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2.12.; 성모신심미사 (창세 12,1-7; 마태 2,13-23)
제1독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가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칠 것입니다(루카 1,55).>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
12,1-7
그 무렵 1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2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3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4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5 아브람은 아내 사라이와 조카 롯과,
자기가 모은 재물과 하란에서 얻은 사람들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길을 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6 아브람은 그 땅을 가로질러 스켐의 성소 곧 모레의 참나무가 있는 곳에 다다랐다.
그때 그 땅에는 가나안족이 살고 있었다.
7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주겠다.”
아브람은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을 위하여 그곳에 제단을 쌓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13-15.19-23
13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14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15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19 헤로데가 죽자, 꿈에 주님의 천사가
이집트에 있는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20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거라.
아기의 목숨을 노리던 자들이 죽었다.”
21 요셉은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22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아버지 헤로데를 이어
유다를 다스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가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다가 꿈에 지시를 받고 갈릴래아 지방으로 떠나,
23 나자렛이라고 하는 고을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무염시태 성모신심의 역사적 위력
1858년 2월 11일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서 프랑스 루르드에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께서 주신 메시지는 당신이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말씀으로서, 4년 전에 반포되기는 했으나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못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것과 지상 생애를 마치시고 승천하셨다는 교리 정식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신자들의 구두 전승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다가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야 정식으로 믿을 교리로 반포되었습니다. 그만큼 신학자들과 교황청 관료 성직자들이 심사숙고를 거듭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를 믿을 교리로 반포해 달라는 신자들의 청원이 열화와 같이 빗발치자 이 두 가지 교리 명제 모두 교황의 무류지권을 발동하여 반포되었습니다. 루르드 성모 발현 4년 전인 1854년 12월 8일 발표된 교황 비오 9세의 교서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으로부터 확정된 ‘성모 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는 1950년 11월 1일에 교황 비오 12세가 회칙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 성모 승천 교의를 선포하는데 보다 큰 밑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무염시태 교리가 정식으로 확정되기 16년 전인 1838년에 조선교구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 주교는 조선으로 향하는 길에 새로운 조선교구의 주보로 ‘무염시태 성모’로 정해 달라고 교황청 포교성에 청원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그동안 북경교구의 주보인 성 요셉을 공동 주보로 모실 것을 조건으로 허락하였습니다.
이는 남부 프랑스 지방 마리냔느 출신인 앵베르 주교가 이 지방 신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열렬한 무염시태 신심의 영향을 받은 데다가, 한참 혹독한 박해가 진행 중인 조선교회의 주교로 임명되어 가면서 이 박해가 하루라도 빨리 종식되기를 바라면서 혹여 박해가 길어진다 해도 박해를 받는 천주교 신자들이 배교하지 않고 치명의 영광을 누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지향에서였을 것입니다. 이 뜻에 따라서, 과연 박해가 공식적으로 종식된 후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명동성당을 1898년에 축성할 때, 성당의 주보로서 무염시태 성모를 지정하였습니다. 무염시태 성모를 한국 교회의 주보로 청원할 때의 지향이 60년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의미는 자못 큽니다. 18세기 말엽에 이 땅에 들어온 천주교는 반만년 한민족 역사에서 작금의 2천 년 동안 거슬러 흘러가던 흐름을 하느님의 뜻대로 돌려놓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 조선왕조는 두 가지 커다란 모순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본시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손이라는 천손의식으로 오랫동안 살아오던 민족을 양반 계층 위주로 백성을 신분으로 나누어 차별하던 불평등 신분 사회를 유지하고 있던 점이고, 다른 하나는 본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홍익인간 사상을 받아 살던 민족을 사대주의에 빠진 양반 사대부들이 중국 송 왕조의 주자학을 마치 국교라도 되는 것처럼 유교로 교조화시켜 통치하면서 명 왕조의 속국으로 자처하느라 하느님 신앙을 억누르고 천시해 왔으므로 하느님을 믿을 자유가 허용되지 않았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천주교는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교리를 천명하고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양반도, 상민도, 천민도 다 같이 믿음의 벗이라는 뜻으로 교우로 불렀던 교우촌의 실천이 그 역사적 증거입니다. 또 천주교는 모든 신자들이 매일 하느님께 기도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매일의 기도는 제물 없이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였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교리는 불교와 유학이 들어온 이래 금지되어 온 하느님 제사를 천주교가 재개한 것으로서, 고구려 시대 이래 2천 년 동안의 금기를 깨뜨린 일이었습니다.
- 이 점이 서양에서 천주교를 전파할 때 조선보다 앞서 선교한 두 이웃 나라와 근본 정신적 토양이 달랐던 점인데다가, 이 두 나라와는 지금도 민족성에 있어서나 신자들의 교세에 있어서도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이유입니다. -
이는 백성을 신분으로 차별하고 하느님을 믿지 못하게 해 오던 조선 왕조의 아킬레스 건을 천주교가 평등 교리와 기도 교리로 혁파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닙니다. 피지배층이 지배층과 다른 가치관을 내세워 저항한 일은 반만 년 역사에서 여러 번 일어났지만, 조선시대 천주교 신자들처럼 무려 백 년 동안이나 저항한 적은 역사상 처음이었고, 더군다나 무기 하나 들지 않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저항한 집단은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무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오직 무염시태 성모 마리아께 드리는 묵주뿐이었습니다. 이 기도의 무기로 천주교 신자들은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자유와 인간으로서 평등해야 함을 끝내 관철해 낸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을 향한 이 같은 움직임은 한민족 역사 안에서 정신적이고도 사회적인 혁명이었으며, 전무후무한 기적이었습니다. 자유와 평등의 최고선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 낸 무염시태 성모신심의 힘이 이토록 큽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의와 평화의 최고선 가치와, 인간 존엄성을 모든 이들에게 공정하게 보장하되 사회적 약자들에게 우선적으로 배려하는 공동선 가치가 남았습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