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곡성군 오산면 성덕산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처녀 성덕이 창건. 관음사(觀音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이다.
관음사는 1729년(영조5) 백매선사가 쓴 관음사사적(觀音寺事蹟)에 의하면, 관음사는 백제 제10대 분서왕(재위 298~304) 4년(301년) 성덕보살이 낙안포(전남 벌교)에서 금동 관세음보살상을 모셔와 절을 짓고 봉안하여 절 이름을 관음사라 하였다고 한데서 비롯된다. 백제가 불교를 공인한 서기 384년 보다 훨씬 앞선 시기이다. 관음사는 백제 불교 최초의 가람이며, 내륙 유일의 관음성지이자, 관음신앙의 근원지로서 그 가치가 크다.
중국 진나라 사신이 황후를 찾아 배를 타고 포구에 이르렀는데,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충청도 대흥에 살고 있던 장님 원량의 집에 도착했다. 효성이 지극한 그의 딸 홍장에게 준 예물을 부녀가 승려 성공에게 시주해 가람의 조영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1374년(공민왕 23)까지 다섯 차례의 중건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원통전만 남기고 소실되었으며 6·25전쟁 때 사찰 대부분이 소실되어 1954년 부근 암자의 건물을 옮겨다 원통전을 중건했다. 현재는 사찰 전체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관음사는 절 뒤로는 검장산(劍藏山, 해발 485.7m), 동남쪽에는 성덕산이 있는데, 이 두 산맥이 선세리 마을까지 뻗어 좁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관음사도 이 계곡에 위치하며, 관음사가 위치하고 있는 마을의 이름도 관음마을이고, 관음사는 이름 그대로 관음도량이다. 그래서 본래 곡성 관음사는 항상 연락부절(連絡不絶, 왕래가 잦아서 끊이지 않음)이라는 말이 있었다 하는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왕래하였다는 의미이다.
관음사는 조선시대 이전의 기록에서는 보이지 않고 『동국여지승람』에서 성덕산 관음사를 기록하고 있어 늦어도 고려시대에는 관음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음사의 연혁을 보면 고려시대에는 1374년 (공민왕 23)에 원통전을 중수하는 등의 5중창을 하였으며, 선원을 중심으로 큰스님이 많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고 거의 폐허화되었지만 관음상을 봉안하고 있던 원통전은 임진왜란의 화를 입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1611년(광해군 3), 1612년에도 중창하였고, 1636(인조 14)과 1718년(숙종 44)에는 원통전을 중수하였으며, 금랑각을 지었다.
1936년에 청운스님이 중건 중수를 하였는데, 그 내용이 금랑각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1912년에 전체 가람을 중수하였으나 6·25당시 공비들을 소탕하기 위해 사찰에 불을 지르게 됐고, 그로 인해 국보 제273호였던 고려시대 건물인 원통전(圓通殿)이 소실되고, 원통전 안에 봉안되어 있던 국보 제214호 금동관음보살좌상이 불에 타 머리 부분만 남아 있는데, 1954년 관음사 위에 있던 대은암(大隱庵)을 옮겨와서 원통전을 재건하고, 불단 위에 머리 부분만 남은 소조불두(塑造佛頭)를 봉안하고 있다. 많은 신비로운 얘기들이 1700년의 역사와 함께 전해오는 관음사의 원통전 앞마당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어람관음상(魚籃觀音像)이 연못가에 앉아 있다.
금랑각(錦浪閣)은 관음사 입구의 다리 역할을 하는 누각이다. 비단 錦, 물결 浪의 금랑각 (錦浪閣) 편액. 비단같은 물결이 넘실거리는 전각이라는 뜻의 금랑각은 관음사 현존 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위로 다리가 놓여 있고 그 위에 2층으로 된 누각 건물이 지어져 있다. 오후 늦은 시간에 계곡물에 비치는 햇살은 반사되어 분명 금랑각 천정에서 출렁거릴 것이기에 금랑각(錦浪閣)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리라. 불교에서 보통 이 다리를 피안교(彼岸橋)라 부른다. 피안이란 온갖 번뇌에 휩싸여 생사 윤회하는 고해의 이쪽 언덕 건너편에 있는 저 언덕을 뜻하는 말이다. 그곳은 아무런 고통과 근심이 없는 불보살의 세계이다. 따라서 피안교란 열반의 저 언덕에 도달하기 위해 건너는 다리를 뜻한다. 우리들이 사찰에 갈 때 피안교를 건너는 것은 세속의 마음을 청정하게 씻어버리고 이제 진리와 지혜의 광명이 충만한 불보살님들의 세계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커다란 통나무 두개를 양쪽으로 걸치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고 기둥을 세웠다. 기둥 위로는 2익공 형식으로 창방이 결구되어 있으며 창방 위로는 화반이 장혀를 받치고 있다.
금랑각의 정면에는 "聖德山觀音寺(성덕산관음사)"라는 산명과 사찰명을 밝힌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의 관지(款誌)를 보면, 崇禎紀元後庚申六月日書(숭정기원후경신6월일서)라고 적혀 있다. 숭정은 1628(무진년)년이므로 이후 경신년인 1680년 음력 6월에 이 현판을 썼다는 뜻이다.
금강역사는 사찰의 문 양쪽을 지키는 수문신장(守門神將, 수문장, 문지기)으로 불교의 수호신이다. 금강과 같은 지혜로서 번뇌를 꺽어 없애므로 금강역사라고 하는데, 이 금강역사를 봉안해 놓은 전각을 금강문 또는 인왕문이라고 한다.
밀적금강(훔금강) 나라연금강(아금강) 법당쪽에서 볼때, 사찰문의 왼쪽에는 밀적금강(훔금강), 오른쪽에는 나라연금강(아금강)이 서있다. 나라연금강은 그 힘의 세기가 코끼리의 100만배나 된다고 한다. 밀적금강은 항상 부처님을 호위하는 5백의 야차신을 거느리고 있으며, 부처님의 비밀스런 사적(事蹟)을 모두 듣겠다는 서원을 세웠으므로 밀적이란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나라연금강은 입을 크게 벌려 ‘아’하는 소리를 내면서 공격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아금강역사라하고,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문채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훔금강역사라고 한다. 이때의 ‘아’는 범어의 첫글자이고 ‘훔’은 끝글자이다. 두금강역사의 입은 시작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과 완성을 상징한다.
극락전의 건물양식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이 각 3칸씩이며, 근래에 건립되었다. 안에는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고 극락전의 주련(柱聯)은 서각가 전명옥씨가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로 쓴 글씨이다.
극락전에 걸린 주련의 내용
극락전의 아미타불 보름달 같은 얼굴 / 한량없는 지혜의 빛 온 허공을 비추나니
누구든지 일념으로 그 이름을 부르오면 / 무량공덕 원만하게 한순간에 이르리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국토를 지난 곳에 있는 서방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으로 극락전, 극락보전, 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 한다. 아미타불은 과거 53불 중 마지막인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의 법문을 듣고 48대원을 세우고 출가한 법장비구였다.
극락전(極樂殿) 편액이다. 극락(極樂)은 아미타불이 살고 있는 정토. 괴로움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 안락하고 자유로운 세상이며 인간 세계에서 서쪽으로10만억 불토(佛土)를 지난 곳에 있다고 한다.
극락전 법당 안으로 조각되어 있는 용꼬리가 너무 아름다워 디카에 담았다. 법화신앙에서는 법당을 ‘지혜를 실어 나르는 배’ 또는 ‘중생을 고통 없이 극락세계로 건너 가게 해주는 배’로 비유하는데, 이것은 곧 반야용선이다. 극락전의 어간 좌우 기둥 위에 바깥으로는 용의 머리 부분을, 내부에는 용의 꼬리 부분을 조각해 놓았다.
불교에서 반야용선은 사바세계에서 피안의 극락정토로 건너갈 때 타고 가는 상상의 배를 말한다. 극락전은 아미타부처님과 함께 서방정토 극락세계로 항해하는 반야용선의 선실과 같은 곳임을 나타낸다. 이때 용두는 뱃머리가 되고, 용의 꼬리는 배의 선미(船尾)가 된다. 이렇게 한 것은 부처님이 계시는 법당 건물이 중생들을 배에 태우고 극락세계로 인도해 가는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극락전에 모셔진 아미타불은 근래에 조성하였으며, 구품인의 수인이고 가사는 양어깨에 걸친 통견의 모습이다.
원통전(圓通殿)의 건물양식은 팔작지붕에 앞면이 3칸, 옆면이 2칸 규모의 건물이다.원통전 편액은 용곡(龍谷) 조기동(趙基銅) 선생의 글씨이다.
대개 관음보살을 그 사찰의 주법당에 봉안하였을 때는 원통전(圓通殿)이라 하고, 부속전각에 봉안하였을 때는 관음전이라고 하지만, 이곳 관음사에는 극락보전이 주법당이다. 목은 부러져 몸통은 없고 머리 부분도 파손된채 얼굴만 덩그러니 남은 관음보살상.유리관 속의 관음보살상
어리섞은 인간들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한민족 간 총부리를 겨루고 싸우는 와중에 관음사의 관세음보살은 온몸이 부서지고 목이 부러지고 머리 부분도 파손된채 얼굴만 덩그러니 남았다. 성덕보살상으로 알려진 소조불두가 비록 불타고 깨진 모습이지만 원통전 불단 위 유리관 속에 봉안되어 있는데, 지난 세월 동족상잔의 아픔을 후세 사람들에게 일러주고 있다. 얼굴만 남아 있어도 살포시 자비로운 미소를 짓으며 산사를 찾는 사람들을 반기고 있지만, 이 불두(佛頭)의 모습은 보는이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
불자(佛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를 보문시현(普門示現)이라고 하며, 법화경에는 33응신을 말하고 능엄경에는 32응신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32 또는 33의 수는 한정된 숫자가 아닌 무수한 수를 나타낸다.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보관의 정수리에는 아미타불을 근본 스승으로 삼고 항상 모신다는 뜻으로 아미타불의 화불을 모시고 있다.
33응신을 나타내는 33관음에는 우리가 잘아는 용두관음(용머리를 탄 형상), 양류관음, 백의관음, 수월관음, 지경관음(바위에 앉아 경전을 들고 있음), 유희관음(오색 구름을 타고 유희하는 모습), 어람관음(魚籃觀音) 등도 있는데, 관음사 원통전 앞에 위치한 석조 조각상(높이 95cm)이 바로 어람관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어람관음상(魚籃觀音像)으로 왼 손에는 물고기 한 마리를 들고 있는데 앞에는 물고기의 머리 부분만이 보이고 꼬리는 관음상의 등에 표현되어 있다. 오른 손에는 지물을 들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결구공만이 남아 있으며 조각 수법으로 보아 조선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어람관음은 33관음의 하나로 『법화경(法華經)』에서 손에 물고기가 가득 찬 바구니를 들거나 혹은 큰 물고기를 타고 있다 하며, 나찰(羅刹), 독룡(毒龍), 악귀(惡鬼)의 해를 제거하는 공덕이 있다고 여긴다. 당나라 시대에 한 물고기 장수의 아름다운 딸이 보문품을 수지독송하는 신자에게 시집을 갔는데, 이 미녀가 관음의 화신이었다는 설에 근거한다. 어람관음신앙은 중국의 송(宋)대 이후에 널리 유행하였다.
심청전의 원형설화로 알려진 원량과 원홍장(洪莊) 설화
관음사창건기에 의하면, 옛날 충청도 대흥에 원량(元良)이라는 장님이 살았는데 그에게는 홍장(洪莊)이라는 용모가 뛰어나고 효성이 지극한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원량이 동네를 지나는데 성공(性空)스님이 그를 보자 큰 절을 올렸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간밤에 꿈을 꾸었는데 신인이 나타나 “ 오늘 동네에서 장님을 만날 텐데 그가 장차 대화주(大化主)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원량은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였으나 스님은 한사코 그에게 화주가 되어줄 것을 간청하였다.
스님과 헤어진 후 원량부녀는 근심이 태산 같았는데 마침 중국 진(晉)나라 사신이 그 날 저녁에 찾아와 진나라의 혜제(惠帝)가 “새 황후가 될 분이 동국에 있을 것이니 그 곳으로 가보라“하여 배를 타고 왔는데,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끌려 이 집으로 왔다는 말을 하였다. 부녀는 사신이 가지고 온 예물을 받아 그것으로 성공스님에게 시주하여 홍법사를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홍장은 중국으로 건너가 황후가 되었다.
황후가 된 홍장은 착한 마음씨로 인해 황재의 총애를 받으며 계속해서 정업을 쌓았다. 그러나 고국을 그리워하던 홍장은 53불(佛)과 500성중(聖衆) 그리고 16나한상을 만들어 배에 실어서 백제로 보냈다. 그 배는 감로사(甘露寺)앞 나루에 닿았으며, 감로사에 봉안되었다.
그 뒤로 홍장은 관음상을 주조하여 돌배에 실어 백제로 보냈는데 낙안포에 도달한 배는 이를 수상히 여겨 잡으려는 수졸을 피해 그 곳을 떠났다. 이것을 옥성 옥과에 사는 처녀 성덕이 해변을 거닐다가 멀리서 배 한 척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바로 홍장이 보낸 그 배였다. 배가 저절로 성덕에게 다가와 성덕이 안을 살펴보니 관음금상이 빛나고 있었다. 성덕은 놀라 예배하고 관음상을 모셔 인연의 땅을 찾아 나섰다. 관음상을 업었더니 처음에는 깃털처럼 가벼웠다. 그런데 걸을수록 관음상이 무거워졌다. 숱한 들과 마을을 지나 어느 산에 이르자 무거워서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마침내 성덕은 그곳에 절을 짓고 금동관음상을 봉안하니 관음사였다.
성공스님은 불사를 원만히 회향하였고, 홍장의 아버지 원량은 눈을 떠 95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1930년대 김태준의 <조선소설사>에 소개된 이래로 홍장의 설화는「심청전」의 원형설화, 근원설화, 배경설화로 국문학계의 공인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