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김성우×엄기호 지음 『유튜브는 책을 집어 삼킬 것인가』
세계 최대 규모의 동영상 공유 플랫폼
스마트폰과 더불어 급성장한 유튜브는 영상매체 시대를 이끌며 우리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유튜브엔 세상 모든 정보가 있고 흥미로운 영상은 끝도 없이 이어지면서 개인에게 맞춤형 동영상을 제시하며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한다.
이러한 영상매체의 부상은 자연스럽게 문자 매체의 몰락을 가져오고 문자 매체는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버릴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정말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버릴 것인가? 제목을 보면 아마도 그런 느낌으로 책을 잡을 듯하다. 하지만,이 책은 오히려 텍스트가 아닌 영상으로 집중되는 이유와 그러한 현상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으로 이어진다.
리터러시(Literacy) :문해력은 무엇인가?
'문해력'으로 풀이되는 이 단어는 유네스코의 정의에 따르면 '다양한 맥락과 연관된 인쇄 및 필기 자료를 활용하여 정보를 찾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만들고, 소통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넓게는 문자 매체뿐만 아니라 이미지나 영상 등의 매체를 이해하고 활용하여 소통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러한 개념은 시대의 변화와 함께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세상은 점차 정보나 이야기를 ‘읽고 쓰기’보다는 ‘보고 찍는’ 방향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문자 매체에 익숙한 기성세대는 이런 현상을 보며 젊은 세대의 문해력이 떨어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이는 젊은 세대와 노인 세대는 서로가 자라온 환경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리터러시는 서로의 환경과 처지를 이해하고 조화를 이뤄내는 방향으로 변화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리터러시 사유와 성찰
리터러시는 문자를 읽어내는 능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 타자에 대한 태도, 즉 삶의 태도와 연관된 문제로 타자와 세계에 대한 주도적 읽기이며, 동시에 읽음을 통하여 서로의 다름의 인정하고 그 다름의 가치에 주목함으로써 상호 소통의 이유와 방식을 내재화하는 역량이다. 읽을 수 있는 자와 읽지 못하는 자, 읽을 것을 정하는 자와 읽어야 하는 자, 읽는 자와 보는 자를 나누고, 우열을 가리어 서열을 매기는 교조적인 리터러시가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그것이 갖고 있는 가치에 주목하여 상호 소통과 이해에 이르는 열린 리터러시에 주목한다. 리터러시는 단지 문자만을 해독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련의 자기화 과정이며 주도적인 체험 과정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유와 성찰에 이르기 위한 것이다.
젊은 세대가 유튜브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
요즘 학생들이 유튜브에 빠져드는 이유는 세상이 문자 매체에서 영상매체의 시대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자 매체 기반의 교육은 삶을 이해하고 성찰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고 문자는 단지 시험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다. 문학작품을 배울 때도 각자의 다양한 감상을 허락하지 않고 일관된 답을 찾아 시험 점수를 위한 암기와 요령만이 목적이 되어 있다.
하지만 유튜브는 자신이 보고 싶은 영상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고 또한 마음껏 시청할 수 있으며 정해진 답도, 반드시 읽고 공부해야 하는 것도 없이 그저 자유롭게 둘러보며 자신의 흥미를 따라가면 된다. 대입 수단이 되어버린 글쓰기, 시험을 위한 문학과 비문학 지문, 일관된 답을 끌어내야 하는 독해는 결코 리터러시 능력을 제대로 향상하지 못하기에 리터러시와 문해력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글을 읽는 행위는 여전히 중요하다
영상매체 시대에도 문자 매체가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글을 읽는 행위는 역지사지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게 만든다. 우리를 자연스레 몰입하게 만들고, 글의 주인공 또는 저자가 되어 색다른 시선으로 사유하게끔 만드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영화가 소설보다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이유도 글이 지닌 특유의 속성 때문이다. 100명이 하나의 소설을 읽을 때 각자의 머릿속에선 모두 다른 100개의 세계가 펼쳐진다. 같은 문장을 읽어도 개인마다 다르게 해석하지만, 영상은 똑같은 화면을 보여주기 때문에 대부분 큰 차이 없이 비슷한 수준으로 내용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글을 이해하는 데엔 적극적인 개입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영상은 그냥 보이는 화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어려운 글은 집중해야만 오롯이 읽어낼 수 있고 영상은 집중을 덜 하고도 대부분의 영상은 큰 어려움 없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오랜 시간 공들여 생각하고 해석해야만 이해할 수 있던 세상이 이젠 짧은 영상 몇 개로 요약되어 버렸지만 그래도 글을 읽는 행위는 여전히 중요하다.
삶을 위한 리터러시
텍스트와 영상을 대립적으로 분리하지 말고 각각의 매체가 지닌 장점을 살려 어떻게 하면 풍성한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문자와 영상은 서로 다른 장단점을 지녔기 때문에 각각의 장점을 동시에 활용하여 세상을 폭넓은 관점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현시대의 리터러시를 논할 때 중요한 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하느냐, 영상을 봐도 되느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매체를 사용하든지 타인의 세계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인간이 모두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지만 단순히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은 왜 사는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서 서로의 세계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다중 문해력
리터러시 역량이 시민과 개인의 탄생을 가져왔지만, 그와 동시에 리터러시 하지 못하는 이들을 대상화하여 배제하고, 리터러시 언어 가능 여부나 수준에 따라 서열화하여 권력이 되어 가기 때문에 리터러시 능력은 개인 역량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역량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구분, 배제, 우열을 가르는 리터러시는 폭력적이며, 탁월한 유연성, 경제성, 추상성의 미덕을 지닌 텍스트가 유튜브 영상에 돌이킬 수 없을 지경까지 압도됨으로써 사회 전반의 리터러시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되어 텍스트 리터러시 능력 저하가 세계를 인지하는 방식은 물론 의미 구성 방식까지 변화시켰다.
리터러시의 권력화는 리터러시의 가장 큰 미덕인 상호성에 기반한 세계에 대한 통합적 이해 능력을 가로막고 글로벌화에 따라 각기 다른 문화와 이해관계라는 상이한 맥락을 지닌 타자와 세계에 대한 이해가 날로 중요해지고 있는 시점에서 다양한 미디어, 플랫폼, 디바이스, 콘텐츠의 등장으로 인해 다중 문해력을 요구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출발점
나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우리는 성장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노력으로부터 사회는 점차 변화하고, 삶을 위한 리터러시는 인간의 삶을 다면적으로 바라보고 이해하는 능력이다. 한 가지 잣대로 누군가를 평가하지 말고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고, 편을 가르기보단 서로의 차이를 받아들이며 타인을 존중하며 세상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앎의 단계로 나아가며 성장해 나간다.
문자 매체 시대에서도 영상매체 시대에서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삶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를 성찰하며 타인을 이해하는 능력일 것이다. 삶의 주인이 되는 리터러시, 좋은 삶을 위한 리터러시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읽기 리터러시의 문제
읽기가 중요하지만 학교 교육이 '시험을 위한 읽기'에 치중하는 바람에, 보기-말하기 리터러시보다 진입장벽을 갖는 읽기 리터러시를 교육에서조차 해결해 주지 못하는 현 상황의 문제는 [리터러시는 개개인의 역량 부족이 아닌 제도를 통한 사회의 역량에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리터러시 교육이 시험에만 치우치지 말고 학업이 아닌 공공성으로 나아가야 하며, 텍스트와 영상을 같이 엮었을 때 더 풍성한 의미가 만들어지고, 보다 폭넓게 타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중심의 문해력,제도가'용인'하는 리터러시의 틀에 벗어나 멀티 리터러시와 삶에 복무하는 도구로의 쓰임을 생각해 볼 때다. 결국 리터러시란 응답할 줄 아는 역량인 것이다.
책익는 마을 지 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