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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원하는 자는(48)
말씀: 계 22:12-21. 2025년 3월 23일 일요일 오후 2시
오늘은 계시록의 결론 부분입니다. 크리스천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서 뭔가를 하며 살아야 합니다. 구원 받았으니 끝이란 생각을 한다면 그 사람은 속은 것입니다. 구원은 영적 생활, 믿음의 경주에서 시작일 뿐입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삶에서 주어진 달려갈 길이 있습니다.
침례 요한은 “자기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행13:25).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달려 갈 길을 마쳤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끝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므로](딤후4:7). 우리 역시 “.....인내로 우리 앞에 놓여 이는 경주 길을 달려가며”(히12:1)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푯대를 향해 밀고 나가야 합니다(빌3:14).
구원은 이 길에서 시작이요 출발일 뿐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기뻐하는 일도 좋지만 이제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이기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고 상을 받기 위해 달려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 한 일들을 통해 우리의 영원의 삶이 결정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우리가 한 행위대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각자 회계 보고를 해야 하며(마18:23, 롬14:12, 벧전4:5) 우리가 한 모든 일들이 낱낱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이 주신 구원을 일해서 드러내야 합니다(빌2:12).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은 선한 행위를 통해 밖으로 드러나야 하며 많은 이들에게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아무도 볼 수 없지만 믿음의 행위는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사랑은 볼 수 없지만 사랑의 수고와 섬김은 누구나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것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요13:35). 사랑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란 신분증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안수 증을 주시거나 증명서나 추천서나 기타 인증 샷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제자란 신분, 자격을 드러내 보이고 증명하는 길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의 회원증이나 침례 증서나 신학교 졸업장을 보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아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을 압니다. 사람들은 성령을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열매는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온유함을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 부드러우며 모든 사람에게 온전히 온유함을 보이게 하라.”(딛3:2)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이 계시느니라.](빌4:5)고 합니다. 보이게 하라, 알게 하라...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진정한 사역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입증하고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너희 자신을 검증하라.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살펴보고 너희 자신을 검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는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알지 못한다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들이니라.](고후13:5). 이것은 성경의 명령입니다.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검증하라. [너희는 이 세상에 동화되지 말고 너희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그 선하시고 받으실 만하며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검증하도록 하라.](롬12:2).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라. [오히려 모든 일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입증하되...](고후6:4)
★주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인지 검증하라. [[주]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무엇인지 검증하라.](엡5:10).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라. [너희가 뛰어난 것들을 입증하고 그리스도의 날까지 순전하고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며](빌1:10).
우리는 구원 받은 자들로서 자신에 관해서 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이제 구원 받았으니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사람만큼이나 어리석은 자들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회계 보고를 해야 하는 심판이 남아 있다는 사실과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할 행위대로 주리라.](계22:12).
“보라”는 말씀은 계시록에서만 26번이나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그 중 여섯 번은 주님의 오심과 관련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보라.” 이 말은 우리의 관심을 집중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12).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시면서 “보라. 내가 속히 가리니...”라고 하지 않으시고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하십니다. 우리나라말과는 어감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곧 갈게”라고 하는데 영어에서는 “I’m coming”이라고 합니다. 영어를 배울 때 come이란 단어는 ‘오다, 가다’란 뜻이 다 있습니다. come은 기준이 되는 위치나 장소, 시간, 상태, 정도로 가까워진다는 어감입니다.
우리나라말로는 “내가 네게로 갈게”라고 하면 영어로는 “I'll come to you.”라고 합니다. 밖에 있다가 안으로 들어갈 때도 “I’m coming”합니다. 그쪽으로 간다고 할 때도 “I will come there”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번역된 come은 하늘을 기준으로 보면 간다고 되고 땅에 있는 우리를 기준으로 하면 온다고 합니다. go는 대상과 멀어지는 것, come은 대상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때에 항상 come을 씁니다.
주님은 속히(곧)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오심은 멀지 않습니다.
“내가 줄 보상이 내게 있어...”(12). 성도들에게 주의 오심은 보상의 때이고 불신자들에게 주의 오심은 심판의 때입니다. 구원은 은혜의 선물이지만 보상은 행위에 따른 삯입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주님이 주시는 보상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는 보상이 무엇인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편 심는 자와 물 주는 자는 하나이며 저마다 자기 수고에 따라 자기 보상을 받으리라.](고전3:8).
보상은 “자기의 수고에 따라”받습니다. 일한 대로 받는 것이 보상입니다. 구원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따라 받는 것이고 보상은 우리가 주를 위해 한 일에 따라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고전3:14-15).
우리가 한 일이 불에 타면 보상을 받지 못합니다. 육신의 행위는 불에 타 버릴 것입니다. 죽은 행위는 모두 불에 타 없어져 버릴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해 한 행위, 사람들의 칭찬이 즐거워서 한 행위는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내가 자원하여 이 일을 하면 보상을 얻겠지만 내 뜻에 반하여 한다 할지라도 복음의 분배 사역이 내게 맡겨졌느니라.](고전9:17). 보상을 얻는 요건 중 하나가 ‘자원하여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리스도의 치욕을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는데 이는 주께서 보상으로 보답해 주시는 일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히11:26). 우리는 부르심의 상을 받기 위해 모든 일에 절제하고 달려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히11:6).
[너희가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3:24).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보상을 주에게서 받는 줄을 압니다. 보상은 은혜의 선물이 아니라 섬기는 자에게 주시는 삯입니다.
본문12절을 다시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할 행위대로 주리라.](계22:12). 주님께는 각 사람에게 줄 보상이 있는데 각 사람의 행위에 따라 주십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이 주를 위해 일한 모든 수고와 섬김, 행위, 고난 등은 충분한 보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롬14:10-12, 고후5:10, 고전3:11-15).
13절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계22:13).
주님께서는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라고 4번(계1:8,11,21:6,22:13) 나오는 주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주님은 말씀이시며 글자이십니다. 주님께서 요한에게 히브리어의 첫 글자와 마지막 글자인 알렙과 타브라고 하지 않으시고 헬라어인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심으로 신약 성경의 원어가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임을 확정해 주셨습니다.
하늘에서 천사들은 히브리어로 말했고 히브리어로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은 자신을 일컬어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라고 하심으로 계시록 뿐 아니라 신약 성경이 헬라어 원문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요 처음과 마지막이라.”(13). 이 말씀은 주님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작이시고 그분이 끝입니다. 그분보다 먼저이거나 앞선 것은 없습니다. 그분 뒤에 있는 결론은 없습니다. 모든 시작과 끝, 처음과 마지막이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시편에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나이까? 땅에서는 주 외에 내가 사모할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시73:25)란 말씀대로 주님이 전부(all)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려 하시며(고전15:28)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엡1:23). 성경은 말하기를, “.......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시느니라.”(골3:11)고 하시는데 이것이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 처음과 마지막이란 정확한 뜻입니다.
14절입니다.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이것은 그들이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소유하게 하며 그 문들을 지나 그 도시로 들어가게 하려 함이니라.](계22:14).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소유하려면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새 예루살렘에는 12개의 문이 있는데 이 문들을 통과해 그 도시로 들어가려면 그분의 명령들을 행해야 합니다. 큰 환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그분의 명령들을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행위가 없다면 그는 생명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소유하지 못합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큰 환란 때나 천년 왕국에서 사람들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고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크리스천들은 생명나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크리스천들은 문들을 지나 그 도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원 받은 민족들, 땅에 사는 사람들은 천년 왕국에서나 영원 세계에서 철저히 주의 입에서 나오는 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15절입니다. [개들과 마법사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누구든지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밖에 있느니라.](15).
성경에는 많은 짐승들이 나오는데 그 중에 개들은 믿지 않는 남자들, 돼지는 믿지 않는 여자들을 말합니다(벧후2:22, 잠26:11).
주님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을 비롯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뱀들과 독사들이라고 하셨고 거짓 대언자와 거짓 교사들을 양떼를 해치는 이리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을 가지고 일하는 사역자들을 일하는 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혹시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 할지모르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개들을 애완동물 차원을 넘어서 반려 동물이니 가족이니 딸이니 아들이니 하면서 집 안에서 키우고 침대 안에서 끌어 않고 자며 사람들처럼 먹고 자게 합니다. 어쩌다가 사람이 개를 낳았는지 아빠다, 엄마다. 하며 스스로 자신도 개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개들은 집 안에 있지만 방 밖에 있는 것이 정상인데 오늘날 개들은 거실은 물론이요 아예 침실로 들이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부정적으로 말씀하신 개들을 그들의 경계밖에 두지 않고 한 방과 한 침실에 끌어들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개들은 부정한 짐승이요(사66:3, 마7:6)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동물입니다. 성경은 “개들을 조심하라.”(빌3:2)고 말했는데 이는 비유적으로 믿지 않는 할례파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이지만 사람들은 개 취급하면 기분나빠하면서 개를 사람취급 한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개들과 마법사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누구든지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밖에 있느니라.”(계22:15)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깨끗하고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곳에 더러운 것들은 들어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물론 이들은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가증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쟁이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하시니라.] (계21:8) 땅에 이런 자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는 신속하게 심판이 집행되어 바깥 어둠 속에 던져질 것입니다(마8:12, 22:13, 25:30).
“밖에 있느니라.”(15)는 말씀은 성경에서 여러 번 나오는 말씀입니다.
[집주인이 한번 일어나 문을 닫으면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며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하여도 그가 너희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눅13:25). 여기서 밖은 집 밖인데 밖에 있다는 말의 1차적 의미는 구원 받지 못한 자들입니다.
구약에서는 이방인들을 이스라엘 밖에 있는 자들(엡2:12), 율법 밖에 있는 자들(롬2:12)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연방 밖에 있던 외인들이며 약속의 언약들에서 분리된 낯선 자들이요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 밖에 있던 자들이었으나](엡2:12).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들이라고 불렀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모두 문 밖에 있게 될 것입니다. 크리스천들이 밖에 있는 자들이라고 할 때는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데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이란 말입니다(고전5:12,13). 크리스천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고 불신자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몇 구절을 보겠습니다.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해서는 시간을 되찾으며 지혜롭게 걸으라.](골4:5). 밖에 있는 자들이란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합니다. [이것은 너희가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해 정직하게 걷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에게 어떤 것도 부족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살전4:12). 크리스천들은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해 정직하게 걸어야 하며 ‘좋은 평판을 받아야’ 합니다(딤전3:7).
예수 그리스도는 진영 밖으로 나가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고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이십니다(롬3:21).
[그 짐승들의 피는 죄로 인해 대제사장이 성소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고 그것들의 몸은 진영 밖에서 불사르나니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친히 자신의 피로 백성을 거룩히 구별하시기 위해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의 치욕을 짊어지고 진영 밖에 계신 그분께로 나아가자.](히13:11-13).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밖에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진영 밖에 계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왕국이 이 땅에 세우진 후로부터 우리는 안에 있게 되고 개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들은 밖에 있게 됩니다. [더럽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결코 그곳으로 들어가지 못하며 또 무엇이든지 가증한 것을 이루게 하거나 거짓말을 지어내는 것도 들어가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계21:27). 새 예루살렘에는 밤이 없고 문이 언제나 열려 있지만 이들은 결코 들어가지 못합니다.
16절입니다. [나 예수는 내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 안에서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후손이요 빛나는 새벽별이니라.](계22:16).
“나 예수는...”(16). 주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실 때 받은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 안에서 이것들을 증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천사들을 통해 요한에게 계시되었고 그것들을 기록해서 각 교회들에 보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증언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계1:1)를 지금 듣고 보고 읽고 믿습니다. 이 말씀들은 참되고 신실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후손이요 빛나는 새벽별이니라.”(16).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라 불리시는데 이는 그분의 육신에 관한 것입니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롬1:3). 자신(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습니다.
다윗은 이 분을 ‘주’라 불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서 가르치실 때에 응답하여 이르시되, 어찌 서기관들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느냐? 다윗이 [성령님]을 의지하여 스스로 이르되,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그런 까닭으로 다윗이 스스로 그를 [주]라 부르는데 그러면 어찌하여 그가 다윗의 자손이냐? 하시니 보통 사람들이 그분의 말을 즐겁게 듣더라.](막12:35-37). 주님은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이신 다윗의 자손에 대해서 말씀을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당시 서기관들은 누구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 진리는 상식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씨에서 나실 한 사람을 “주”라 불렀는데 이는 그분이 자신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십니다(마1:1). 다윗의 아들들이 수백, 수천이 넘지만 성경이 말하는 다윗의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습니다. 유대인들인 “이 분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시냐?”(마12:23)라고 말할 때 다윗의 자손이란 뜻은 다윗이 주라 부른 그 분을 말합니다.
주님께 나아와 간구한 무리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했는데 다윗의 자손이란 뜻은 다윗의 씨에서 난 메시야(그리스도)를 일컫는 칭호입니다.
주님은 다윗의 도시에서 나셨고 다윗의 자손이라 불리며 다윗의 장막을 일으켜 세우고, 다윗의 왕좌에 앉으시며 다윗의 열쇠를 가지셨고(계3:7) 다윗의 뿌리이십니다. [장로들 중 한 사람이 내게 이르되, 울지 말라. 보라, 유다 지파의 [사자](獅子) 곧 다윗의 뿌리께서 이기셨으므로 그 책을 펴시고 그것의 일곱 봉인을 떼시리라, 하니라.](계5:5).
“나는... 빛나는 새벽별이니라.”(16). 새벽 별이라고 하면 흔히 금성(샛별)을 말합니다. 이 별을 계명성, 효성이라고 부르는데 새벽에 가장 잘 보이는 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새벽별이라고 하신 것은 그 때를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속에 떠오를 때까지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비치는 빛을 대하듯 이 말씀에 주의를”(벧후1:19) 기울여야 합니다. 이 시점이 교회의 휴거 시점입니다.
그리고 큰 환란이란 깊은 어둠의 날이 온 후 의의 해가 떠오릅니다. 천년 왕국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내 이름을 두려워하는 너희에게는 의의 해가 자기 날개들 안에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지고 떠오르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의 송아지들같이 자라리라.](말4:2).
새벽별은 주님의 공중 재림, 의의 해는 주님의 지상 재림입니다. 샛별과 해가 뜨는 사이가 큰 환란입니다. 주의 재림이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으로 두 가지가 있고 교회의 부활과 휴거, 큰 환란 성도의 휴거와 부활에 대해 알지 못하거나 부정하는 이들이 매우 많습니다. 특히 교회의 환란 통과론자들, 환란 후 휴거를 주장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새벽 별과 의의 해”의 차이를 정확히 구분할 줄 모릅니다.
17절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며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할지니라.](계22:17).
성령과 신부는 이 시대 복음 전파의 주체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데 교회를 사용하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성령과 신부는 세상을 향해 “오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듯이 우리는 주님과 동일한 목소리를 냅니다.
“오라.”(17). 우리 주님은 누구든지,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주님이 오라고 부르는 대상은 듣는 자, 목마른 자,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 예정이니 창세 전 선택이니 하는 교리가 헛소리요 거짓임을 알려 줍니다.
주님은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이라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원하기만 하면 그는 구원을 얻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대언자들을 죽이고 네게 보낸 자들을 돌로 치는 자야, 암탉이 자기 새끼들을 자기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얼마나 자주 네 자녀들을 함께 모으려 하였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눅13:34).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구원 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예정이나 선택을 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이 은총을 입지 못해서도 아닙니다.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란 말씀대로 죄인들은 주의 말씀과 주님을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요5:40). 이런 주의 말씀을 외면하고 계속해서 구원 예정이니 선택을 외치는 이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할 지니라.”(17).
여기서 우리는 “값없이”란 말씀을 봅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에서 맨 처음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네가 마음대로 먹어도 되지만](창2:16). 주님은 아담에게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은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대로란 말씀이 ‘값없이’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마음대로,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값없이 주신 것으로 시작해서 값없이 취하라는 말씀으로 끝이 나는 책입니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다루고 있습니다.
18,19절입니다. [내가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어떤 사람이 이것들에다 더하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대언의 책의 말씀들에서 빼면 [하나님]께서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을 빼시리라.](18,19).
성경의 마지막 경고가 18,19절입니다.
주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는 금지 명령을 주시고 경고하셨듯이 동일하게 이 책의 대언의 말씀들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경 말씀에 더하지 말고 빼지 말라는 경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하지 말고 빼지 말라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금지 명령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에 더하거나 거기에서 빼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나님]의 명령들을 지키라.](신4:2). 하나님은 사람이 주의 말씀에 더하거나 빼는 일을 금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을 지켜 행하고 너는 거기에 더하거나 그것에서 빼지 말지니라.](신12:32).
성경 변개, 성경 부패는 주님께서 엄히 금하신 명령입니다. 주의 말씀에서 오류를 고친다느니 더 완전한 성경을 만들겠다는 성경학자들이란 사람들이 넘치는 시대입니다. 여러분은 시중에 수 백 여개의 번역본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말씀을 더하고 빼고 바꾸는 일을 한 사람들의 작품입니다.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라. 그분께서 너를 책망하실 것이므로 네가 거짓말쟁이로 드러날까 염려하노라.](잠30:6). 구약 성경 39권에 탈무드, 외경, 위경 등을 더해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신약 성경 27권외에 이런 저런 경전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몰몬교는 몰몬경이 있고 안식교는 엘렌 G. 화이트가 받았다는 계시를 적은 책이 있습니다. 이단 종파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성경 외에 자신들만의 경전이 있습니다.
“너는 그분의 말씀들에 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한 단어, 한 글자도 더해서는 안 됩니다. 주의 말씀은 기록된 대로 읽고 그 기록된 대로 믿어야 합니다. 설교나 성경 강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말씀을 설명해 주고 기록된 대로 보여 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사람들의 해석이나 견해는 전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제가 잘 아는 형제님 한 분도 말씀을 기록된 대로 믿지 못하고 자꾸 앞뒤로 한 단어를 더하는 못된 버릇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대해 죽었다”고 하면 율법이란 말 앞에 ‘구전’이란 말을 넣어서 “구전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란 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혀 버렸습니다.
말씀을 혼잡케 하는 자는 주님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혼잡케 하시고 혼미하게 해 버리십니다. 성경의 단, 복수, 시제는 물론이요 대, 소문자까지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콤마나 마침표와 같은 구두점 하나에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원문 성경, 원어 성경, 고대 사본, 필사본을 들먹이는 자들에게 아무런 점수를 줄 필요가 없습니다.
원어 성경에는 띄어쓰기도 없고 대소문자도 없고 구두점도 없습니다. 지금 우리 손에 있는 킹제임스 성경은 최초의 원본과 동일한 성경입니다. 이런 말은 오늘날 소위 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에게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지만 성경을 믿는 신자들에게 주어진 주의 말씀은 킹제임스 성경이 주 하나님의 완전한 말씀입니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주}의 집 뜰에 서서 {주}의 집에서 경배하려고 오는 유다의 모든 도시들에게 내가 네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말하라고 한 모든 말들을 말하되 한 마디도 감하지 말라.](렘26:2). 주님은 자신의 말씀을 한 마디도 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사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더하면 그에게는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그에게 더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빼면 생명책과 거룩한 도시와 이 책에 기록된 것들로부터 그의 부분(몫)을 빼 버리십니다. 킹제임스 성경과 NIV를 비교하면 수 만 곳이 틀립니다. 얼마나 많은 단어가 빠지고 더해졌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경들을 채택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20절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시는 분께서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 하시는도다.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계22:20).
주님께서 다시 한 번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고 하셨고 요한은 “아멘. 주 예수님이여, 과연 그와 같이 오시옵소서.”라고 답했습니다. 성도들에게 있는 가장 큰 소망은 주님께서 속히 오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면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약속이 다 성취됩니다. 주 안에서 잠든 자들은 다 일어나고 육신의 몸은 영광스럽게 변화됩니다. 땅에서 저 하늘로 채여 감을 받습니다.
셋째 하늘의 낙원에 올라가 주님과 함께 거합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육신 안에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는 확신에 차있으며 오히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고후5:8).
‘몸을 떠나’란 말은 육체의 죽음을 말합니다. 크리스천들이 확신에 차서 원하는 것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캐톨릭 교회가 말하는 것처럼 연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혼의 수면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와 함께 있게 됩니다. [이는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라. 그러나 내가 육체 안에 산다면 이것은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 이는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기 때문이라. 떠나는 것이 훨씬 더 좋으나](빌1:21-23).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훨씬 떠 좋다고 말합니다.
주님이 속히 오시면 우리는 죽지 않고 들림을 받아 공중에서 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우리는 주의 오심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반드시 속히 오리라”(20). 이 말씀은 재림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이론을 모두 무너뜨립니다. 성령 강림이 주의 재림이란 주장은 헛소리입니다. 이미 주님께서 오셨다는 주장도 거짓입니다. 주님은 요한에게 내가 반드시 속히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계시록 22:7,12,20절에 연속해서 세 번이나 동일한 말씀이 있습니다.
21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모두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22:21).
구약 성경의 마지막이 ‘......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치지 아니하게 하라.’(말4:6하), 저주란 단어로 끝이 나는데 신약 성경의 마지막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란 말씀으로 끝이 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원한다는 성경 말씀에 모두 아멘으로 화답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말씀에 합당하게 반응하시면 그 말씀은 여러분에게 그대로 임하게 됩니다. 기록된 대로 주님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있게 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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