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에 올라가 달을 바라본다. 갑자기 싸늘해진 날씨 탓일까. 오늘따라 달빛이 유난히 떨고 있다. 도시의 달은 바라보는 이가 없어 더 춥고 외롭다. 현란한 네온사인, 거리의 가로등 불빛에 따돌림당한 채, 저 높은 하늘에 덩그러니 홀로 떠, 있자니 얼마나 춥고 쓸쓸할까.
어머니 심부름으로 삼촌 댁에 가는 대숲 길도 달빛이 있어 무섭지 않았고, 발걸음도 신이 났다. 달을 따라 신작로를 걸을 때 논두렁 풀잎, 풀벌레도 모두가 깨어나 넘실대는 벼잎을 타고 사각거리며 선율을 이룬다.
칠흑같이 캄캄한 밤, 산 능선을 살며시 넘어서 싸리문을 밀치고 문풍지 사이로 비춰 들어온 달빛, 문풍지를 바라보는 달빛은 은은한 정을 속삭인다.
음력 8월은 해마다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한가위, 시부모님 제사, 친정어머니 생신, 남편, 아들 생일, 아이들 소풍 운동회, 집안의 크고 작은 행사가 8월 속에 거의 다 들어있다. 달력의 숫자에 동그라미를 씌우고 여백에 메모를 해두면 여백은 꽉 차고, 그것을 하나둘 지우며 지나가는 숫자들은 나와 함께 몸살을 앓는다. 우리 집에서 맞이하는 8월은 만월만큼 무겁고 꽉 차 때로는 미안한 생각마저 든다. 자식을 치자면 열두 자식 중 가장 힘든 일만 시키는 셈이고 보니, 차라리 다른 집으로 딸려 갈 것을 소원해 본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떠나보내거나 귀찮아해서는 안 될 일들이고 보면 그런 생각들은 어쩌면 나를 향한 공연한 투정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음력 8월이 좋다. 고향의 마당 덕석에는 해마다 풍성한 햇곡식이 널려있고, 내 유년의 하늘이 드높고, 운동장이 한없이 넓어 보이던 때도 8월이기 때문이다.
달빛이 마을 동산에 내리비치면 밤은 대낮인 양 동네 아이들이 뫼똥구리로 우르르 몰려와 숨바꼭질, 하루야로 시간을 쫓고 자정쯤 되어 집으로 돌아가면, 그때까지 어머니는 달을 벗 삼아 질삼을 담아두고 노래 부르며 베를 짜고 계셨다. 어머니의 노래가락을 타고 기우는 달의 기폭만큼 베폭이 길어지고, 길어진 베 폭만큼 어머니의 얼굴이 달빛으로 환하게 비춰들었다.
그렇듯 훤한 달빛으로 차 있던 어머니도 이제 몸져누워 계시니 바라보는 빛 또한 슬프도록 푸르다. 평생을 시부모를, 남편을, 자식을 위해 섬광의 빛을 발하며 살아오신 어머니, 진정 당신의 몸은 돌아보지 않고 밤낮으로 일을 하며 몸을 삭여내고 비우며 살아오신 어머니가 아니던가. 지금 그 어머니가 당신의 몸과 마음의 월광을 잃어가며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빈 허물로 누워 계신다.
이태 전 밭길에서 미끄러져 심하게 허리를 다쳤을 때, 너무 아파서 집까지 근근이 기어 오다시피 했다는데 전화 한번 하지 않고 어째서 숨기고 혼자서 조약만 해 드시고 여태까지 지내셨는지, 내 생활 내 달력의 표시대로 살아가며 제대로 어머니를 보살펴 드리지 못한 회한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어머니는 올해 처음으로 도회지 아들 집에서 한가위를 맞게 될 것이다. 그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고 계실까. 창틀 사이로 바깥을 내다보는 이 갑갑하고 암담한 회색 도시에서 어떤 색깔의 달빛이 어머니께 비추어 보일까. 고향의 마당가 우물 속에 가득 채워진 달빛은 온 밤을 어머니를 찾아 어디까지 나설까.
때때로 갑갑할 때 베란다 의자에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보고 골목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방으로 들어와 눈물을 훔치시며 돌아눕는 어머니, 어머니 머리맡엔 당신의 옷가지가 든 가방 속에서 시골의 넓은 뜰, 우거진 대나무밭 밑에 있는 기와집, 그토록 부지런히 오르내리던 가느다란 논밭 길의 발걸음이 꿈틀거린다.
여수를 달래는 어머니의 노래 가락이 흘러든다.
저승길이 길 같으면 오고가고 하련마는
저승길이 길 아니라 오고가고 못 하더라
강물이 문 같으면 열고닫고 하련마는
강물이 문 아니라 열고닫고 못 하더라
달은 점점 만월의 차림새를 가다듬어 간다. 손주와 자식들이 머물다 갈 방을 깨끗이 쓸고 추석 차례상에 오를 제수 하나하나를 정갈하게 준비하셨던 지난날의 어머니가 마을 앞 훤한 신작로로 걸어 든다.
창가로 스쳐가는 바람이 번진다. 알알이 영근 결실의 가을이 겨울을 부른다. 따스한 봄날이 동틀 녘이면 어머니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토록 그리던 당신 집을 향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내디디 시리라.‘
모든 것이 허물로 젖어 드는 시린 가슴, 저 아리도록 깊은 가르멜산* 고요한 적막의 어둠을 비추는 달빛을 찾아, 동공 속에 피어나는 당신 아들의 얼굴을 더듬으며 어제도 오늘도 구슬픈 로사리오 노래만이 끊임없이 원을 그리고 있다.
어느새 달빛은 은하수 계곡을 흐르고 있다.
첫댓글 황 작가님의 어머님을 그리는 그 여리고 착한 마음을 하늘은 알고 있겠지요. 어머님이 병석에서 일어나시길 빌겠습니다. 황 작가님도 건강 챙기셔야 어머님께 힘이 되어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