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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바 여왕과 솔로몬 / 열왕기상 10:1-13
제가 고등학생 때 전북대 국문과 교수의 아들이 같은 반에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말하기를 자기 아버지 서재에 가면 난이 있는데, 꽃에서 나는 향이 은은하고 향기롭다며 자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난을 본 적이 없지만, 난이란 것이 꽃의 향기가 그러게 좋은가 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갈보리 오기 전에 한암에 있었는데, 교회 뒷산이 매봉(610m)인데, 이곳에 난이 많다고 하여 가서 난을 좀 캐왔습니다. 교인들이 흔해 빠진 춘란을 뭐하러 캐왔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춘란이 꽃은 피었는데 향기라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2억 원대를 호가하는 춘란이 있다면 믿어지겠습니까? 들은 풍월로 비싼 난은 몇 백만 원, 또는 몇 천만 원하는 것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몇 천만 원을 호가하는 난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긴가민가했던 저로서는, 실제 2억 원을 호가하는 난이 있음을 TV에서 방송될 때,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난은 한국 춘란이라고 하는데, 잎의 색깔과 무늬에 따라서, 가격이 작게는 몇 천원부터 크게는 수억 원까지, 천차만별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도대체 풀잎 몇 개에 불과한 것이(난 애호가들이 들으면 무식한 말이라고 하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풀잎으로만 보이니까요) 2억 원이라는 것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TV에서 몇 만 원짜리 난과 비교하여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지만, 난을 좋아하지도 않고, 취미도 없는 저의 눈에는, 그저 똑같은 풀잎으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난 애호가인 그분들의 눈에는, 더할 수 없는 보물이었고, 2억 원의 가치가 있는 난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내세우는 보물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하찮은 풀과 다를 바 없이 보이는 것처럼, 내게 보물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보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결국 보물에 대한 시각은, 사람들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취미와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2억 원짜리 난은 난 애호가들에게는, 말 그대로 보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한번은 소장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저의 마음은 ‘만약 저 난이 내게 있다면, 당장 팔아서 딴것 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난 애호가들에게는 2억 원짜리 난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겠지만, 난에 관심이 없는 저에게는 2억이 아니라 10억짜리 난이라고 해도, 그것이 행복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행복이 아닌 것을 팔아서, 행복이 되는 것을 내게 두겠다는 생각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마다 보물은 다르지만, 보물을 추구하는 마음은 같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보물을 가지고 행복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곧 자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보물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공통적인 마음이며, 또한 인간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로 인해서, 예수님이 가져오신 보물을 전혀 알 수 없고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보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인한 구원입니다.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인한 구원은, 우리를 우리의 행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내 행함을 바라보면서, 낙심하고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공로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합니다. 그래서 보물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보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쁨, 행복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가져오신 보물이 보물로 여겨집니까? 예수님의 공로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내 마음이, 주님에 의해 변화되기를 소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입니다. 다윗이 다스렸던 시대는 주전 천 년경이었습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유대의 왕이 된 솔로몬은 40년간 유대를 통치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유대를 다스리던 때에, 유대의 서남쪽 아라비아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나라는 스바였습니다. 이 스바 나라를 다스리던 여왕은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있었습니다. 특히 솔로몬은 지혜가 특출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는 과연 솔로몬이 지혜로운 왕인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한 나라의 장래는 그 나라를 이끌어 가는, 통치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웃 나라의 사정을 잘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나라 조선 시대에도, 이웃나라 일본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때, 일본 열도에 “통신사”를 보내었습니다. 1590년에 일본 교토에 선조가 통신사를 보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할 의향이 있는 지 없는지를 탐지할,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파견되었습니다. 서인의 대표로 정사 황윤길과 동인의 대표로 부사 김성일을, 1590년 3월 6일에 일본으로 보내었습니다. 그들이 일본을 다녀와서 조정에 보고를 하게 되었는 데, 의견이 상반되었습니다. 황윤길과 허성은 “왜적들이 틀림없이 쳐들어 올 것이다”고 보고한데 반하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민심을 동요시킨다”는 의견을 내어 놓았습니다. 조정에서는 그 의견을 받아 들여서, 일본의 조선 침략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침략을 계획하고 있었고, 얼마 후에 공격을 해 왔습니다. 만일 이때 조선 왕조에서 올바른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임진왜란의 참화를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웃 나라에 대한 정보는 이렇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은 전쟁의 참화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일본으로 포로되어 끌려갔습니다.
이런 비극을 막기 위하여 나라들은, 이웃 나라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스바 여왕이 솔로몬이 통치하던 나라에 대하여,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설명되지 않고 있지만, 들려오는 소문대로 과연 솔로몬 왕이 지혜가 특출한 왕인지, 그를 상대하여 어떤 외교적인 관계를 설정해야 할 것인지, 여러가지 이유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단순히 호기심 때문에, 그 많은 선물과 사람들을 데리고 찾아왔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솔로몬왕의 지혜나 부강함이 자신의 나라보다 승하다면, 감히 그 나라에 대하여 함부로 도전하지 말아야 할 나라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소문만 무성한 것이라면, 그를 무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성을 듣고, 어려운 문제로 그를 시험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2-3절은 스바 여왕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모두 말하고, 솔로몬은 그 말에 대해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왕궁과 성전의 규모와, 상의 식물과 신하들 등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스바 여왕이 얼마나 놀랐는가는 6-7절의 말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6-7절 “왕께 말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친히 본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내가 들은 소문보다 더하도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면, 스바 여왕이 단지 솔로몬의 지혜와, 그가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에 대해서만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8-9절의 내용을 보면, 이방 여인에게서는 생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8-9절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하들이여, 항상 당신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왕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원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으로 삼아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곧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한 능력을 칭찬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지혜를 주셔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솔로몬과 같은 왕을 두어서, 나라가 발전하게 된 것이 복이 아니라, 항상 솔로몬 앞에 서서, 솔로몬으로부터 지혜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작 이스라엘이 항상 솔로몬 앞에서, 지혜를 들을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여깁니까? 그리고 솔로몬 역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송축하는가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스바 여왕의 입장이었다면, 솔로몬이 누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복되다고 했을 것이고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솔로몬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을 항상 세상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솔로몬과 같은 사람이 부럽게 보일 뿐입니다. 솔로몬이 누리고 있는 것을 누렸으면 하는 소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스바 여왕은 솔로몬 앞에 서서, 지혜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이스라엘이 부러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게 하신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마 12:4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혜의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지혜에 대해 무관심한 세상을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소유한다고 해도,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2억 짜리 난을 소유하고, 그것으로 행복을 맛본다고 해도,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 마지막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멸망이라는 말 자체를 우습게 여깁니다. 하지만 지옥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나사로를 자기 형제에게 보내서 지옥의 실상을 증거 하여, 자신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멸망이라는 말에 마음이 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살았을 때 좋은 것만 받기를 원했던 것에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세상에서 좋은 것만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좋은 것이 주어짐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어떤 행복을 누린다고 해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결국 멸망으로 마치는 인생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보다 크신 분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지혜를 구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죄 받을 이 세대의 실상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거부하고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은혜와는, 상관없는 자로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곧 인생의 비참함이라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다고 해도, 전혀 고통스러운 것도 없고, 세상일에 방해되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서도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출하신 은혜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다만 솔로몬이 누렸던 좋은 것들이, 자신에게도 조금이나마 주어지기를 고대하면서, 예수님을 부를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복됨을 알지 못하게 되고,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사랑에 대해서도, 무지할 뿐입니다. 내가 달라지기를 원하기보다는 내 환경이 달라지기를 원할 뿐입니다. 환경만 달라지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대에 오직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 온 스바 여왕이, 이 세대를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스바 여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의인이기에, 달라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이 달라져야 하고, 고침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도로, 이미 고침 받은 사람으로, 예수님을 아는 자로, 복음을 아는 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고침 받고 달라지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타인을 고치고 달라지게 하려고, 달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고침 받고, 달라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기에, 말씀을 듣는 자의 복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2:39-40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동안 땅속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요나의 생각에 니느웨는 구원과는 거리가 먼, 악한 이방민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곧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도 역시 고침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요나에게 알게 하신 것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힌, 죽음의 경험이었습니다. 곧 자신도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알게 하신 것이, 요나의 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흘을 땅 속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땅에 묻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생명과 성령의 법에 있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야 말로,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지혜가 미련하게 보이기에, 결국 예수님에게서 자기 행복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바 여왕이 정죄하는 이 세대의 실상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향해 정죄하는 자로 세워져 있습니다. 성도가 완벽하기에, 정죄하는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야 할 자라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성도라는 뜻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자리로 내려가 보십시오. 우리를 구출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나는 복되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든 성경은 예수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주인공은, 이 땅에 구속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의 솔로몬 왕과 스바 여왕의 사건도, 사실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곧 본문의 솔로몬이 예수님을 예표한다면, 스바 여왕의 모습은 예수님께 나아와 마음에 있는 것을 모두 토로하며, 예수님 앞에 부복하는 성도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와, 자신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아뢰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슬픔과 기쁨, 성공과 실패, 그리고 미래의 꿈에 대하여, 예수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십자가 희생이 얼마나 고귀하며, 그가 흘린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갈보리에서 나타난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너비와 높이와 길이를 측량해 본 경험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헌신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 동안의 교회 생활 가운데 허리가 휠 정도로, 주님께 내가 가진 시간이나 물질을 드려본 적이 있습니까? 아라비아에서 2,000km 이상의 먼 거리까지 왕을 찾아온 스바 여왕의 열심을 가지고, 우리 모두 예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께 헌신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저희들이 지은 죄를 다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용서받은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다시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 시간 기도 드리오니 이제 온전히 용서받는 사람이 되어, 우리 또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이야기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이 얼마나 고귀하며, 그가 흘린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골고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너비와 높이와 길이를 가슴에 담게 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격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헌신하게 하옵소서.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은 즐거워하면서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예수 이름을 시인하는 것은,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데는, 한없이 뒤로 물러섰습니다. 이제 기도 드리오니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바로 서게 하여 주시고, 부활의 생명을 받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