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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 페퍼
문득, 마지막으로 운전대를 잡았던 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서울에선 얼마 전부터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에 집에 내려갔을 때도 기차를 이용했었다. 본래부터 운전을 잘하지 못 했는데, 간만에 운전을 한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긴장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히 얼마 전까지 지상의 모든 도로를 점령한 것 같던 운전자들이 여름 풀벌레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진 듯 도로는 한산했다. 그럼에도 가끔씩 스쳐지나가는 운전자들은 늦여름 매미소리처럼 신경에 거슬렸지만.
한 시간 조금 넘게 달렸을까. 가드레일 너머로 사고현장이 보였다. 은색 승용차가 소형 트럭과 크게 부딪쳐 보닛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손상되어있었다. 공교롭게도 교통사고 전광판 바로 앞에서 사고가 났다. 불현듯 ‘사망’란의 숫자가 하나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조금 더 달리니 사이렌을 울리며 달려오는 응급차 한 대. 아무래도 사고현장을 향하는 듯.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져, 갓길에 차를 세웠다. 뒤따르던 차를 보지 못 한 탓에 하마터면 이쪽도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뒷차의 운전자는 경적을 몇 차례나 시끄럽게 울리며 내 옆을 스쳐지나갔고, 각각 다른 방향으로 멀어지는 경적소리와 사이렌소리가 무질서하게 뒤섞이며 머릿속을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역시 누군가에게 운전을 부탁했어야 했나.
그 자리에서 조금 쉬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담뱃불을 붙였다. 창문을 열고 바람을 좀 쐴까 했는데, 갑작스레 비가 쏟아져 도로 창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소나기. 차를 세워둬서 다행이었다. 빗길 운전은 곤욕스럽다.
…
그곳에도 비가 내렸던 모양인지, 거리 곳곳에 작은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차도 여기저기가 움푹 파이고 인도의 벽돌들이 군데군데 뜯겨나간 길이 제법 맘에 들어, 마을 어귀에 차를 세우곤 조금 걸었다. 십오 분 쯤 걷자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누르려던 순간, 대문이 미세하게 열려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잠그지 않으신 듯. 나는 가볍게 녹색 대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널브러진 세숫대야와 누나가 가끔 옥상에 올라갈 때 쓰곤 했던 사다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우면서도 낯선 풍경. 그곳에선 마치 빈집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너무 조용한 탓에, 잠깐 동안 다른 집에 들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마당 한 편에 엎드려있는 골든 리트리버를 발견하기 전까진 말이다. 번견으로 키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싶을 만큼 페퍼는 나의 방문에 무심했다.
“저 왔어요.” 하고, 대문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한참이 지나서야 어머니가 창가에 모습을 드러내셨다. 두 달 전에 뵀을 때보다도, 어머니는 더 많이 늙어계셨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그저 눈짓으로 들어오라고 말하신 듯했고, 문을 열어주셨다. 군말 않고 안으로 들어서자 약간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지난 두 달 사이에 집 안 풍경이 제법 많이 바뀐 것 같았다. 먼지가 쌓이지 않게끔 가구들을 덮은 보의 레이스가 어딘지 너저분해보였고, 유독 집 안에 종이가 적어진 듯했다. 책이나, 사진 같은. 그리고 어머니치곤 제법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으신 듯, 약간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났다.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또 기원 가셨어요?” 하고, 내가 여쭈었다.
어머니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으셨다.
“방에서 주무셔. 아버지 요샌 기원 안 나가시더라.”
“정말요? 어머니 소원 이루셨네요.”
나는 너스레를 떨며 말하곤 가볍게 웃었다. 어머니는 이전부터 아버지가 기원에 자주 다니시는 것을 영 탐탁찮아 하셨다. 큰돈을 걸고 내기바둑을 두는 것도 싫어하셨고, 바둑을 두다 술자리를 갖게 되시는 것도 싫어하셨다.
그러나 내 말에 어머니는 무슨 이유에선지 착잡한 표정을 지으셨다.
먼지 냄새가 싫어, 나는 허락도 없이 온 집안의 창문을 열었다. 날은 본래부터 제법 선선했는데, 비가 온 직후라 그런지 창을 열어두면 춥다는 느낌마저 있었다. 9월이 되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온종일 에어컨을 틀고 생활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날씨였다.
“누나 방도 청소 좀 하세요.” 하고, 나는 잔소리를 하듯 말했다. 어머니가 거실에 계셨지만, 누군가 내 말을 들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누나 방에 쌓인 먼지 층이 유독 두텁다는 사실을, 문을 열자마자 알 수 있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여니 창틀엔 주인을 잃고 물방울만 빛나고 있는 거미줄이 있었다. 눈가처럼 축축해진 창틀. 그동안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은 듯했다. 풀썩. 백색 가루. 매트리스 없이 틀만 남은 침대에 앉으니, 먼지가 한 주먹 쯤 피어올랐다.
그때 안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버지가 거실로 나오셨다. 인사를 드리기 위해 나도 거실로 나섰다. 아버지는 몽롱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셨다. 꼭 잠깐 동안 나를 못 알아보신 듯했다.
“저, 오늘은 자고 가려고요.”
내가 말했다. 두 분도 쓸쓸하실 것 같으니, 하고 덧붙이려다가 괜한 말일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래라, 하고, 어머니가 부엌에서 말씀하셨다.
“흥, 16강도 못 가는 놈한테 줄 방 없다.”
반면 아버지는 툭 던지듯 그렇게 말씀하셨다. 짓궂은 농담. 그 얘기를 들은 어머니가 “왜 그래요, 지고 싶어서 진 것도 아니고.” 하고 아버지를 나무라셨다. 얼마 전 있었던 삼성화재배 이야기였다. 근래엔 제법 성적이 좋아 스스로도 기대했었지만, 아쉽게도 32강에서 2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두 판 모두 중국 기사에게 패한 탓에 아버지의 실망은 어느 때보다도 크셨으리라. 아버지는 최근 중국의 강세가 영 못마땅하신 듯했다.
어머니의 면박에,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아버지의 말에 조금 상처를 받았지만, 아버지의 그런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 나는 괜찮다고 말씀드리며 가볍게 웃었다.
…
물을 마시러 부엌에 들어갔을 때, 그곳은 밥 짓는 냄새가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무척 삭막한 공간처럼 보였다. 나는 잠깐 어머니를 도와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최근 여자친구에게 기초적인 요리를 배웠는데, 이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은근히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잠시 뒤 생각을 접었다. 칼질을 누구한테 배웠느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았기에. 그리고 또, 어머니가 이미 혼자서 요리하는 것에 제법 익숙해지신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에.
어머니가 식사를 준비하시는 동안, 마당으로 나가 페퍼와 놀기로 했다. 내가 마당으로 나섰을 때, 페퍼는 내가 대문으로 들어왔던 때의 위치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곳에 누워있었다. 움직일 기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또 다른 각도로 보자면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스스로 움직이는 행위의 비효율성에 대해 깨달은 현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페퍼 옆에 쪼그리고 앉아 페퍼에게 몇 마디 말을 걸어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탓인지, 페퍼와 이야기하는 것도 조금 어색하게 느껴졌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고,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쭈뼛거리며 말을 걸었다. 어릴 땐 좀 더 자연스럽게 얘기했던 것 같은데, 나이를 먹은 탓에 이제는 동물과 이야기한다는 일 자체가 바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페퍼는 반응할 기력조차 없다는 듯 계속해서 귀만 펄럭일 뿐 내겐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페퍼가 내 목소리나 냄새를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문득, 페퍼의 빈 밥그릇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먹긴 하는 것일지 불안 섞인 궁금증이 일었다. 창고 문을 열고 안에서 사료포대를 찾아내어, 포대 안 바가지에 반쯤 사료를 퍼 밥그릇에 담아주었다. 페퍼는 배가 고팠던 것인지 밥에는 작게 반응을 보였다. 그래봤자 시선을 아주 잠깐 주는 정도였지만. 나는 페퍼가 먹기 좋게끔 밥그릇을 페퍼의 입 앞까지 옮겨주었다. 페퍼는 마치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처럼 코를 킁킁대기만 할 뿐 끝내 먹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고, 잠자리 한 마리가 담벼락을 넘어 마당에 들어왔다. 잠자리는 잠깐 동안 나와 페퍼 사이의 아무 것도 없는 공중에서 움직이지 않고 떠 있다가, 다음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지붕 너머로 날아갔다.
일주일 전 저녁,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드문 일이었다. 발신자 표시에 ‘아버지’라는 글자가 적힌 것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다 전화를 받으니 아버지도 어색하셨던지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여보세요?” 하고, 괜스레 한 차례 물으니 아버지는 그제야 목소리를 내셨다. 아버지는 가볍게 안부를 물으시곤, 페퍼가 아픈 것 같으니 데려가라는 말씀을 전하셨다. 집 근처엔 마땅한 동물병원이 없었다.
“네. 조만간 내려갈게요.”
짧게 대답을 드리니 아버지는 얼른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직후에 나는 부엌으로 가 커피를 한 잔 내리고 거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로 시선이 갔다. 풀다 만 사활문제와 여자친구가 버려두고 간 올이 터진 갈색 스타킹. 나는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곤, 스타킹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후 바둑돌을 정리했다.
그러는 내내 페퍼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들에 대해. 페퍼는 벌써 십오 년 넘게 살아왔다. 대형견치곤 상당히 장수한 셈이었다. 두 달 전, 누나의 기일에 보았던 페퍼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내가 보기에 페퍼는 이미 많이 아팠고 또 너무 많이 지쳐있는 듯 보였다. 아버지는 누나가 죽은 후로 페퍼가 짖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 한 것 같다고 넌지시 말씀하셨다. 나는, 어쩌면 우리들 모두 또 다시 가족을 잃는다는 두려움에 페퍼에게 번거로운 삶을 강요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보았다. 주인을 잃고 몸까지 아픈 노구가, 과연 무슨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을지.
페퍼를 데려오는 것이 귀찮은 일처럼 느껴졌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열었다. 늦여름의 밤, 바깥공기는 아직 덥고 습했지만, 나는 두꺼운 이불을 턱 밑까지 덮고 침대에 누웠다. 커피를 마신 직후여서 그런지, 잠은 오지 않았다.
…
점심을 먹은 후엔 아버지가 장롱에서 낡은 바둑판을 꺼내오셨다. 내가 연구생에 뽑혔을 때 아버지가 내게 선물해주신 오동나무 바둑판이었다. 반상은 지저분했다. 무슨 놀이를 한 것인지, 판 여기저기에 연필로 가위표나 동그라미가 무질서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주 어린 시절에 누나가 한 낙서였다. 낙서를 한 후, 누나가 아버지께 크게 혼났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는 바둑판을 더럽히는 일을 무척 싫어하셨다. 아버지께 혼나고, 누나는 크게 소리 내어 울었다. 나는 그때를 제외하면 누나가 그토록 크게 우는 모습을 본 일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아니, 애초에 아버지가 누나를 혼내는 일 또한 흔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우는 누나를 보며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정작 주인인 나는 별 애착도 없는 바둑판 따위에 낙서를 한 죄로, 누나는 마치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크게 혼났다.
그러나 누나가 종종 울고 있던 어린 내게 그랬듯 등을 토닥여주진 못 했다.
아버지는 석 점을 까셨다. 좀 더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확실히 실력이 좋으셔서, 두세 점 깔고 두시면 웬만한 프로들과도 잘 어울리는 한 판을 둘 수 있으셨다. 내가 막 입단하던 열다섯 때까지만 하더라도 아버지는 내게 종종 석 점 접바둑을 이기곤 하셨다. 그러나 나이를 드시면서, 아버지의 기력은 많이 약해지셨다. 특히나 누나가 떠난 요 일 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은 더더욱. 그럼에도 아버지는 여전히 석 점을 마지노선처럼 고집하고 계셨다. 일전엔 아버지께 이제 넉 점으로 두자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너무 큰 집 차이로 이겨서 우스갯소리로 한 말이었는데,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셨다. 끝내 화해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아버지 앞에선 치석을 늘리자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세월의 흐름을 감당하지 못 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여유롭게 두었다. 아버지가 눈치 못 채시게끔 자연스러운 수로 반상 균형을 맞춰야한다는 과제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두 수에 한 수는 장고를 하셨기 때문에 계가할 시간도 충분했다. 바둑을 두는 내내 시선은 베란다 창문에 두었다. 아버지껜 죄송한 얘기지만, 바둑은 싱겁고 지루했다.
창밖으론 페퍼가 보였다. 페퍼는 여전히 무기력한 자세로 마당 한 쪽에 엎드려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위치가 아까와는 조금 달라진 것도 같았다. 아무도 보지 못 한 사이 자리를 바꾼 듯. 나는 페퍼의 시선을 따라갔다. 페퍼는 마당에 있는 자신의 집을 보고 있었고, 그 옆에 있는 목줄이 묶인 쇠말뚝을 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너머를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퍼의 집 뒤엔, 담벼락만이 있을 뿐이었다.
“안 두냐?”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갑자기 말씀하셔서, 반사적으로 반상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아버지는 묘한 자리를 두셨다. 별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나는 선뜻 손을 내지 않았다. 장고하는 체하며, 잠깐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어머니는 방에서 낮잠에 드신 듯했다. 페퍼는 여전히 짖지 않았고, 아버지와 나는 말없이 바둑을 두었다. TV는 꺼져있었다. 인근 공사현장의 소음만 없었더라면 무척 조용한 낮 시간이 되었을 텐데 아쉽구나, 하고 짧게 생각했다.
…
언제 이런 게 생겼던가.
대형 슈퍼마켓 체인점이었다. 주변 건물들과 대비하며 예닐곱 배의 부지는 더 차지할 것 같은 건물이 여봐란듯이, 그러나 부자연스럽게 서있었다.
“여기 언제 생긴 마트에요?” 통일성 없는 식재료들로 묵직해진 카트를 밀며, 내가 어머니께 여쭈었다. 어머니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으셨다. “어릴 땐 이런 거 없었잖아요?” 내가 덧붙였다.
“그랬던가? 옛날부터 있었던 것 같은데.”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시곤 걸음을 재촉하셨다.
옛날부터?
나는 나의 기억력과 어머니의 말씀을 한 차례씩 의심해보았다. 그리고 이내 어머니가 무언가 착각하고 계심을 깨달았다. 분명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마트는 없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런 것을 말씀드리지 않고 조용히 어머니의 뒤를 따랐다.
오후 세 시 쯤. 아버지와 두 판의 대국을 끝내고 나니 어머니가 마트에 같이 가달라는 부탁을 하셨다. 나는 우리 남매가 어릴 때 종종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따라가던 시장을 말씀하시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처음 보는 대형 슈퍼마켓이었다.
어머니는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슈퍼마켓 안을 맴도셨다. 나도 역시 착실히 뒤따랐고. 어머니는 내게 이건 어떻겠니? 저건 어떻겠니? 하고 상기된 표정으로 물으셨지만, 요리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아주 기본적인 것밖에 없는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칠 수밖에 없었다. “좋아요.”, “괜찮죠.” 하고. 내 무심한 대꾸에도, 어머니는 오랜만에 자식과 함께 장을 보는 것이 즐거우신 듯했다. 어머니는 요 근래 잘 하시지 않게 된 농담까지 던져가며 웃으셨다. 한 번 웃으실 때마다, 어머니는 자신의 잃어버린 젊음을 아주, 아주 조금씩 되찾아가고 계신 듯 보였다. 다만 그런 미소가 마냥 보기 좋지만은 않았다. 어쩌면 어머니가 나를 통해 누나의 그림자를 보셨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종종 함께 장을 보곤 했다.
장보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내가 운전을 했다. 아버지의 차는 기어가 뻑뻑했다. 단순히 차가 오래된 탓인지, 혹은 한동안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없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마트에서 집까진 차로 오 분 거리였다. 우리는 대화도 없이 집에 도착했는데, 어머니는 일부러 말을 시키지 않으신 듯했다. 운전에 집중하라는 듯. 백미러를 통해 힐끗 쳐다보니, 어머니는 내가 운전하는 내내 이유도 없이 장바구니를 뒤적거리고 계셨다.
…
거실에 상을 펴고, 상 차리는 일을 도와드렸다. 상은 거실에 폈다. 아버지가 바둑중계를 보고 계셨다. 아버지는 한 번 무언가에 집중하시면 중간에 헤어나질 못 하는 성격이셨다. 어머니와 내가 상을 차리고, 식사를 시작했음에도, 아버지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TV화면만 바라보고 계셨다. 아마추어 대학동문 대회였다.
아버지는 식사엔 전혀 집중하지 못 하신 채 대국을 보며 내 생각을 물으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께 밥부터 들라고 말하셨지만, 아버지는 전혀 듣지 않으셨다. 나는 적당히 해설이 방금 했던 말을 표현만 바꾼 채 반복했다. 나도 밥을 먹을 때만큼은 바둑에 대해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에.
아버지는, 사실 내 말에도 별로 집중하지 못 하시는 듯했다.
부모님껜, 특히나 아버지껜 단 한 번도, 바둑을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사실 어릴 적부터 바둑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이기는 판이 일상이 되었고, 지더라도 크게 분할 건 없는. 어릴 적엔 프로기사가 되기보다는 부모님처럼 손님들과 두런두런 이야기할 수 있는 가게를 하나 갖고 싶었다. 아니 사실, 프로에 입단한 이후로도 몇 번이나 바둑을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했다. 열아홉 살에 처음으로 명인전 결승까지 올라갔을 땐, 이쯤 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하였고.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내가 연구생이 되고 프로에 입단하던 때,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 그만둘 수 없었다. 아버지가 나를 프로로 만들기 위해 애쓰셨던 시간의 의미를,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관두면 되잖아.”
내가 이런 고민을 말했을 때, 누나는 남 일이라는 듯 대답했다. 내가 그러지 못 하는 이유에 자신은 전혀 무관하다는 듯.
“누나가 취직이라도 해야 내가 마음 놓고 이직하지.”
나는 누나가 괘씸하여 그렇게 대꾸했다. 스물한 살, 사진작가가 되겠다며 대학을 중퇴한 누나는 매일같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누나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부러웠다. 결국 이렇다 할 성과를 끝까지 만들어내지 못 한 누나였지만, 표정만은 언제나 여유만만이었기 때문에.
“내 핑계대지 마. 남자가 돼서 자기 길 하나 뜻대로 못 정하면서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섣불리 길을 바꿨다간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눈앞에 있어서 말이야.” 하고, 나는 비꼬았다.
“뭐어?”
거기까지 말한 건 심기를 건드렸는지 누나는 눈을 부릅떴다. 둘 다 스무 살 전후였는데, 싸울 때의 우리는 아직도 어린애들 같았다.
우리는 서로를 한 차례씩 노려보았지만, 다행히 그 이상의 싸움은 없었다. 누나가 무언가 다시 말하려던 찰나, 옆에 있던 페퍼가 한 차례 짖으며 흐름을 끊은 덕이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부터 우리 사이를 중재해주던 건 언제나 막내인 페퍼였다.
혹시, 페퍼가 짖지 않게 된 건 우리 남매가 더 이상 싸울 일이 없게 되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
찬장을 뒤져보았지만, 커피는 없었다. 어머니께 여쭈니 두 분 다 한동안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카페인이 들어가면 잠이 잘 안 온다고 하시면서.
“좀 나갔다올게요.”
“커피 사러?” 어머니가 물으셨다.
“겸사겸사요. 오랜만에 왔으니 여기저기 산책도 좀 해보고…….”
나는 억지로 미소를 띠며 말하곤 신발을 신었다. 분명 잠깐 슈퍼에 갈 뿐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어머니는 마치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현관까지 따라 나오셨다. 물론 어머니가 그러시는 이유는 알 것 같았고, 어머니가 하시고 싶은 말도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어머니가, 그 말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현관문을 나서기 직전에 어머니는 끝내 작은 목소리로 그 말씀을 하시고야 말았다.
“…차 조심하고.”
“…네.”
어머니가 그 말을 하셨을 때에는, 분명 강박을 견디지 못 하는 환자처럼 조급한 기분이셨으리라.
현관문을 나오자, 문득 페퍼가 눈에 들어왔다. 밖으로 나오는 내겐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낮에 창문을 통해 보았을 때와 똑같은 위치만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옆으로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 시선의 높이를 똑같이 하면 페퍼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 눈에 보인 거라곤 페퍼의 집 옆에 박힌 쇠말뚝과, 거기 묶인 목줄뿐이었다.
혹시 산책을 나가고 싶은 걸까?
“같이 나갈래?”
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페퍼는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듣지 못 하게 된 게 아닐까 싶었다. 어릴 적에 돌아가신 할머니도 나이가 드시면서 귀가 많이 안 좋아지셨던 일이 기억났다. 목소리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권해보면 반응하지 않을까 싶어, 말뚝에서 목줄을 풀고 짧게 잡은 후 몇 차례 당겨보았다. 숨소리를 확인하곤 몇 차례 쿡쿡 찔러보기도 했다.
그러나 페퍼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산책을 나가고 싶은 게 아니었나?
나는 실망하며 목줄을 놓았다. 목줄을 내려놓는 순간 페퍼가 약간 움직인 것도 같았으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았기에, 천천히 걷기로 했다. 거리는 많이 변해있었다. 못 보던 가게가 생겨났고, 기억에 없는 주택들이 세워졌다. 집 앞 골목을 빠져나가면 정면엔 제법 부지가 넓은 공사현장이 있었다. 이미 해가 졌는데도 공사를 계속하고 있는 듯. 낯설었다. 고향풍경이 기억과 너무 다르니 마치 돌아와선 안 될 곳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인 풍경만이 내가 전혀 엉뚱한 곳으로 흘러들어온 건 아니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술에 취해 떠들어대는 아저씨들과, 성질머리 더러운 택시기사.
나는 편의점을 찾아 걸었다. 슈퍼는 몇 군데인가 보였지만 그냥 지나쳤다. 편의점에서 파는 스타벅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편의점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대형마트가 생겼으니 편의점쯤이야 당연히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게 실수였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십 분쯤 더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불 켜진 가게와 인적이 줄어드는 것 같았다. 왜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그냥 왠지, 그러고 싶었다.
다행히 그만큼 걸으니 길 건너편에 유독 불을 밝게 밝힌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다행이다.” 하고 중얼거리곤 어머니 말씀대로 차를 조심하며 길을 건넜다. 편의점에 들어서니 젊은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생기 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모습이 많이 바뀌어있었지만, 나는 단박에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던 여자애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돌 까기’나 한다며 놀려대던. 아직도 이 동네에 사는 또래가 있구나, 하고 나는 조금 놀랐다. 하긴, 나보다 고작 두 살 많던 누나도 작년까진 이 동네에 살았으니.
어렵게 찾은 편의점이었지만, 마시고 싶었던 스타벅스 커피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적당히 아무 커피나 하나 사서 가게를 빠져나왔다. 계산을 하면서 그 애도 내가 누군지 알아본 것 같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붙이지 않았다.
가게 밖으로 빠져나오자마자 큰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 목소리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다가가보니, 취객과 택시기사 사이에 싸움이 붙은 듯했다. 그저 지나치는 체하며 내용을 엿들었다. 취객 아저씨가 갑작스레 도로에 뛰어들면서 하마터면 달리던 택시와 부딪칠 번한 모양이다.
바보 같다. 나는 말로 내뱉었더라면 분명 온갖 시니컬로 무장한 B급영화 주인공의 대사 같은 것이 되었을 생각을 짧게 했다. 꼭 일이 터지고 나야 무엇이 정말로 중요했던 것인지 알아차리는 바보들이 있다. 사고가 나지 않았음에 감사할 줄은 모르는 걸까.
나는 그들을 지나쳐 편의점에 들어가기 전 걷던 방향으로 더 걷기로 했다. 왠지 거기서 돌아서서 집으로 향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러는 사이 해가 지고, 달이 높은 하늘에 걸렸다.
…
누나가 떠나고 얼마 뒤에, 나는 합의금 문제로 사고를 낸 운전자를 만날 수 있었다. 갓 성인이 된 내가 어머니나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 자리에 나간 건 아무래도 두 분 모두 상대를 직접 만나는 자리가 된다면 이성을 유지하기 힘드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소 침착하고 과묵하신 성격의 아버지도 누나의 일에 관해서만큼은 맹목적이셨고, 어머니는 말할 것도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옆에 있었으면서 차를 막아주지 못 한 페퍼를 원망하여 내다버릴 생각까지 하셨으니.
스물예닐곱 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검은색 와이셔츠와 침착한 단색의 바지를 입고 나왔다. 너무 격식을 차리지도 않으면서 사죄와 위로의 뜻을 나타내기에 적당한 차림 같았다. 사람도 좋아보였다. 단순히 유치장에 가기 싫어서 나를 만나러 나온 건 아닌 것 같았다는 얘기다. 그는 얼마 전 자신의 연인과 사이에 아이가 생겨 급히 결혼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사고도 결혼 문제로 부모님 집을 찾아뵈다가 난 것이라고. 그는 말하는 내내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그가 조금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이제 곧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될 텐데.
우리는 카페에 앉아 한 시간 정도 이야기했다. 제법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정작 합의금에 관한 문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던 것은 아니다. 나도 내색은 안 하려 애썼지만 어쩔 수 없이 그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그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내가 기억하는 누나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신 탓에 죽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정도는 알게 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도, 또 누나에게도. 내가 누나에 관해 이야기하는 마지막 십여 분 동안 무의식중에라도 눈을 마주치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그의 모습을, 아직까지 선명히 기억한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소소하게나마 누나의 복수를 해준 것 같다는 유치한 생각을 하며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는 내가 나온 뒤에도 잠시 동안 카페 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7월의 마지막 날이었던 것 같다. 푹푹 찌는 무더위와, 최근 몇 년 새 부쩍 더 시끄러워진 도심의 매미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
멀리서 보곤 잘못 본 줄 알았다. 대문이 바깥으로 열려있었다. 마당으로 급히 들어서서, 문을 나서기 직전의 풍경을 기보를 복기할 때처럼 빠르게 떠올렸다. 세숫대야, 사다리, 개집과 담벼락. 다른 건 전부 그대로였다. 페퍼가 사라진 것만 빼면. 나는 행여 부모님 중 누군가가 페퍼를 데리고 나가신 것이 아닐까 싶어 급히 현관문을 열어보았다. 가지런히 정리된 신발 역시 내가 나갈 때 그대로였다.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들으셨는지, 방에서 어머니가 나오셨다. “지금 들어오니?” 하고. 안방에선 무엇인지 모를 TV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두 분은 페퍼가 사라진 것을 아직 모르시는 듯.
초조함보다는,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찾아왔다.
달빛이 탁했다. 엷은 구름에 가린 듯했다. 아버지의 차 보닛과 거리의 자그마한 웅덩이들이 그 탁한 달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구름 탓인지, 아니면 이곳도 이제 많이 밝아진 탓인지, 별빛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대신 네온사인을 켠 몇몇 술집들의 간판 덕에 거리는 그리 어둡지 않았다. 언제 그런 것들을 보고 기억한 것인지는 다소 의문이다. 정신없이 달렸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페퍼는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인근 공사현장이었다. 공사현장 앞을 지날 때 인부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안을 들여다보니 페퍼가 있었다. 들어오지 말라는 경고문구도 무시한 채 가까이 다가갔다.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다. 가엾게도 페퍼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조금 떨어진 위치에선, 마치 페퍼의 낮은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는데.
나는 페퍼 가까이에 쪼그려 앉아 페퍼의 목덜미를 쓰다듬어주었다. 찬 공기와 차갑게 식은 몸 탓에 털이 빳빳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누나가 떠난 이후론 털 관리를 한 번도 못 해준 것 같았다. 누나가 돌보던 시절의 페퍼는 언제나 부드럽고 윤기 나는 털을 갖고 있었다.
“학생 개야?”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안전모에 랜턴을 단 인부 한 사람이 찾아와 내게 물었다. 랜턴 불빛에 가려 정확히 볼 순 없었지만, 그는 연민의 눈으로 나와 페퍼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예.” 하고, 나는 짧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입을 통해 새어나오는 바람처럼 느껴졌다.
“죽을 때가 돼서 집을 나온 모양이네. 개는 나이가 차면 옆에 끼고 지켜봐줘야 돼. 자기가 죽는 모습을 가족들한테 보이기 싫어하거든. 그나마 발견해서 다행이구만. 우리 집도 몇 년 전까지 늙은 개를 한 마리 키웠는데, 마누라가 낮에 청소를 한답시고 문을 열어놓은 사이 나가버린 거야. 학교 갔다 온 애들이 얼마나 난리를 피워대던지…….”
그는 상심 말라는 듯 비교적 가벼운 투로 말했다. 꼭, 키우던 개가 죽는 것쯤은 흔한 일이라는 듯.
“고맙습니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그에게 건넸다.
인부들의 도움을 받아, 공사장 한 편에 페퍼의 시신을 묻어주었다. 보다 의미 있는 장소에 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장소가 없었다. 인부들 중 몇 명이 개의 이름이나, 새끼가 있는지 등을 물어보았다. 나는 이들의 질문에 모두 대답했지만, 전부 거짓말로 일관했다. 부모님께도 페퍼를 묻은 위치는 알려드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페퍼를 묻기 직전에, 페퍼의 더러워진 남색 목줄은 풀어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 어쩌면 다시는 쓸모가 없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페퍼를 묻은 후 우리는, ‘소장’이라고 불린 한 인부의 주도로 기도를 시작했다. 그 자리에 기독교인은 그 한 사람밖에 없는 듯했지만, 모두들 동참해주었다. 나 역시 기독교인은 아니었으나, 고마운 마음에 함께 기도하기로 했다. 하나님 아버지 어쩌고저쩌고 하는 구절이 페퍼의 죽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잘 알지 못 했다. 기괴한 풍경이었다. 공사 인부 몇 명과 나이 어린 프로기사 한 명이 다 함께 고개를 숙인 채 무언가 중얼거리고 있다니. 꼭 무슨 사이비 종교 의식 같았다.
“그나저나 엄청 크네 그려. 몇 살이나 먹었어?”
기도 중에, 바로 옆에 있던 한 인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열다섯 살이요.”
이번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대답하려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페퍼는 열여섯 살이었다.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열악한 작업환경 탓인지 공사현장은 다른 곳보다도 더 춥게 느껴졌다. 인부들이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고, 나 혼자 페퍼의 무덤 앞에 남았다. 찬바람이 한 줄기 불어왔고, 눈앞에 어디선가 나타난 잠자리 한 마리가 잠시 떠다니다가, 다음 바람이 불어오자 어디론가 날아갔다. 일순간 구름에서 벗어난 푸른 달이 페퍼의 무덤가에 환한 달빛을 내리비춰주었다.
9월. 거짓말처럼, 다시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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