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사랑을 더럽히는 온갖 것들에서 마음을 지키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산상 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깨끗한 마음은 욕심 없는 마음, 때 묻지 않은 마음, 소박한 마음, 사랑할 줄 아는 마음, 이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3항) ‘깨끗하다’는 서술어는 ‘욕심 없다’는, ‘때 묻지 않다’는, ‘소박하다’는, ‘사랑할 줄 안다’는 서술어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동어 반복적 의미 설명은 단어가 지닌 뜻을 조금 더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동어 반복적 설명은 어떤 것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보다는 추상적인 이해에 머물게 하는 위험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지?, 욕심 없는 마음이라는 것이 정말 무엇을 뜻하는 것이지?, 마음이 때 묻지 않았다는 것이 뭘 뜻하지?, 마음이 소박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정말 무엇을 뜻하지?,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라는 것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지? 라고 질문을 던지면 여전히 무언가 애매모호한 느낌입니다. ‘깨끗하다’는 서술어를 ‘소박하다’, ‘욕심 없다’, ‘때 묻지 않다’, ‘사랑할 줄 안다’는 비슷한 서술어로 그저 바꿔서 반복적으로 설명한 것뿐입니다. 동어 반복적 설명의 한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깨끗한 마음이란?
성경적 맥락에서 깨끗한 마음이란, 우리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네시는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호세 2,16 참조)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법을 간직하고 새기는 일입니다.(예레 31,33 참조)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 36,26)는 성경 말씀처럼, 새 마음과 새 영으로 사는 것입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3항)
물론 여기서 또 구체적인 질문들을 계속해서 던질 수 있습니다. 과연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하느님의 법을 마음을 새기고, 새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이 시대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질문 말입니다.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인다는 것은 성경을 자주 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기도와 묵상에 몰입한다는 뜻인지, 교회의 규범과 가르침에 순종한다는 것인지, 하느님의 법을 마음에 새긴다는 것이 성경의 문자적 가르침을 교조적으로 준수하는 것인지, 교회법적 규정과 법규를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이념으로 수용하는 것인지, 복음서가 선포하는 예수님이 지니셨던 마음과 태도를 본받는 것인지. 이 시대에 새 마음 새 영으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지. 이처럼 다양한 관점과 각도에서 질문을 계속 던질 때 우리는 깨끗한 마음이 신앙적인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조금씩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깨끗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마음을 더럽히는 온갖 것들에서 마음을 지켜내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잠언 4,23) 거짓으로 더럽혀진 것은 그 무엇도 주님 보시기에 참된 가치를 지니지 못합니다. 주님께서는 ‘거짓을 피해 가고 미련한 생각을 꺼려 떠나가 버리십니다.’(지혜 1,5)”(‘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4항)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거짓과 미련한 생각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무엇이 거짓이고 미련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다시 질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함부로 참과 거짓을 속단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무엇이 현명한 생각이고 무엇이 미련한 생각인지 섬세하게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타인과 세상의 문제에 있어서 참과 거짓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를 우리는 살아갑니다. 사람의 위선과 사회의 구조적 은폐와 모순이 참과 거짓을 쉽게 판별하기 어렵게 합니다. 하지만 자신 안의 참과 거짓은 스스로 정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래도 조금은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자신 안의 참과 거짓은 자기 성찰과 자기반성의 문제입니다. 자기 성찰과 자기반성이 결여된 사람은 자신 안의 참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자기 성찰과 자기반성의 태도가 몸에 밴 사람은 자기 안에서 참과 거짓을, 비록 완벽하지는 않지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핵심은 자기 성찰과 자기반성입니다. 마음을 지킨다는 것은 끊임없이 주님 앞에서 자기를 성찰하고 자신을 반성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허한 말 vs. 진정한 원의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신앙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신앙은 단순한 믿음(신념)이 아니라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고 선언하는 일은 쉽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말로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인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으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인을 찾기란 참 어렵습니다. ‘마음으로’ 즉, “공허한 말이 아닌 진정한 원의”(‘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6항)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신앙인의 고백이 단순히 공허한 말인지 아니면 진정한 원의인지는 그(녀)의 행위를 통해 판단할 수 있습니다. 물론 행위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똑같은 행위처럼 보여도 속내에는 다른 원의들에 의해 발생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마음과 원의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말과 행위를 통해 추론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뿐만 아니라 숨겨진 말과 행동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타인의 마음을 판단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을 판단해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 그저 공허한 말에 불과한 것이 아닌지 아니면 내 안의 진정한 원의인지, 자기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해보면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참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깊은 바람과 결심은 이 마음속 원의에서 생겨”(85항)나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
“사랑의 행동 없이는 분명 사랑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참 행복은, 주님께서 우리 형제자매들에 대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을 우리에게 기대하신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5항) 그리스도교 사랑은 그저 말과 행동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으로서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을 위한 사랑의 행위를 실천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헌신으로서의 사랑입니다. 마음이 없는 행위는 그저 죽은 행위일 뿐입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의 헌신만이 지속적일 수 있고 참된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참 변덕스럽습니다. 공부와 성찰과 일상적 수행을 통해서 끊임없이 마음을 수련시키고 깨끗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마음만이 말과 행동을 일치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만들고, 공부와 성찰과 수행을 통해 마음을 지켜나가며 깨끗하게 할 때, 우리는 거룩한 사람이 되어 갈 것이며, 분명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자비로운 마음으로 보고 행동하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자비의 하느님
“사랑”, “진리”, “정의” 등의 개념들은 신학 역사 속에서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 교회라는 주제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신학의 역사에 있어서 “자비”라는 개념이 두드러지게 부각되지는 않았습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사랑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 ‘진리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익숙하지만 ‘자비의 하느님’이라는 표현은 자주 고백되지 않았습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론과 인간론과 교회론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갖습니다.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의 모습에 대한 이해가 좌우됩니다. 신관의 차이는 인간관의 차이를 낳고 교회관의 차이를 낳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배제와 분노와 혐오와 폭력을 행사하는 종교인들은 과연 어떤 하느님을 믿는지 의문스러울 때가 자주 있습니다.
신학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자비 개념이 오래 동안 망각되어 온 이유는 형이상학적 신관과 현대 무신론의 도전 때문입니다. 형이상학적(존재론적) 신관은 하느님을 초월적 존재, 존재 그 자체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형이상학적 속성(무한성, 영원성, 무소부재, 전지전능)이 강조됩니다. 또한 하느님 완전성에 대한 강조는 하느님을 고통 받지 않는 분이며 피조물들의 고통에도 무감각한 분으로 묘사하는 경향을 드러냅니다.
한편으로 현대 무신론의 끈질긴 도전은 그리스도교의 신학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성찰을 할 여유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느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에 대응하기 위해 하느님 존재의 입증에만 매달렸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존재에만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에 하느님의 속성에 대해 성찰할 여유가 없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의 강조는 성경의 하느님에 대한 복원입니다.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강조는 철학자들의 신이 아닌 성경의 하느님, 역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성찰입니다. 인격신으로서의 하느님이 강조될 때 인격적 특성인 자비의 개념이 부각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 정의의 하느님, 진리의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무엇보다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자비의 교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취임 초부터 자비를 강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 우리의 삶을 위한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진리입니다”(2013년 4월17일 로마 주교좌 착좌미사 강론).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와 자비의 교회, 이 두 개념은 교황님의 핵심 교회관입니다. 교황님에게 있어서 중요한 복음적 태도는 겸손함과 온유함입니다. 가난과 연결되는 겸손함의 덕, 자비와 결부된 온유함의 덕이 강조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설명에 따르면, 예수님, 성모님, 요셉 성인, 이 세 분 모두 겸손함과 온유함의 덕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다정함이시고 사랑, 온유이신데 모든 의미의 이데올로기는 항상 딱딱합니다.”(공식 대담집, ‘나의 문은 항상 열려 있습니다’, p.129)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는 마리아 ‘방식’이 있습니다.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온유한 사랑의 혁명이 지닌 힘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겸손과 온유가 나약한 이들의 덕이 아니라 강한 이들의 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복음의 기쁨’, 288항)
“여기에서 저는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돌보고 보호하는 데에는 선함이 필요합니다. 여기에는 어떤 부드러움이 요구됩니다. 복음에서 요셉 성인은 강인하고 용감한 사람, 노동자로 나오지만 우리는 그의 마음에서 커다란 부드러움을 봅니다. 이는 약자의 덕이 아니라 강한 영의 표징이며, 관심, 연민, 타인에 대한 참다운 개방, 사랑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선함, 부드러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교황 즉위 미사 강론, 2013년 3월19일)
자비의 교회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조는 현실 교회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이 시대의 교회는 세상의 고통과 비참에 대해 조금 무관심한 모습으로 서있는 것 같고, 교회가 윤리적 · 교의적 문제에 대한 냉혹한 심판관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비에 대한 강조 안에는 어머니로서의 교회와 따뜻한 교회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습니다.
자비의 그리스도인 – 나눔, 헌신, 이해, 용서
올바른 신관, 올바른 교회관, 올바른 신앙관을 갖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은 무엇보다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자비의 하느님을 고백하고 믿고 따르는 교회와 신앙인은 그 자신이 자비의 태도와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합니다. “자비에는 두 측면이 있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하여 베풀고 도와주고 봉사하는 것뿐 아니라, 그들을 용서하고 이해하는 것 또한 여기에 포함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80항)
어쩌면 “베풀고 도와주고 봉사하는 것”은 그래도 조금 쉬운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이러한 자비의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레지오 단원으로 살아가는 이상 자선과 봉사는 몸에 밴 태도와 행동일 것입니다. 물론 시혜적 관점과 태도에서 베풀고 도와주고 봉사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자비란 단순한 베품과 봉사의 뜻이라기보다는 나눔과 헌신이라는 뜻이 더 정확한 이해일 것입니다. 내가 많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도 자비이지만, 내 것을 포기하고 나누는 것이 더 큰 자비일 것입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진정한 자비는 잉여의 물품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마저도 더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양보하고 나누는 행위입니다. 당연히 진정한 자비란 우월의식을 갖고 남을 도우고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적 친교의 마음과 태도로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용서를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실감합니다. 그저 추상적인 명사로서 용서를 쉽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용서가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도 우리는 잘 압니다.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어떤 불이익과 상처를 받았을 때, 말처럼 쉽게 용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 그 자체가 교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현대인들은 타인을 이해하기보다는 판단하고 심판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오늘의 종교인들이 하느님의 정의라는 명분을 내세우며 사람들을 단죄하고 심판하고 보복하는 모습을 뜻밖에도 자주 발견합니다. 슬픈 풍경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용서는 주님의 몫이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주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용서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향해야 할 것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보면 오히려 더 분노에 사로잡히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용서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 어리석음과 교만입니다. 용서는 주님의 몫입니다. 주님을 향할 때,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아주 조금 용서의 길에 들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과 일치하여 주님의 시선으로 사람들과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의 시선은 따뜻해지고 우리의 마음 안에는 이해와 용서의 미덕이 조금씩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이해의 마음과 태도로 다가갈 때 우리는 주님을 닮아 조금씩 거룩해질 것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시대
날은 덥고 코로나 사태는 여전히 수습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조금씩 지쳐가고 무감각해져 갑니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내 앞에서 벌어지는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습니다. 코로나 감염자가 세계적으로 천만 명이 넘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텔레비전 영상을 통해 시청하는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이 그저 숫자와 구경의 대상으로 비칠 뿐입니다. 인터넷을 통해 우리는 실시간으로 타지역의 감염 상황과 소식을 알게 되지만, 그것들은 그저 가상의(virtual) 일들로 여겨집니다. 즉, 구체적 실감으로 잘 다가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실상보다 영상과 가상에 더 익숙합니다. 실제 모습과 실제 상황들이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영상과 가상의 모습과 상황으로 변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일들에 생각보다 무관심하고 무감각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텔레비전과 인터넷 시대는 필연적으로 우리를 더 이기적인 존재로 만들고 있습니다.
감정과 욕망의 시대
사람은 생각하는(사유하는) 동물입니다. 역사 안에서 사람들은 오랫동안 생각과 사유를 강조해왔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시대는 달라졌습니다. “나도 감정이 있다 고로 나는 나다.” “나는 욕망한다 고로 무엇보다 내 욕망이 중요하다.”입니다. 생각과 사유보다 감정과 욕망을 중요시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생각과 사유보다 감정과 욕망은 더 충돌적이고 이기적인 경향을 지닙니다. 내 감정과 내 욕망이 중요합니다. 타인의 감정과 타인의 욕망은 고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경쟁과 충돌의 대상일 뿐입니다.
감정과 욕망은 본능적이고 충동적이고 일차적입니다. 생각과 사유는 시간의 여유가 필요하고 이차적입니다. 타인의 사정과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사유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현대의 문명은 점점 생각과 사유를 위한 시간 여유를 잘 허용하지 않습니다. 설혹 시간의 여유(여가 또는 휴가)가 주어진다 해도 사람들은 그 시간을 감정의 충족과 욕망의 쾌락을 위한 물질의 시간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여가 시간마저도 사유하고 성찰하는 정신의 시간으로 사용하기보다는 감정과 욕망을 향유하는 물질의 시간으로 사용합니다. 물론 감정을 공유하는 공감의 능력이 때때로 타인을 배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지만 감정의 변덕스러움은 금방 자기의 감정에만 충실하게 합니다. 감정과 욕망의 시대는 우리를 점점 더 이기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의로움에 대한 갈망
오늘의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는 텔레비전과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마저도 획일화하고 이기적 쾌락을 지향하는 모습으로 통제하고 조절합니다. 우리의 생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소중히 살피고, 우리의 욕망을 건강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 안에는 분노와 혐오의 감정과 물질과 쾌락의 욕망만 가득한 것 같습니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정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올바르고 건강한 욕망은 점점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오늘날 사회의 전체적 풍경은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에 “열렬히 정의를 바라고 의로움 갈망하는 사람들이”(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7항) 있을 것입니다. 세상 구석구석에는 정의를 지향하고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실, 교회와 신앙인은 무엇보다 의로움을 갈망하는 공동체와 사람이어야 합니다.
세상 속의 정의
오늘의 한국 사회와 정치의 장에서 자주 듣는 말이 정의와 공정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사회 안에서 정의와 공정이라는 말은 그 참뜻을 잃어버리고 그저 이데올로기적 선전구호처럼 여겨집니다. 모든 이의 정의가 아니라 자기들만의 정의, 모든 사람에 대한 공정이 아니라 자기들만을 위한 공정이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또 자본주의와 물질주의 사회 안에서 정의는 자주 왜곡되고 조작됩니다.
“세상의 정의는 가끔 사소한 이해관계로 훼손되거나 다양한 방식으로 조작되고는 합니다. 우리는 세상 정의가 얼마나 쉽게 부패의 수렁에 빠지는지,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다.’는 일상의 정치에 얼마나 쉽게 얽혀 드는지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거래가 됩니다.”(78항) 경쟁과 정쟁에서 이긴 사람들이 모든 것을 독식하고 있습니다. 이 승자 독식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참된 정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승자들의 대열에 편승하기를 선택합니다.”(78항) 소수의 승자가 많은 것을 누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밀려나고 배척되는 오늘의 사회 안에서 참된 정의를 실현하고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는 자주 목격합니다.
신앙의 정의
거룩함으로 불리움 받은 모든 신앙인은 하느님의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앙의 정의는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는 것입니다.(79항) “참된 정의는 사람들이 각자 내리는 결정에서 의로울 때에 그들 삶 안에서 이루어지고,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는 가운데 드러납니다.”(79항)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 정의란 개별적 차원에서 보면, 신앙인들이 각자의 삶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들이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또한 공동체적(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결국, 정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에서 행하는 선택과 결정이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주교님들이 교회와 사회 안에서 하는 선택과 결정들이 정말 의로운 것인지, 오늘날 본당 사제들이 본당에서 하는 선택과 결정들이 정말 의로운 것인지, 끊임없이 묻고 성찰해야 합니다. 모든 신앙인들이 자신들의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행하는 그 많은 선택과 결정들이 과연 하느님 뜻에 부합하는 의로운 모습인지, 끊임없이 묻고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행하는, 정치적 선택과 결정, 경제적 선택과 결정, 사회적 선택과 결정, 문화적 선택과 결정들이 정말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끝없이 질문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들이 이념과 배제의 방식으로, 자본주의적이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혐오와 차별의 방식으로, 소비주의적이고 쾌락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는지, 묻고 또 묻고, 성찰하고 또 성찰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저 종교의 영역에서만, 교회 안에서만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늘 성찰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와 신앙인들이 “가난한 이들과 약한 이들을 위한 공정을 추구”하고 있는지, 늘 살펴보아야 합니다.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기 어려운 세상과 시대를 살고 있다고, 혼자의 힘으로 감내하기는 너무 힘든 세속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변명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더 역설적으로, 의로움을 갈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 거룩한 일일 것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코로나 사태로 여전히 세상은 어수선합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를 물리친다 해도 또 다른 감염병이 다가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감염병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감염병과 함께 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의 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상황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청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특성은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대형 집회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대형화와 외적 성장을 추구해 왔던 교회들의 삶의 방식이 변할 것입니다. 미래의 신앙생활은 작은 공동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미국의 어느 신학자는 예견하고 있습니다.
즉, 가까운 이웃에 살며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끼리 작은 공동체를 형성하며 신앙생활 하는 방식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대형 집회를 형성하는 부흥회 형식의 신앙 모임은 아무래도 줄어들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에는 작은 모임들이 확산되어 좀 더 큰 모임으로 발전할 수는 있지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처음부터 대형 집회를 형성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교회의 작은 공동체 운동을 촉진시키는 역설적인 매개체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슬픈 일들에 응대하는 신앙의 방식
살다보면 많은 일들을 겪습니다. 기쁘고 행복한 일들도 있고 슬프고 고통스런 일들도 있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피하고 싶습니다. 자기 삶 안에 기쁨과 행복만 가득하기를 우리는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의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에게 운명적으로 다가온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을 우리 자신이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응대하는 방식을 우리는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자기 생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것들을 어떻게 응대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살면서 돌아보면, 우리 주변에 유난스레 고통스럽고 힘든 일들을 많이 겪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운 좋게도 평탄하고 기쁜 생을 보내기도 합니다. 물론 마냥 평탄하고 기쁜 생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큰 질병과 큰 고통 없이 평탄하게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생을 살아갑니다. 운명의 질곡 속에서 혹독함을 겪는 사람도 있고, 순탄하게 자기 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끔 우리 생의 운명은 차별적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거듭 강조합니다. 자신에게 왜 어떤 일들이 운명처럼 다가오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다가오는 일들을 어떻게 응대하는가 입니다.
가끔 신앙인들이 혼동스러워 합니다. 자기에게 다가온 고통스럽고 슬픈 일들이 혹시 하느님의 시험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범한 어떤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자연 재해와 커다란 질병의 성행이 인간의 잘못에 대한 하느님의 벌이라고 말하는 극단적인 종교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분명하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인과응보의 논리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꾸 원인과 결과의 인과율로 하느님의 섭리를 재단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의 섭리는 언제나 인간의 논리를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의 얄팍한 논리로 하느님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우리가 할 일은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 복음과 신앙의 방식으로, 즉 예수님의 태도와 방식으로 응대하는 일입니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행복선언 가운데, 역설적인 의미가 가장 잘 드러나는 선언입니다. 슬픔은 슬픔입니다. 슬픔이 기쁨일 수는 없습니다. 사실, “세속적인 사람은 가족이나 주변의 질병과 슬픔 같은 문제들을 외면하고 눈을 돌립니다. …. 세상은 고통스러운 상황을 무시하는 편을 택하고 이를 덮어 두거나 감추어 버립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5항) 하지만 신앙인은 다가온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슬픔을 외면하고 회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슬픔을 발생시킨 상황을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어디서든 십자가가 결코 없을 수 없”(75항)다는 것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슬픔을 수용한다는 것이 단순한 체념과 굴복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슬픔을 견뎌내고 극복하기 위해 슬픔을 정직하게 수용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값싼 동정과 거짓 위로를 구하지 않습니다. 참다운 위로는 언제나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이 슬픔 가운데 계신다는 것이 우리를 위로합니다. 슬픔은 슬픔만이 감싸 안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슬픔이 우리 생의 슬픔을 감싸 안고 위로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슬퍼하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신비를 깊이 깨달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퍼할 줄 아는 사람만이 십자가의 구원 능력을, 십자가의 그 깊은 위로를 맛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물을 존재하는 그대로 보고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은, 삶의 깊은 곳까지 다다를 수 있고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께 위로를 받습니다.”(76항)
슬픔의 연대만이 우리를 거룩함으로 이끌 것입니다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도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자기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것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사람의 아름다움과 거룩함은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어떻게 응대하고 있는가에 달려있는지도 모릅니다.
자기의 고통과 슬픔보다 먼저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헤아리고 공감하는 일은 분명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 생의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고통과 슬픔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깊이 깨닫는다면,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하고 연대할 줄 알게 될 것입니다. 슬픔을 정직하게 수용할 줄 알고, 그래서 예수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한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함께 나눌 용기를 낼 수 있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해 달아나지 않습니다.”(76항) 참 신앙인은 “고통을 겪는 이들을 도와주고 그 사람들의 슬픔을 이해하며 그들에게 위안을 줌으로써, 자기 삶의 의미를 찾”(76항)는 사람입니다.
슬픔만이 슬픔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슬픔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은, 즉 진정으로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슬픔을 수용(공감)할 수 있으며 함께 슬퍼할 수 있습니다. 슬픔의 연대는 깊고 큽니다. 슬픔의 연대만이 참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타인과 함께 아파하니 모든 거리감도 사라지게 됩니다.”(76항) 참다운 친밀성의 공동체는 오직 슬픔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대해 무관심하고 외면하는 사람은 십자가의 신비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마 12,15) 함께 울 줄 모르는 사람은 십자가의 신비를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역시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할 줄 아는 것이 곧 성덕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온유하고 겸손하게 응대하는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ing)라는 격리의 시간(a time of quarantine)이 꽤 길었습니다. 다시 성전에 모여 미사를 조심스럽게 거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은 4월24일에 쓰고 있습니다) 이 감염병의 파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여전히 예측이 어렵습니다. 그저 우리는 신앙생활이 예전의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자유롭고 편안한 마음으로 성당에 가서 형제자매들과 친교를 나누고, 공동체와 함께 하는 감사의 미사를 매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랄뿐입니다. 그런데 감염병을 물리치고 사회의 모든 것이 정상화되면 우리의 신앙생활도 예전처럼 그렇게 정상화(?) 될 것인지 살짝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코로나 시대에 우리 삶의 방식이 많이 바뀔 것이라고 학자들은 예견하고 있습니다. 교황청에서도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대비하는 위원회를 만들었다는 기사를 인터넷에서 읽었습니다. 코로나 사태 이후 사회의 모습과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지, 그리고 그 변화가 신앙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연구한다고 합니다. 교회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그저 예전의 모습과 방식을 고수하기만 한다면, 아마도 성당 안에서의 신앙생활은 위축되고 축소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위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당신의 교황직 수행에서 식별(discernment)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모든 신앙인은 식별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교회는 식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자주 강조합니다. 식별한다는 것은 시대의 징표를 읽고, 교회 자신의 모습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화와 선교를 지향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과 오늘의 한국 교회 역시 식별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의 현실과 징표들을 섬세하게 읽어내야 합니다. 우리들의 지난 신앙생활의 모습과 한국 사회 안에서의 교회의 지난 모습에 대해 반성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코로나 시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우리 신앙생활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 교회의 모습과 성당 안에서의 신앙생활이 어떤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새롭게 상상하고 새로운 전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일본에서 선교하고 있는 어느 메리놀 신부님은 한 칼럼에서 흥미 있는 지적을 합니다. 격리의 시간 동안 본당 미사와 모임이 취소되는, 신앙의 공백(?)을 경험한 신자들이 본당 미사가 재개되어 다시 돌아올 때, 그들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신자들의 모습이 코로나 사태 이전의 본당 생활의 성적표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코로나 사태 이전의 본당 미사와 본당 생활에서 진정한 신앙과 공동체 의식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면, 이 격리의 기간 동안의 공백이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우울한 진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코로나 이전 시대에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은 격리의 시간 동안 본당에 나오지 않는 것이 습관적으로 익숙해져서,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본당으로 돌아오지 않을 확률이 많다는 뜻입니다.
본당 안에서의 신앙생활과 본당 밖에서의 신앙생활이 언제나 연결되어 있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깨닫습니다. 참 신앙은 본당 안과 밖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참 신앙은 언제나 삶의 모든 자리에서 표현되는 태도로서 드러납니다. 사실, 신앙은 신념과 확신의 문제라기보다는 삶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신앙은 어떤 신념과 확신을 가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또 어떤 종교적 관행을 습관적으로 실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무엇보다 삶의 모든 자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태도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자주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강조하고 싶은 태도는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과 태도가 거룩함의 길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타인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는 이기적 자기중심주의입니다. 현대인은 자기표현을 선호하고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경쟁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데 열중하고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타인마저도 자신의 관점과 기준에서 판단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생각과 관습, 심지어 말과 옷차림으로 다른 이들을 끊임없이 판단합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71항)
솔직히 고백하면, 성직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이 식별과 판단을 잘 구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부터 저희들은 식별이라는 단어를 자주 듣고 또 스스로 사용합니다. 우리 성직자들은 식별이라는 이름으로 자꾸만 타인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식별은 복음과 신앙의 관점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는 일이고, 공동체와 자기 자신이 하느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하고 성찰하는 일입니다. 식별은 타인을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개념입니다. 식별의 행위 안에는 분석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는 행위가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적 맥락에서 식별은 하느님 앞에서 자신과 공동체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개별적 타자를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타인을 규정하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타인을 제멋대로 규정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 뿐입니다. 남을 규정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신앙인이 아닙니다.
타인에게 쉽게 화를 내고 타인의 허물에 대해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쓸모없는 불평에 힘을 낭비하고 우월감에 빠지는 사람은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72항) 자기 자신과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어떤 사람을 혐오하고 배척하는 사람은 참 신앙인이 아닙니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로 타인을 대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함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에서 드러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자비의 희년’에 그토록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무엇보다 사랑과 자비의 태도로 드러난다는 사실 말입니다.
온유는 나약함이 아니라 내적 청빈이며, 타인을 대하는 신앙인의 거룩한 방식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온유함을 자꾸만 나약함과 어리석음의 모습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74항) 단호하지 못한 유약함, 자기주장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온유함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앙적 의미에서 온유함은 인간적 힘과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신뢰와 희망을 두는 영적 겸손함과 가난함의 태도입니다.(74항) 온유하다는 것이 기질적으로 부드럽고 성격적으로 유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타고난 성격과 기질이 괄괄하고 강한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온유는 타고난 성격과 기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신앙적인 맥락에서 온유는 기질과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 겸손함으로 드러나는 태도입니다.
온유는 성격과 기질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것을 응대하는 신앙인의 방식의 문제입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어디서나 그 무엇을 대하든 항상 온유한 태도로 접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선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우리의 고유한 신앙과 확신을 수호해야 할 때도 우리는 ‘온유하게’ 해야만 합니다.”(73항) 온유는 삶의 모든 자리에서 신앙인이 지녀야 할 태도와 방식입니다. 우리는 온유함을 통해 거룩함으로 나아갑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마음이 가난한 것이 곧 거룩함입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온 세상이 난리입니다. 세계는 감염병이라는 난제 앞에서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모든 시대는 그 나름의 질문과 도전에 직면합니다. 지금의 시대가 가장 어려운 시대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21세기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갈라지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야기한 질문과 도전은 우리 삶의 방식에 대해, 종교와 신앙의 모습에 대해 다시 성찰해보기를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혼돈의 시기가 지나면, 망각의 습관에 빠져, 우리는 여전히 예전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혼란의 시간이 가져온 강렬한 기억은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사람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듭니다. 물리적 거리(사회적 거리)라는 말이 조금 무섭습니다. 타자와의 밀접한 접촉이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생각이 확산된다면, 그렇지 않아도 개인화되고 고립화된 현대의 삶 속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가 얼마나 멀어질 것인지. 배타와 배제, 혐오와 분노의 논리가 우리 사회에 더 많이 성행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일시적이지만 신자들과 함께하는 미사가 중단되었습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의 모든 활동마저도 중지되었습니다. 물론 이 시기가 지나면 다시 공동체가 함께 미사를 할 수 있을 것이고 본당에서의 활동들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와 함께 하는 미사와 본당 활동의 일시적 중단 앞에서, 우리는 지난 신앙생활을 잠시 반성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갖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우리 신앙생활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본당 밖에서의 신앙생활에 대한 토대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었다는 것을 절감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미사와 본당을 중심으로 한 활동이 맞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생활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전례 성사와 본당이라는 공간 중심의 신앙생활은 일상 안에서의 신앙생활과 항상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전례 성사로서의 미사와 삶의 성사로서의 미사는 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최후만찬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언제나 연결되어 있습니다. 미사의 은총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삶에서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의 제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보편 사제직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들은 세상 안에서 자신의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사회적 삶 속에서 자신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에 대한 성찰과 교육이 부족했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자기들이 선 자리에서 자율적이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을 키우는 일에 교회가 소홀했음을 반성합니다.
전례와 본당을 중심으로 한 신앙생활은 지나치게 성직자 의존적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신자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신자들의 신앙 근육과 면역력을 키우는 데에 교회가 조금 더 관심을 가졌었더라면, 공동체 미사 중단과 본당 공동체 생활의 일시적인 중지라는 어려움의 시기를 조금은 더 쉽게 건너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살짝 들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닮는 방식은 행복 선언 안에 담겨있습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단순히 미사와 본당 생활에만 충실한 것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미사의 은총을 통해, 공동체 생활이 주는 용기와 격려의 힘을 통해, 삶의 모든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 거룩함의 길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날마다 자신의 삶에서 스승님의 얼굴을 드러내도록 부름을 받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63항)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거룩해진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종교적 행위를 통해 도달하는 것이 아님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일상의 성인임을 분명하게 권고하고 있습니다.어떤 모습이 예수님을 닮는 것인지, 즉 어떤 모습이 거룩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에 비추어 하나의 제안을 하고 계십니다. “행복 선언은 그리스도인에게 신분증과” 같아서,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각자 저마다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63항) “‘행복한’ 또는 ‘복된’이라는 말은 ‘거룩한’이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64항)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복음 말씀은 “거룩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표현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는 강력한 선언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시적 감흥을 주지만, 이 세상의 통상적인 일처리 방식과 명확히 반대”되기 때문에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65항)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세 가지 맥락에서 성찰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당연히 물질적 가난을 의미합니다. 물질적인 욕심에서 벗어나 “단순하고 소박한 삶”(70항)을 사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카 12,16-21)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물질적 부가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압니다.(67항)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 안에서는 돈이 모든 것의 척도가 됩니다. 이 자본주의 시대에 물질적 자본은 핵심 요소입니다. 모두가 부자가 되고 싶은 세상에서 물질적 가난과 소박한 삶을 말한다는 것이 공허한 외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를 뒤흔들고 자극하며 우리 삶에 참변화를 요구할 수 있도록”(66항)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수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끈질기게 노력해야 하고, 하느님의 은총을 끊임없이 구해야 할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삶은, 우선 우리의 물질적 부를 향한 우리의 욕망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우리의 이기심과 나약함을 고백하면서 주님 은총의 힘을 구하는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겸손한 마음과 열린 마음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세속의 욕심과 욕망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과 우리 형제자매들을 향한 사랑을 담을 자리를, 또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누릴 자리를 남겨” 두는 일입니다.(68항) 물질적 부를 향한 탐욕, 자신만 성공하겠다는 공명심, 타인을 배제하고 배척하는 이기심, 기존의 생각과 규율에 사로잡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폐쇄적인 마음에 사로잡혀 있다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가난한 마음에 끊임없이 새롭게” 들어오시기 때문입니다.(68항)
세 번째 의미는 집착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치우치지 않는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69항) 살아가면서 우리는 편파적이 되거나 그 어떤 것에 집착하기 쉽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이러한 집착과 편파적인 것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물론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이 단순히 기계적인 중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에 대해, 즉 세상의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것들, 즉 물질과 권력과 명예와 지위와 인정욕망 등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결국, 거룩한 사람이란 물질적 가난과 소박한 삶을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겸손하고 열린 마음과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거룩한 사람은 세속의 것들에 집착하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집중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앙공부의 기쁨과 즐거움] 사랑이 우리를 거룩하게 합니다
사람은 머리와 가슴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금 건조하게 말하면, 인간에게는 이성(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차원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오랫동안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고,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사유하는 능력으로 보았습니다. 당연히 지성의 힘과 성찰과 통찰의 능력에 우위성을 두었습니다. 거룩한 사람 역시 하느님에 대한 앎과 하느님에 대한 통찰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역사 안에서 인간의 의지적 행위와 삶을 중요시하는 추세가 발생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를 더 나은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 되게 만드는 것은 통찰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영위하는 삶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 시작하였습니다.”(‘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47항) 거룩함의 길에서 하느님에 대한 지성적 통찰보다 하느님을 향한 의지적 노력과 개인적 노력이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인식과 성찰보다 의지와 실천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실천중심주의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의 우선성
인간에게 지성(머리), 감정(마음), 의지(몸)는 중요합니다.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이성을 통해 아는 지식도 필요하고, 감정과 정서 안에서 하느님을 마음으로 느끼고 체험하는 것도 중요하고, 하느님의 가르침을 행동과 의지를 통해 실천하는 것도 요청됩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지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교회 안에서 교리와 신학만을 중요시하는 일종의 지식인중심주의와 엘리트중심주의를 낳았습니다. 넓은 맥락의 영지주의 전통입니다. 감정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감각적인 신앙체험만을 추구하는 무분별한 열정의 태도를 낳았습니다. 의지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종교적 행위의 의지적이고 습관적 반복만을 중요시하는 형식주의적 신앙을 낳았습니다. 일종의 펠라지우스적 전통입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여전히 이 영지주의적 태도와 펠라지우스적 태도가 잔존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영지주의적 태도를 강하게 비판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현대판 펠라지우스적 태도에 대해서도 역시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현대판 펠라지우스적 태도를 지닌 이들은 “인간 의지가 순수하고 완벽하고 전능한 어떤 것이나 되는 양”(49항) 행동합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힘만을 믿고, 정해진 규범을 지키거나 과거의 특정한 가톨릭 양식에 완고하게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이 다른 이들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합니다.”(49항)
어쩌면 거룩함의 길에서는 하느님에 대한 인식보다 하느님을 향한 행위와 실천이 더 중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말과 생각보다는 행동과 실천이 더 중요합니다. 말보다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또 하느님에 대해 입으로 숱하게 떠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행동과 삶이 하느님을 닮지 않는다면, 즉 행동과 삶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모습이 아니라면, 하느님에 대한 생각과 말은 빈 것이 되고 맙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는 길에 있어서 행동과 실천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의지적 행위와 실천의 노력보다 앞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입니다. 조건 없이 선물로 주신 당신의 은총과 사랑과 자비 덕분에 우리는 거룩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은총의 선물은 인간 지성의 능력과 의지의 힘을 초월합니다.”(54항) 하느님의 “은총은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통상적으로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를 점진적으로 변화시켜 줍니다.”(50항)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이 은총의 선물에 대하여 기쁨의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것뿐입니다.(54항) “교회는 우리가 우리의 공로나 노력으로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된다고 되풀이해서 가르쳐 왔습니다. 언제나 먼저 주도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52항) 결국 은총의 선물에 대한 감사의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또한 우리의 지성과 의지의 한계를 인정하며 주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노예살이로 변질된 종교적 태도
인간의 의지적 노력만을 강조하는 종교인들은 자칫 관습주의자, 율법주의자, 형식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종교인들은 “율법에 대한 과도한 집착, 사회적 정치적 쟁취에 대한 환상, 교회의 전례와 교리와 특권에 대한 허식, 실질적인 일처리 능력에 대한 자만, 또는 자립과 자아실현 프로그램에 대한 집착”(57항)의 모습을 보입니다. 복음에 대한 열정보다는 종교적 사업과 행사와 프로그램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본당 안에서 우리가 어떤 일들을 할 때, 우리가 정말 그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분을 닮게 해서 기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합니다. 비록 겉으로는 복음 선포와 선교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우리는 너무도 쉽게 사업과 행사와 프로그램의 효율성만을 추구하는 위험에 빠지곤 합니다.
또한 우리는 본당에서 신심활동을 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어쩌면 신심 단체 활동을 더 오래한 신자들 사이에서 더 쉽게 발견되는 위험입니다. “이는 일부 그리스도인 단체들이 그들 고유의 특정 규범, 관행, 행동 방식 준수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 일어납니다.”(58항) 레지오 마리에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지오의 규범과 교본과 전통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도구입니다. 규범과 교본과 전통은 진정한 성모님의 군대가 되기 위한 도구일 뿐입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고 불변적인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규범과 관행과 행동 방식을 준수하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한 규범과 관행과 행동 방식인지를 끊임없이 묻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복음의 기쁨과 은총의 선물로서의 행복과 자유를 잃어버리고(55항), “일종의 노예살이로 변질”(59항)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교리와 신학적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종교적 규범과 관행과 전통에만 집착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교리와 신학적 앎이 필요합니다. 규범과 관행과 전통을 준수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무슨 복잡한 논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구분되지 않는 하나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단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또 다른 두 가지 정식이나 명령을 전해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두 얼굴, 아니 오로지 하나, 곧 수많은 다른 모습에 반영된 하느님의 얼굴만을 전해주십니다.”(61항)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오직 사랑으로만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