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후(留侯) 장량(張良)은 한(韓)나라의 오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자방(子房)이라 하는데, 그래서 그는 흔히 ‘장자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나라가 진(秦)나라에게 멸망을 당할 즈음 장량은 나이가 어려서 아직 관직에도 오르지 못했을 때였다.
5대째 대대로 재상을 지낸 그의 집에서는 한나라가 멸망당할 때
3백 명이 넘는 종들을 거느리고 있을 만큼 큰 집안이었다.
장량은 어린 시절부터 나름대로 큰 꿈을 꾸고 있었다.
그러나 한나라가 진나라에게 멸망당하면서 그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그 무렵 아우가 죽었지만, 그는 장례 치를 생각도 하지 않고
재산을 몽땅 털어 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한 자금으로 썼다.
마침 그때 진나라 시황제가 동방을 순회한다는 소식을 접한 장량은 곧바로
회양(淮陽)으로 달려가 동이(東夷) 출신인 창해군(倉海君)을 만났다.
“시황제를 죽여 우리 한 나라의 원수를 갚아야겠습니다.
담력 있는 장사를 소개해 주시면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장량은 한때 회양에서 예(禮)를 배운바 있는데, 그때 만났던 창해군에게 이 같은 부탁을 하였다.
당시 창해군은 회양 땅에서 현자(賢者)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좋습니다. 나는 그대의 우국충정(憂國衷情)에 감동했습니다.”
창해군은 곧 장량에게 바윗돌을 공깃돌 놀리듯 하는 장사 한 명을 소개해 주었다.
장량은 대장장이에게 부탁하여 무게 120근(45kg)이나 나가는 철퇴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객으로 고용한 장사와 함께 시황제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시황제의 순행단이 하남성 양무현 남쪽에 있는 박랑사(博浪沙) 계곡을 지나가게 되었다.
장량은 장사와 함께 그곳으로 달려갔다.
숲속에 숨어있던 두 사람은 시황제의 수레가 바로 앞을 지나칠 때, 그 수레를 향하여 철퇴를 집어던졌다.
그러나 장사가 던진 철퇴는 엉뚱하게도 시황제의 수레가 아닌 바로 그 뒤에 따라오던 수레를 박살냈다.
장량과 장사는 그 길로 도망쳐버렸다.
시황제는 크게 노하여 두 사람을 찾기 위해 전국에 대대적인 탐색령을 내렸다.
장량은 변장을 하고 이름까지 바꾼 채 하비(下邳)로 도망쳤다.
그렇게 도망 다니던 어느 날 장량은 어떤 다리 위에서 초라한 몰골의 한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장량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신고 있던 짚신을 벗어 다리 아래로 집어 던지고 나서 말했다.
“이봐, 젊은이! 저 아래에 내려가서 내 짚신을 좀 가져다 줄 수 있겠나.”
장량은 일부러 노인이 자신을 놀리기 위해 심부름을 시키는 것으로 알고 은근히 화가 났다.
그러나 상대가 나이 많은 노인이라 꾹 참고 시키는 대로 하였다.
장량은 곧 짚신을 가져다 노인 앞에 쑥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 이 녀석아! 짚신을 가져 왔으면 어서 신겨야지.”
노인은 발을 내밀었다.
장량은 어차피 참기로 한 이상 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무릎을 꿇은 채 노인의 발에 짚신을 신겼다.
그런데 노인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자신이 가던 길을 가버렸다.
장량은 그저 어이가 없어 노인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그때 갑자기 돌아선 노인이 소리쳤다.
“보아하니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녀석이야. 닷새 후 새벽에 다리로 나와 봐!”
“네.”
장량은 영문도 모른 채 얼떨결에 대답을 해버렸다.
닷새 후에 장량은 그 다리로 나갔다. 새벽에 일찍 나갔는데 이미 노인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놈아! 이제 나오면 어떡해? 늙은이를 기다리게 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놈! 닷새 후 새벽에 다시 와!”
이렇게 일방적으로 소리친 노인은 아예 장량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않고 획 가버렸다.
장량은 닷새 후 첫닭이 울 때를 기다려 다리위로 나갔다.
“또 늦었군! 닷새 후에 다시 나와!”
노인은 또 가버렸다.
다시 닷새가 지나고 나서 장량은 한밤중에 나가서 노인을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그러자 잠시 후 노인이 나타나서 웃으며 말하였다.
“됐어! 마음씨가 무던하군! 그만하면 스스로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겠어!”
노인은 품속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장량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이 무슨 책입니까?”
“가져가서 잘 읽어봐. 이 책으로 공부를 하면 먼 훗날 왕자(王者)의 스승이 될 수 있어.
자네는 앞으로 10년 뒤에 일어날 거야.
그리고 어느 때, 곡성산(穀城山) 밑에서 황석(黃石)을 발견할 것인데, 그것이 바로 나다.”
노인은 장량이 더 묻기도 전에 획 바람처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장량이 책을 펼쳐보니, 그것은 태공망의 병법서였다.
병법을 공부하면서도 장량은 진나라의 시황제를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반드시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말리라.”
장량은 이렇게 기약하면서 하비에서 맘에 맞는 호걸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때 그는 살인 사건을 저지르고 피해 다니던
항우(項羽)의 숙부 항백(項伯)을 숨겨주어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인물로 읽는 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