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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323 / 갚아주시는 나의 하나님 (마6:1-4)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에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세부적인 내용들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 시작이 5장의 팔복으로 대표된다면 6장에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 앞이 아닌 사람 앞에서 사람들로부터 의로움을 인정을 받기 위해 행했던 세 가지 행위 곧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해 언급하시면서 참된 경건을 위한 구제나 기도나 금식은 반드시 행해야 할 것들이나 문제는 그 기준이 ‘누구 앞에서 하느냐?’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먼저 1절을 보게 되면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때 예수님은 ‘주의할 것’을 말씀하시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그들 앞에서’라는 두 개의 조건을 붙이셨습니다.
언뜻 보면 같은 말을 반복하신 듯합니다. 그만큼 중요해서 강조하려고 그러신 걸까?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에 두 가지 경우가 다 문제가 된다면 예수님은 ‘주의하라’가 아니라, ‘하지 마라’고 하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중에서 무엇이 문제가 되고, 무엇을 주의하라는 걸까요?
마태복음 5: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전에 이미 말씀하시기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사람에게 보이게 하라.’
이렇게 보면 우리가 의를 행하되 사람들 앞에서 행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의를 행하는 동기가 어디에 있는가입니다.
여기서 성도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주어’의 문제가 다시 대두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인정받자!’라고 하는 것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대신 ‘하나님이 인정받으시게 하자!’를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둘 사이에서 어떻게 행할지를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받으시게 하는 삶을 살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나요?
그걸 말씀하신 것을 요약해 놓은 것이 성경의 산상수훈입니다.
그렇다고 기록된 것만이 전부는 아니기에 우린 오늘을 살아가며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받으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를 늘 주의해야 합니다.
그러니 어찌해야 할까요? 나로 인해 하나님이 인정받으시게 하려면.
첫째가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혹 고속도로를 다니시는 중에 고려은단이라는 회사가 세운 대형 광고판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광고라 하면 해당 상품의 특징이나 이미지 등을 부각시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상품에 관심을 갖게 해서 궁극적으로는 상품구매를 유도하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은단이란 회사는 고속도로변에 대형 광고판을 설치하고는 아무 내용 없이 오직 “Jesus loves you”라고만 써 놓고는 그 밑에 조그맣게 고려은단이란 회사 이름을 넣어 놓았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부러 자세히 보지 않으면 특정 회사의 광고라기 보다는 예수님을 대대적으로 알리는 대형 전도판이라 여기기가 십상입니다.
그렇다면 그 회사가 그런 광고판을 제작한 의도는 뭘까요?
회사 내부적으로도 광고 기획 단계에서부터 ‘그게 무슨 광고냐’며 많은 반대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전 국민에게 예수님을 알리겠다는 창업주의 정신을 살려 광고를 강행했다고 하는데, 이후, 당시 은단 하면 일본에서 만든 은색 알약만을 떠올리던 시절에 고려은단은 홍삼 은단을 시작으로 비타민C의 중요성을 강조해서 만든 비타민C가 불티나게 팔려나가며 엄청난 수익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항간에선 이런 결과를 두고 우연의 일치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불교계에선 이것이 명백한 종교법 위반이라며 지금까지도 법적으로 시비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는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 삶을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삶!’
이게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또 알아야 할 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마다 각기 다양한 방법들이 있겠지만, 굳이 한 가지를 말씀드린다면, 운동선수로는 제일 처음으로 ‘기도 세리모니’를 시작했던 박주영 선수의 간증을 보게 되면, 그는 믿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합니다.
당시 그의 기도 세레모니를 두고 불교계나 불신자들은 보기 싫다는 둥, 자제하라는 등의 압력을 넣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꿋꿋하게 기도 세레모니를 계속 했습니다.
‘내가 누구 눈치를 볼 것인가? 내 기도 세레모니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보이기 위함이라’는 게 그의 확신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이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진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눈치를 본다는 건 소위 ‘눈칫밥을 먹는다’는 말처럼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눈치를 본다는 건 자발적이라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주의하라’고 말씀하셨을 땐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려고 하라는 말씀인 겁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면 먼저 ‘하나님이 내가 하려는 이 일과 이 행동을 좋아하시려나?’를 생각하는 것,
이게 하나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일들의 결과에 대해선 하나님도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은혜와 응답으로 역사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4절에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는 언급이 있다 보니 본문을 택해 구제를 주제로 가르치거나 설교를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만, 구제는 예수님께서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하신 하나의 예일뿐 정작 본문에서 중요한 핵심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따라서 4절 말씀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시고자 했던 중요 메시지는 ‘구제하라’가 아닙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굳이 구제를 언급하신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신앙생활의 3대 의무라 여겼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임에도, 굳이 ‘나 한다!’라고 광고하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히나 헬라어로 ‘은밀한’이란 말의 표면적인 해석은 ‘비밀스러운’이란 뜻이지만, 그 말에 담긴 의미는 ‘하나님만 아시게’란 뜻이 있습니다.
실제로 회당과 성전 구석진 곳에는 ‘침묵의 방’이라 불리는 작은 방이 있었는데 은밀한 구제를 위해서 마련된 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방은 입구를 두 개로 만들어서 구제하려는 사람이 들어오는 입구와 구제를 받으려는 사람이 들어오는 입구를 달리했습니다. 때문에 구제를 하려는 사람은 조용히 들어가 가져온 것을 놓고 나올 수가 있었으며 구제를 받으려는 사람도 다른 쪽으로 들어가서 필요한 것을 들고 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는 서로 간에 구제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구제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오직 하나님만이 아시게 은밀하게 행할 수 있도록 성전 설계에서부터 개입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서기관이든 바리새인이든 진정한 신앙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구제를 하고자 했으면 침묵의 방을 통해 얼마든지 할 수 있었음에도 그들은 2절에서 보듯이 회당과 거리에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나 이렇게 구제한다고 나팔까지 불어가며 요란을 떨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2절 후반부를 보면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이 아주 의미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무슨 말인가 하면 그들이 그런 행위를 했던 목적이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한 것이었다면 사람들에게 다 보여지고 알려졌으니 그걸로 그들이 목적했던 바가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미 원하던 목적을 달성했기에 그들이 이미 자기 상을 받았다는 말은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실 상은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게 매사에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눈치를 보지 않고 행하는 사람들에게 있게 되는 불행입니다.
사도 바울도 말하기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는데 본인들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없으니, 그들에겐 믿음도 없었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믿음 없이 외식하는 자들을 지적하시며 당시 모인 무리와 오늘 우리들에게 ‘너희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교훈을 주고 계신 겁니다.
여기서 우린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기에 바라는 것이 없다면 믿음도 없다는 것을.
이를 역으로 하면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우리에겐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많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바라는 것이 많기에 믿음도 많게 되고, 믿음이 많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도 많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세상에서 얻기 위해 하나님께 바라는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는 복음 성가를 봐도 ‘이 세상 사람 날 몰라줘도 뒤돌아서지 않겠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유가 이 세상 사람은 날 몰라줘도 ‘하나님은 날 알아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만 있으면 예수님께서 본문 4절을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하신 은혜가 내게도 있을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한 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은 / 은밀한 중에 보신다.”
이때도 알아야 할 것이,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한 것만 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한 것도 아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고 잘 나갈 때만 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잘 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성경은 이런 하나님을 소개할 때 ‘전지하신 하나님’이시라고 한 겁니다.
단, 이때의 ‘전지하다’는 말을 척척박사라든가 만물박사 등의 개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전지하시다는 말은 ‘나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랬기에 시편 139:1-3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은밀한 중에 보신다는 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이미 내 형편을 다 보시고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어떤 형편에 놓여 있든 우리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다시 4절 말씀 후반부를 보세요. 예수님이 약속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이 말씀에서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갚아주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그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나를 위해 은밀한 중에 갚으시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떤 순간에서라도 ‘나의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고 확신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모든 형편 다 아시기에 다 갚아주실 것입니다.
아시겠지만, 모든 것에는 기준이라는 게 있습니다. 혹여 여러분이 사람이 주는 상이 받고 싶으시면 사람에게 잘 보이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고 싶으시면 하나님께 잘 보이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린 매사에 하나님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께 잘 보이는 삶이 될 수 있을까요?
4절 앞부분을 보세요.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이 말씀에서 ‘은밀하게’라는 말을 원뜻대로 ‘하나님이 아시게’로 바꿔보면, “네 구제함을 하나님이 아시게 하라.”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번엔 바뀐 말씀에서 ‘구제’라는 말을 여러분에게 해당하는 다른 말들로 바꿔보세요.
“네 문제를 하나님이 아시게 하라.”
“네 괴롬을 하나님이 아시게 하라.”
“네 소원을 하나님이 아시게 하라.”
세상 사람들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내가 얘기하지 않으면 내 속을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내 생각과 감정, 소망과 바람, 그리고 내가 처한 현재의 모든 상황들을 다 알고 계십니다.
또한 전능하시기에 그 모든 것을 다 갚아주십니다.
그러므로 긴 말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갚아주시는 은혜를 받기 위해서라면 우린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 아시지요!’라는 이 말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을 향해 마태복음 10:30-3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언제든 우리가 하나님이 아시고 갚으시리라고 믿는 믿음만 놓치지 않는 한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런 믿음까지도 아시기에 결국엔 나를 위해 갚아주시고, 채워주시고, 이루어지게 해주시는 은혜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이제 남은 건 이 세상을 살아갈진대 누구 눈치를 보며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저와 여러분의 선택뿐입니다.
더는 사람 눈치나 보며, 세상일로 인해 일희일비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이 나의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내 모든 형편 다 갚아주시는 주님이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심을 믿어, 언제 어느 때든 ‘아시지요. 주님!’과 ‘믿습니다. 주님!’을 고백하는 믿음으로 살아서, 언제 어느 때든 은밀하게 보시고 갚아주시는 하나님이 여러분 각자의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이미 이사야 58:11을 통해 약속하신 대로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며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하신 은혜 안에서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