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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증]《异域志》元·周致中 고조선은 동북해빈(東北海濱)에 있었다.
원나라때 주치중(周致中)이 쓴《異域志》는 조선국(朝鮮國)은 동북해빈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동북해빈(東北海濱)은 어디인가?
이를 《상서》[주1]에서는 양곡(暘谷).탕곡(湯谷).동표(東表),우이(隅夷)지역으로도 불렀다.
일반적으로 동북지방이라면 요동지역을 말하지만 동북해빈이라면 요동까지 미치지 못하는 발해해협을
지목하는 표현이었다.
따라서 요동이나 한반도라는 표현은 동북해빈(東北海濱)의 핵심을 벗어나는 외부지역을 말한다.
[주1]《상서(尙書)∙요전(堯傳)》 전에 이르기를, “동표지지(東表之地)는 우이(嵎夷)이다.
양(暘)은 밝다는 뜻이다. 골짜기에서 태양이 솟아올라 온 세상이 밝아지므로 양곡(暘谷)이라 한다.
양곡(暘谷)과 우이(嵎夷)는 같은 말이다.”라고 하였다.
《정의(定義)》에 이르기를, “청주(靑州)는 동쪽에 있고, 경계의 바깥 쪽에 있는 것이 표(表)이다.
그래서 동표지지(東表之地)라고 하는 것이다. 해가 솟아오르는 것에 근거해서 양곡(暘谷)이라고 하고,
그 지명을 가리켜서 바로 우이(嵎夷)로 일컫게 된 것이요, 따라서 양곡과 우이(嵎夷)는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도:대청광여도 산동반도의 동북부 부분이다.
이 지도에는 등주를 고우이(古隅夷)로 표시하였고,기자가 바다를 건너려고 대기하던 청주.창락등이 표시
되어있다.《고려도경》에서 말하는 고려의 건국지는 등.래.빈.체주와 서로 마주 보인다는 위치로 사문도가
표시되어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동해는 황해이고 북해란 발해를 말하므로 동북해란 등주를 기준으로 갈라지는
발해해협을 말하는것이다.
그리고 해빈(海濱)이란 바닷가 또는 해안. 퇴적토가 싸여 이루어진 섬을 말하므로 발해해협을 따라 이루
어진 묘도열도(廟島列島)를 말하는것이다.
이를 《산해경 》에서는 "동해지내'북해지우"(東海之內 北海之隅)에 조선이 있다고 하였고,
《한서》<천문지>에서는 한무제가 정벌한 조선은 내륙에서 건너다 보이는 해중에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기》<조선열전>의 주석에서는 "경사의 동쪽으로 바다끝에 이르러 바다로 부터 해중 400여리가
조선이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상서》<주소> 《후한서》<동이열전> 《신.구당서》《송사》 <식화열전>《고려도경》
《원서》<지리지> 《원서》<천문지> 원시대 《이역지》《우공추지》등 수없이 많다.
이곳은 《사기》<봉선서>에서 말하는 삼신산이 있는 사문도(현 장도)였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발해> 부(部)(1930년 장려화본)에서는 동북해빈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외의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이미 이 기록이 삭제되었다.
이러한 장려화 본도 원형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록이 삭제되어 묘도군도가 고조선의 강역이었던
사실을 제외시켰다.
그런데도 한국의 유수한 대학도서관에서는 1930년대 출판되었던 장려화본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은
보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대학들은 근간에 간행된 상해본만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1930년판 발해에 대한 기록이다.
[발해]는 요동반도와 산동반도간에 있는 내해다.그중에 큰 만이 두개가 있는데 동북쪽에 있는 만을 요동만
이라 부르고, 요동반도는 그 동쪽 벽에 있다.
서남쪽으로 들어간 만을 직예만(直隸灣)이라 부른다.
산동반도는 그 동쪽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기타 작은 만들이 많이 형성되어있다.
요동반도에는 금주만(金州灣)과 복주만(復州灣)이 있고 서북쪽 변두리로는 금주만(錦州灣)이 있다.
금주만의 서쪽으로는 호로도가 있다. 산동반도에는 용구만이 있는데 꽤 유명하다.
양 반도간에 황해와 상통하는곳을 직예해협이라 부른다.넓이가 200여리이다.
북쪽으로 노철산,남쪽으로 등주두, 묘도군도는 이 양쪽을 연결하는 천연적인 문이 있는데 이곳의 수심은
심히 낮다. 중앙 깊은곳이 111척에 불과하다. 길이가 816리이고 넓이가 476리다.
태고전에 양반도는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바다도 역시 육지였다. 이후 점차 함락되기 시작하며
바다가 되었다.
묘도군도는 산맥이 함락되어 바다가 된 후 여봉이 남아 이루어진것이다.
발해에서 큰 물줄기는 요하,난하,황하가 최대로 크고, 요하지구에는 영구가 있다.
천진은 백하의 입해구에 있고 최고로 유명한 상업항이다.겨울과 봄사이에는 약 7~8십일간이 결빙을 이룬다.
이때 기선들은 산해관내의 진황도에 머문다.(1)
《이역지》에서는 조선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조선 일명 고려는 동북해빈에 있다.주나라에서 봉한 기자국이다.
당시 상나라 사람 5천명은 의무복서,백공기예,례악시서등 문물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모두 중국풍이었다.
의관은 중국 각조의 제도를 따랐고,중국 정삭(세력)을 사용하였다. 왕자는 중국 태학에 들어가 독서를
하였고,화풍(華風)의 풍속을 따랐다. 인성은 순후하였고 지방은 동서 3천리,남북 6천리다.
왕은 개성부에 살았는데 산을 의지하여 궁을 짓고 신와(神窩)라고 하였다.
백성들의 집은 초가와 기와를 사용하였다.
낙랑을 동경으로,백제 금주를 서경으로 삼고 180군,390진,주도가 30,이었다.
압록강을 서쪽으로 고정시키고,동남쪽으로 명주에 이른다.바다는 모두 절벽이고, 물이 깊으며 낮은 골짝
이는 없다.(2)
*만약 고려의 영토가 한반도에만 국한되었다면 국토의 넓이가 동서 3천리,남북 6천리가 될수는 없지
않은가.《사기》<조선전>은 주석에서 해내로 400여리라 하였고,여타의 사서들의 기록도 강역의 크기가
들쭉 날쭉 다르다.
그렇지만 중요한 대목은 한반도의 크기를 벗어나는 강역의 면적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것인가.
여하튼 《이역지》에서 말하는 고려의 영토는 동서가 3천리요 남북이 6천리라는 대목은 한반도에 만주를
포함하는 면적이 아니면 불가능한것이다.
다음 낙랑을 동경으로, 백제 금주를 서경으로 하였다는 대목은 《통고》의 기록과는 조금 다르다.
《통고》에서는 신라 동주 낙랑부를 동경으로,백제 금주 금마군을 남경으로,평양 진주를 서경으로 불렀다고
하였다.당시 신라 동주 낙랑부는 봉황성이었다.
그리고 백제 금주 금마군은 대련이었고,평양 진주는 사문도(장도)였다.
그만큼 고려의 초창기에는 변화가 많았다.
국경은 압록강을 서쪽에 고정시켰다고 한 대목은 압록강이 요하였음을 지목한것이다.
현재 한반도의 압록강은 북쪽 아니면 서북쪽에 있는것이지 서쪽에 있다고 볼 수 는 없지 않은가.
동남쪽으로 명주(明州)에 이른다는 대목은 좀더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다.
《元史》<天文志>는 중국과 고려의 국경을 등주라고 하였다.
다음글은 《원사》<천문지>(3)에 기록된 원 태사"곽수경(郭守敬)(1231~1316)의 글 중 일부다.
요임금시대 고조선의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인것이다.
대체적으로 살펴보면 중국의 요임금때 고조선은 "우이"라고 부르는 청주 지역에 있었는데 그 곳은 북위
38도 선상에 있는 등주지역과 같이 있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참고로 한나라의 낙랑군이라고 주장하는 평양은 39°03'39.71" 동경125°49'45.53" 이다.
따라서 좌표상의 위치를 비교한다면 같은지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후세에 조선은 외국이 되었기 때문에 측량은 등주까지 밖에 못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요임금때는 "우이"가 청주 지역이었으므로 우임금의 측량은 조선지역에서 이루어졌음이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하는것이다.이곳이 바로 요임금시대 고조선으로 삼신산이 있었던 군자국이고 고려의 건국지
었던 지금의 등주 건너편의 장도다.
후에 이곳은 고려의 서경이 되었다.
이를 《고려도경[주1]》에서는 등주.내주.빈주.체주에서 서로 마주 보이는 곳이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잡지>지리4[주2 ]고구려편에서 평양을 설명하는 대목에는 "등주에서 동북쪽
바닷길로 나서서 남쪽으로 해변을 끼고 패강 어귀에 있는 초도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 지방에 도달할 수
있다"고 기록 되어있다.
만약 한반도에 있는 평양을 설명할려면 국경선인 압록강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상식이지 어떻게 수천리나
떨어진 등주를 깃점으로 하는가가 의문이고 더욱 이해 할 수 없는것은 초도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지방에
도달 할 수 있다고 한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설명들은 한반도와는 관계가 없는 설명들이고 장도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본다.
이 외에도 《후한서》<동이전>[주12]《죽서기년의징》에 의하면 《우공》에서 말하는『우이』가 분포
되었던 지역은 산동 봉래 일대의 해빈이라고 하였다.
또 《동사보감》에서는 조선은 동표에 있다고 하였다. 동표(東表)는 등주 우이지역의 해빈을 말한다.
《후한서》<동이전>[주12]
《竹書紀年義證》卷八皆謂『於夷』即《禹貢》之『嵎夷』。《禹貢》戰國時人所為,距商代已
遠,且地在今山東蓬萊一帶濱海之地(顧頡剛先生說,見《中國古代地理名著選讀》頁三),
地望亦不甚合。
《東史寶鑑》曰。朝鮮音潮仙。因水爲名。又云鮮明也。地在東表。日先明。故曰朝鮮。《山海 經》。禹與
伯益所著。以朝鮮名東方。則其來古矣。卽四郡之通名。如中國之爲齊州也。揚子雄 《方言》。或稱燕之外
鄙朝鮮洌水之間。或稱燕代朝鮮洌水之間。或稱燕之北鄙朝鮮洌水之間。 或稱燕之北郊朝鮮洌水之間。或稱
燕朝鮮洌水之間。或稱北燕朝鮮洌水之間。或稱燕之東北朝鮮洌水之間。凡稱朝鮮。必竝燕與洌水。則朝鮮
古在燕之幅員中矣。《淸一統志》
[주1]《고려도경》 봉경(奉境)중에서
今所建國正與登來濱隸相望
自元豊以後 每朝庭遣使 皆由明州定海 放洋絶海而北 舟行皆乘夏至後南風 風便 不過五日卽抵岸焉
[지금 세워진 나라는 등주. 내주. 빈주. 체 주와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있다. 원
풍(원풍, 송 신종의 연호,1076~1085) 연간 이래 우리 조정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는 항상 명주의 정해에서
먼 바다로 길을 잡아 북쪽으로 나아갔다.
배를 탈 때는 언제나 하지 다음의 남풍을 탔으니 바람이 순조로우면 닷새도 안 돼 해안에 도착 할 수 있다.]
《신원사》권47 <지리지>4 서경을 해도(海島)로 표현한 이메지
홍복원이 고려에 대하여 반란을 이르키자 남아있던 백성들은 해도 서경으로부터 떠났다.
이로인하여 서경은 드디어 페허가 되었다....그러나 《고려사 절요》의 기록에서는 해도서경의 해석이
잘못되어있다.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반란을 이르켰던 홍복원이 몽골로 도망하자 그의 아비와 가족들은 사로 잡히게
되자,남어지 백성들은 섬에 있던 서경에서 모두 떠났다고 하였다.
백성들이 모두 떠나버리자 서경은 패허로 변한것이엇다.
《신원사》는 徙餘民<於海島西京>이라고 하였으니 남어지 백성들은 해도서경으로 부터 떠났다는 말이다.
따라서 서경은 사문도에 있었던것이다.
옛날에는 고구려 평양성이었고, 후에 서경이 되었다는 동령로지도를 보시라.
*서경 평양이 페허가 되었던 역사는 수차에 걸쳐 반복이 되었다.
대동강 평양을 수십년씩이나 페허로 묵혔던 역사는 없지 않은가.
그것은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침략한 이래 많은 백성들을 회(淮)지역으로 소개시켰고,당나라가 침략한후
노약자들만 남겨두고 수만명을 중원대륙 서쪽으로 소개시켰다. 하여 장차 반란의 소지를 제거한것이었다.
이후 지진과 해일로 저지대가 바다로 가라앉자 당나라는 평양을 패쇄하고 안동도호부를 고요동성으로
옮겨갔다.이후 신라가 점유하였다가 여건이 황페되어 섬을 비우자 여진족들이 들어와 양마장으로 이용
하였다.이에 왕건이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평양을 재건하게 된다.이후 1135년 묘청의 난을 거쳐 1233년
홍복원의 반란으로 섬이 페허가 되었던 시기만도 (1233~1522)19년이 된다.
다시 1269년 최탄과 이년령의 반란으로 60여개 성이 몽골의 지배하에 놓이자 동령로가 설치되었다가
1290년 몽골의 반환으로 수복되었다.
이같이 많은 반란사건들은 모두가 서경이 배경이었다는 사실은 서경은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해도(海島)가
아니면 불가능했던것이다.
고려초 서경의 설치를 명한 태조의 기록이다.《고려사절요》권1.태조원년 9월
<"원년(元年) 9월 왕(王)이 군신(君臣)에게 말하여 가로되 평양(平壤)은 고도(古都)인데 황폐한지 이미
오래되어 … 반인(蕃人)이 그 사이에서 유렵(遊獵)하고 인하여 침략(侵掠)하여 실實하게 함으로써 반병
(藩屛)을 굳게 해야 하겠다.
드디어 황(黃), 봉(鳳), 해(海), 백(白), 염주(鹽州)등의 인호(人戶)를 나누어 그곳에 살게 하고 대도호부
(大都護府)로 삼았으며 태조(太祖)의 당제(堂弟)인 왕식염(王式廉)과 광평시랑(廣評侍郞) 열평(列評)을
보내어 지키게 하고 이어 (參佐 )4,5人을 두었다."({高麗史節要} 권1, 태조 원년 9월)>
대명구변인적노정전도(大明九邊人跡路程全圖)제공:향고도
청 강희2년(1663)청에서 제작돤것을 다시 일본에서 번각하여 쓰쿠바대와 고베대학 도서관에 소장
한반도의 평양을 서경이라고 주장하던 종래의 학설을 부정하는 지도다.
워낙 대형의 지도이다보니 안락에 위치했던 평양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섬으로 그리고 내용을 설명한것
이다.
지도에서 한반도는 볼 수 없다. 안락은 발해가 완성되기 전의 구 평양성의 위치이고 봉래각의 건너편에
있다. 이곳을 옛날에 고려 평양성이라 불렀고 후에 서경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후 원나라때는 동령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한반도의 평양을 원나라때 동령로라고 주장하던 왜곡된 역사는 어떻게 해야 옳은가.
사태가 반전되자 묘청은 1135년(인종 13년) 정월 어서경의 분사시랑 조광(趙匡) 및 병부상서 유참 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 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령 이하 관리들과 상경인(上京人)[3]으로서
서경에 와 있던 사람을 모조리 잡아 가두었다.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서북면 안에 있는 모든 고을의 군대를 서경에 집결하게 하고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
(天開), 군대의 호칭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하였다. 이어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자비령이 어디었기에 개경의 토벌군을 저지하기 위해서 자비령의 길을 막았단 말인가.
후에 그들이 내세웠던 자비령의 길은 황해도 황주.봉산등 지역으로서 수많은 길중의 군사 요충지었을
뿐이다.
이는 사문도가 서경이었을때 자비령은 여순 대련지역에 있었던 단단대령의 남단이었기가 쉽다.
그곳은 내륙에서 해도로 들어가는 외길이었기 때문이다.
자비령은 절령(岊嶺)이라고도 한다. 높이 489m. 황주 남동쪽 25km에 있으며, 예로부터 개성에서 평양으로
통하는 정치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 역신 최탄(崔坦)이 난을 일으켜 서경(西京)을 비롯한 북계(北界) 54성(城)과 자비령 이북 6성을
가지고 몽골[蒙古]에 귀순하여, 이곳을 동녕부(東寧府)라 칭함으로써 1270년(원종 11)~1290년(충렬왕 16)
까지 자비령이 여 ·원(麗元)의 국경이 되었다.
1361년(공민왕 10) 11월에는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이 고개에 방책을 쌓고 방비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세조(世祖) 때에는 이 고개에 호환(虎患)이 많았으며, 또 명(明)의 사신들이 황주 남쪽 10 km에
있는 극성진(棘城鎭)의 극성로(棘城路)를 통하여 왕래하므로 이 고갯길을 폐하기도 하였다.
《고려사 절요》/권16/고종 안효대왕 계사 20년(1233)
福源逃入蒙古(복원도입몽고) : 복원은 도망쳐서 몽고로 들어갔으므로
擒其父大純(금기부대순) : 그 아비 대순(大純)과
弟百壽(제백수) : 동생 백수(百壽)와
及其女子(급기녀자) : 그 아들딸들을 사로잡고,
悉徙餘民于海島(실사여민우해도) : 나머지 백성들은 다 섬으로 귀양보내니,
西京遂爲丘墟(서경수위구허) : 서경이 드디어 폐허가 되었다.
福源舊名福良(복원구명복량) : 복원의 처음 이름은 복량(福良)이니,
本唐城人(본당성인) : 본래 당성(唐城) 사람이다.
*서경이 패허가 된 이유는 백성들을 해도로 귀양보내서 생긴게 아니고 홍복원이 서경을 떠나면서 백성
들을 요양으로 끌고 갔기때문이었다.
홍복원(洪福源, 1206년 ~ 1258년)은 고려의 역신으로 본래 이름은 복량(福良),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1233년 5월 서경에서 필현보(畢賢甫), 낭장 홍복원(洪福源) 등이 모반. 필현보는 처형되고, 홍복원은
요양(遼陽)으로 달아나 반고려 세력을 형성하였다.
홍복원은 고려의 백성들과 포로들을 데리고 요양으로 가서 원나라 황제에게 바쳤다.
원으로 간 홍복원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고려를 치라며 끊임없이 원을 부추겼고, 원의 고려 침공 때는
앞잡이가 되어 따라 들어왔다. (위키백과)
황명일통도(皇明一統圖)
만주벌판이 공지로 비워진 지도다.그리고 압록강의 위치가 동북진 하다가 다시 서북쪽으로 올라간 방양을
주시해야 한다.
이 압록강의 주변으로 펼쳐졌던 고려와 조선의 지명들을 다음에 올려진 《독사방여기요》의 조선도에서
확인하시라. 현재의 압록강과 지도의 압록강은 그 방향이 다름을 확인할 수 있다.
강계는 현재의 압록강의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독사방여기요》는 고려의 개주성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게 어떻게 경기도의 개성을 설명하는 말인가."개주성은 왕경 서남 200리에 있다.
고려가 이곳에 주를 설치하였다.좌측에 계곡이 있고,우측에 산이 있다. 이를 험고라고 불렀다.
또한 송악이라 하였다. 당 천복초(901)에 사승 궁예가 이곳에 살았다.후량 정명5년(919)회남 양융연에게
입공하였다. 후당 청태말(935) 왕건이 궁예를 살해하고 이곳에서 대를 이었다.
그리고 이곳을 동경으로 삼았다.역시 개경으로도 불렀다."
*만약 개주성이 경기도 개성이라면 왕경의 서남 200리란 말이 타당할 수가 있는가?
지도에서의 개성은 평양의 동쪽 대동강 남쪽에 있다.
따라서 송악이라고 부르던 개주성은 궁예가 살던곳이고,왕건에게 축출당한 곳이다.이곳은 봉황성인
개주성이다.그러나 왕건이 살던 촉막군은 왕경으로서 개주성(봉황성)의 동북 200리에 있다는 말이다.
송 대중상부3년(1010) 고려의 신하 강조가 그 주군 용을 살해하였다.
용(涌) 이 죽자 순(洵)을 세웠다. 이때 거란의 군주 융서가 압록강을 건너 공격하자 강조는 패하여 보강주로
후퇴하였다.거란이 추격하자 금조등은 수십리를 도망하였다.동,작,귀,영주등이 항복하였다.
개경을 공격하자 순은 성을 버리고 평주로 도망하였다.
거란은 궁실과 부고등을 불태우자 민호는 그대로 겨울울 났다.병력이 물러가자 순은 돌아와 개경을 복원
하고 그곳에 살았다.여러 성들 역시 고려로 복원되었다. 지금의 개성부다.(4)
신라의 국경을 대동강과 원산이남이라고 주장한 다음 자료를 믿어야 한다면 통일신라의 영토는 당나라
이후 발해에게 많은 땅을 내줘야 했기 때문에 압록강까지 진출이 불가능해야 옳다.
그런데도 거란지리지도는 신라의 국경을 압록강까지 그려놓았고, 한술 더 떠서 요동반도의 중앙을 고려.
신라.여진. 발해등 4속지지(四屬之地)라고 하여 신라를 요동반도에 까지 진출시키고 있다.
따라서 신라의 요동진출설을 부인하는 주장은 사리에 맞지않는다고 본다.
주(1) [渤海] 齧入遼東半島山東半島間之內海也,中有大灣二,入於東北者曰遼東灣,遼東半島爲其東壁,
入於西南者曰直隸灣,山東半島突出於其東,其他小灣甚多,在遼東半島者,有金州灣、復州灣,迤而西北
有錦州灣,灣之西有葫蘆島,在山東半島者,有龍口彎,皆有名者也,兩半島之間與黃海相通處曰直隸海峽,
廣二百餘里,北曰老鐵山角,南曰登州頭,廟群島聯絡兩間,爲天然之門戶,此海水量甚淺,中央深處不過
百十一尺,長八百十六里,廣四百七十六里,太古前兩半島之山脈本相聯絡,此海亦爲陸地,迨後漸次陷落,
遂成此海,廟群島乃陷落之餘峰也,入於渤海巨川,以遼河、灤河、黃河爲最大,營在遼河之口,天津牢牢
白河之口,皆最著之商港,惟冬春之間,冰結者七八十日,汽船皆取道於山海關內之秦皇島焉
주(2) ○朝鲜国
古朝仙,一曰高丽,在东北海滨,周封箕子之国,以商人五千从之。其医巫卜筮、百工技艺、礼乐诗书皆从中国。
衣冠随中国各朝制度,用中国正朔,王子入中国太学读书。风俗华美,人性淳厚,地方东西三千,南北六千。王居开
城府,依山为官,曰神窝。民舍多茅茨,鲜陶瓦。以乐浪为东京,百济金州为西京,有郡百八十,镇三百九十,洲岛
三十。以鸭绿江为西固,东南至明州,海皆绝碧,至洋则黑海,人谓无底谷也。
주(3)『東極高麗,西至滇池,南逾朱崖,北盡鐵勒,皆古人之所未及。按
高麗既古朝鮮,北極出地三十八度,與登州間。後世朝鮮為外國,
測景但可在登州。堯時嵎夷為青域,測景自當在朝鮮也。』
주(4) ○开州城在王京西南二百里,高丽所置州也,左溪右山,称为险固,亦曰松岳。唐天初,眇僧躬据此。
朱梁贞明五年,入贡于淮南杨隆演。后唐清泰末,王建杀躬而代之,仍都于此,谓之东京,亦曰开京。
宋大中祥符三年,高丽臣康肇弑其主诵,立诵兄询而相之。契丹主隆绪讨高丽,渡鸭渌江,康肇战败,退保钢州,
契丹进擒肇等,追亡数十里,钢、霍、贵、宁等州皆降。进攻开京,询弃城走平州,契丹遂焚开京宫室府库,民庐
俱尽。兵还,询复葺开京而居之,诸城亦复归高丽,今曰开城府。
조주(祖洲)와 조강(祖江)의 역사적 배경
고조선의 왕험성은 7키로미터의 험한 물을 해자로 하여 2000여년의 사직을 지켜왔고,고려의 고종정권은
300여미터의 험한 물길을 해자로 하여 세계최강의 원나라를 상대하며 39년의 사직을 지켜왔다.
상상을 초월하는 해상에 뿌리를 내렸던 해상역사를 밝혀본다.
조주(祖洲)는 험독(險瀆)에 있던 왕험성을 말한다.
왕험성이 있었던 묘도를 동방삭이 저술한 《해내십주기》에서 조주(祖洲)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조주는 험독이라는 험한 물을 끼고 있었다는 말이다.이곳이 고조선의 평양이었다.
그래서 조주(할애비땅)로 불렀을까.
반면 한반도의 평양은 고구려가 당나라에게 망한 후 옮겨진 평양이라는 사실은 중국의 많은 정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해내십주기》의 주석에 성한(星漢)이란 용어가 등장한다.
성한(星漢)이란 천문에서 은하수를 이르는 말이다.그런데 이 묘도열도는 북두칠성형태로 섬들이 배열되어
있고, 주변에는 견우도가 포함되어있다.
따라서 성한(星漢)이란 발해해협의 바다를 은하수로 표현한 은어다.
서울의 한강도 사실은 여기에서 유래된 말이다.
또한 왕험성에는 마고(삼신)할미가 주재하는 천후궁(소도)이 있었고 선악(仙岳)이란 삼신산이 있었다.
문무대왕은 삼국을 통일한 인물이다. 그의 비문에서 그의 15대 조상으로 '성한왕(星漢王)'을 언급한 것은
성한(星漢)이 의미하는 뜻이 대단히 커서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만든 조상의 근원이 묘도라는 사실을
은어를 사용하여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러니까 천손의 후예라는 말이다.
묘비에 기록된 문무대왕의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이 하늘에서 내려와 신령한 선악(仙岳)에 임하였다
(十五代祖星漢王降質圓穹誕靈仙岳肇臨)"는 것은 성한왕(星漢王)의 성한(星漢)의 의미는 하늘의 은하수를
고전에서 인용하여 삼신산을 들어낸것이다.
풍류도를 지극히 숭상하던 문무대왕이 동방삭의 《해내십주기》를 인용한것은 아닐까.
이 기록은 《사고전서》에도 수록되어있다.
《해내십주기》에 소개된 성한(星漢)은 조주(祖洲)가 동해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기록에 주석으로 등장
한다. 따라서 동해란 발해해협을 말하고 발해해협을 은하수로 불렀다는 얘기다.
대청광여도는 삼신산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왜 삼신산을 건너기가 어려웠는지는 우측의 표주(漂注)가 설명한다.
이곳을 동방삭은 《해내십주기》에서 조주(祖州)로 부르고 주석에서 성한(星漢)이라고 부기하고 있다.
《초학기》에서 기록한 삼신산과 명해(冥海)얘기
북두칠성형으로 배열된 묘도열도
<청구칠청(靑丘七靑=동방칠수(東方七宿> 이 해역을 성한(星漢)이라고 하여 은하수로 비정하였다.
삼신산 해역을 동래로 표시하고 그 우측으로 견우도(牽牛島)를 배치하고 있다.
즉 이곳이 은하계인 성한(星漢)이라는 말이다.
조강(祖江)은 강화해협의 험독(선돌목),고려행궁의 해자(垓子)였다.
한강과 임진강과 예성강 만나는 곳… 한반도의 탯줄·젖줄·핏줄이 모여 天地人 어우러지는 그곳 '祖江'…
지금 南北 경계 돼 배 못 다니지만 제 몸 스스로 녹이는 성엣장처럼 분단 상처 지우는 봄날은 언제일까
세 강이 만나는 곳의 이름은 무엇일까? 한강일까, 임진강일까, 예성강일까? 셋 모두 아니다.
'조강(祖江)', 즉 할애비강이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그 뜻을 금방 알 수 있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가운데서 발원한 한강은 조국의 심장인 서울을 지나는 아비이고, 함경도
에서 출발한 임진강은 남북의 아픔을 감싸 안은 어미이며, 개성을 지나온 예성강은 손자가 아니더냐?
아비와 어미와 손자를 모두 품에 안으니 할아버지인
것이다.
강화도는 할애비강에 의해 한반도의 배꼽이 되었다.
일제가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할 음모로 개명한 마니산(摩尼山)의 원래 이름은 마리산(摩利山)이었다.
'마리'는 머리를 뜻하는 범어(梵語)로 우리말 '머리'의 어원이다.
마리산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낸 생명의 머리 터다. 이렇게 보면 단군의 홍익인간(弘益人間) 사상이
펼쳐지는 장엄의 끝이자 시작은 한강의 풍백(風伯), 임진강의 우사(雨師), 예성강의 운사(雲師)가 만들어
낸 할애비강이다.
팔도전도 경기도 강화해협부분
갑곶돈대 아래로는 염하(鹽河)가 흐른다. 염하는 강화도와 경기도 김포시 사이에 있는 남북 방향의 좁은
해협이다. 마치 강과 같다고하여 소금강, 염하라고 부르며 강화해협 또는 김포강화해협이라고도 한다.
폭이 좁은 곳은 200~300m, 넓은 곳은 1km 정도이고 길이는 약 20km이다.
밀물때의 최대 유속은 초속 3.5m로 물살이 거세고 수심이 얕아서 썰물 때에는 곳에 따라 바닥이 드러나
기도 하는데 염하의 북쪽으로는 한강과 임진강, 예성강의 강물이 흘러 들어오고 북쪽의 월곶과 남쪽의
황산도 간에는 해수면의 차이가 커서 물살이 빨라지게 된다.
갑곶돈대에서 바라 본 염하와 강화대교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지역에 있는 목[項].
지형상 이 지역이 바다로 돌출해 있는데 대안(對岸)의 강화도 광성보(廣城堡)가 있는 곳도 바다로 돌출해
있어 두 지역 사이가 좁은 여울의 형태를 이룬다.
따라서 밀물 때 이곳을 흐르는 해류가 급류를 이루어 배가 건너다니기 어렵다.
손돌이라는 지명은 이곳에 있던 뱃사공의 이름에서 나왔는데 그에 관한 전설은 2개로 되어있다.
고려 때 몽고의 난을 피해 급히 이곳에 도착한 왕이 바다를 건너고자 할 때 손돌이 아직 바람이 자지 않았
으니 쉬었다 건너자고 하여 왕이 그를 모반자로 생각하여 처형을 하니 광풍이 불이 바다를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왕이 크게 후회하여 그가 탄 말의 목을 베어 제사를 지내고 나니 바람이 잔잔하여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왕이 탄 배가 바다를 건널 때 손돌이 배를 급류쪽으로 몰아 위험을 느낀 왕이 손돌의
행동을 의심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그가 죽기 전 자기가 죽은 뒤 바다에 바가지를 띠워 그 바가지가 가는
대로 배를 몰면 안전할 것이라고하여 손돌을 죽인 뒤 그의 말대로 했더니 배가 무사히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이에 왕이 크게 뉘우쳐 손돌의 무덤을 만들고 크게 제사를 지내주었다고 한다.
음력 10월 20일경인데, 이때는 겨울의 북서풍이 강하게 불어 겨울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며 이 시기에
부는 바람을 손돌풍(孫乭風)이라고 한다.
*손돌목 돈대 [孫乭─墩臺]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佛恩面) 덕성리(德城里)에 있는 강화53돈대의 하나.
덕진돈대와 함께 덕진진에 소속되어 있으며 뱃사공 손돌의 전설에서 돈대의 이름을 땄다.
1679년(숙종 5)에 축조하였는데, 강화도의 다른 돈대들이 사각 모양인 것과는 달리 원 모양으로 만들었다.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외국 함대들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서, 1977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파괴되었던 성벽을 복원하였다.
돈대 입구에는 서해안 지역의 북한계선 식물인 탱자나무가 자라고 있다.
손돌목돈대에서 동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용두돈대가 있는데, 그 앞의 염하(강화와 김포의 경계를
이루는 수역)를 뱃사공 손돌이 왕의 오해로 억울하게 죽은 곳이라 하여 손돌목이라고 한다.
염하 건너편 동남쪽에 덕포진이 있는데, 덕포진 언덕 위에 손돌의 묘가 있다.
고려 궁지 소재지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1
이곳은 고려가 몽고(蒙古)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抗戰)하던 39년간의 궁궐터(宮闕址)이다.
안해루 광성보 성문인 안해루
손돌목 물살 용두돈대 아래 손목목의 거친 물살이 예사롭지 않았다.
(九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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