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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 21 - 23.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마 1: 21.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
1] 아들을 낳으리니
누가가 기록한 마리아를 향한 수태고지와 거의 흡사한 메시지이다.
* 눅 1: 31 -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낳으리니'(*, 텨세타이 데)란 말 속에 불변사 '데'가 사용되어 '그리고 지금'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며 20절의 내용과 연결되고 있다.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적 기원을 재삼(again and again) 일컫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요셉은 두려움을 완전히 물리치고 오히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에 자신을 동참케 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을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마리아의 남편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태어 날 아들이 다름 아닌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사 9: 6)이신 메시야였기 때문이다.
2] 이름을 예수라 하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에 대한 명명권은 아버지에게 있다.
* 창 4: 25 -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하나님께서 아이의 이름을 직접 지시하심으로 친부권을 행사하시며, 예수의 법적 아버지 요셉을 그의 양부(養父)로 임명하고 계신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 '예수아'(*)라는 이름의 헬라어 표기이다.
* 느 7: 7 -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여호와는 구원이시라'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그가 오신 목적, 곧 마리아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베푸실 분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나타내고 있다.
구약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인물 중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제시된 사람은
(1)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한 여호수아. (수1-12장)
(2) 예수의 조상 스룹바벨
* 스 2: 2 –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 느 7: 7 –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아사랴와 라아먀와 나하마니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베렛과 비그왜와 느훔과 바아나와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라.
(3) 동시대 인물로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는 자'로 이름이 싹(순, 筍)이라 하는 여호수아
* 슥 6: 11-13 – 11 은과 금을 받아 면류관을 만들어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머리에 씌우고 12 말하여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싹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자기 곳에서 돋아나서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리라. 13 그가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고 영광도 얻고 그 자리에 앉아서 다스릴 것이요, 또 제사장이 자기 자리에 있으리니 이 둘 사이에 평화의 의논이 있으리라. 하셨다 하고
'예수'라는 이름이 이들의 이름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천사가 시 130: 8을 인용한 뒤의 구절이 '예수'라는 이름의 본질적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 시 130: 8 –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
'예수'란 이름은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연결되어 사용되는데 이는 유대인이 대망하던 그 메시야로 오셔서 인류의 죄를 속량해 주신 분이라는 신앙 고백을 내포하고 있다.
3] 자기 백성(*, 라온 아우투).
유대인의 통치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왕적 권위를 내포한 말이다.
본래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유대인에게만 한정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세례요한과 예수는 이스라엘의 경건한 자와 이방인들을 제자로 삼았으며(3: 9, 8: 11), '자기 백성'의 범주에 포함했다.
즉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그 통치를 전인적으로 인정하는 모든 '메시야의 백성'을 의미한다.
4]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죄'(*, 하마르티아)란 말은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갔다는 의미의 동사 '하마르타네인'(*)에서 유래한 말로서 하나님의 뜻(과녁)에 인간의 의지와 행동(화살)이 빗나간 상태를 일컫는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뜻보다 지나칠 때나 모자랄 때 모두를 가리키는데, 예수께서는 바로 인간의 이 같은 연약함을 적극적으로 치유(healing)하고 덮어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이 구절은 독자들이 예수께서 오신 목적과 다윗의 왕권을 계승하여 메시야적 왕으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종말론적 통치의 참된 본질을 깨닫게 한다(Ridderbos).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며, 그 멍에에서 초래한 모든 악으로부터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정치적인 메시야 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할'(20: 28)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스도는 '그들의 죄 가운데서(in)' - 로마의 속박 가운데서가 아니라, 더 근본적인 '죄로부터'(from) -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구약에서 '구원'(*, 소조)이라는 말은 육체의 위험(8: 25), 질병(9: 21-22) 또는 죽음(24: 22)으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할 수 있으나, 이 구절에서의 '구원'은 보다 본질적인 구원, 즉 죄악으로부터의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성경적인 입장에서 볼 때 죄악은, 항상 직접적인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다른 재난들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고 있다.
신약에서 소개하고 있는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하게 될 포괄적이고도 궁극적인 구원을 의미한다.
5] 예수
이름은 한 사회나 단체의 보이지 않는 얼굴이다. 우리는 이름을 듣거나 떠올림으로써 그 단체의 성격이나 특징 등을 상상할 수도 있고 쉽게 판단할 수도 있다. 이처럼 개인이든지 단체든지 이름은 매우 중요하다. 본문은 이미 태어나기 전에 벌써 그 이름이 지어지고 그 삶의 형태가 특징지어진 경우를 보게 되는데, 바로 예수님의 이름과 삶이 그렇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예수님의 이름과 삶이 어떻게 특징지어졌는지 알아보자.
(1) 평범한 사람으로 태어났다. - '아들을 낳으리니'.
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탄생 기사를 살펴보면 기이한 많은 영광중에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에도 그러한 기사가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거나 놓치기 쉬운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본문에 기록된 내용으로 기묘한 영광중에 탄생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이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과 다르게 특별한 모양이나 어려서부터 신적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가 태어날 때 있었던 기묘한 이적들은 단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실 일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 영광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서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평범한 인간으로서 커다란 울음과 함께 탄생하셨으며, 보통 어린아이들과 같이 엄마의 젖과 따스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였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경탄하고 찬미하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평범한 한 인간으로 오셨기에 우리 인류의 죄를 대표하여 속죄할 수 있었다.
(2) 능력자의 이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에서 온 것으로 '여호수아'라는 말은 '하나님은 구원자'라는 뜻이다. 구약의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했던 영도자 모세조차도 이룩하지 못했던 가나안 입성을 이루였으며 가나안을 점령한 인물이다. 이처럼 예수님도 능력을 지니신 분이셨다.
예수님은 평생 여호수아와 같은 세상적인 무력을 싫어하셨으며, 철저히 배격하셨다. 물론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원하기만 하면 열두 영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실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에 대한 바른 개념과 사용하셨던 힘은 악을 물리치는 힘이요 악에 대하여 참고 인내하는 힘이었다. 인류 역사의 종국에는 반드시 이 힘이 승리할 것이다.
(3) 자기 백성들이 있었다.
'자기 백성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 어떠한 백성이 있다는 사실과 어떠한 왕권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먼저 예수님의 백성은 온 인류를 가리킬 수도 있으며, 예수를 믿고 구원 얻은 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왕권에 대한 것인데 그의 왕권은 앞서도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세상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세상에서는 힘으로 질서를 세우고 통치하지만, 예수님의 통치는 온유와 겸손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겸손하며, 자기를 희생하는 맘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는 모두 예수님의 통치권 안에 살아가는 것이며, 예수님의 통치권을 세상에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4)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바로 인류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서였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는 시작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무엇보다도 인류의 죄를 먼저 해결하셔야 했다. 그리하여 십자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아담의 범죄 이후 영원한 생명과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버리고 떠났던 사람들이 이제는 사망의 통치를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권 안으로 돌아오도록 길을 만들어 놓으셨다.
우리가 감격하고 기뻐하고 찬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하늘의 별도 천군 천사와 함께 기뻐하였고, 들에서 양치던 목자와 동방박사도 주를 찬양하고 즐겨 예물을 드렸다.
마 1: 22. 예언의 성취 -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
1]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이 모든 일'이란 직접적으로는 성령을 통한 마리아의 처녀 수태에 관련된 모든 사건을 가리키나, 간접적으로는 그리스도에 대한 구약의 모든 예언과 성취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된 것은'(*, 게고넨)이란 능동태 직설법 현재 완료형 동사를 취하고 있는 용어로서 어떤 사실이 예언된 대로 지속적 성취를 통하여 이미 됐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구약의 수많은 예표론적 사건과 선지자들의 예언적 메시지 등을 통해 하나님께서 거듭거듭 오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해 오셨다.
그리고 당신이 예시하신 바를 따라 모든 예언을 현실화, 구체화하셨다. 실로 하나님에게는 예언적 메시지와 성취적 사건이 결코 모순됨이 없이 진실한 한 짝을 이룬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맥 네일(Mc Neil)은 '예수의 삶 속에서 나타난 사건들은 구약 예언을 성취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뚜렷하신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다'고 피력(披瀝)한 바 있다.
2] 마 1: 22-23의 화자
이 두 구절의 화자(speaker)에 대한 견해는
Ⓐ 천사
Ⓑ 마태의 설명(Bruce)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어느 것도 무방하나 이러한 표현이 본서 전체에 걸쳐 반복적으로 나타난다(2: 15,17,23, 4: 14, 8: 17, 12: 17, 13: 35, 21: 4, 26: 56, 27: 9 등)는 사실과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가 성경을 인용하는 표현이 없다는 점 등이 Ⓑ의 주장을 지지해 준다.
3]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마태는 구약의 메시야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키기 위해서 구약을 자주 인용할 뿐 아니라 메시야의 전형(典刑)을 발견할 수 있는 구약의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인용한다.
* 마 2: 15 -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마 1: 23. 임마누엘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
1]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사야 예언(사 7: 14)의 70인 역(LXX)에 따른 인용이다.
이 예언은 북이스라엘과 아랍의 동맹군이 침략해 올 때를 배경으로 한다. 여호와를 떠나 이방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하는 유다 왕 아하스에게 선지자 이사야가 책망하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에게 '징조'를 주실 것이라 예언하는 장면이다.
23절과 사 7: 14을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이에 대한 많은 견해 중 타당성 있게 생각되어지는 다섯 가지는 다음과 같다.
Ⓐ 젊은 여인이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에 대한 찬양으로서 자기 아들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 지었다. (Unnik, Hill, Taylor).
Ⓑ 이사야의 예언 당시 처녀였던 한 젊은 여인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아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그의 원수들로부터 해방될 것을 말한다. (Broadus, La Sor).
Ⓒ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다. (Alexander, Hengstenberg, Young).
Ⓓ 임마누엘은 유다에 남아 있던 의로운 자들로서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자들을 암시하는 것이고, 임마누엘을 낳은 젊은 여인은 시온이다. (Rice).
Ⓔ 사 7: 1 – 9: 7은 한 단위이며, 7: 14은 그 가운데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임마누엘의 탄생은 '미래에의 확증'이라는 해석이다. (Motyer).
즉 예언된 임마누엘(7: 14)은 결국 유다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며
* 사 8: 8 –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 하셨느니라.
그의 모든 원수의 계획을 좌절시키며
* 사 8: 10 - 너희는 함께 계획하라. 그러나 끝내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해 보아라. 끝내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이니라.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빛이 되시기 위해 이방의 갈릴리에 나타나실 것이다.
* 사 9: 1-2 –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 임마누엘은 한 아기요 한 아들이며, 그 이름은"기묘자(奇妙者)요, 모사(謀事)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요, 평강의 왕"(9: 6)으로서 다윗의 위(位)에 앉아 나라를 굳게 세우고 영원토록 공평(impartiality)과 정의(justice)로 왕국을 보존하실 것이다.
* 사 9: 7 -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2] 처녀
사 7: 14에서 예언된 본 구절은 '처녀 논쟁'(알마 논쟁)으로 유명하다. 그 까닭은 히브리어 원문에는 '처녀'를 '알마'(*)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성(性) 경험이 전혀 없는 '처녀'(virgin)라는 고유한 어휘 '베툴라'(*)와는 의미상 차이가 나는 결혼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젊은 여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70인 역(LXX)이 히브리어 '알마'를 단순히 '젊은 여자'를 뜻하는 '네아스'(*)로 번역하지 않고 처녀를 뜻하는 '파르데노스'(*)로 번역하였는데 그 문제점이 있다.
처녀성을 잃은 디나를 창 34: 4에서 '파르테노스'로 번역했으나 '파르테노스'는 확정적으로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처녀(virgin)를 뜻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히브리어로 '알마'로 표기된 사 7: 14의 내용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기에는 '처녀'로 단정 지을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다.
(1) '알마'는 일반적으로 '젊은 여자'를 뜻하지만, 구약 성경에 기술된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관용적으로 '처녀'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 창 24: 43 - 내가 이 우물 곁에 서 있다가 젊은 여자가 물을 길으러 오거든 내가 그에게 청하기를 너는 물동이의 물을 내게 조금 마시게 하라. 하여
* 출 2: 8 -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 시 68: 25 - 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이다.
* 잠 30: 19 - 곧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와 반석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며
* 아 1: 3 - 네 기름이 향기로워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구나.
* 아 6: 8 -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2) 이사야 선지자에 의해 메시야의 예언과 결부하여 사용된 용어는 '처녀'를 지칭하는 것이지 처녀성의 지속적 유지에 대해 논의한 단어가 아니다.
(3) '알마'와 동일 어근인 남성 명사 '에렘'(*)은 결혼 전의 풋내기 소년을 일컫는 말이다.
* 삼상 17: 56 - 왕이 이르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 삼상 20: 22 -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4) 고대 비문에 새겨진 '알마'와 동근어(同根語) 고대 우가릿(Ugarit)어 'glmnt'가 오직 결혼 전 여자에게만 사용되었다.
결국 '감추다', '숨기다'는 뜻의 '알람'(*)에서 유래한 '알마'는 처녀성의 계속적 유지에 관심을 둔 용어인 '베툴라'와는 달리 남자와는 격리되어 순결히 자라온 처녀, 곧 동정녀임을 확정지을 수 있다.
마태복음의 문맥의 전후 관계를 살펴 볼 때에 '처녀'는 마리아가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눅 1: 34)라고 한 것처럼 '동정녀'를 의미한다.
3]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 단어는 '예수'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사용되기보다 성부 하나님에 대한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역의 한 단면을 암시한다(사 7: 14).
'임마누엘'(*)은 '함께'(with)라는 뜻의 히브리어 '임'(*)과, '우리와'(us)라는 뜻의 '마누'(*), '하나님'(God)이란 뜻의 '엘'(*)이 결합된 형태로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메시아와 예수가 되실 뿐 아니라 그분이 곧 죄악으로 인해 절망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이 땅에 강림하신 하나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God with us) 분이심을 강조한 호칭이다.
실로 죄로 인해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인간들을 화해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어 주실 이시다.
* 요일 4: 10 -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중보자이신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다가
* 요 1: 14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헬, 참이)가 충만하더라.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영원한 하나님 그 자체이시다.
* 마 28: 20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죄 사함을 받고 그분의 실존(existence)을 날마다 인정하는 백성들은(21절) 모두가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4] 임마누엘
'임마누엘'. 이보다 큰 기쁨의 소식이 있을까? 우리 인류 역사에 있어서 이보다 크고 놀라운 소식은 없을 것이다.
(1)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
양에게는 이리가 함께 있는 것이 유익한 일이 될 수 없다. 선한 무리 속에 사악한 자들이 자리를 같이함이 해가 됨은 자명한 일이다. 그러나, 철없는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함께 있는 것은 어떠한가? 유약한 자를 보살피고 사랑으로 돌보는 이가 같이 있다는 것보다 행복한 일은 없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다.
① 그분은 우리를 조성하신 분이다.
어떤 사물이든 모든 면에서 그것을 만든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거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누가 하나님보다 우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는가?
② 그는 우리를 사랑하신 분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세요. 그가 왜 거기에 매달려야 합니까? 소리 없는 그 아릌의 외침은 천둥소리보다 더 크게 우리에게 들려지지 않습니까? '내가 너를 사랑했노라'고.
③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기를 원하신다.
그는 우리가 고아와 같이 외롭고 고통당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 요 14: 18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때문에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돌보기 위함이요, 모든 원수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함이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다.
(2) 우리와 함께하신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 사탄과 죄의 종으로 전락한 우리를 그분이 찾으셨다.
① 하나님과의 화목을 의미한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단절되었다. 죄로 멍든 가슴, 피 묻은 손으로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가 가능하겠는가? 때문에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친히 작정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근본적으로 치료하고 사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내포하고 있다.
② 모든 삶에 그의 도우심이 보장되었다.
우리는 능히 사탄과 싸울만한 능력이나 지혜가 없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슬픔이나 환란을 대적할 인내나 용기도 없다.
우리 주변에 있는 수 많은 사람이 죄악에 넘어지고 실패로 좌절하고 있지 않습니까? 갖가지 슬픔과 고통으로 인해 삶을 포기한 이들 또한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넘어뜨리고 삼키려는 원수가 세상의 임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사탄의 궤계를 부수고 그의 머리를 발로 밟으신 이가 우리의 모든 고난을 궤휼하신 이가 친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것이다.
* 사 53: 4-5 –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③ 그의 함께 하심은 부담이 아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기쁨을 아십니까? 또는 같이 있기가 거북하고 민망한 사람과 함께 있는 부담을 이해하십니까? 예수! 그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일평생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었다.
세리도, 문둥병자도, 아니 모든 죄인이 부담없이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예수다. 흠 있고, 불완전한 인간! 심히 부패하여 치료가 불가능한 우리의 다정한 친구,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 분, 그분이 예수다.
④ 결코 헤어짐이 없다.
에덴동산의 헤어짐은 그분의 마음을 심히도 아프게 했다. 때문에 그는 계획을 세우셨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우리는 주님을 떠났으나 그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다.
이제 다시는 헤어질 수 없는 길을 그가 만드셨다.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 롬 8: 31-39 –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3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3) 임마누엘이 누구에게나 기쁜 소식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지만 죄에 머물기를 원하고 세상 것에 분주하여 그리스도의 청을 받아들일 준비가 없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심판의 소리가 된다.
이리에게는 목자가 없는 이들에게는 이것이 오히려 심판의 소리가 됩니다. 이리에게 목자가 반가울 리 없고, 어둠을 사랑하는 이에게 빛이 어찌 기쁨이 되겠는가?
오늘 임마누엘의 소식이 당신에게 기쁨이 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나팔 소리가 더디 울리기를 바라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잘못된 자리에 있음을 깨닫고 회개하여 돌이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