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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시론(詩論)
---안정옥의 시세계
신상조(문학평론가)
1.
보르헤스가 우주를 도서관으로 상상한 것은 너무도 유명하다. 그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은 이렇게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 보르헤스의 도서관을 두고 소설가 김영하는 이런 해석을 덧붙인다. “누구나 알다시피 도서관은 책을 모아놓은 곳입니다. 누구라도 그곳에 들어가면 어떤 신성함을 느끼게 됩니다. 많은 저자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책등은 묘비처럼 느껴집니다. 그곳은 죽은 이와 산 자가 가장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간이고 엄밀한 의미에서 저자가 죽어 있는지 살아 있는지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주가 도서관이라면, 그래서 그곳에 진열된 책들이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면서 영향을 주고받도록 만들어졌고, 그 책들의 저자가 당연하게도 (이미) 죽은 자와 (아직은) 살아있는 자들이라면, 도서관은 죽은 자들이 남기고 간 책들의 퇴적층 위에 새로운 저자들의 책들이 쌓여가는 고고학적 공간이거나, “간밤에 내린 헌 눈 위로 수시로 눈을 보태”는 “헌 의자”(「헌 의자 위에 헌 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컨대 안정옥 시인은 이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사람도 지나간 일 위로 자꾸만 새로운 일 보태주는 것이 삶이듯 그렇게 소리 없이 지나가기만 하는 일들은 애달프다 눈은 내렸고 버겁다 풀어 쓸 수조차 없는 희미한 죽음이 당도해도 해줄 수 있는 일은 소리 없이 왔다가는 눈처럼 소리 없이 왔다간 사람처럼 그저 모호하게 바라보는 일뿐이어서 더 애달프다 나도 지나간다”. 시인이 헌 의자 위에 헌 눈이 쌓이는 광경을 바라보며 삶을 생각하는 일과, 보르헤스가 우주를 무한히 확장되는 도서관에 비유하는 일에는 ‘삶 너머의 죽음’을 상상한다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안정옥 시인의 『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는 작은 우주에 해당하는 우리의 삶이 수많은 상실과 부재의 퇴적층이고, 누군가 지나간 자리를 내가 현재 대신하거나 나 또한 지나가고 있음을 감지한, 그 죽음과의 접촉을 통한 감수성의 파동을 기록한 기록물이다. 시인은 “기존 슬픔에 구멍을 내는 작업”을 통해 우리의 눈앞에 가릴 수도 메울 수도 없는 커다란 공백, 혹은 말라르메의 말을 빌린다면 ‘자신의 죽음’이라는 절망적 심연을 출현시킨다.
2.
누구라도 때때로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인간만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기에, 그러므로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가장 인간다운 모습이다. 시인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이곳의 내가 주체라 믿는 것과 무성해진 쇠뜨기가 저를 주체라 믿는 것 중 누가 그른지 모르겠다”(「무성해진 쇠뜨기)」)라며 즉자적 존재와 대자적 존재의 경계를 흐려놓는다. 그래도 우리는 ‘닭의장풀’이 의식의 대상에서 자기의식의 대상으로 전환하리라 믿지는 않는다. 시인이 “닭의장풀이나 나나”라며, 둘 다 유한한 존재이면서도 당신의 영역에” 들어가려 “안달”한다는 공통점을 강조하더라도 말이다.
아침에 핀 닭의장풀 꽃을 송두리째 잘라
물 컵에 넣어주면, 야생은 참으로 거칠다
집안에서 꽃도 펴, 수염 같은 뿌리들
견디는 힘 또한 무지스럽다
들어올 여분도 없는데 벌레들은 어디서 오나
공기 껍질 같은 꽃잎을 바삭이며
빤히 쳐다본다는 착시에 빨려들 것 같다
그래도 꽃잎 속으로 한발 더 들어서면
피보나치의 논리를 따분하게 들어줘야 되듯
남의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건 흘린다는 말,
당신에게 흘린다는 건
나의 많은 부분들 가지 쳐야 하듯
닭의장풀의 침묵과 당신에 관한 침묵들
단단한 세상인데 무얼 더 밝힐 수 있겠어
나의 생, 어느 중간쯤 닭의장풀 꽃 보며
에둘러서 말하고 싶다는 것이다
닭의장풀이나 나나 뿌리내린 시간들이
지극히 짧은, 그럼에도 당신의 영역에
들어가질 못해 안달이다
몹시 말하고 싶은데 이렇게 에둘러대는,
삶은 한 뼘씩 죽어가는 것들과
잠깐씩 이별하는 것이라 말해줘
-「닭의장풀」 전문
달개비 혹은 닭의 밑씻개로 불리는 닭의장풀은 짙은 하늘색 꽃이 보일 듯 말 듯 피기에 그저 잡초 중의 잡초로만 여겨지는 식물이다. 아침에 핀 닭의장풀 꽃을 물컵에 넣어주니 수염 같은 뿌리를 뻗는다는 화자의 말처럼, 닭의장풀은 줄기를 물에 꽂으면 금세 뿌리를 내린다. 두보(杜甫)가 닭의장풀을 일컬어 ‘꽃이 피는 대나무’라 불렀다는데, 아마도 “견디는 힘 또한 무지스러”운 야생의 거칠고 억척스러움이 번식에 강한 대나무의 생명력을 빼닮아서일 터이다. 화자는 여기에 더해 벌레들까지 “들어올 여분”이 없음에도 몰려드는 광경을 보며 목숨 가진 것들의 그악스러운 ‘힘’을 경이롭다는 듯 관찰한다. 이 모두는 남의 영역에 뿌리를 내리려는, 혹은 들어가려는 안간힘이다.
화자 역시 “빨려들 것 같”은 “착시”를 경험하며 꽃잎 속으로 한 발 들어선다. 앞서 말한 바대로 들어선다는 건 “남의 영역으로 들어”가려는 “안달”이기도 해서, 화자는 “당신의 영역”에 들어가려면 대상이 건네는 “피보나치의 논리를 따분하게 들어”줘야만 한다고 말한다. 주지하다시피 피보나치수열은 예측과 분석과 판단에 활용되는 견고한 패턴이다. 이를테면 인류 역사는 수천 년이 지나도록 근본적으로 변함없는 패턴을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대에 걸친 삶이 이처럼 일정한 패턴에 불과하다면, 개인 삶의 고유성은 그 가치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다.
화자는 이 ‘따분한’ 논리에 반박하기보다 “많은 부분들”을 가지치기한 말을 ‘당신’에게 흘리거나 차라리 침묵을 선택한다. “무얼 더 밝힐 수” 없을 만큼 세상은 너무나 “단단”하고, 닭의장풀이나 ‘나’의 삶은 “지극히 짧”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생, 어느 중간쯤 닭의장풀 꽃 보며” 깨달은 삶의 전모를 “에둘러” 다음과 같이 추려낸다. 삶이란 ‘죽어가는 것들과 잠깐씩 이별하는 것’, 혹은 ‘한 뼘씩 죽어가는 것들’과 ‘잠깐씩 이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런데 우리가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두 귀를 세워도” 그건 우리의 “능력 밖”이다. 우리는 늘 ‘당신’의 말을 “다르게 번역”(「번역 아니면 고니」)하거나,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를 아직도 이어가고 있는”(「포플러나무 책방」) 중이라서다. 「시카고, 시카고」를 읽어보자.
고달프면 그는 시카고, 시카고, 검은 눈은 미시간 호에 악어로 떠있어
누구나 한번쯤 가봐야겠다 상상하는, 아무 갈등 없는 그런 도시 갖는다
그와의 삶은 어디에도 없는데 이렇게 오랫동안 시카고, 시카고를 호응
해주지 못한
그가 사라진 후에야
지금쯤 그는 시카고 어디쯤 수로에 가두어놓았나 나무 위에서 한 마
리 새로 앉아 자신의 고달픔을 가라앉히나 새의 말을 듣지 못하듯 모
든 새의 말을 다 알아듣는다면 한동안 정신을 잃어야 할
나는 코르크나무가 숲을 이루는 어디쯤 오크나무 위에 앉은 한 마리
새가 될 수 있을까 새의 말은 그렇게 지척이다 그러니 못 알아듣는다
화는 내지마 이제서야 들리는 시카고, 시카고,
-「시카고, 시카고」 전문
오래전부터 그는 ‘나’에게 시카고를 가고 싶다고 노래해 왔던 모양이다. 미국 일리노이주 북동부에 자리 잡은 이 도시는 짐작건대 그에게 고달픈 삶의 현재를 위무하는 곳이다. 미시간 호수에는 검은 눈의 악어가 떠 있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아무 갈등 없는 그런 도시”가 바로 시카고라고 그는 상상한다. ‘한 번쯤’ 시카고를 가고 싶다던 그의 염원은 “오랫동안” 호응을 얻지 못하다가 “그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화자의 의식에 명징하게 떠오른다. 바로 곁에 머물던 이의 음성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는 ‘나’의 자책은 그가 지금쯤 시카고 어디쯤의 “나무 위에서 한 마리 새로 앉아 자신의 고달픔을 가라앉”히는 중이고, 새가 된 그가 “모든 새의 말을 다 알아듣는다면 한동안 정신을 잃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실상은 화자의 바람인 상상으로 이어진다. 새가 된 그와 달리 ‘나’는 아직 “코르크나무가 숲을 이루는 어디쯤 오크나무 위에 앉”아 노래하는 존재가 되지 못했다. 코르크나무에 앉은 새 혹은 나무 위에서 노래하는 새소리는 우리가 한 번도 선택하지 못한 삶이거나 우리에게 불가능한 존재 방식이다. 지척에서 노래하는 새의 말을 ‘나’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데서 이는 입증된다.
그렇더라도 “그가 사라진 이후에”라는 문장에 죽음이 개입하는 순간, 명멸하는 무심한 시간 속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짧고 강렬하게 확인되는 그의 마음이 있다. 공감과 호응은 보다시피 언제나 사후적이다. 걸쳤던 “겨울코트를” 벗듯 이곳의 육체를 이탈하여 “너는 이미 다른 분리에 들어섰”고, 그런 “그의 등 뒤를 노을로 오래 바라보며 서 있었던 때”를 잊지 못한들, 감정을 뒤따르는 생각의 전진은 “거기까지다”(「유체이탈」). 안정옥의 시는 우리는 누구나 무심과 오해로 점철된 관계 속에서 죽어가는 중이고, 죽어가던 것들과 잠깐씩 이별함으로써 ‘너’라는 존재 지평에 가닿는다는 불편한 진실에서 출발한다.
3.
이처럼 문학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은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쉽게 정답에 도달할 수 없는 대개의 질문이 그러하듯, 삶과 죽음에 대한 물음에도 정답이란 없다. 이는 질문하는 이가 매번 새로운 답을 찾아내거나, 질문자의 본래 의도가 답을 찾는 데 있지 않고 질문하는 행위 그 자체라서다. 안정옥의 시에서 삶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이 주어진다.
먼지가 많을수록 저녁노을 더 붉다
빛나는 별은 먼지와 부패덩어리
노을과 당신도 내겐 평생 미혹이다
-「노을의 입을 빌려」 부분
노을의 입을 빌렸다지만 화자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의 말에 따르면 생은 “평생 미혹”되었으면서 미혹된 줄 모르고 사는 데 불과하다.
사실 미혹은 무엇에 대한 마음의 상태다. 그것은 심성을 어지럽히는 부정적 상태가 아니라 내 내면의 프리즘을 통과한, 즉 ‘나’의 내면이 깊숙이 투영된 대상을 향한 영혼의 마음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혹자의 말처럼,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보고 갈 수 있었던 시대의 행복(루카치)도 그 별을 바라보는 인간 내면에 ‘타자’에 대한 사랑이 타올랐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을과 당신도 내겐 평생 미혹이다”란 말은 ‘내’가 당신과 노을을 평생 사랑했다는 뜻인 것이다.
안정옥의 시에서 미혹은 사랑이다. 그의 시에서 “나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가 있나/그러면 내 뒤를 캐거나 알아내려/애쓰지 마라 노을은 상처다”(「노을의 입을 빌려」 )란 부정과, “내 손이 너에게 살짝 닿았다 해도 그것이 언젠가 어떤 방식으로 부풀려 내게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다”(「염소의 투정조로」)라는 긍정은 이율배반적이지 않다. “수십 마리 새들이 부지런히 입안으로 옮겼을/배설들도 벚나무 되고 언젠가 붉은 앵두 되”는 이치라서 “희미한 가로등 아래 새똥을 치우며,/한낮을 불평하는 밤”(「버찌감흥」)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내게 왔던 꽃들과 떠난 꽃들 모두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로”(「꽃들의 상냥함」)라고, 노을에 홀리지 않는 이성적 ‘적막’보다 “격하게 흔들리는” ‘바깥’의 시적 순간이 있어서, 그리고 “문득 눈이 녹듯” 사라지는 “짧”(「나무 가시밭」)은 생이기에 황홀할 수 있노라 고백한다. 함께 읽을 「나무 가시밭」은 “누구나 생의 끝자락이 적막이라지만” 그러한 절망이야말로 황홀한 절망임을 말해준다.
나무들은 있음으로
제 몸이 부풀다 터지면 5월이 오고
무성한 잎들이 그늘을 맞이하면
사방 모든 걸 볼 수 있는 도마뱀처럼
나무는 별 거리낌이 없다
격하게 흔들리는 건 언제나 바깥이다
아침, 벚나무가 길게 늘어선 길을 지나왔다
잎을 다 내린 나무들은 어두운 가지들을
속내처럼 들쳐 내 짐짓 그 길이 가시밭이다
가시들도 견디다 못해 글자의 생김새로
사람도 견디다 못해 중얼거림으로
그런 반복을 거치면 적막이다
누구는 생의 끝자락이 적막이라지만
나무가 온 삶을 비유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제 몸을 늘려대기만 한 것을
문득 눈이 녹듯
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
-「나무 가시밭」 전문
화자는 이날 아침, 잎을 다 내린 벚나무가 길게 늘어선 길을 지나왔다. “나무들은 있음”으로 존재한다는 화자의 성찰은 생을 의식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깨달음이다. 나무는 제 몸을 부풀려 잎들을 틔우고 그늘을 만들고, 다시 그 잎들을 내리는 과정을 반복하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제 몸을 늘려대기만 한 것”에 완벽히 무감하다. “나무는 별 거리낌이 없다”라거나, “격하게 흔들리는 건 언제나 바깥이다”란 표현은 나무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말로 들린다. 생은 의식하는 존재에게만 생이다. 생을 의식하지 않는 존재에게 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문득 눈이 녹듯/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란 화자의 다짐은, 눈이 녹듯 허망하게 사라질 생을 의식하는 존재에 대한 자각이자 경탄으로 다가온다. 격하게 흔들리면서, 혹은 격하게 미혹 당하면서, 그러함에도 자신의 유한성을 의식하기에 인간은 황홀하게 절망할 수 있다. 적막은 적막이므로, 꽃도 나무도 인생도 문득, 눈이 녹듯 스러질 것이므로.
4.
“그러니까 살아있다는 것은 죽은 것을/두 팔로 안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저리도 붉은 것이」, 『다시 돌아 나올 때의 참담함』)다. 인류 역사라는 서적에서 죽음은 영원한 고전이자 신간이다. 출생이 죽음의 시작이란 서양 속담은 진부하기보다 불변의 진리라고 해야 옳다. “네가 세상을 떠날 때/네가 죽는 바로 그날부터 너의 더러운 육신은/악취를 풍기기 시작”한다고 네송은 노래했지만,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썩어 악취를 풍기는 주검에 대한 시에 불과하다. 그러니 대체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의 온 삶은 훨씬 짧게』는 거기에 대한 답을 적지 않게 내놓고 있다. 시인이 보기에 “가장 아름답게 꾸미고 날짜, 시간에 맞춰 나가서 맞이할 사람처럼 그렇게 만나야 할 죽음은 어디에도 없다”(「월요일 편지」). “밥 먹다 수저 놓듯 잠에서 눈뜨듯” 자연스럽게,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고 문을 닫고/달은 준비된,” 자세로, “맡겨놓은” 물건이라도 찾는 사람처럼 죽음을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그래서 어려움을 겪지”(「죽음이 무엇인가」)라며 죽음을 불현듯 맞이할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그러니 “그들이 데리러 오기 전, 내 발로 성큼성큼 걸어/모르포 나비의 양쪽 날개를 겨드랑이에 붙이고/두려움 많다는 죽음, 그곳에 날아갈 수는 없을까”(「운치 있게」)란 질문은, 운치 있게 죽음을 맞이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더군다나 어느 하루도 부고장을 보내거나 받지 않은 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고장은 언제 어디서고 “울타리에 편지처럼 꽂혀” 우리를 기다린다.
어린 내게 정구지 사오라고, 개가 있는 집은 무서웠어,
이번엔 정구지란 어려운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시든 걸 사왔다고 불같이 화를, 고추나 오이는 명징하다
이름이 여러 개인 정구지라는 말, 지금도 불편해
길가 집 울타리에 편지가 꽂혀 있다 나에겐 소중한 편지,
반가운 소식을 집에 전해준다 불같이 화를, 부고장이라고
교실에선 답이 틀린 수대로 손바닥을 맞고, 흐느낌들
그런 일에 도대체 나는 울어 본적이 없다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다 불같이 화를, 내가 빠질 불속,
그러나 흥, 그런 사소한 일에 눈 깜짝할 줄 알아
세상의 불같은 화가 다행히 내 몸에는 옮겨 붙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몸은 불붙은 당신을 쉽게 끌 수는 있다
내가 잘한 일은 불같이 화를 내는 당신의 그 자체만
묵묵히 바라보고 대꾸 없이 다 들어준 일이다
대신 얻은 것은 봄꽃이 흐드러지게 오는, 장마가 세차게
내리는 밖이란 걸, 눈이 쌓인 나무 위 새를 온 종일,
당신이라는 사물을 온 종일 멈추지 않고 바라본 일이다
그것이 세상이 내게 준 가장 큰 특혜였으니
목적을 이만큼 실현하였으니, 그렇게 불편한 삶은 아니다
그러니 그 멀리 부추 혹은 정구지를 사러
꽃고무신을 신고 꽃잎처럼 발걸음도 가볍게 갔을 테지
-「부고장을 받던 시절이 있었다」 전문
이 시에 반복되는 “불같이 화를”은 여러 장면을 연결하여 하나의 몽타주로 만드는 역할을 담당한다. ‘불같이 화를’은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간에 존재하는 시간성이 연속적 운동성을 띠게 만들고, 장면과 장면 사이에 비약과 생략을 가능케 함으로써 “그렇게 불편한 삶은 아니”었던 하나의 몽타주를 구성하는 것이다.
다양하나 통일성을 갖춘 장면들, 즉 시에서의 에피소드들은 정색하기에는 다소 해학적이다. 어린아이의 시선에 드러난 어른들의 부당하고 치졸한 언행, 예컨대 양심적이지 못한 상인에게 시든 정구지를 사 왔다고, 상(喪)이라는 한자를 모르는 아이가 집 울타리에 꽂힌 부고장을 반가운 편지인 줄 알고 들고 들어왔다고, 시험지에 틀린 답을 선택했다고 불같이 화를 내는 어른들을 이해하려면 보잘것없는 삶을 보듬어 안고 감쌀 수 있는 넉넉함이 필요하다. 이는 당시 아이의 눈높이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은 아니나, 성인이 된 화자에게는 가능하다. 그는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왔다며 “빠질 불 속”을 운운하는 ‘당신’의 도덕적 강박에 “흥, 그런 사소한 일에 눈 깜짝할 줄 알아”라고 대응한다. 화자는 “도대체” 울어본 적이 없다. 대신에 그는 ‘당신’들이 불같이 화내는 걸 “묵묵히 바라보고 대꾸 없이 다 들어”주었다. 그럼으로써 봄꽃이 흐드러지고 장마가 세차게 내리는 “밖”, 눈 쌓인 나뭇가지 위의 새를 관찰하는 바깥에서의 삶을 살 수 있었다. “당신이라는 사물을 온종일 멈추지 않고 바라”볼 수 있었으며, 그런 일이야말로 “세상이 내게 준 가장 큰 특혜였”다고까지 말한다. “목적을 이만큼 실현”하였으니 그만하면 괜찮다는 화자 삶의 몽타주는, 결국 장면과 장면 사이를 넘나드는 이 같은 태도로 인해 완성된다.
그런데 다만 이뿐인 걸까? 시를 읽는 우리는 완성된 몽타주 위로 다른 장면이 중첩됨을 경험한다. 아이에서 어른으로의 시간 연쇄가 역전되며 심상적 리얼리티를 획득한 장면은, “멀리 부추 혹은 정구지를 사러/꽃고무신을 신고 꽃잎처럼 발걸음도 가볍게” 가는 아이가 울타리에 꽂혀 있는 부고장을 발견하는 데서 멈춘다. 개별적이면서도 일반성을 획득한 이 장면은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조건을 표상한다. 천진한 아이는 죽음을 모르고, 죽음을 껴안고 살아가는 우리도 죽음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빛들이 흩어지는 일몰에는 서러움이 몰려온다. 눈앞의 풍경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금세 오는 죽음이자 죽음의 은유다. 이렇듯 죽음에 대한 상념은 상실과 슬픔과 이별 등등을 거느리며 마음을 헐겁게 흔들어놓는다. 신체 하나에 그림자 하나가 따르듯, 죽음은 애초 인간의 출생에서부터 깃들어 있는 실체다. 이 명확함과는 반대로, ‘내 차례’의 죽음은 떠도는 풍문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가릴 수도 메울 수도 없는 커다란 공백. ‘죽음’이라는 절망적 심연을 극복하기란 불가능하다. 삶이 죽음을 바꿔놓을 수 없으나,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삶은 조금쯤 달라질 수 있으리라. “나의 쓰임새는 눈뜨면서부터/누군가를 향해 지저귀는 것”(「다른 쓰임새」)이라는 시인으로서의 자각과 “죽음의 책무”(「책무라는 돌」)를 깨닫는 일이 죽음에 대한 끝없는 사유의 결과이듯, 안정옥의 시가 “죽음과 삶을 같은 줄기로 가지런히 세우니/모든 게 잘 갖추어진 줄기다 부족함이 없다”(「반 토막」)라며 바닥 모를 깊이로 깊어지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