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바로읽기13-지안스님
××××××××××××××××××××××××××××××××
13. 경을 수지하는 방법
如法受持分 제13
그때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경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며
저희들이
어떻게 받들어 지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경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이니,
이 제목으로
너희들은 받들어 지녀야 한다.
그것은 수보리여!
여래는 반야바라밀을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설하였으므로
반야바라밀이라 말한 까닭이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는가?”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설하신 법이 없습니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삼천대천세계를 이루고 있는
티끌이 많다고 하겠는가?”
수보리가 대답하였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여!
여래는 티끌들을
티끌이 아니라고 설하였으므로
티끌이라 말한다.
여래는 세계를
세계가 아니라고 설하였으므로
세계라고 말한다.
수보리여!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고 볼 수 있는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여래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는
서른두 가지 신체적 특징은
신체적 특징이 아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여!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목숨을
보시한다고 하자.
또 어떤 사람이
이 경의 사구게만이라도 받고 지니고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해 준다고 하자.
그러면 이 복이
저 복보다 더욱 많으리라.”
××××××××××××××××××××××××××××××××
◎ 해설 :
부처님의 가르침을
여법하게 수지한다는 것은
정법(正法)을 바로 실천한다는 것이다.
수보리가 경의 이름을 물으매
『금강반야바라밀』이라 일러 주고는
다시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고 하였다.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닌
반야바라밀경을 잘 받들어 지니라는
부처님의 분부인 것이다.
일본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스즈끼다이세쯔(鈴木大拙)는
『금강경』의 사상(思想)을
즉비사상(卽非思想)이라고 표현하였다.
‘무엇이 무엇이 아니고,
이름이 무엇이다.’는 논리(論理) 는
금강경 전문에 걸쳐 여러 차례 나온다.
‘중생이 중생이 아니라
이름이 중생’이라는 등의 표현이
곧 개체적 사물의 이름을 들어 놓고
그것을 부정해 버리는 논리이다.
이를 ‘즉비사상’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는 역시
겉으로 나타나는 상(相)을 부정하는 말로
사물에 대한 관념적 고집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공한 것일 뿐,
어느 것도 무엇이라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때문에 경도
경이 아니라는 말은 당연한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은
단순한 부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이 아니다.
또한 지식의 내용도 아니다.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낳는 모체가 되는 경으로
반야의 당체를 가리킨 것이다.
금강과 같이 견고하여
번뇌를 끊고
무명의 어리석음을 부수는
지혜덩어리가 바로 경이다.
이것은 모든 관념과
지식의 경계를 초월해 있는
절대적인 것으로
무분별지(無分別智)라 말하기도 한다.
누구에게나
본래 갖추어져 있는 각성(覺性)으로
일체의 상을 여읜 공적(空寂)한 것이다..
모든 법이 공하다면
모양을 드러낼 수 없는 것이고
또 공한 법이 이름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수보리는
경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부처님은
금강반야바라밀이란 이름으로
받들어 지니라 하시면서도
이름이 이름이 아니기 때문에
이름이라는 말씀을 하시며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라 하셨다.
또 먼지 티끌이
먼지 티끌이 아니고,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는 말씀도
세계를 구성하는 먼지 티끌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땅덩어리가
공의 이치로 보면
부정되어져
한 낱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름이란
사람이 쓰는 언어를 통하여
방편으로 붙인 것이므로 모두가 가명이다.
진리의 본체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사실인즉 소용없는 일이다.
말을 떠나 있는 자리를
말로써 나타내는 것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
그러나 부득이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하여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름을 붙인다.
그래서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진여를 말을 떠난
이언진여(離言眞如)와
말을 의지하는
의언진여(依言眞如)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모든 사물의 진상(眞相)은
감각적인 모양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부정하고,
비어 공(空)해진 모양을 초월한 실상을
분별을 떠난 무분별의 세계에서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하는 것이
금강경 설법의 중심 요지이다.
법을 설해도
설한 바가 없다는 말씀은
오히려
부처님의 설법의 참뜻을 더욱 높여
법문의 수승함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야기]14
하늘이 언제나 파란 것은 아니다.
인연에 의해 일어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중생들의 업식(業識)에 의해 인식될 때는
어떤 고정된 관념이 생긴다.
그러나 이 고정된 관념이라는 것은
기실 순간의 찰나적인 상황설명일 뿐이다.
다시 말해
그때의 전제된 조건에 맞춰
상황을 서술할 뿐이라는 것이다.
앞에서도 예를 들어 설명한 바와 같이
가령 하늘이 파랗다고 묘사했을 때
반드시 숨어 있는
어떤 전제된 조건이 있는 것이다.
우선 날씨가 청명할 때의 하늘색인 것이고
또 어두운 밤의 시간이 아닌
낮의 시간일 때이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의 하늘이 아닌 것이다.
물론 황혼이
물들었을 때의 하늘도 파랗지 않다.
따라서 상(相) 곧 상태를 떠나서는,
다시 말해
상황의 조건들을 전제하지 않을 때는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서술 불가능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명상(名相)을 통해 만들어진
모든 관념들은 허구적인 생각일 뿐인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이름 붙였다 해서
참된 이름이 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거짓된 가명에 불과하므로
‘무엇이,
무엇이 아니라
이름이 무엇이다.’는
『금강경』특유의 말이
거듭 설해져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