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 9:1-7 / 신약적 헌금관 - 십일조는 신약 성도들의 의무인가?
■2025-1-6(월)■
(고린도후서 9장)
1. 성도를 섬기는 일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나니
2. 이는 내가 너희의 원함을 앎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마게도냐인들에게 아가야에서는 일 년 전부터 준비하였다는 것을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의 열심이 퍽 많은 사람들을 분발하게 하였느니라
3. 그런데 이 형제들을 보낸 것은 이 일에 너희를 위한 우리의 자랑이 헛되지 않고
내가 말한 것 같이 준비하게 하려 함이라
4.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가 준비하지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5.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묵상/고후 9:1-7)
◆ 미리 준비할 것
(5) 그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가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하게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마게도냐는 오늘날 북마케도니아와 그리스 북부의 일부다.
아가야는 오늘날 그리스 본토의 중남부 지방이다.
마게도냐에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등이 있고, 아가야에는 고린도가 있다.
지금 바울은 마게도냐 지역에서 고린도 교회에 서신을 보내는 중이다.
바울은 그동안 마게도냐의 교회에서 고린도 형제들의 헌금 자세를 자랑했다.
이것은 마게도냐 형제들을 크게 자극했다. 이제 마게도냐 형제들이 바울과 함께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텐데,
이들의 기대가 실망이 되지 않도록 바울은 먼저 함께한 일행 중의 몇을 보내서 미리 확인하도록 했다.
마게도냐 교회, 고린도 교회 등 여러 교회가 모은 연보는
심한 기근에 시달리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것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드리는 연보는 참으로 아름답고 귀하다.
그런데 바울은 연보가 연보답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어떠해야 하는 지를 가르친다.
‘미리 준비할 것’
성도가 드리는 연보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워지려면 미리 준비해야 한다.
우리가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뵐 때 부모님을 뵙는 현장에서
주머니에 갑작스럽게 있는 대로 꺼내서 드리는 것은 참 공경이 아니다.
적어도 부모님을 공경한다면 그렇게 하지 말고 미리 준비한 것을 드려야 할 것이다.
연보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적용하려면,
연초에 나는 수입의 몇 퍼센트를 하나님께 드릴 것인가를 마음에 정하고 실천하는 것이 좋다.
그냥 있으면 드리고 없으면 안 드리는 태도는 좋지 않다.
헌금을 어디에 드릴 것인가?
교회가 구제와 선교를 잘 실천하면, 모든 헌금을 교회에 드려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헌금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지도자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나는 무조건 드렸으니 하나님께서 알아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종종 거대한 헌금이 부패한 지도자를 통해서 엉뚱한 곳에 쓰여진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 사역을 오히려 방해하고 주님의 명예를 실추시킨다.
그런 곳에 모든 헌금을 다 드리는 것은 절대로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권하기는 모든 헌금을 교회에 바치기 보다는,
일부는 가난한 형제나 어려운 사역자들에게 익명으로 돕는 것이 좋다.
그것이 진짜 '연보'다. 이런 것이 공동체를 더욱 든든하게 할 것이다.
선교지에 가면 은퇴한 목사들 중에 ‘선교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꼬박꼬박 거액의 선교비를 받아 챙기는 분들이 있다.
이들은 정말 아무것도 안 하면서, 가는 곳마다 대접받으려고 하며
젊은 선교사들에게 짐이 되고 선교에 방해만 된다.
왜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귀한 헌금이 쓰여져야 한단 말인가?
차라리 형제로서 돕는 헌금으로 받아라.
성도들은 자신들이 드려지는 헌금이 어디에 쓰이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만일 내가 속한 교회가 제대로 헌금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면,
개인적으로 헌금 통장을 따로 만들어서 거기에 비축해 두고
정말 하나님 나라 사업과 관련이 있는 곳에 주님의 이름으로 보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섬기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 이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 헌금액을 마음에 정할 것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오늘날 교회들이 각종 헌금의 종류를 많이 만들어놓았다.
그중에서 ‘십일조’는 대단히 많이 강요된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십일조’라는 율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에 있는 십일조를 따라 하면 몇 가지 의미에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십일조는 레위 지파의 몫으로 떼어놓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에(민 18:24),
다른 사람이 그 십일조를 차지하면 안 된다. 그것은 불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비롯한 어느 제자들도 십일조를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그들은 레위 지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일 받았다면 불법으로 처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복음이 이방에게 전해졌을 때,
이방 교회에 속한 이방인들이 당시에 유대교에 속한 레위 지파와 제사장들을 봉양할 의무가 있었을 리가 없다.
오늘날 신약교회에서 레위 지파, 제사장은 누구인가? 모든 성도가 바로 레위 지파요 제사장이다.
(벧전 2:5) 이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에서 아주 중요한 사상이었다.
신학교 나오고 안수받으면 신약교회에서 레위 지파, 제사장으로 둔갑한다는 것은
유대교를 모방한 짝퉁 기독교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이 그런 식으로 함부로 제사장을 만듦으로써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다.(대하 11:14,15)
우리는 율법의 예를 들어서 성도들에게 십일조를 강요하면 안 된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라는 말씀을 인용하며
신약에서도 십일조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주장하는데, 잘못 해석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성전이 있었고, 레위 지파와 제사장도 있었다.
당연히 십일조가 폐해지면 안 되었다.
예수님은 당시에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신약의 성도들에게 적용하면 안 된다.
내가 신학교나 다른 모임에서 율법과 복음을 가르칠 때, 청중들은 십일조에 대단히 민감했다.
‘십일조를 안 바쳐도 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것을 듣는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졌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과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은 종교인들에게 철저하게 세뇌되어서 떠는 것이고,
기뻐하는 사람들은 그동안 억지로 바쳐왔다는 증거다.
그러면 신약에 와서는 헌금의 원리가 없는가?
있다.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해준다.
그것은 십분의 일이라는 강요된 숫자가 아니다.
‘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7절) 라고 했다.
마음에 정하라. 사실 신약의 성도들이 구약의 성도들보다 적게 바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십일조라는 말은 쓰지 않는 것이 좋겠다.
십분의 일도 아니면서 십일조란 말을 쓰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가?
우리 교회는 ‘마음에 정한 대로’라는 말을 따서 ‘심정 헌금’이라고 부른다.
무엇으로 부르든 상관없다.
나는 비록 많은 수입이 아니지만,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따로 떼어놓고,
그 외에 사역을 위해서 따로 돈을 쓴다. 조금도 아깝지 않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아멘.
이제 세금 바치기 전의 십분의 일이냐, 바치기 전의 십분의 일이냐로 골머리를 앓지 말라.
선물 들어온 것도 십일조를 내야 하느냐 마느냐로 고민하지 말라.
‘온전한 십일조(the whole tithe)’라는 말 때문에 시험에 든 자도 많다. 자유 하라.
그런데 그것이 ‘인색함’으로 전락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 율법에서 자유로운 것을 깨닫는 순간 ‘인색함’으로 손이 오그라들었다.
그런 자를 정죄하지 말라. 그렇다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색하게 된 것은 그들의 믿음의 분량이 그것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책망할 것이 아니라, 믿음을 더욱 북돋아 주어야 할 일이다.
어떤 분은 체면 때문에 억지로 하는 분도 있다. 거기에서도 해방되라.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
억지로 내면 돈은 돈대로 나가고, 복은 복대로 달아난다. 그것처럼 억울한 일이 있겠는가? 기쁨으로 내자.
올바른 신약적 헌금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꾼들을 섬기며,
하나님 나라 사업에 힘쓰고, 마음을 다해 형제들을 돌아보자. 그게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이다.
주님,
제가 드리는 것이 인색함이나 억지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모든 것을 기쁨으로 드리겠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느 13:31) 아멘.
[출처] 고후 9:1-7 / 신약적 헌금관 - 십일조는 신약 성도들의 의무인가?|작성자 야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