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의 운전대'를 놓는 법
파도는 높이 솟구쳤다가 산산이 부서지고 결국 사라진다.
파도의 운명이다.
그래서 파도는 늘 두렵다. 하지만
그런 파도 안에도 바다가 있다.
파도의 속성과 바다의 속성은 하나다.
부서짐을 두려워하던 파도가 그 사실을 깨우치면 달라진다. 그 순간
모든 두려움이 소멸한다.
파도가 아무리 산산이 부서져도 자신이 바다임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도 그런 바다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예수가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로 다가오자,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예수를 향해 걸아갔다.
물 위를 걸어서 말이다. 그러던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왜 다시 빠졌을까
그런데 파도는 바다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가 부른다. 다시 말해 ‘신의 속성’이 부른다.
우리 안의 ‘바다’가 우리를 부른다.
“나다! 나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내가 바로 네 안의 바다다.” 그렇게 우리를 부른다.
그래도 우리는 바다를 알아보지 못한다.
예수를 알아보지 못한다.
내 안에 있는 ‘신의 속성’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소리친다.
“유령이다. 유령이 나타났다. 유령이 나타났어!” 그렇게 비명을 지른다.
20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예수는 지금도 말한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르코(마가) 복음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6장 51절)
왜 바람이 멎었을까.
파도가 바다를 만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사막 위에 세운 나라다.
삭막한 땅에서 갈릴리 호수 일대는 푸르디푸르다.
물도 많고, 풀도 많고, 나무도 많다.
위의 사진은 옛그림으로 남아있는 갈릴리 호수의 모습이다. [중앙포토]
신약성서 4복음서 중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마르코(마가) 복음서(기원후 70년 전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에서는 여기서 이야기가 멈춘다.
예수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멎었고,
제자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그날 낮에 있었던 ‘오병이어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져 있었다고 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마르코 복음서보다 10년 정도 후대에 작성됐다는 마태오(마태) 복음서는 다르다.
예수가 배에 오르기 전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름 아닌 ‘물 위를 걷는 베드로’다.
산에서 기도를 마친 예수는 새벽녘에 제자들에게 갔다.
배가 떠난 뒤였다.
예수는 호수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갔다.
유령인 줄 알고 놀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는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오 복음서 14장 28절)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오너라.”
베드로는 배에서 내렸다.
물 위로 한 발, 또 한 발 뗐다.
놀랍게도 베드로는 물 위를 걸었다.
그는 예수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강풍(strong wind)’이 불었다.
강풍이 부는 것을 보자 베드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러자 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궁금하다.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물에 빠진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사람들은 쉽게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간다.
그게 물 위를 걷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그게 물에 빠지는 것이다.
그러니 믿어야 한다.
믿지 않는 자에게는 멸망과 죽음이 있을 뿐이다.” 이처럼 단순화한다.
성경을 이렇게만 읽으면 ‘물 위를 걷는 베드로’에 담긴 영성의 울림을 맛볼 수가 없다.
베드로가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라고 청하자
예수는 “오너라.”라고 말했다.
성경에는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으며 예수에게 나아갔다
(descending from the ship, Peter walks on the waters, to come to Jesus).”라고 기록되어 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렸다.
‘에고가 운전하는 배’에서 내렸다.
만약 베드로가 여전히 ‘에고의 운전대’를 붙잡고 있었다면
배에서 내릴 수 있었을까.
물 위에 발을 딛는 순간 빠져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갈릴래아 호수의 바람 속에서 나는 이 대목을 안고 눈을 감았다.
베드로는 먼저 ‘에고의 배’에서 내렸다.
자신의 고집과 집착에서 내려왔다.
그렇게 ‘나의 눈, 나의 관점’에서 내려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나의 눈’에서 내려올 때 물 위를 걷게 된다.
왜 그럴까. 에고가 만든 잣대와 틀에 스스로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물 위를 걸으며 우리는 예수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
그런데 이상하다.
베드로는 다시 물에 빠지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마태오 복음서에 그 이유가 나와 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 있을 때 강풍이 몰아쳤다.
복음서에는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고 나와 있다.
‘휘이익!’ 하는 돌풍 소리에 베드로는 덜컥 겁이 났다.
죽을까 봐 두려워져 얼른 ‘에고의 운전대’를 다시 잡았다.
갈릴리 호수에는 지금도 간혹 돌풍이 분다.
그때는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배들도 모두 포구로 돌아온다. [중앙포토]
그 순간 베드로는 물에 쑥 빠져들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주님, 저를 구해주십시오.”라고 소리쳤다.
예수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마태오 복음서 14장 31절)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에고의 배’에서 내려온다.
그때 비로소 ‘에고의 운전대’를 놓게 된다.
그다음에는 어찌 될까. 저절로 흐른다.
사람 속으로, 자연 속으로, 우주 속으로 저절로 흘러간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말이다.
그렇게 물 위를 걷게 된다.
사람들은 따진다.
예수가 물 위를 걸은 것이 사실일까 아니면 비유일까.
거기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지금도 ‘물 위를 걷는 예수의 이적’은 논란이 되기도 한다.
물 위를 걷는 예수 일화는 단순한 기적 이야기가 아니다.
거기에는 인생이라는 길을 가면서 물 속에 빠지지 않고,
물 위를 걷듯이 갈 수 있게 하는 통찰력이 녹아 있다. [중앙포토]
나도 궁금한 적이 있었다.
왜 하필 물 위를 걸었을까.
눈먼 사람을 고치고, 병든 사람을 낫게 하는 이적은
그래도 낯설지 않다. 어딘가 익숙한 일화다. 그런데
‘물 위를 걷는’ 장면은 상당히 독특하고 낯설다.
기적의 배경이 왜 하필 물 위일까. 왜 물 위를 걷는 사람일까.
나는 이스라엘 역사서를 읽다가 그 단초를 찾았다.
[출처:중앙일보]백성호:종교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