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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이 자랑하는 사람 눅7:1-10
내 용 :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동차 사고로 죽은 세 사람이 하늘나라로 가는 길에 똑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장례식을 하면서 당신이 관 속에 들어 있을 때, 친구나 가족들이 애도하면서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소?"
의사인 첫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는 아주 유능한 의사였으며 훌륭한 가장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
교사인 두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저는 아주 좋은 남편이었으며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어 놓은 훌륭한 교사였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마지막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앗, 저 사람 움직인다!!!'"
여러분은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날 때 여러분을 아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해 주기를 원합니까? 어떤 조사를 읽어 주기를 원하십니까?
가끔 목사님들이 모이면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 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의 그 교회 장로님과 집사님 교인들을 아주 자랑하는 목사님이 계시고 어떤 목사님은 장로님에 대하여 안 좋은 말을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제가 만약 우리 교회에 우리 성도님에 대하여 누구에게 소개한다면 어떻게 소개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81년부터 교육전도사 생활을 하면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한 19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나온 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저를 만난 사람들에게 어떻게 평가되었을까입니다. 저를 보면서 자랑할까? 아니면 만나기도 싫은 사람이 되었을까? 입니다. 저도 저를 만난 사람들을 생각해 보니 지금은 전혀 기억이 되지 않은 사람들도 있고 아직까지 오래도록 있지 못하고 때때로 생각이 나면 기도해 주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들도 있고 누구에게나 떳떳이 그분에 대하여 자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된 마음으로 별로 만나고 싶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짜피 한 평생 살아가는데 자랑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될 줄 압니다. 오늘 본문에는 사람들도 자랑하고 예수님도 자랑한 한 인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면에서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Ⅰ. 인간 관계에서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1. 백부장은 인간 관계가 참으로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종을 사랑하였습니다. 당시 종은 물건 취급되었습니다.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을 사랑했습니다.
2) 단순한 종이 아닙니다. 병든 종입니다. 병들어서 부담이 되는 종입니다.
3) 병도 죽을 병에 걸린 사람입니다(마8:6). 중풍에 걸렸습니다. 바로 죽지도 않습니다. 오래도록 짐이 될 것입니다. 당시는 기적이 아니면 고칠 수 없는 병입니다. 당시 하인이 병들어 쓸모없이 되면 고물차를 폐차시키듯이 내다 버렸습니다.(삼상30:13) 놓아 두면 둘수록 부담만 되는 사람입니다. 식민지 종입니다. 평생 부려먹고 쓸모 없으면 버리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되던 때였습니다.
4) 그런데 자신에게 피해를 주는 종이 될 땐데 그 종을 사랑했습니다.
누가는 둘로스라는 말을 사용하여 종을 표현하였고 마태는 하인(파이스)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파이스는 아들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아들처럼 사랑했다는 말을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사랑하다는 말의 원문은 "엔티모스"로 "가치있는, 더욱 존경할만한, 친애하는, 귀한, 덕망있는"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백부장은 병든 종이지만 가치있는 존재로, 존경할 만한 존재로 귀한 존재로 아들처럼 사랑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2. 우리도 인간 관계에 있어서 이 백부장과 같은 사랑으로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홀로 살지 않습니다. 늘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부모를 만나고 배우자를 만나고 자녀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고 이웃을 만나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간관계를 가지고 살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유형을 살펴보면 한 네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착취관계, 거래관계, 배품관계, 희생관계 유형입니다.
1)착취의 인간관계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인간관계입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 챙기기에 급급합니다. 어디 가면 밥 한끼 사지 않습니다. 신앙을 가졌지만 하나님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할 따름입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한 목회자와 10여년 동안 같이 신앙 생활해도 밥 한끼 대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가 밥 좋아하는 먹사가 되어 이런 말씀드린는 것 아닙니다. 인간관계를 가지면서 조금도 손해보지 않고 음식을 먹드래도 영향분이 무엇이 많이 있는가 따려가며 먹습니다. 교인 중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회할 때 책을 세일하는 집사님을 보셨는데 교인 집집 마다 돌아다니며 각매하여 어려움을 주는 분을 보았습니다. 사고 싶은 사람이 살 물건이 있는데 이왕이면 교인 집의 것을 사 주시면 좋겠지만 피해를 주면서까지 각매하여 어려움을 주면 되겠습니까?
2)거래의 인간관계는 조금 났습니다. 주고 받는 것입니다. 한가지 주고 한가지 받은 것입니다. 주었는데 다시 돌려 받지 않으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목회 하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기분 나쁘다고 헌금도 돌려 달라는 사람도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집사님이 옷을 사주고 문제가 발생하자 옷을 달라고 했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회자 선물 사주고 무엇을 사주었다고 선전하고 다닙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인간 관계를 치밀하게 계산하여 합니다. 조금 더 계산 적인 사람은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살겠다고 말합니다.
3)배품의 인간관계는 자신이 손해를 보지 않는 한도 내에서 베풀며 사는 인간관계입니다. 거래의 인간 관계보다는 좀더 발전한 단계입니다. 바자회를 하면 집에서 쓸모 없는 것 내어 놓는 것입니다. 받지 않아도 될 정도의 생활이 되기 때문에 어차피 필요 없는 것 돈주고 버리느니 다른 사람 주는 것입니다. 폐차 시키자니 돈들고 복잡하니 그저 다른 사람에게 10년 차를 타고 주는 것입니다.
4)희생의 인간관계는 자신의 손해 보면서도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백부장이 바로 그런 관계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물질이 손해를 봅니다. 자신의 시간이 손해를 봅니다. 자신의 자존심이 상합니다. 욕을 얻어먹습니다. 용서해 주고 싶지도 않지만 용서를 해주는 것입니다. 시대적 사조와는 맞지 않지만 주님의 명령이 오리를 가고자 하면 10리를 가고 겉옷을 벗어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고 했으니 그 그리스도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신 예수님의 희생적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긍휼과 자비는 영혼 의 질병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특히 12동판법을 기초로 로마의 가부장제적인 환경에서 자라고 훈련받은 로마 군병들은 잔인할수록 더욱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는 사회입니다. 그러나 그 시대적 사조에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열린 교회 식구들은 이런 인간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한 식구입니다. 교회에 와서 위로받고 사랑받고 교훈받고 씻음받아야 하지 상처받고 분노를 간직하고 살면되겠습니까? 뚱뚱한 분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오면 되지가 미니스터트는 뭐 미니스커트 하며... 뒤에서 돼지가 잘 굴러간다고 수군거리면 되겠습니까? 말한 마디 해도 칭찬해주고 용기를 돋아 주어야 합니다. 공포의 대상이 되지 마십시오. 아무리 아름답지 않아도 아름답다고 칭찬해 주어야 다음날 밥 한끼라도 먹자고 하지 않겠습니까? 말로 칭찬해 주고 위로해 준다고 누가 세금 내라고 합니까? 성경은 우리를 한 가족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엡 2:19)"
부부끼리도 마찬가집입니다. 날마다 남편을 의심하며 피곤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옛날 서울에서 목회할 때 저녁 늦깨까지 교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관리 집사님이 전화가 왔어요. "왜 저녁 늦게까지 교회에 있는냐?"는 것입니다. 혹 자기 부인과 썸씽이 있는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저같이 눈이 작은 사람과 무슨 썸씽이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후로는 조심했어요. 어느 글에 보니까? 의부증이 있는 아내가 날마다 남편의 옷을 검사합니다. 냄세를 맡아 보고 머리카락이 있는가 조사합니다. 그리고 누구 머리카락이냐고 따지고 조금만 이상한 냄세가 옷에서 나면 누구 냄세냐고 따집니다. 어느날 보니 아무 머리카락도 없고 냄세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대머리년하고 놀아났느냐고 따집니다.
이렇게 살면 되겠습니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은 "첫째,사랑은 관심을 가진다. 둘째,사랑은 존경한다. 세째,사랑은 이해한다. 네째,사랑은 책임을 진다. 다째,사랑은 주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랑은 사랑하기 때문에 멸시고 천대을 받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나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갖은 정서적인 반응이나 호감 정도가 아닙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을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위하여 처절한 고통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사랑의 고통을 감수합니까? 남편, 아내, 이웃, 교회와 국가를 위하여 사랑의 고통을 감수합니까?
Ⅱ. 일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5).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 남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오래도록 기억 남는 선생님을 생각해 보십시오. 잘 가르쳐주고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입니까? 아닙니다. 나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 위로해주고 사람을 베풀어 주었던 선생님입니다. 인간 관계가 좋았던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다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업적이 있어야 자랑하는 것입니다.
1. 백부장은 일에 있어서 사람들이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5).
1)유대인 장로들이 그를 자기들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자랑합니다.
2)유대인 장로들이 자신들에게 회당을 지어준 사람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는 로마 장교이고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 속국 백성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들을 사랑하면 회당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가 사업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돈이 많아 지어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월급받는 군인입니다. 지금 말하면 중대장급 되는 사람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무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자신들을 창칼로 짓밟고 있는 로마의 장교입니다. 민족적 감정은 대단합니다. 그런데 유대 골수분자인 장로들이 그를 칭찬합니다. 그가 얼마나 유대인들을 사랑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우리도 일을 통해서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두 번 사는 것 아닙니다.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얼마나 살든지 한번은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의 자식들이 우리를 아는 사람들이 잘 죽었다고 박수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4)"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시 90:10)"
폴틸리는 인간의 한계상황을 ①죽음과 자기 숙명성 ②허무와 무의미성 ③죄책감에 대한 불안이라 하였습니다
언젠가 우리는 저 천국 하나님의 품에 갈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열심히 기도하여 잘먹고 잘 살다가 왔습니다. 이정도의 삶을 살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남겨 놓는 것 중의 하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사람의 삶을 네 종류로 나누어 생각해 보았습니다. (1)마귀를 위해 사는 사람, (2)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 (3)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 (4)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동안 사탄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는 일마다 사탄이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평생 동안 자신과 자신의 자족만 위해 살다 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가치 있는 일이란 어떤 것일까요? 마귀를 위한 일보다는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자신을 위한 일보다는 타인을 위한 일입니다. 타인을 위한 일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어떤 종류의 일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을 위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를 위해 산다고 굶어 죽거나 명예를 못 얻거나 권력을 못얻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채워 주십니다.
지금 76세이 지미 카터 참 아름답게 살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그는 `노령의 미덕'이란 책에서 "은퇴이후 생활의 기쁨은 일주일에 골프를 몇차례 치는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에 도전하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데 있다"며 노인들이 생을 다할 때까지 무언가 의미있는 일에 자신을 투자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대통령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 갈 때 그에게는 반갑지 않은 두 가지 큰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백만불이 넘는 빚입니다. 150년간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으며 대대로 터전으로 가꾸어 오던 기업입니다. 이 농장을 다 팔고 집을 다 팔아도 모자랄 만큼 많은 빚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나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미 늙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주저 앉지 않았습니다. 80년 패배이후 그에게는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낙인이 찍혔지만 눈물로 농장을 처분하고 자서전 출간계약으로 겨우 호구지책을 한 뒤 82년 애틀랜타에 `카터평화센터'를 창립한 그는 본격적인 `평화의 전도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과 니카라과 아이티 수단 등을 돌면서 분쟁을 해결했습니다. 카터센터는 86년 이후 강력한 보건위생활동을 펼쳐 아프리카의고질적 풍토병인 `메디나병'을 근절시켰습니다. 세계의 집없는 빈민들을 위한 해비타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집짓기 공사현장에서 작업복 차림으로 부인 로절린 여사와 함께 직접 망치를 들고 일하는 그의 모습은 미국인은 물론 전세계 사람들에게 많은 감동을줬습니다. 그는 참으로 자랑할 만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청년기 해군 장교 시절부터 성경 학교 교사를 한 그는 퇴임이후 고향인 조지아주 플레인스 마을의 마라나타 침례교회에서 주일마다 성경학교 교사를 하고 있습니다. 큰 교회가 아닙니다. 마라나타 교회는 교인수가 1백25명 정도인 소규모 교회입니다. 그는 평소 "신앙은 나를 활력있게 만드는 최대의 원천"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신앙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고 말하며 `망치의 신학'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누구든 망치를 들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각은 "하나님이 주는재능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독일 백작 진센 돌프는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였지만 뚜렷한 목적이 없이 살았습니다. 어느날 박물관 방문하여 그림을 감상하는 데 십자가에 달려 가시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를 보았습니다. 한참 감상하고 있는데 맨 밑에 "너는 날 위하여 무엇을 주느냐?"라는 글 귀가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나는 무엇을 하는가? 그는 결심하고 10년간 기도하는 가운데 1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만큼 큰 일을 못한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나의 달란트와 나의 자리에서 얼마든지 자랑할 만한 일을 만들 수 있습니다.
20세기 성녀 마리아 테레사 수녀가 거리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 주니까 "죽어가는 자들이 무수히 많은데 한두 사람 도와 주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누가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 마리아 테레사는 "인도양에 물한방울 보태는 기분으로 돕는다"라고 했답니다.
Ⅲ. 신앙에 있어서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9).
1. 백부장은 믿음에 있어서 예수님이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9)
1)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예수님게 맡겼습니다(3).
2)겸손한 신앙을 가졌습니다(6). 일등병이 거들먹거립니다. 장교 중에서도 소위가 거들먹 거립니다. 대령쯤되고 병장쯤 되면 거들먹 거리지 않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하나님을 섬기는 겸손한 농부가 교만한 철학자보다 위대하다"고 했습니다.
3)말씀의 권위를 믿고 그 말씀대로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는 신앙을 가졌습니다(7). 예수님이 오시지 않아도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었습니다.
2. 우리도 예수님이 자랑할 만한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평소에는 신앙을 우리가 잘 몰라도 위기를 당하면 그 분이 자랑할 만한 신앙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문제를 당하면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전전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친구도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떤 문제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순종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인을 훈련시킬 때 이 훈련부터 시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합니다. 아들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25년을 기다려 아들을 받았는데 그 아들을 바치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그 훈련의 과정을 통과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주인집 아주머니가 유혹합니다. 말씀에 순종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 받은 자이기 때문에 말씀에 순종하여 죽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순종의 시험에 합격하여 많은 사람이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 신앙 생활에 중요한 것입니다. 훈련소에 들어가면 총검술 받기 전에 명령에 복종하는 훈련 시킵니다. 누워 일어나 엎드려 뒤로 취침 앞으로 취침합니다.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을 나온 박사도, 인기 연예인도, 태권도 5단짜리도, 장군의 아들도, 사장의 아들도, 의사도 목사도 다 그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모든 자존심 자신의 체면, 생각 배경 다 버려야 합니다. 훌륭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인턴부터 수련기간동안 절대복종을 배워야 합니다. 아무리 전술이 뛰어나도 적진에 나아가라는 지휘자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시되 십자가에 죽기까지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히5:8,9).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으나 피래미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실의와 좌절에 빠져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함으로 죄가 시작되었고, 가인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발함으로 살인하게 되었습니다. 믿는다고해서 다 같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나름대로 믿는 믿음은 인정치 않으십니다. 자기 열심, 자기 성실, 자기의에 기초해서 믿는 믿음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요즈음 신앙인들은 나대로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나 잘난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상관없이 나대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가 말씀을 잘 알지 못하지만 말씀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이 땅에 사는 것도 아니고 누구와 만나 잠깐 살다가 이 땅을 떠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자랑할 만한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격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서 해 놓은 일 때문에, 우리의 신앙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자랑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도 여러분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때 자랑거리가 되어야 하고 우리 성도님도 제가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자랑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의 자랑거리가 되는 인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자랑하는 사람/누가복음7:1-10/김필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