상수도 공급시설을 시공 중이니, 내년이 되면 지난 13년간의 물고생도 안녕이 될 것이다.
또한 교회에 대한 세인들의 인식도 많이 좋아졌다. 섬교회들은 많은 신자들을 양육하여
도시교회로 내보내는 못자리 역할도 잘 하고 있다.
일찍이 섬지역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선배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의 노고가
하나님의 은혜와 친히 역사하심으로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 것이다.
많은 분들은 이름 석 자도 남기지 않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열악한 이 섬지역을 찾아와
수고를 아끼지 않다가 떠나갔다.
청광교회의 최홍국 목사님도 그 젊음을 #선유도라는 섬에서 불태운 한분이시다.
사직아파트에서 여진헌 목사님과 사모님, 홍인덕 목사님과 박부도 전도사님이 오셔서
송별예배를 드린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13년이나 흘렀다.
청주를 떠나있던 그 어간에도 서문교회와의 관계는 더욱 깊어만 갔다.
어린 시절 청주제일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래 많은 교회를 전전했지만,
서문교회를 감히 모교회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서문교회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니 "청주행 꼬리표를 달아서 청주로 돌려보내자“라는 농담이 들리기도 한다.
고향이 있다는 것은 부러워할 일인데 저 하늘나라에 내 본향이 있음은 엄청난 복이 아닐 수 없다.
1994년 11월 20일 무녀도 고군산중앙교회에서 -관-
덧글;
윗글은 청주서문교회 소식지 '충만'에 기고한 글을 약간 수정했다.
새만금간척사업이 시작되던 때에 서문교회수양관 관리목사로 나왔는데,
지금은 무녀도까지 연육교로 연결되어 자동차를 타고 들어가는 시대가 되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더니...
첫댓글 목사님과 사모님 하늘에서 그 충성이 해같이 빛납니다.
지금이라면 어렵겠지요? 젊으셔서 감당할 수 있을때 상급을 쌓게 하셨어요.
하나님이 충성된 종아! 부르시네요. 가슴이 찡합니다.
김 권사님, 과찬이십니다.
여하튼 내 인생의 황금기(?)는
"사명"이라는 두 글자에 매여
섬에서 훌쩍 보낸 셈이지요.
보내 주시고 사용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