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에게 절하는 형제들 (창 42: 1-38)
오늘 말씀은 드디어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에게 나아와 엎드려 절하는 장면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발견하는데
먼저 하나님의 말씀은 틀림없이 성취된다는 점입니다.
창37:7에 “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한 요셉의 꿈이 정확히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라면 정확히 이룸이 있습니다. 대인간의 일이라면 베드로와 피장 시몬이 그러하듯 양편에 함께 주어집니다.
요셉의 사건은 꿈의 성취이듯 예수님의 모든 행하심은 다 성경이 예언한 그대로 성취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장성도 성품도 박해도 죽으심도 부활도 승천도 어느 것 한 가지도 다 성경의 언대로 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을 곡식단으로 보았을 때 아직도 주여 주여 입으로만 부르는 그 수준에 있다면 곡식단처럼 더욱 온전히 주님을 나의 왕으로 경배할 날이 올 것입니다.
다음은 풍요로울 때 저축하지 못한 죄가 얼마나 큰가 하는 것입니다.
애굽인들도 그렇고 열방 나라들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 모두 7년 풍년 시 저축해 두지 않다가 쓰디쓴 결과를 만났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야곱이지만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으실 때는 어느 누구일지라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르쳐 주시든 안 가르쳐 주시든 삶의 지혜란 풍요로울 때 예비하는 것이죠. 그렇지 못했을 때 심히 어려움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 들을 때 순순히 순종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순순히 말씀으로 하실 때 혹은 풍성한 은혜로 넘칠 때 자기 신앙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고난을 받아야만 순종한다면 그 사람은 고난자초형의 인간입니다. 시32:9에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자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식을 가장 기뻐하십니다. 우리 성도들도 말씀하실 때 그냥 순종하시는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요셉의 지혜로움입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충분히 스스로 과거의 죄를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어 당황하지 않게 하였습니다. 만약 처음부터 “나는 요셉입니다.” 했다면 모두 기절초풍하여 자발적 회개가 아닌 “나 살려 주시오.”식 강압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강압이 아닌 아름다운 모습으로 여러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데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 주실 때가 그 기회입니다. 고후6:2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주님은 요셉이 형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서 진정한 회개와 사랑의 고백을 듣기를 원하신다는 점입니다.
1. 이 일은 양식 사러 갔다가 되어진 일입니다.
3절에 “요셉의 형 십 인이 애굽에서 곡식을 사려고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여기 양식이 무엇입니까? 문자적으로는 곡식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마4:4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 양식 구하려고 애굽 갔다가 요셉의 유도심문에 걸려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게 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만날 때 동일한 결과가 옵니다. 자기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히4:12-13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죄를 회개치 못한 것은 성경을 보며 회개하지 않았기에 우리로 치면 윤리 수준의 회개에 그치고 만 것입니다.
요즘 새벽예배를 통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을 통하여 자기의 모습을 비추어보았습니다. 이렇게 성경에서 자기를 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예수의 복음을 보아야 하고 또한 자신의 모습도 보아야 합니다. 성경 율법과 선지서의 그 방대한 기록은 대부분 우리 자신들을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철저한 인식 없이는 구세주를 바로 모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론의 기초가 아주 중요합니다. 인간의 전적인 타락과 무능력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구세주의 절대 필요성 역시 확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신 나의 구주일 뿐 아니라, 내 죄로 인해서 예수님이 죽으셨다. 그러므로 나는 예수님을 죽인 자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오순절에 회개했던 유대인들도 “어찌 할꼬” 즉 내가 예수를 죽인 자라는 고백이 있었을 때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은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은 죄로만이 아니라 예수 두 번 죽인 죄로 지옥 갑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주신 큰 구원을 방심한다면 그 죄의 벌로 영원히 버림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것을 깨달을 때 진정 주님을 위해 살 수 있게 됩니다.
2. 요셉이 데려오기 불가능한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했듯 우리의 마음의 우상을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참 회개입니다.
15절에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말째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하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가정사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을 형제들에게 주문합니다. 그것은 말째인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곱이 그토록 사랑하던 요셉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사랑하는 라헬의 아들 베냐민만큼은 절대로 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냐민을 보내는 과정을 통해서 전의 요셉의 일을 다시 한 번 부각시켜 깨닫게 하여 회개토록 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와 같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 일에 아무 대답도 못하자 요셉은 그들을 사흘을 가둡니다. 그래도 답변이 없자 시므온 한 사람만 가두고 나머지는 양식을 주어 돌려보내는데 다시 오도록 하기 위해서 가져온 돈을 자루에 담는 조작을 합니다. 형제들은 그렇지 않아도 간첩으로 오해 받았는데 이제 돌아오지 않으면 도둑으로까지 오해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가지 않으면 잡힌 시므온이 죽습니다.
형제들이 도착하여 자초지종 이야기하지만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베냐민을 쉽게 놓아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두 번 이상 곡식을 가지러 애굽에 가야하는데도 불구하고 굶어야 했습니다. 흉년은 계속되고 모두가 죽을 지경이 되자 장자 루우벤과 아버지 야곱이 그제야 결단을 합니다. 루우벤도 자기 두 자녀를 내놓고 야곱도 아들들을 잃으면 잃으리라 하면서 베냐민을 보냅니다. 대단한 각오입니다.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라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입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 보내기가 이렇게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마음의 우상 버리기가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가장 사랑하는 것 우리가 애지중지 붙잡고 있는 것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도록 오늘도 우리의 삶을 쥐어짜고 계십니다. 우상도 우상이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도 우상입니다. 나를 사랑함도 우상이요, 내 뜻대로 하는 것도 우상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그것을 내어놓도록 하나님께서 온갖 시련으로 쥐어짜시고 짜시니까 결국 회개하게 됩니다. 그 시련 중에 심령의 고통이 가장 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우상 숭배할 때 징계하지 않으실 때가 있었습니까? 한 번도 없었습니다. 언제나 징계하셨습니다. 내놓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면 내 힘으로 불가능할 때는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풍요로울 때 회개하고 믿음을 저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 죽인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되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마음의 우상들 죄를 회개하십시다. 그래서 온 가족이 요셉 만나듯 예수 만나 기뻐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