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함양군(咸陽郡)
○ 남계서원(南溪書院)
- 지정번호 : 지방문화재 제91호(1974.2.6)
- 소 재 지 :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남계마을)
- 시 대 : 1552년(明宗7 壬子)創建 1566년(明宗21 丙寅)賜額.
- 제 향 : 정여창(鄭汝昌: 號一蠹 贈右議政 諡文獻 文廟配享).
강 익(姜 翼: 號介菴 昭格署參奉).
정 온(鄭 蘊: 號桐溪 贈領議政 諡文簡).
- 별 사 : 유호인(兪好仁: 號林溪 掌令).
정홍서(鄭弘緖).
조선 명종7년(1552)년에 개암 강익(姜翼)이 문헌공 정여창(鄭汝昌)을 기리기 위하여 창건하고 남계서원이라 칭하였는데 서원으로서는 백운동서원(소수서원 : 1543년 중종38년)에 이어 전국에서 두번째로 지은 건물로 명종21년(1566)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정유재란때 소실되어 그 후 나촌(九羅)에 세워져 광해군4년(1612)에 옛터인 현재의 자리에 중건하였다.
숙종3년(1677)에 문간공 동계 정온(鄭蘊)을 서편에 배향하고 숙종 15년(1689)에 개암 강익을 동편에 배향하였다.
또, 별사(別祠)에 뇌계 유호인(兪好仁)과 송난 정홍서(鄭弘緖)를 배향하였다가 고종 5년(1868)에 별사를 훼철하였다
이 서원에는 유생들을 수도케 한 어정오경등 서적이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다. 건물 구성은 제향공간으로 사당, 동무, 내삼문이 있고 강학공간으로 강당, 동재, 서재, 장판각, 풍영루 등이 있으며, 배치형식은 급한 경사지에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일축선 배치를 하고 있다.
양재는 경사지에 배치되어 1칸은 방, 1칸은 누마루형식의 대청으로 하였으며 동재를 양정재, 애연헌, 서재를 보인재, 영매헌이라 하며 전면에 현판이 걸려있다.
동재앞에는 연못이 있고 서재앞에는 신도비와 맞배지붕의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강당의 측면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판장벽과 판장문으로 된 우진각 지붕의 장판각이 배치되어 있다.
이 서원의 출입구인 풍영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5량구조 팔작지붕 겹처마이고 하부기둥은 8각형의 장대석 석주로 하였고 2층 누마루에 계자난간을 설치 하였다.
이 서원 입구에 홍살문이 있고 그 옆에 하마비 1기가 있다.
○ 청계서원(靑溪書院)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 56호(1983.8.6)
- 소 재 지 : 함양군 수동면 원평리(남계마을)
- 시 대 : 1915년(燕山乙卯)建精舍 乙卯年(1915年)重建書院.
- 제 향 : 김일손(金馹孫: 號濯纓 春秋館記事官 諡文愍).
조선 연산군때의 학자인 문민공 김일손(金馹孫) 선생은 경북 청도 사람이나 학자 일두 정여창 선생을 흠모하여 1495년 남계마을에 청계정사를 짓고 학문을 익혔는데 선생의 사후 황폐화 된 것을 조선 고종 광무10년(1905년)에 함양의 선비들이 선생의 인격을 추모하여 정사를 복원하고 유허비를 세우면서 청계서원이라 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하고 있다.
일두 정여창 선생은 김일손보다는 14살이나 많으나 관포지교로 사귀었는데 김일손은 정여창 선생 대하기를 스승과 같이 섬겼다라고 되어있으며 평소 정여창을 흠모하여 선생의 집이 훤히 보이는 이곳 수동면 남계마을에 청계정사를 짓고 학문을 배우면서 교류하였는데 이곳이 곧 청계서원의 전신인 것이다.
정면은 단층 팔작지붕으로 구경재와 동서재, 호남문과 솟을삼문등 부속건물이 있으며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다.
- 김일손
선생은 경북 청도군 사람으로 세조10년(1464년)에 태어 났으며 부친은 사헌부 집의를 지낸 맹(孟)이며 할아버지는 효자 김극일이다.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계운(季雲)이고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小微山人)이며 시호는 문민공(文愍公)이다. 어려서는 할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는데 1486년 생원시에 장원을 했으며 그 해 진사시에서 2등을 하였고 또 다시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등용된후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진주 교수(敎授)에 제수되자 곧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군 이서면으로 돌아가 운계정사를 짓고 후학을 열면서 학문에 몰두하였다.
이 시기에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정여창, 김굉필, 강혼등과 깊이 교류하였으며 정여창 선생을 함양까지 찾아와 16일간 지리산 등람을 하기도 하였다.
다시 벼슬에 나아가 홍문관 및 사간원등 주로 언관을 많이 지냈으며 이조정랑까지 올랐다.
춘추관에 있을때에는 전라도 관찰사 이극돈(李克敦)의 비행을 사초에 직필하고 뒤에 다시 이극돈등이 붕당을 만들어 분쟁을 일으킨다고 상소하여원한을 사기도 하였으며 문종의 비인 현덕왕후의 소릉(昭陵) 복위 상소를 하는 한편 기득권층인 훈구파의 부정 불의를 논하여 이들의 미움을 많이받았다.
성종실록을 편찬할시 스승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것이 이극돈을 통하여 연산군에게 알려진 것이 화근이 되어 집권층인훈구파의 유자광(柳子光)등에 의하여 무오사화가 발생되었는데 미움을 많이 받은 선생은 능지처참의 형을 받았다.
중종 반정으로 신원이 복원되었으며 중종때 홍문관 직제학에 추증되었고현종때 도승지, 순조때 이조판서로 각각 추증되었고 문민(文愍)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탁영집, 회로당기, 속두류록이 있으며 이 곳 함양의 청계서원과 목천의 도동서원 그리고 고향인 청도의 자계서원에 제향되고 있다. 또한 선생이 즐겨 타던 거문고(일명 탁영금)는 1988년 보물 제957호로 지정이 되어 있다
○ 송호서원(松湖書院)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209호(1994. 7. 4)
- 소 재 지 : 함양군 병곡면 송평리
- 시 대 : 1830년(純祖30 庚寅)創建
- 제 향 : 이지활(李智活: 號 고은)
이 어(이 어: 한남군)
이지번(李之蕃: 號 송계)
순조 29년(1829)에 경상도 선비들이 모여 고은 이지활(李智活) 선생을 제향하지 않는 것은 선비들의 수치라 하여 뜻을 모아서 순조30년(1830)에 건립하고 위패를 봉안하고 순조32년(1832)에 한남군 정도공 이어(이어)와 송계 이지번(李之蕃)을 추가로 모셨다.
고종5년(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는데 1914년 유허비를 세우고 1915년부터 단을 만들어 제향을 하여왔으며 1936년 다시 복원하면서 3분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건물은 목조 기와로 된 건물로서 경앙사, 승사문, 서원, 집의재, 거경재, 정용문의 6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 이지활
이조판서를 지낸 비 의 이들로 세종때(1434년) 태어 났으며 자는 망기(忘紀), 호는 고은(孤隱)이며 본관은 성주이고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8세에 추천에 의하여 운봉 현감이 되었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이 발생하자 관직을 버리고 거창 가조면의 박유산으로 들어가 망월정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다가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산꼭대기에 올라가 술을 마시고 매일 통곡을 하다가 죽었다.
정조24년(1800년) 유생들의 상소로 충효의 정려가 내려지고 고종28년(1891년) 이조판서에 추정되었으며 1933년 숙모전에 제향되었다.
- 이지번
자는 성중(盛中), 호는 송계로, 현감을 지낸 문현(文賢)의 아들이며 고은 이지활의 손자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정진, 당대의 명사인 표연말(表沿沫)․유호인(兪好仁)․최한후(崔漢侯)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성종23년(1492년) 추천에 의하여 무장 현감에 부임, 선정을 베풀어 수안 군수로 승진했으나, 연산군이 즉위하여 무오사화가 일어나는 등 정국이 혼미하자 고향인 함양으로 돌아와 영귀정을 세우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 황암사(黃巖祠)
- 소 재 지 :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 시 대 : 1714년(肅宗40 乙未)創建 1717년(肅宗43 丁酉)賜額
- 제 향 : 곽 준(郭 준: 號存齋 贈吏判 諡忠烈).
조종도(趙宗道: 號大笑軒 郡守 贈吏判 諡忠毅).
- 別 祠 : 1715년(肅宗41 乙未)創建.
정 용(鄭 庸: 聞慶郡守).
유 개(劉 盖: 居昌座首).
丁酉再亂때 황석산성 殉國烈士
이곳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 때 황석산성을 지키기 위하여 왜적과 싸우다 순국한 호국선열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황석산성 전투는 정유년(1597)에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군 14만명중 우군 2만 7천 명이 8월 16일(음력)에 가또(加藤淸正), 구로다(黑田長政) 등의 지휘로 황석산성을 공격하면서 일어난 3일간(8월 16일~8월 18일)의 처절한 공방전이었다.
이때 안의현감 곽준(郭埈)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는 소수의 병력과 인근 7개 고을의 주민들을 모아 성을 지킬 것을 결의하고 관민남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조총으로 공격하는 왜군에 맞서 활과 창칼 혹은 투석전으로 대항하였다. 마지막에는 육박전으로 처절한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마침내 음력 8월 18일 황석산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전투에 참여한 주민 및 병사의 수(數)를 일부 사서(史書)에서는 500여명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의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수천(數千)에 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숙종(肅宗) 40년(1714)에 황석산 밑에 사당을 짓고 황암사(黃巖祠)라 사액(賜額)되어 당시 황석산성 싸움에서 순절한 모든 분들의 원혼(冤魂)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왔다. 일제강점기에 사당이 헐리고 추모행사 마저 중지 되어오던 중 1987년에 황석산성이 사적 제322호로 지정된 것을 계기로, 지방민의 정성을 모아 2001년에 호국의총(護國義塚)을 정화(淨化)하고 사당(祠堂)을 복원하여 순국선열(殉國先烈)들의 숭고한 호국정신을 이어받고자 한다.
○ 백연서원(栢淵書院)
- 소 재 지 :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 시 대 : 1670년(顯宗11 庚戌)創建.
- 제 향 : 최치원(崔致遠: 號孤雲 贈內史令 諡文昌侯 文廟配享).
김종직(金宗直: 號佔畢齋 刑判贈領議政 諡文忠).
함양읍 백연리에 있었고 문창후 최치원(崔致遠), 문간공 김종직(金宗直)의 사당이다. 현종 11년(1670)에 건립하였다. 고종5년(1868)에 철거하였다.
○ 구천서원(龜川書院)
- 소 재 지 : 함양군 수동면 효리
- 시 대 : 1701년(肅宗27 壬午)創建.
- 제 향 : 박맹지(朴孟智: 號 박맹지 執義).
양 관(梁 灌: 號 일로당 同敦寧).
강 한(姜 漢: 號 금재 縣監).
표연말(表沿沫: 號 남계 同成均).
양 희(梁 喜: 號 구졸암 大司諫).
하맹보(河孟寶: 號 우계 崙後孫 活子).
수동면 효리에 있었고 숙종27년(1701)에 창건하여 춘당 박맹지(朴孟智), 남계 표연말(表沿沫), 일로당 양관(梁灌), 금재 강한(姜漢), 구졸암 양희(梁喜), 우계 하맹보(河孟寶)를 배향하였다.
고종5년(1868)에 철거되었다. 지금은 그 후손들이 수계하여 제실과 비를 유허지에 세우고 예를 드리고 있으며 1984년에 복원하였다.
○ 화산서원(華山書院)
- 소 재 지 : 함양군 수동면 내동
- 시 대 : 年代 未詳
- 제 향 : 임대동(林大仝: 號 회헌)
조선 성종5년 현감을 지낸 회헌 임대동(林大仝)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 당주서원(당州書院)
- 소 재 지 : 함양군 지곡면 공배리
- 시 대 : 1581년(宣祖14 辛巳)創建 1660년(顯宗1 庚子)賜額.
- 제 향 : 노 진(盧 진: 號玉溪 吏判 諡文孝).
- 별 사 : 정희보(鄭希輔: 號 당곡)
문효공 노진의 사당으로 선조14년(1581)에 창건하고 현종 원년(1660)에 선액하였으며 별사에는 당곡 정희보(鄭希輔)를 배향하였다.
고종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철폐하였고 지금은 그 터에 위당 정인보가 글을 지은 유허비만 서있다
○ 정산서원(井山書院)
- 소 재 지 : 함양군 지곡면 정취리
- 시 대 : 年代 未詳
- 제 향 : 허 주(許 周: 諡 간숙)
허 목(許 穆: 諡 문정)
허방우(許方佑: 號 돈남)
허원식(許元식: 號 삼원)
간숙공 허주(許周), 문정공 허목(許穆), 돈남 허방우(許方佑), 삼원 허원식(許元식)을 연향하였다.
○ 도곡서원(道谷書院)
- 소 재 지 :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
- 시 대 : 1701년(肅宗27 辛巳)創建.
- 제 향 : 조승숙(趙承肅: 號德谷 高麗縣監 諡文敬).
정복주(鄭復周: 號 죽당 高麗判典農寺事).
노숙동(盧叔同: 號松齋 司諫院知事 淸白吏).
노우명(盧友明: 號 신고당 叅奉 贈吏判).
노사예(盧士豫: 號 홍와)
정수민(鄭秀民: 號 춘수당)
숙종 27년(1701)에 세우고 덕곡 조승숙(趙承肅),죽당 정복주(鄭復周), 송제 노숙동(盧叔仝), 신고당 노우명(盧友明), 홍와 노사예(盧士豫), 춘수당 정수민(鄭秀民)을 배향하였다
고종5년(1868)에 철거하였고 지금은 입판의 매안소(埋安所)에 단을 만들고 예를 올리고 있다
○ 용문서원(龍門書院)
- 소 재 지 : 경남 함양군 안의면 봉산리
- 시 대 : 1583년(宣祖16 癸未)創建 1662년(顯宗3 壬寅)賜額.
- 제 향 : 정여창(鄭汝昌: 號一蠹 縣監 贈右議政 諡文獻 文廟配享).
임 훈(林 薰: 號葛川 判決事).
임 운(任 芸: 薰弟 號瞻慕堂 叅奉).
정 온(鄭 蘊: 號桐溪 吏叅 贈領議政 諡文簡).
성종25년(1494)에 문헌공 정여창(鄭汝昌)이 안의 현감 5년간에 학교를 일으키고 인정을 베풀어 민심이 선생을 추모하여 세웠다.
○ 역천서원(嶧川書院)
- 소 재 지 : 경남 함양군 안의면
- 시 대 : 1635년(仁祖13 乙亥)創建
- 제 향 : 임득번(林得蕃: 進士).
정유명(鄭惟明: 進士 贈吏叅)
○ 성천서원(星川書院)
- 소 재 지 : 경남 함양군 안의면
- 시 대 : 1703년(肅宗29 癸未)創建
- 제 향 : 송준길(宋浚吉: 號同春堂 左參贊 贈領議政 諡文正 文廟配享).
송준길 (宋浚吉)
1606∼1672(선조 39∼현종 13)
조선 후기 문신·학자.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본관은 은진(恩津). 어려서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된 뒤 세마(洗馬)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학업을 닦았다. 서인(西人) 중 청서파(淸西派)였던 그는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집의(執義)로 기용되어 인조 말부터 권세를 잡고 있던 공서파(功西派) 김자점(金自點)을 탄핵, 파면시키도록 하여 청서파가 집권하도록 하였다.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김자점이 청(淸)나라에 밀고함으로써 좌절되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여러 번 임관되었으나 계속 사퇴하다가 1659년 병조판서가 되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였다.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과 함께 남인(南人) 윤휴·윤선도(尹善道) 등의 3년제를 반대하여 기년제를 주장, 논란 끝에 승리하고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1665년 원자보양(元子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상소로 사퇴하였다. 뒤에 좌참찬 겸 좨주·찬선(贊善)에 이르렀다. 송시열과 학문적 경향이 같았고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문묘(文廟)를 비롯하여 충현서원(忠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
○ 귀주사우(龜洲祠宇)
- 소 재 지 : 경남 함양군 안의면
- 시 대 : 1694년(肅宗20 甲戌)創建.
- 제 향 : 신 권(愼 權: 宣敎郞).
성팽년(成彭年: 敎官 贈持平).
○ 모리영당(某里影堂)
- 소 재 지 : 경남 함양군 안의면
- 시 대 : 1654년(孝宗5 甲午)創建.
- 제 향 : 정 온(鄭 蘊: 號桐溪 吏叅 贈領議政 諡文簡).
정온 (鄭蘊)
1569∼1641(선조 2∼인조 19)
조선 중기 문신.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고고자(鼓鼓子). 본관은 초계(草溪). 정구(鄭逑)를 사숙하고 정인홍(鄭仁弘)을 사사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진사로서 별시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614년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직시, 영창대군을 살해한 강화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의 처벌을 주장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생활 10년 동안 《덕변록(德辨錄)》 등을 지어 반관자성(反觀自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 석방되어 헌납·대사간·부제학 등을 역임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이조참판으로서 조선과 명(明)나라의 의리를 내세워 척화(斥和)를 주장하였다. 항복이 결정되자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후 관직을 단념,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갔다. 조식(曺植)의 학풍을 이어받아 강개(慷慨)한 처신으로 사림의 추앙을 받았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광주(廣州)의 현절사, 제주의 귤림서원, 함양(咸陽)의 남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
○ 서산서원(西山書院)
- 소 재 지 : 경남 함양군 안의면
- 시 대 : 1841년(憲宗7 辛丑)創建.
- 제 향 : 전오륜(全五倫: 杜門賢)
전오륜 (全五倫)
고려 말기 문신. 호는 채미헌(採薇軒). 본관은 정선(旌善). 1391년(공양왕 3) 우상시(右常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1392년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으나 조선 태조에 의해 본향안치(本鄕安置)의 처벌을 받았다. 뒤에 풀려나 서운산(瑞雲山)에 은거하였다. 안의(安義)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첫댓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 하여 =백연서원 란 : 문간공 김종직(金宗直)의 사당이다==>文忠公 金宗直이 아닐까요
숙영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文忠公" 이 맞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