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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1편 1절-3절.
51편.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1절-3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께서 다윗이 지은 죄를 아시고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회개토록 했다.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부잣집에 한 손님이 왔는데 이 부자가 자기 집의 많은 양떼 중에서 양을 잡아 손님에게 대접하지를 않고 가난한 집에서 딸처럼 키우는 양 한 마리를 빼앗아 잡아서 대접을 했다고 말했다. 다윗이 이 말을 듣고 분이 나서 그 놈을 죽이고 양을 4배나 갚아야 할 것이라고 말을 하니까 나단 선지자가 말하기를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요’ 라고 하니까 다윗이 그만 고개가 확 떨구어졌다.
사실 우리도 자기의 잘못은 잘 안 보고 남의 잘못만 유심히 보고 남의 잘못만 꼬집는 경우가 많다. 이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눈에 남의 잘못이 보여질 때 ‘나에게는 저런 잘못이 없을까?’ 하고 자기를 돌아봐야 한다. 다른 사람이 범죄 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 자기 자신을 먼저 바라보는 것이 현명한 사람이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잘못한 것이 밝혀졌을 때 보통 보면 자기가 지은 죄를 시인하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늘어놓기도 하고, 변명을 하기도 하고, 도망을 가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기가 지은 죄를 지적해 줄 때 그 죄를 시인한다면 이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라고 보여지고, 그 인격이 참으로 고상한 사람이라고 보여진다. 더 나아가 남이 자기의 죄를 지적해 주기 전에 자기 스스로 자기 죄를 깨닫고 스스로 시인을 한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고상한 사람이다.
인간 자기는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특수한 목적이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그리고 인격성 도덕성이 있어서 희로애락을 느낄 줄도 알고, 가치판단과 평가를 할 줄도 아는 존재다. 즉 선과 악에 대하여, 의와 불의에 대하여, 아름답고 추한 것에 대하여,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존귀와 영광에 대하여 알고 느낄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선을 행하면 마음이 기쁘고, 죄를 지으면 고통을 느끼는 존재가 바로 인간 자기 자신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후로 죄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로 인해 죄를 죄인 줄 모르고, 남을 따라 죄를 짓고, 약해서 죄를 짓고, 어쩔 수 없어서 죄를 짓고, 좋아서 죄를 짓고, 싫은데도 죄를 짓고, 고의적으로 죄를 짓고, 계획을 해서 죄를 짓고, 가만히 있으면서도 죄를 짓고, 일을 하면서도 죄를 짓고, 바로 한다고 했는데 죄가 되어있고, 이래저래 죄를 짓는 것이 참으로 많고, 어떻게 보면 살고 있는 자체가 죄만 짓는 것 같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이래도 죄, 저래도 죄이니 그 말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왜 선지자를 보낸 거냐? 죄를 지적하여 회개시켜 온전자로 만들어 주려고. 깨닫고 보면 다윗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고치고 바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거다. 죄를 짓고 깨끗케 될 수 있는 기회, 고통을 덜고 기뻐할 수 있는 기회, 죄의 노예에서 진리의 참 자유자로 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거다. 그래서 회개의 기회를 얻은 자는 참으로 복된 자라고 할 수 있다.
선지자가 자기에게 올 때는 분명히 진리와 성령이 같이 오는 거다. 그래서 자기에게 선지자의 말이 왔을 때 인간의 말로 받거나, 우습게 여기거나, 하찮게 여기게 되면 바로 고칠 기회를 영원히 놓치게 되는 거다. 이것은 자기 축소요 자기 재앙이 된다. 자기 눈앞에 금방 재앙이 안 떨어진다고 해서 그냥 하나의 인간의 말로 듣고, 그런 생각과 마음이 점점 굳어져서 자극이 없다면 자기 스스로에게 재앙이 된다.
학생이 선생님의 말씀대로 공부를 열심히 하면 사회에 나가서 얼마든지 존귀영광 부귀 영광자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안 들으면 자기 실력의 축소요, 옳은 말씀을 받지 않는 그것이 누적이 되고 굳어지게 되니 이 학생의 앞날은 망하는 거다.
1절: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다윗이 곧바로 회개할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 같으면 안 그렇다고 잡아떼고, 듣기 싫으면 도망을 가버리고, 교인들 같으면 교회에 안 나올 거다.
나는 간혹 생각해 보는데, ‘우리교회에서 내가 한 성도를 일으켜 세워서 정말 얼굴을 들지 못하도록 야단을 친다면 이 사람이 다음 주일에 교회에 나올까?’ 하는 궁금증이 있다. 자기가 어떤 실수를 했을 때 목사님이 나를 교인들 앞에 일으켜 세워서 야단을 하면 ‘목사님, 그런 얘기는 나에게 일대 일로 하면 되는 거지 왜 여러 사람 앞에 불러서 망신을 줍니까? 그렇게 하니 시원하십니까?’ 라고 할 거다. 다윗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인격자의 세계에서는 ‘선한 것이다, 악한 것이다. 죄가 된다, 죄가 안 된다’ 라고 하는 법의 기준이 있다.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떠난 이방세상에서는 양심을 써서 서로 의논을 해서 법이라고 하는 기준을 정하여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법은 하나님 앞에 저주 받고 타락된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양심을 써서 세운 거다. 이게 세상법이다.
각 나라마다 법을 만들어서 이 법을 기준으로 살고 있지만 나라마다 죄를 말하는 기준이 조금씩 다르거나 정 반대일 경우도 있다. 예를 들자면 지금도 그런 나라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어느 나라에서는 자기가 신던 신발에 침을 뱉어서 상대방의 뺨을 때리는 것이 인사라고 하는데, 만일 다른 문명국가에서 이런 인사를 했다가는 폭행죄로 당장 끌려가고 말 거다.
세상을 보면 같은 사람인데도 같은 것을 가지고 어떤 때는 죄라고 했다가, 어떤 때는 죄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한 나라에서 같은 시대에 사는 법률가라고 해도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이 사람은 죄라고 하고, 저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하기도 한다. 또는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이건 죄가 아니다’ 라고 하시는데 인간들은 선악과 따먹은 자기들의 차원에서 ‘죄다. 아니다’ 라고 하면서 죄가 큰 사람에게는 벌금을 내게 한다거나 사형선고를 내린다거나 한다.
믿는 우리는 일반적으로도 법에 걸리는 일을 하면 안 된다. 남을 속이려고 하지도 말고 매사에 똑바로 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큰소리를 할 수 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 법에 걸리는 일을 하게 되면 나중에 골치가 아파지고 인격 면에 수치스럽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으로도 양심을 써서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이 죄를 안 지으면 상당히 자유롭지만 뭔가가 흉허물이 잡힐 게 있으면 항상 불안하고,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할지라도 자기 스스로 인격 면에 수치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세상은 같은 일을 가지고 사람에 따라 죄라고 하기도 하고, 죄가 아니라고 하기도 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고 한 것도 있다. 무슨 말이냐? 테레비에 변호사들이 나와서 어떤 사건에 대해 ‘죄다, 아니다’ 하는 주장을 하는 게 있는데, 이 때 이 사람의 말을 들으면 이게 맞는 것 같고, 저 사람의 말을 들으면 저게 맞는 것 같고 한 게 있다.
이처럼 양쪽이 다 일리가 있게 보일 때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기에 대 놓고, 진리 법을 거기에 대 놓고 진리 따르는 양심으로 그 사건이나 일을 하는 사람을 보되 행동 이전에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그 면을 보고 판단을 해야 한다. 세상은 무슨 증거를 가지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불법이다. 성경에 보면 재판은 누구에게 속한 거다? 하나님에게 속한 거다. 그래서 사실 세상의 재판관이라도 진리를 아는 재판관이라야 바른 판결을 할 수 있는 거다.
믿는 우리는 절대로 세상 법을 하나님 법처럼 믿지 말아라. 세상 법에 걸릴 일도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지혜롭게 바로 살아라. 좀 가난하게 살더라도 하나님 앞에 바로 사는 게 떳떳한 거다.
하나님도 인간들처럼 시대마다 죄를 정하는 것이 다를까? 언제나 같다. 국법을 어긴 죄인이 형을 다 살고 나오면 자기 나라 국법에는 자유인이 되는 거지만 하나님의 법에도 자유인이 되는 거냐? 안 된다. 여전히 죄인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여전히 죄인이다.
세상사람들이 설령 국법을 어기지 않고 자유자로 산다고 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다. 또한 인간들끼리 상을 주고 벌을 주고 해도 상을 주는 사람이나 상을 받는 사람이나, 벌을 주는 사람이나 벌을 받는 사람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다. 우리는 성경의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로 기본구원을 얻었지만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덧입어 나가는 구원이 없다면 그 면에 죄가 되는 거다. 이 죄는 지옥에 가는 죄가 아니라 얻어맞는 죄가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일반적인 죄를 짓지 않고 일반적인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다면 일반적인 사람들이 볼 때 죄인이냐, 의인이냐, 보통사람이냐? 보통으로 그냥 사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 죄인이다. 왜 죄인이냐?
학생이라면 신앙 식으로 말한다면 공부를 잘 하는 것이 의인이냐, 공부를 못 하는 것이 의인이냐? 공부를 잘 하는 거다. 공부를 못하면 얻어맞는다. 공부를 못하면서 노력도 안 하고 있다면 얻어맞는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공부를 잘하는 다른 학생까지 살살 꾀어서 공부를 못하도록 한다면 상을 줘야 하느냐, 얻어맞아야 하느냐? 많이 얻어맞아야 한다. 그런데 세상은 꼭 그렇지 않고 의를 행하고도 얻어맞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기본구원을 얻었지만 이뤄나가는 이룰구원 성화구원 면에 열심도 없고 마음도 없다면 이건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거다. 말하자면 얻어맞는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어나가는 면이 없다면 이 자체가 하나님을 닮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요, 이런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게 할 수 있는 죄행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거다. 앞에서 말한 다윗처럼 그 말이다. 언행심사적으로 얼마든지 죄가 나올 수 있다.
또한 이룰구원을 이루어 나가지 않을 때 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 쪽이 아닌 세상 쪽을 바라보는 상태이기 때문에 때 순간적으로 옆을 바라보고, 땅을 바라보고 얼마든지 죄행이 나올 수 있는 거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이 적극적이고 돌격적이고 정복적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신앙정신이 얼마나 팔팔 살아야 하겠느냐? 늘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던 죄 용서와 탕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다. 죄 용서와 탕감은 인간이나 이방신이 할 수 없고, 또 안 되는 것이고, 혹 자살을 한다고 해도 그 죄는 여전히 있는 거다. 하나님 앞에서 해결을 하고 가야 한다.
세상사람들은,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도 대부분 일반적으로 무엇이 죄인지를 알고 있다. 양심적인 죄도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대부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어떻게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인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 있는 거다. 나는 의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죄일 수가 있다.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마음대로 살아놓고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적당히 둘러서 말을 하면 안 되는 거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으려면 인자와 긍휼과 자비가 있는 분 앞에 가야 한다. 이것은 우리 인간들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가 지은 죄를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께는 기다려 주심이 있고, 불쌍히 여기면서 그 죄의 고통을 들어주심이 있다. 한 마디로 아가페 사랑이다. 인간의 사랑을 가지고는 죄 사함이 안 된다. 인간에게는 아가페 사랑이 없다. 그러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던 당장 안 죽이고 왜 기다려 주실까? 우리의 영원 궁극적 결과적 구원이 있기 때문에 당장 안 죽이는 거다. 다시 말하면 회개의 기회를 주는 거다.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은 영원 궁극적 구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원 궁극적인 구원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기다려 주심을 믿고 우리가 또 죄를 지을까?
이 영원 궁극적인 구원은 예수 믿는 사람에게 다 있는 건데 이걸 모른 채 사는 사람은 얼마나 불쌍하냐? 영원 궁극적인 구원이 있다는 것, 영능의 실력으로 누릴 수 있다는 것, 이것 때문에 죄를 짓더라도 나를 당장 죽이지 않는다는 것, 당장 죽이지 않는 것은 회개해서 구원을 이루라는 거다. 그러니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냐? 그렇지만 하나님의 이 아가페 사랑을 역이용하면 그 때는 괘씸죄까지 들어가는 거다.
그러면 이 영원 궁극적 결과적인 구원이 얼마나 귀한 것이기에 우리가 죽을 죄를 지었어도 기다려 주실까? 그 이유는 우리를 죽이는 것보다도 영원 궁극적 구원이 더 크다는 거다. 이건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육신의 생명을 거두어 가신다고 하면 우리의 이룰구원은 없는 거다. 그러니 이 이룰구원이 얼마나 중요하냐? 이것 때문에 슬픔과 고통과 불행이 되더라도 회개를 시켜서 이룰구원을 이뤄나가게 하는 거다. 자기의 목숨보다 이룰구원이 더 크다. 이 이룰구원이 있기 때문에 고통 중에 사는 성도를 안 데려가는 거다.
창세 전 영원 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영원 궁극적 결과적 구원이 설정이 되었기 때문에 이 구원을 위해서 인간 자기를 만든 거다. 즉 신령천국에서 실력대로 누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를 만들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어느 게 더 귀한 거냐? 구원이 귀한 거냐, 인간 자기가 귀한 거냐? 인간이냐? 지옥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 없다. 구원보다 인간이 더 귀하다면 인간을 지옥에 보내면 안 되는 게 아니냐? 그러니까 구원이 더 귀한 거다. 구원은 당신의 나라의 누림성을 말한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구원이 있는 거지 하나님이 없으면 구원이 없다. 따라서 구원이 없다면 자기도 존재가 되지 않는 거다. 하나님이 계시니 구원이 있고, 구원 때문에 자기를 만든 거다. 그런데 자칫 잘못하면 인간이 앞설 수 있다. 물론 인간이 귀한 거다. 한 영혼이 귀한 거다. 그런데 지옥에 가도 영혼이 많다. 이걸 볼 때 영혼이 귀한 거냐, 구원이 귀한 거냐? 구원이 귀한 거다. 이룰구원이 귀한 거다.
단순히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귀한 게 아니라 구원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존재케 했고, 사물이 돌아가게 했고, 인간 자기를 인격자로 만든 거다. 따라서 인간 자기가 구원을 귀하게 여기면 그 수준이 하나님처럼 올라간다. 구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죄 사함이 있는 거고, 주님에게는 우리의 죄가 도말이 될 수 있는 많은 자비가 있으시다.
2절;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죄를 말갛게 씻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옷이 더러우면 빨래비누로 비비고, 방망이로 두드리고, 헹구고, 그래도 안 빠졌으면 또 두드리고 헹구고 하듯이 우리의 죄를 말갛게 씻으려면 사건 환경의 갖가지 몽둥이가 필요하다. 누구에게? 빨래에게? 인간 나에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치 않고 있다면 자기의 성격 성질이 고쳐지지 않고, 얻어맞게 되고, 얻어맞으면 맞을 적마다 고통이고 병이 자리를 잡게 된다. 병도 합병증이 있다. 이러면 약 쓰기가 힘들다. 어느 한 쪽을 낫게 하려고 하면 어느 한 쪽은 망가져야 한다. 우리가 육적인 면에 병이 안 들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마음이다. 사람이 마음까지 병이 들어놓으면 끝장이다. 그래서 몸은 아프더라도 마음은 병들지 말아야 한다. 마음이 건강하면 몸을 움직여 나가고, 몸의 모든 고통을 이길 수 있다. 이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다.
그래서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만능이라. 하나님의 말씀 하나가 창도 되고, 칼을 만들 수도 있고, 투구도 병기도 다 만들 수 있다. 만능이다. 사람의 심령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지혜도 되고, 지식성도 되고, 도덕성도 들어가고, 성품이 바뀌는 거고, 만능이다. 이게 진리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역사를 한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장사 잘 된다’ 라고 한다면 이게 어떻게 만능이냐? 이게 어떻게 만능적으로 역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냐?
‘자기의 죄 + 자기의 성질 + 얻어맞는 사건 + 아픔’까지 더해지면 이건 합병이 되어서 점점 고치기 힘들어진다. 이렇게 되면 얻어맞으면서도 풀리지 않고 더 꼬이게 된다. 이런 상태인 나의 죄를 말갛게 씻기실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
3절: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자기가 지은 죄는 누구 앞에 가 있겠느냐? 남 앞에 가 있느냐? 자기 앞에 있다. 자기 속에 있다. 자기가 지은 죄가 다른 사람 앞에 가 있는 걸 봤느냐? 자기가 지은 죄를 다른 사람에게 떠 밀면 다른 사람에게 가고, 그 사람이 그 죄를 또 나에게 떠 밀면 나에게 오는 거냐? 내가 지은 죄는 내 앞에 있고, 다윗이 지은 죄는 다윗 앞에 있는 거다. 다 자기 앞에 있다.
그런데 왜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을까? 왜 내 뒤에 있지 않고 내 앞에 있느냐? 뒤에 있으면 안 보일 게 아니냐?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으니 그 죄가 항상 보이는 것인데, 그 죄를 보기가 좋겠느냐, 나쁘겠느냐? 나도 보기 싫고, 남도 내 죄를 보기가 싫다. 그러니까 죄가 내 앞에 있다는 것은 내 얼굴이 추해진다 그 말이다.
죄가 내 앞에 있으면 이 죄 때문에 양심이 찔리고 고통스럽다. 죄가 내 앞에 있으면 나의 도덕성이 자라지 못하고, 죄가 내 앞에 있으면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죄가 내 앞에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중단이 되고, 죄가 내 앞에 있으면 사단 마귀의 종이 되고, 죄가 내 앞에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를 쌓게 된다. 그러니까 빨리 빨리 털어내는 것이 좋겠느냐, 내버려두는 것이 좋겠느냐? 몸에 종기가 나면 고름이 생기는데, 이 고름을 그대로 오래 오래 두면 살이 되느냐? 결국은 고름의 균 덩어리가 자꾸 몸을 먹어 들어간다. 우리의 죄도 마찬가지이니 우리에게 죄가 있으면 빨리 빨리 회개하고 없애버려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