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철의 우병훈 책 서평을 읽고
정이철 목사님이 '바른믿음'에 게재한 글, 고신대학교 우병훈 교수의 책 <그리스도의 구원>에 비판 서평을 잘 읽었습니다. "고신 총장님! 우병훈 교수의 언약신학이 마음에 드십니까? 고신 우병훈 교수의 <그리스도의 구원> 서평 1" (바른믿음, 2019.7.27. 01:02:22)은, 많은 분량의 독서를 하고 요점을 또렷하게 지적하는 정 목사님의 실력을 잘 드러냅니다. 우리 시대의 신학적 현안을 다루는 내용이므로 한국교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우병훈 교수의 위 책을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정 목사님의 의문에 대한 답은 저자의 몫입니다. 저자 본인이 직접 나서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이 글에서 정 목사님의 서평에 대한 나의 소감과 고신 공동체의 분위기를 알려드리고, 더욱 소호력 있는 접근방법을 권하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신학 공동체의 교회사적 단면을 담아 기록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우병훈 교수와 정이철 목사님을 모두 아끼는 마음으로 쓰는 상호권면의 이 글이 서로에게 유익하기 바랍니다. 우병훈 교수에 대한 정 목사님의 정보에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① 그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것은 사실이지만,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지 않았고, 박사 학위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② 그가 신학을 처음 공부한 고려신학대학원은 부산이 아니라, 천안시 천안삼거리 부근에 있습니다. ③ 칼빈신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그만 둔 것이 아닙니다. ④ 현재 고신대학교 신학과(학부)의 전임 교수입니다. ‘고신대학’이라고만 하면 고려신학대학원을 배제하는 인상을 줍니다. ⑤ 그는 장차 고신의 신학을 대표할 신학자가 아닙니다. 고신대학교 신학과와 고려신학대학원의 교수는 현재 예장 고신 공동체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입니다. ⑥ 장차 한국교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 아니라 이미 상당히 이바지하고 있는 신학자입니다. 바울은 서울대학교, 고려신학대학원, 칼빈신학교를 배설물로 여긴 적이 없습니다. 바울 당시에는 이 학교들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수사적인 의미로 바울과 배설물을 동원한 것을 이해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배운 세속 지식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가 배설물로 여기 그 학문을 배우는 과정에서 기독교 교리를 체계화한 바울의 통찰력, 통합력, 학문성이 형성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가진 모든 것을 유기적으로 사용하여 진리를 계시했습니다. 서울대학교, 고신대학교-고려신학대학원, 칼빈신학교의 교육은 우병훈의 하나님의 확장과 복음전파 능력 구축에 이바지 했습니다. 정 목사님이 고려신학대학원과 칼빈신학교가 배설물을 가르친다고 생각한다면 구체적인 근거제시와 철저한 논의가 필요합니다.
우병훈은 자신이 정통 기독교를 따르고, 종교개혁의 신학에 부합하는 해석을 선호한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동시에 인정하려고 하는 입장은 겉으로는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상 모순을 그냥 품고 가자는 입장으로서, 건전한 인간의 지성이 받아들일 수 없고 계시의 온전성을 믿는 신자로서는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으며 교회사를 통해서도 가망성 없는 입장으로 판명이 난 견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우병훈, “아르뱅주의”가 가능한가?-구원에 대한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 <개혁정론>,2016.9.16.). 우병훈이 “인간이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고 언약적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서술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한국교회의 현실을 고려하면 이런 표현은 다소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죄를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을 구원받은 자로 착각하는 ‘기독인’의 경우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병훈은 청년 사역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난해한 신학 주제를 쉽게 풀어주고 이해시키는 탁월한 능력 소유자입니다. “우병훈 교수의 언약 사상은 새 관점 학파, 유보적 칭의론, 알미니안, 펠라기우스파들의 주장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비판의 소지는 그가 구원론이라는 난해한 신학 구조를 단순화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약간의 결핍 또는 현대 청년 언어로 이해되는 쉬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생긴 찰과상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우병훈이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기초 신학을 수학할 무렵, 나는 동료 교의학 교수들이 언약신학의 중요성을 선명하게 가르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언약신학을 어느 정도로 가르치느냐"라는 나의 질문에 어느 교의학 교수는 “요즘은 언약신학이라는 퀘퀘먹은 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한두 해 전, 일부 고신 목회자들은 '이신칭의' 교리를 버리고 '이신행칭의' 교리를 도입하려고 시도했으나, 고신교단 총회(2018)에 의해 중단되었습니다. 고신 공동체는 개혁신학의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신학이라는 영역은 대립과 심한 각인(刻印) 전쟁터입니다. 고려신학대학원은 여러 해 전, 성경관과 에큐메니즘을 둘러싼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 때문에 신학충돌을 겪었습니다. 이 때, 고신 공동체는 각인 효과를 선점하려는 선동형, 권력형, 공격형 접근의 천박성과 폭력성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건 후 고신공동체는 먼저 문제점을 개인적으로 지적해 주고, 수용하지 않으면 성경적-합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반응하지 않으면 공개적 논의를 요청하는 접근 방식을 선호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마 18:15-17)에 부합합니다. 다시 말하면 본인에게 직접 문의하지 않고 “고신 총장”과 “신학교수들”에게 호소하는 방식은 고신 구성원들에게 호감을 주지 못합니다. 우병훈은 자신의 주장과 같지 않은 견해도 잘 소화하고 걸러 이해하는 해석학적 능력을 가진 학자입니다. 자기의 명제나 주장이 완전하거나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 목사님의 지적 가운데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수용하고, 다소 불투명한 부분은 다듬어 발전시킬 수용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이라는 학문은 넓고 깊은 해석학적 소양을 요구합니다. 고신 공동체는 개혁신학을 지향하며, 성경과 합리성에 호소하는 범위 안에서 학문적 자유의 공기가 넉넉한 신앙공동체입니다. 확실성을 추구하지만 절대성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21년 동안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나는 학생들에게 정답을 주입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성경적, 합리적 정답을 스스로 찾고 만들어내는 학문능력을 배양시켰습니다. 진론드의 <신학적 해석학>(서울: 본문과현장사이, 1999)의 인식론적, 해석학적 이해력을 가지도록 했습니다. 격한 공격과 일방적인 매도는 어느 학문세계에서나 환영받지 못합니다. 자신이 선호하는 신학이나 교리에 일치하지 않으면 쉽게 이단으로 정죄하면 미숙한 학자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습니다.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다루는 인간 인식의 능력과 한계 또는 제한성을 다 소화하지 않더라도 평범한 수준의 해석학적 자기 통찰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바울은 복음사역자에들에게 진리에 대한 변증 노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 목사님의 수고는 의미심장합니다. 그러나 상대 비판에는 지켜야할 학자적인 예도가 있습니다. 정 목사님의 글을 접하면서 ‘극단,’ '성급한 판단,' '근거 불투명'이라는 용어들을 떠올리지 않도록, 긴 글이나 짧은 글이나 간에 진중함과 예의를 갖춘 접근이 호소력을 제공합니다. 높은품격과 격조를 지닌 글을 기대합니다. 학문성과 통합성(integrity)을 지닌 정중한 질문, 지성적인 논의가 ‘바른믿음’의 신인도 향상에 이바지하리라 생각합니다. 최덕성 (브니엘신학교 총장,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1989-2009) http://reformanda.co.kr/xe/index.php?mid=theology&document_srl=104003
정이철 목사의 몸글: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597&fbclid=IwAR0lns-KUwJTC9TWvbgS-1H_s9e1BrUvC5rxWps7ESy0UNzB9pYxtrZNS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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